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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칼럼(734호)
몸과 영혼이 고통당하는 지옥
(계 20:1-15)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2-15).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 10:28).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 5:29).
한국 기상 관측역사 118년동안에, 올해 2024년 서울은 최장의 열대야를 보내고 있다. 냉방장치가 없이는 밤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 이렇게 열대야 때문에 모두가 고통을 겪고 있는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옥은 어떨까?
예수님께서는 지옥에 대해 적어도 18번 이상 언급하셨다. 그러면 지옥은 어떤 곳인가?
성경에서 지옥에 대한 단어를 살펴보면 ‘지옥’에 관한 단어가 헬라어로 각각 세 가지로 분류된다. 신약성경에는 지옥(hell)으로 번역된 말이 모두 23번 나온다. 그 가운데 10번은 하데스(hades), 12번은 게헨나(gehenna), 그리고 1번은 ‘타르타루스’(tartarus)라는 헬라어가 지옥으로 번역되어 있다.
1) 하데스(히브리어로‘스올’)에 관한 내용은(눅 16:19-31)에 있다. 하데스는 두 곳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중에 한 곳은 구원받은 사람이 가는 곳인데,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나타나 있고 다른 곳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장소이다.
2) 타르타루스(흑암) “또 자기들의 처음 위치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원한 사슬로 묶어 흑암 속에 가두어 두셨느니라"(유 1:6).
3) 게헨나는 ‘불 못’에 대한 헬라어이다. 바로 이곳이 최종적인 지옥이 되는 것이다.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계 20:14-15).
1. 지옥은 어떤 곳인가?
1) 사랑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 20:10). 지옥은 사랑이 완전히 거두어 버린 차가움과 냉랭함과 원망 후회 불평 쓸쓸한 것만 있는 곳. 생명이 없는 시체, 사랑이 강탈당한 아비규환의 장소, 처절함과 슬픔과 찢어지는 고통으로 온갖 저주로 가득한 곳, 하나님의 사랑이 멈추어진 곳, 고의적으로 무시된 곳, 무관심해서 저주스러운 곳이다.
2) 배신한 대가를 지불하는 곳이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 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사람은 배신감을 당할 때에 이를 갈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을 배신하고 진리를 배신한 자들이 대가를 영영히 지불하는 곳이다. 결혼잔치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는 곳이다. 천국을 분명히 갈 수 있다고 한 자가 못 가고 맛보는 곳이다. 자기 자신은 정당한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마귀에 게 속은 자가 가는 곳이다.
3) 수치스러움과 고통을 영원히 당하는 곳이다.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 라”(계 20:13-14). 지상생활에서 사는 동안에는 수치스러운 것을 행하면서도 몰랐던 자들이 죽은 후에 지옥에 가서 수치스러움과 고통을 당하는 곳이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 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8-49).
4)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만이 들어가는 곳이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2.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가?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우리 중에 여기에 해당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부분적으로 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주셨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자비가 없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게 해 주셨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두 지옥불에 던져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하신다. 다행히 우리는 예수를 믿고 지옥에 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예수를 믿지 않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부모, 형제, 내 주변의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결론. 지옥은 분명히 있다. 모두들 천국 문을 통과하는 성도가 되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만일 그들을 방치해두었다가 그들이 어느 날 죽은 후에 지옥에 간다면 그들이 나를 얼마나 원망하겠는가? 우리는 믿지 않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루빨리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말해주고, 예수님을 믿게 해야 한다. 그들이 믿고 안 믿건 간에 일단 우리의 사명은 말해주어야 한다. 이미 말했다면 일단은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믿고 있지 않다면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전해야 한다. 지옥은 반드시 있다. 지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이 땅에서 방종하거나 방탕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다가 모두 다 천국 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근신하고 절제하고 깨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천국과 지옥
1. 누가복음 16:19-31
① 누가복음 16:19-31까지를 가리켜 혹자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터툴리안(Tetullian)과 암브로스(Ambross), 칼빈(Calvin)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본문에 거지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입니다. 부자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전설에 의하면 ‘다이브스’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 가운데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거지의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② 그리고 나사로는 믿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 품으로” 갔다는 말씀이 잘 가리킵니다(22절). 부자는 믿지 않는 자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호화로운 연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말씀이 증거 합니다(19절).
2. 부자
부자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그는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이 자색은 로마 황실에서 전용으로 입는 색깔입니다. 자색의 빛깔은 깊은 시내의 고동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자연 색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옷 한 벌을 자색으로 온전히 물들이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실은 자기의 권위를, 부자들은 자기의 부요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색 옷을 입었었습니다. 거기다가 고운 베옷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운 베옷은 이집트에서 직조를 했습니다. 마에서 가장 가는 섬유로 천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 값을 칠 때에는 옷 무게와 금을 똑같이 달아서 금 값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고운 베옷을 입었는지 모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 모아놓고 자기 좋은 것을 원 없이 나누고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① 값진 옷입니다.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옷, 자동차, 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② 날마다 날마다 즐기는 생활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③ 호화로운 생활입니다.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곳 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3. 거지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 먹고 병원가 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 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의 연회에서 남겨진 음식 부스러기를 얻어서 배를 채웠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그 문가에서 같이 음식을 나누던 개가 그 헌데를 핥아 주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나사로가 어떤 사유로 거지가 되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사람은 몹시 불행했고 고통받는 인생을살았습니다.
22절에 보면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부자는 젊어서 몸을 녹용, 뱀, 인삼 등으로 많이 보호했기 때문에 숨이 안 끊어져 고생을 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다 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①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입니다.
② 육신적 죽음입니다.
③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요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가게 될 운명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18회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옥에 있는 부자를 봅니다. 부자가 그 지옥 속에서 외치는 외침을 들어봅시다. 그는 첫 번째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를 적셔 주시옵소서." 그는 이미 지옥에 가서 분위기를 파악했습니다. 머리가 보통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옥은 한번 빠지면 이미 결판이 났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안 되는 곳임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의 것을 요구합니다.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에 대 달라고...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것뿐만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단절이 생겼다. 그래서 갈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강청합니다. "아브라함이여, 내 아버지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 다섯 형제만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는 형제들을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된다". 부자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여, 아닙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형님 전갈이라고 말하면 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아니, 모세가 다시 살아나서 가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다."
4. 지옥은 고통의 장소
여기서 우리들은 지옥의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봅니다. 지옥이 없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옥을 말하시는 분은 이사야도 아니고 예레미야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호세아도 아니고 아모스도 아닙니다. 세례 요한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지옥을 말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십시오. 지옥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창조를 아십니다. 시작을 아십니다. 끝을 압니다. 인생의 높이를 압니다. 저 깊은 낮음도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이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옥을 부정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분이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그분이 말하고 있습니다.
5. 지옥은 자비가 끊어진 장소
두 번째로 이 지옥은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도 끊어진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십니다. 공평하십니다. 한없이 주십니다. 그런데 그처럼 흔한 물이 지옥에서는 단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옥 불 같은 불 속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세 친구는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주님의 보호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자비와 긍휼히 있었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 자체가 지옥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끊어져 버린 장소,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마저도 말라버린 장소가 지옥입니다.
6. 지옥에는 기회가 없다.
그런가 하면 지옥에서는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거기 들어갔던 이 부자는 다시 기회 없는 줄 이미 눈치챘습니다. 만약 기회가 있었으면 그 유능한 능력으로 아마 예수님이라도 로비를 해서 천국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먼저 물 한 방울만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자기가 이미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 두 번째로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단절의 땅입니다. 지옥은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마 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매주 11,000여 명의 회원님들에게 한 번씩 보내는 칼럼입니다.
서울 강서교회 김창환 목사(문지기) 드림
양천구 신정로 11길 63 강서교회 010-3913-8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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