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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싱가포르는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자치방이 되었다. 인민행동당의 당수인 이광요는 대선에서 총리로 임명되어 싱가포르의 개국의 아버지가 되었다. 30여년동안 재임하면서 내각의 영향을 많이 끼쳤다. 이광요는 강권정치로 국가안정을 취하였다. 사회의 질서를 위해 엄중한 벌을 사용하였고, 빈곤하기 그지없는 작은 어촌마을을 경제기적을 창조해냈다. 반면 2011년 대선중 집권당은 역사상 최악의 득표를 하였다. 그리하여 이광요는 내각에서 물러나고 이광요의 싱가포르는 이제 이광요시대 이후의 새내각을 맞이할때이다.
1959년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었다. 그해 5월 싱가포르는 1차대선을 실시하였다. 人民민행동당은 51개 입법의석중 43석을 획득하였다. 입법의원 제1여당이 된것이다. 이광요는 자치방정부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사진은 1959년 6월 3일 싱가포르 투표장에서 투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이광요는 1923년 싱가포르 생이며, 어릴때부터 영국식 교육을 배워왔다. 변호사 출신으로 左派학생이며 인민행동당의 당수가 되었다. 그래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처음 총리로 부임하면서 이광요는 싱가포르의 자원이 부족한 것을 인식하고 생존을 위한 후배지를 찾아 말레시아연방에 가입하였다.사진은 1959년 이광요와 그의 지지자들이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연방에 가입 후 겨우 23개월동안 지속되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긴장된 정당관계가 말레이시아에서 온 화교간의 인종문제로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한 연유로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축출되었다. 1965년 싱가포르는 원치않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당시에는 먹는 수돗물도 말레이시아에서 제공받아야만 하는 작은 빈촌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싱가포르 독립이 이광요에게는 평생의 가장 유감이었다고 한다. 사진은 196년 싱가포르 하천의 전경이다.
1960년 싱가포르의 평균 국민 생산액이 1330싱가포르원이다. 싱가포르정부는 건설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전문 책임 계획과 공공시설을 건축하였다. 또한 중산층 이하의 주택문제를 해결해주었다.이광요가 말하길 사람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기타 다른 건축물을 건립하는데에 한층 고무된 제도인 것 같다. 모든 가정 또한 국가의 채권들을 갖고 있었다. 하물며 일반 가정의 자녀가 전장에 나가게 되면 자기의 가정을 위해 전장에 나간다고 생각할 정도이었다.
사진은 1965 년 5월 1일 이광요 건설기지 현장에서.
싱가포르정부의 제1차 10년 건설 목표는 우선 1방 1거실의 집을 짓는것이다. 면적은 35m2, 이정도 방이면 일반 서민들이 필요한 가구를 구매할 능력이 있을 것이다. 싱가포르의 집이 없는 가정이 집이 생기게 된 것이다. 제 2차 10년의 계획은 거실1 방2개의 50~53m2의 집을 짓는것이다. 이래서 정부는 모든 가정이 집을 가지게 되었다는 만족된 기반위에 다시금 거실1방3개, 방4개,방5개 등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사진은 1965년 5월 1일 이광요가 아파트 짓는 건설현장에서..
1965년 정부가 지은 집에 23%라는 점유율,76년에는 51%에 달하고, 1983년에는 77% 21세기 들어서는 싱가포르 국민의 92%의 가정이 자기의 집을 갖게 되었다.
사진은 1997년 5월 25일 한 여인이 아파트 촌을 지나가고 있다.
반면 이광요는 교육,노인,의료 방면에서는 서방국가의 제도를 반대하고, 완전 무상의 정책과 법을 실시한다. 그는 복지주권 방면으로 가기에는 너무 멀지만, 절대 평균 주권에 이를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양은밥그릇이 아니라 도자기 밥그릇이 국민 모두가 갖게 될것이다. 사진은 한명의 부녀자가 두개의 아파트 동을 지나가고 있다. 오래된 아파트 뒤에는 새로운 아파트가 생겨났다.
1967년 싱가포르 정부는 [경제발전 장려법안]을 통과 하였다. 정부에서 비준된 제조업회사 세금을 최저로 하였다. 1968년에는 싱가포르 발전은행과, 유랑공업구관리구 를 설립하여 1년사이에 싱가포르의 경제는 나날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사진은 유랑 공업구
70년대 싱가포르는 수출무역과 제조업이라는 이원적경제구조를 실시하였다. 싱가포르는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는 가장 큰 물류 이동기지이며 또한 세계 최대의 콘테이너 집합항구로 변한 것이다. 사진은 싱가포르항 조감도
70년대 싱가포르는 국민경제적 기초를 만들었고, 80년대 부총리 오작동은 1999년까지 탁월한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발전을 위한 계획을 만들었다. 90년대 세계 경제 협력조직이 선포되고 싱가포르는 싱가포르 기적을 만들어냈다. 사진은 1998년 3월 24일 싱가포르 항구에서 콘테이너가 1억개 된다는 표지이다.
勞動運動 출신인 이광요는 勞動運動을 좋아하지 아니했다. 제 1차 싱가포르항공회사가 勞動쟁의를 하였다. 그때 이광요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勞動쟁의를 계속 진행하라, 나는 내가 할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너희들에게 교훈을 주겠다” 라고 말하였다.사진은 1965년 5월 1일 이광요와 노동자들 대표와의 대담
이광요는 민족간의 갈등은 국내 안정에 큰 적이라는 것을 깊이 알고있었다. 그래서 민족간의 화합을 위한 선결과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개국초, 이광요는 싱가포르의 모든 관공서의 언어는 영어를 사용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화교인들은 불만에 가득차 있었다.
1971년 싱가포르는 화문신문에 관공서에서도 중국어를 사용하기 위해 강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광요는 산파민족주의라는 이름의 신문사를 폐간시키며 몇 명의 간부급들을 구속시켰다. 그 어떤 법적 절차도 없이 강제 수감 시킨것이다.
사진은 60년대 싱가포르 거리
이광요는 어떤 매체도 대중의 소리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아니했다. 선거로 선출된 자기 자신만의 대중의 소리를 대표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정부의 일을 매체가 관리감독하고 있다는 것에는 찬성하지 아니했다. 반면 매체들은 당연히 정부의 건설국가를 위해 도와 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는 매우 낙후된 국가이다. 현대화를 최대한 빨리 이루기 위해서는 당연히 모든것들이 모두 철저하게 변해야 한다. 또한 일반 대중들의 그런 요원한 생각마저 용납하지 아니한다. 정부와 대중들의 모순은 불가피 하다. 단 정부는 싱가포르의 신속한 경제 발전을 위해 줄기차게 나아갈것이다. 개개인의 호주머니에 가득 채우기 위한 경제 발전이 아니다.”
나중에는 대중들은 이 말을 이해했다. 사진은 싱가포르의 대로상에 있는 이광요의 선전광고.
이광요는 싱가포르 국민의 요구에 대해서는 비교적 존중했다.그리고 여성들의 출산율도 하락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래서 고학력자들의 출산율이 저학력 출산율보다도 낮았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유전적 기초가 가장 중요하나, 고학력 부녀자들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라고 말하였다. 초등학생들의 비만 문제가 발생하였을때, 그는 학교에서 기름에 튀긴 모든 식품들을 판매 금지 조처를 내렸다. 사진은 1997년 6월 15일에 실시한 어린아이 암산대회
사진은 1998년 7월 5일 싱가포르 센토사, 젊은 사람들이 야외에서 비누거품 파티를 즐기고 있다. 한 달 후 정부는 이런 파티를 취소시켰다. 이런 파티가 미성년자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싱가포르 젊은이들이 서방의 자유주의-히피족들의 퇴폐적인 생활방식-에 대해 그릇된 이해를 염려했던 것이다.
이광요는 장발족에 대해서는 정부의 차별대우란에 공개적으로 게시하였고, 공무원들의 장발 또한 금지되어있다. “만약 국민의 개인적 사생활에 대해서 개입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이런 현재의 성취를 이루어 낼수가 없다” 라고 이광요는 말한다.
첫댓글 생각해보니 법은 방종을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잘 보았읍니다.
이광요의 50년 통치기간 동안 미국과의 마찰이 없었던 것인가?...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