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갇힌 선교사 타마자( John Van Neste Talmage) 1부
순창읍교회 정문 우편에 계란형 모양의 적당히 크고 아름다운 바위에 “1913년 설립 한국기독교 장로회 순창읍교회” 라는 표지석이 서있다.
“1913년 설립”이라는 말이 주는 역사의 무게를 느끼며 그 옛날에 물 설고 낯 설은 순창 오지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한 그 사람이 누구이며 그 복음을 받아들인 최초의 사람들이 누구일까를 생각하며 엄청난 영적, 역사적 사건을 상상해보곤 하였다.
과연 순창읍교회 설립자는 누구일까?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538쪽은 순창읍교회 설립에 관해 말하고 있다.
순창읍교회가 설립되고 선시에 본리거(本里居), 이사라와 함북지경에서 전도를 듣고 믿었으며 백병택은 광주병원에서 전도를 듣고 믿은 후에 열심병력하여 전도한 결과로 교회가 성립되어 초옥 칠간을 매수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고 선교사 타마자( J. V. N. Talmage)와 조사 고려위, 김세열, 이영희 등이 계속 시무하니라. 사기 538쪽
사기(史記)가 순창읍교회의 설립자를 타마자 선교사라고 기록하였으므로 설립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설립연대이다. 사기(史記)는 순창읍교회 정문 앞에 서있는 표지석과 다르게 교회 설립연대를 1918년으로 적고 있다. 우리는 두 개의 기록에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이는 어느 한 쪽이 맞고 어느 한 쪽이 틀리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교회가 기억하고 있는 1913년과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가 말하는 1918년이라는 두 기록이 다 맞다. 전자는 이사라와 백병택이 순창읍 사람들과 함께 처음으로 예배를 본 시점이고 후자 1918년은 전라노회주관으로 공식설립예배를 드린 시점을 적은 것이므로 년대가 다르게 나타난 것이 당연한 것이다.
순창읍교회 공식설립자인 타마자 선교사는 1884년 12월 30일 중국 선교사인 센더만 타마자와 모친 마리엘라 타마자의 아들로 미국 동부의 뉴저지 주 뉴왁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07년 툴레인 대학교에서 공학사 (전기 및 기계공학)를 취득하였고 1909년 사우스웨스턴 장로교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910년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1년의 대학원과정을 마쳤다.
1910년 3월 8일 그는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의해서 한국 선교사역을 하도록 임명을 받았고 1910년 7월 15일 뉴올리안스 노회에서 미국 장로교 목사로 안수 받았다. 7월 18일에 엘리사 데이 에머슨(Eliza Day Emerson)과 결혼을 하였고 7월 26일, 갓 결혼한 그들은 ‘에스에스 아시아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였다.
그는 1910년 8월 19일에 목포로 상륙한 이래 우리가 아는 대로 1942년 6월 1일 일본에 의해 강제 출국을 당할 때 까지 광주 선교부에서 32년 동안 복음 전파에 헌신하였다. 그는 특별히 담양을 비롯한 그 일대 지역을 자주 순회하며 전도여행을 하였다.
일제 패망 후, 그는 1948년에 다시 내한하여 1955년까지 광주 선교부에서 선교사로 활동을 하였다. 1955년 정년으로 귀국하여 1964년 80세를 일기로 소천 하였다.
그는 1912년 1월 배우지 (유진 벨) 선교사가 미국으로 소환됨에 따라 그의 후임으로 24개 교회를 맡아 순회시무 하였다. 그는 첫 순회 여행을 열흘 동안 계속하였는데 하루에 한 교회씩 방문하여 교회의 내력과 교우들의 형편, 마을의 문화와 관습 등에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에 의하면 그가 당시 순회하며 돌본 교회는
순창군 반월리교회 쌍계리교회, 금성리교회,
곡성군 옥과교회,
보성군 신천리교회,
장성군 대악리교회,
화순군 대포리교회, 화순군읍내교회, 품평리교회,
광주군 봉선리교회,
장성군 황용면 월평교회,
나주군 서문교회 등이었다.
그는 순회 전도의 노력으로 순창읍교회와 석고리교회, 화순군의 백암리교회와 금곡리교회, 광주군의 반석리교회를 공식으로 설립하였다. 그리고 담양읍교회에 건축비 일부를 지원하여 반양제 2층 36평의 예배당을 신축하게 하였다.
1922년 그는 담양읍 백동리 미례산 기슭에 주택을 짓고 선교회 사무실을 열러 조선인들 속에 들어가서 배우고 섬기며 주민들과 고락을 같이하는 선교를 지향하였다.
담양지방교회 편람에 의하면 ❮타마자선교사와 연관된 교회❯는
개동교회, 무정교회, 양지교회, 월곡교회, 주평교회, 창평교회, 담양읍교회, 담양중앙교회, 대치중앙교회, 금성교회, 해곡교회 로 11개이다.
이외에도 전남과 전북에 관련된 교회로
곡성에 옥과교회,
순창에 순창읍교회와 쌍치교회,
장성에 대악교회, 월정교회, 영신교회, 신촌교회와 사거리교회,
화순에 화순읍교회, 대포교회와 백암교회,
보성에 신천교회, 봉갑교회와 반석교회
광주에 금곡교회가 있다.
교회 외에도 타마자 선교사는 1933년에 담양군 봉산면 양지리 볼모지 수만 평에 순담성경학교를 세워 3년 과정으로 성경개론, 설교학, 구약사기, 교회사, 조직신학, 영어, 개인전도학 등의 과목을 가르쳤으며 대부분의 학생들이 농장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노동을 하며 학비를 면제 받았다. 그는 전도사들에게 철저한 근면과 자립정신을 심어주어 농촌교회와 마을의 부흥을 꾀하고자 하였다. 1934년에는 부지 800평과 1,000원으로 광덕학교를 세워 지역 교회에 기증하여 지역의 가난한 아동을 위한 교육의 문을 열어주었다.
타마자 선교사는 양림동 선교부에 본 주택이 있었지만, 깨달은 대로 1922년 담양에 선교 사무실을 열었고 그곳에 거주하며 그 지역 내에 있는 가정과 마을, 교회들을 자주 방문하여 마을과 교회의 문제와 교우들의 희망사항을 더 깊이 알았다. 그는 전도를 위해 한문을 공부하였으며 한국의 역사, 철학 문화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담양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자전거 순회여행을 즐겨하여 그의 발길이 전라남도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는 ‘타깍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신에게는 근검절약하였으나 전도와 성경공부, 교회 건축에는 지원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한국의 농촌교회가 자치, 자조, 자전의 원칙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도록 모범을 보이며 격려하며 훈련시켰다.
그는 성경학교와 선교부에서 날마다 아침예배를 드렸으며 교우들에게 가정예배를 가르쳤고 성수주일과 십일조에 대하여 철저하게 훈련을 시키기로 유명하였다.
1913년 8월 15일 전남노회는 타마자를 부회계로 임명하고, 1952년 2월 27일 회계로 선임하였다. 1923년 1월 30일 광주 금정예배당에서 모인 전남노회는 타마자를 전남노회 재단법인 광주 대표로 선출하고 설립위원인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타마자는 전남노회 재단법인 사무일체를 잘 감당하여 법인등록을 마쳤으며 다른 지역 선교부와 노회의 재단법인의 모델이 되었다.
2부로 계속
2021. 6. 30
우담초라하니
참고서적
차재명 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양전백, 함태영, 김영훈 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저,⎾호남 선교 초기 역사 ⏌, 도서출판 경건, 1998
타마자 저,⎾한국 땅에서 예수의 종이 된 사람⏌,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조지 톰슨 브라운 저,⎾한국 선교 이야기⏌, 동연, 2010
민경배 저, ⎾한국 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7
김명구 저, ⎾한국 기독교사 1⏌,예영커뮤니케이션, 2018
인테넷 한국섬선교회, 박요한의 글❮ 순담청년성경학원 시절 상, 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