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시창작의 길잡이) 104쪽
<상징적 이미지>
시는 구체화가 생명이다
익숙한 사물이라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찾아내보자
억새에 관한 보고서
박수봉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뜻하며 민중들이 사는 농경지역)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황동규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녹두장군)
봉준(琫準)이가 운다.(삼남(三南)을 여행하면서 만난 눈이 '봉준(琫準)이'의 눈물처럼 느껴짐)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漢文)만 알았던들 (조선시대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의 위선에 대한 야유)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청나라와 일본)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외세의 군마가 자기 나라 드나들듯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어 우리 땅을 활보하며 횡포와 압력을 행사)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역설적 표현)
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역설적 표현)
(전봉준 장군과 함께 스러져간 민초들의 울분의 눈물, 억압받는 민중들의 고통과 분노의 눈물)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갑갑했던 당시의 시대상)
무식하게 무식하게.
-1968년 「현대문학」발표
그들처럼 아첨하고 유식한 척 점잖은 척 허세 부리지 않고, 사대주의에 물들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중들의 삶과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식하게 무식하게' 흔들림 없이 분연히 일어섰던 인물, 전봉준
2024년은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입니다.
그 거대한 힘의 덩어리에 깔려 신음하던 130년 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상황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서울로 가는 전봉준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萬頃)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 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 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재낄 것을 ...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 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시인은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고 그 이듬해 첫 시집을 냈다.
시인의 삶의 지향과 역사의 한 순간이 마주치면서 상상력으로
부려놓은 서정이 독자로 하여금 사람의 도는 무엇이며, 사람이
어떠한 길을 걸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풍성하게 사유토록 한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에 비춰진 모습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처음 이 사진을 보았을 때 가마를 태워가는
모습이 의아했는데, 당시 전봉준은 포박당하는 과정에서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도저히 걸을 수 없었으므로
저렇게 가마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본영사관 구내에서 일본인 사진사에 의해 촬영된 사진은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의연했고
그 눈빛은 너무나 강렬했다. 교수대 앞에서 법관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하자,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나의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하여 컴컴한 적굴에서 암연히 죽이느냐“ 라고
꾸짖었다.
그 기개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형형한 눈빛, 정녕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이었다. 1895년 3월 처형되어
유족들에게 인계되지 않은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동학민중혁명의 영웅 전봉준의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를만큼
우리 근현대사에서 동학혁명과 전봉준장군은 철저히 배제되고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