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보의 봄
왠놈의 비는 이렇게 내리는지, 국군6사단 2연대 김영철 이등상사는 투덜투덜거리며 남한강을 바라본다.
홍천에서 철수하여 원주를 지나 계속되는 후퇴로 사기는 떨어지고 많은 병력이 제대로 먹지도 못해 배고파서 걷는 것조차 힘들다.
6월25일 전쟁이 나고 7월3일에 이곳 충주에 도착했으나 19연대와 7연대가 이천-여주방향으로 국군1군단의 엄호작전을 위해 투입되어서 2연대가 충주 일원을 방어해야 했다
적은 인민군 12사단이 바로 전방에서 접촉을 유지한체 밀어붙이고 있고 서북쪽에서는 인민군1사단의 침투가 계속 된다
먼저 남한강을 도하하여 강안상으로 병력을 배치하여 진지 편성을 완료한 2연대는 정찰활동을 계속하던중 7월7일 적 12사단 정찰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따라서 준비된 진지에 들어가 전투준비를 하는데 자정부터 적이 공격을 개시하여 혼란이 발생하고 이미 적은 주간에 준비해 놓은 강가 도선장의 배로 안개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 기습적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달천과 남한강이 용의 꼬리 모양으로 발달된 이곳 충주는 이른 봄이나 여름이면 아침 나절까지 안개로 지척을 분간하기 힘들다
적의 포격으로 피해가 발생하고 짙은 안개로 앞이 분간되지않고 좌측 달천쪽이 도강을 허락하여 이제 후미가 위협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김 이등상사는 3대대 1중대 지역에 있다 적이 후미로 진출하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후퇴를 해야겠다고 느껴 중대장을 찾았으나 보이질 않는다.
나타나지 않는 중대장님, 하지만 도대체 지금 저 밑에 논으로 밀려가는 군인들은 누구인지 알수가 없었다.
한 3일 진지구축하며 지역 주민들의 도움도 받고 허기진 배도 조금 해결했나 싶더니 자정부터 또 콩볶기 시작이다.
이곳 탄금대 일대는 임진왜란시 신립장군이 문경세재에서 고니시에 패한후 1592년 4월 26일 이곳에 들어와 배수진전법으로 맞서 사우다 모두가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때마침 계명산 맞은편 남한강 너머 관모봉일대에서 도하한 적이 마지막재 방향으로 수미상의 인원이 침투함으로써 연대가 포위위기에 처해 수안보 방양으로 철수하게 된다.
대림산 두륭산 문래산등 400~500고지군의 저명한 지형을 이용하여 살미를 지나 수호리 수안보 방향으로 후퇴하여 699M 적포산 일대를 점령하게 되고 제19연대도 복귀하여 진지를 강화하게 된다.
마침 이대 유엔 공군 1개편대가 출격하여 적진을 강타하고 적도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서인지 접촉을 단절하여 적막이 흐르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때 적은 정면의 12사단이 단양을 목표로 마지막재에서 목벌리쪽으로 향하고 서울-충주로 남동진한 제1사단이 작전지역을 인수하게 되었다.
날씨는 덮고 비는 내리고 여기저기 죽어간 군인이며 피난민의 시신이 부패하여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경찰과 군인이 합세하여 보도연맹을 색출하고 도망친 집안은 데려올때까지 일본순사들이 했다던 그 무시무시한 고문과 폭행을 가하고 결국은 차에 실어서 어딘가에 보내진다.
김 영철상사는 박흥식 소대장과 함께 보도연맹이 붙들려와 모여 있다는 싸리재로 향했다.
비록 전쟁이라지만 때로는 여유가 있어 보이고 지역주민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배불리 먹을때도 있다. 군인이 가면 마을이장이나 누가 앞장서서 이런 일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연신 쓰리꼬타에 남자 여자 불문 어른까지도 붙잡혀 오고 있다.
계곡에는 벌써 누군가가 길게 호구덩이를 파놓고 있었다. "이자들이 내버려두면 인민군과 내통하여 우리 구닌 경찰을 다 죽이고 김일성 군대를 만든다. 순 빨갱이같은 놈들만 잡아왔다. 조국과 자유를 위해 이자들을 처단하라~~?"
그리고 몇 삽 올리고 아무일 없는 것처럼 떠나갔다.
전쟁지역에서의 이런 일들은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정말 있어서는 안되지만 실제 내버려두었다가 아군의 동태가 적에게 넘어가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되다보니 눈감고 쏴야 한단다.
총소리 들린다. "따다다다~따다다다" 칼빈소총 소리다. 그러더니 적막이 흐르고 어쩌다 "따콩" 하는 소리도 들린다. 아마 용케도 죽지않은 인원에 대해 확인...... .
수안보는 '물안비'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다.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을 ' 물이 솟는 보의 안쪽 마을'이라는 뜻에서 시작되어 한자로 바뀌면서 수안보가 되었다고 한다.
1018년 고려 현종때 온천이 있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나와 있고 조선조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피부병을 치료하러, 숙종이 휴양과 요양을 위해 찾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이로인해 '왕의 온천'이라 불리기도 했단다.
이렇듯 섭씨 53도의 온천수로 유명한데 이곳으로 북한군 전선사령부가 내려왔다는 이야기 있다.
낙동강전선이 교착상태로 빠지고 속전속결로 부산까지 점령하여 1달여에 끝내려던 북한군의 공격기도는 유엔군의 상륙으로 교착상태에 빠지고 유엔 공군과 함포 사격으로 제대로 보급품을 조달하기가 힘들고 더욱이 많은 희생으로 서울 이천 인천등지에서 어린 학생을 학도의용군으로 편성하여 전선에 내려보내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살기위해 북으로 도망가야할 운명이 되어갔다.
그래서 조기에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독전을 위해 이곳 '수안보 전선 사령부'에 김일성이 나타나 며칠 있다가 북으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석문동 서재욱 할아버지 나이 10살 때다.
북한군이 집집마다 들어가 머물고 석문동은 졸지에 북한군 최고 높은 사람이 와 있었다.
뭔지도 모르고 인민군이 밥하는 곳에 가서 밥도 얻어먹고 심부름도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절대로 밤에 불빛 못나오게 하고 소리도 없이 조용히 암흑속에서 살아야 했다.
어쩌다 높은 군인들이 사이도카 타고 와서 바로 떠나기도 하고 행길에는 남으로, 지게에 뭔가를 지고 남루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밤이면 내려간다.
학생복을 입은 군인도 있고 핫바지같은 옷을 걸친 군인도 있고 어쩐일인지 밤에만 움직이는 북한군.
할아버지는 호기심에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뭘 하는지 보려했지만 도대체 낮에는 잠만자고 별로 하는 일이 없다는 북한군의 일상이다.
그런 어느날 키가 크고 머리털이 노란 미군인지 유엔군인지 2명이 붙잡혀 들어왔다.
영어로 서로 뭐라고 하는데 도무지 알 수는 없다.
본인 집 위 학고방같은 창고에 처박아 놓고 밥은 쫄병들이 갔다 주곤 했단다.
코쟁이들은 아침이면 체조같은 운동을 밖에서 하고 일절 어디를 가지 못하고 그곳에 묶여 있었다.
어느날은 앉아서 옷을 벗어 뭘하길래 가만히 받더니 옷에 까만 '이'가 수두룩하게 붙어 있어 그걸 잡고 있었다. 그러다 훌훌 털기도 한다.
얼마 지나 난리가 났다.
곰짝하지말고 가만히 있어라 한다. 차량 여러 대가 각각 집 처마밑에 멈춰서 있고 차렷 자세로 경계근무하는 쫄병들이 군기가 바짝 들어 있다.
나중에 웬 똥똥한 사람이 계급장도 없이 나오더니 주변을 한번 훌터보더니 "밀어붙이라우" 한마디 하고 떠나갔다.
김일성이다. 서재욱 할아버지가 10살 나이에 김일성이를 수안보 석문동에서 본 것이다.
새벽이면 엄청난 부상자들이 몰려오고 부축을 받으며 일부는 충주쪽으로 간다.
그런데 갑짜기 북한군들이 되돌아 오고 있다. 뭔 일인가?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고 성공하여 허리가 잘린 북한군이 도망치는 것이었다.
갑짜기 인민군이 미군 2명을 데리고 곰지골로 들어간다.
얼마후 "따당~, 따당~" 두발의 총소리기 울렸다.
지켜보고 있는데 함께간 인민군만 나오고 미군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붙잡고 있다. 지금 움직이면 죽을 수 있단다.
곧이어 집집마다 짐을 챙긴다. 해는 벌써 지고 있는데... .
동네사람들에게 "또 올테니 잘 있어라" 인사를 남기고 비내리는 밤에 떠났다.
말이며 소등에는 엄청 많은 것이 실리고 동네에서 거둔 쌀도 다 가지고 갔다.
다음 날 할아버지는 곰지골에 들어갔다.
아뿔싸 바로 초입에 계곡에 죽어서 묻히지도 않은체 그대로 있다.
벌써 파리들이 날고 하늘에는 까만 구름처럼 모여난다.
할아버지와 동네 어른이 삽을 들고 와서 몇 삽 올렸다. 누구의 자유를 위해 죽어갔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