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國 전래 문물제도의 변천사. 增補文獻備考
이 책은 대한제국시기인 1903년부터 1908년 사이에 고종황제의 勅命으로 편찬하여, 간행한 대표적인 조선시대 類書 가운데 하나이다. 이 방대한 유서는 총16考 250권 분량으로 당시로선 최신 기술을 적용한 신식연활자로 인쇄하여 간행되었다. 그간 조선에서는 전례나 예법을 다루는 典掌에 관해서는 중국에서 펴낸 『文獻通考』를 참고하여 활용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우리 역사와 문물제도의 변천에 대해 정리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1769년(영조45) 처음으로 왕명에 의거하여 시작된 편찬 사업은 徐命膺, 蔡濟恭, 徐浩修, 申景濬 등이 주도해, 象緯 · 輿地 · 禮 · 樂 · 兵 · 刑 · 田賦 · 市糴 · 選擧 · 財用 · 戶口 · 學校 · 職官 등 총 13고 100권으로 완성되어, 이듬해인 1770년 8월에 『東國文獻備考』라는 서명으로 인쇄하여 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짧은 기간에 많은 분량을 편찬하다보니 체재가 서로 어긋나거나 기술한 내용이 소략하거나 혹은 착오한 곳이 많아, 1782년(정조6) 博學强記로 이름난 李萬運을 기용해 재 편찬 작업에 들어갔다. 이 사업은 정조이후 사실까지 계속 보완하고 증보하는 작업이 이어져, 1797년에 이만운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 서명응의 손자이자 호수의 아들인 徐有榘도 참여했는데, 훗날 이때의 경험을 밑바탕으로 『임원경제지』를 집필하는데 도움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도 이만운의 아들 李儒準이 보완 작업을 이어갔으나, 앞서 이만운이 이미 갖추어 놓은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한다. 『增訂東國文獻備考』또는 『증보동국문헌비고』로 불리는 이 책은 앞의 13고에 物異 · 宮室 · 王系 · 氏族 · 朝聘 · 諡號 · 藝文 등 7고를 더해 총20고 146권에 달하였으나 간행되지 못했다.
대한제국 시기의 『증보문헌비고』편찬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문물제도가 크게 바뀌게 되자 이를 반영하기 위해 『증정동국문헌비고』를 개찬한 것이다. 1903년 법무국장의 건의로 홍문관 안에 찬집소를 두고 朴容大, 趙鼎九, 金敎獻, 金澤榮, 張志淵 등 33인이 찬집을 맡고, 朴齊純 등 17인이 교정, 韓昌洙 등 9인이 監印, 金榮漢 등 3인이 인쇄를 맡아 5년 만에야 완성하였다.
이때 개찬을 거듭한 결과로 전체 250권으로 분량이 늘어났으며, 분류도 다시 조정되어 상위(12권) · 여지(27권) · 帝系(14권) · 예(36권) · 악(19권) · 병(10권) · 형(14권) · 전부(13권) · 재용(7권) · 호구(2권) · 시적(8권) · 交聘(13권) · 선거(18권) · 학교(12권) · 직관(28권) · 예문(9권) 등의 16고로 변경되었다.
영조 때 처음 ‘문헌비고’를 편찬할 당초에 영의정 金致仁은 “실용에 도움이 되게 하고 經國濟世의 도구로 삼으려 하였다.”고 말하였고, 광무 연간에 편찬할 때에는 총리대신 李完用이 “진실로 경국제세의 실용을 위했다.”고 말한바 있다. 따라서 이 책의 편찬목적은 治世의 실용을 위한 것으로서, 18세기 이후 실학의 한 면모에 해당된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민족문화백과 참조.)
편집 형식은 ‘考’ 분류별로 公私의 史籍에서 역대의 史實을 폭넓게 뽑아 편년 순으로 배열하였는데, ‘補’자가 기입된 표식은 이만운이 증정할 때, 정조 14년(1790) 이전의 원본에서 빠진 것을 보충한 것이다. 또 ‘續’자라고 표시된 곳은 정조 14년 이후의 사실을 보충하면서 쓴 것으로서, 광무 연간의 개찬에서도 같은 표식을 그대로 쓰고 연대로 구별하도록 하였다. 다음 회부터 의약사실과 관련한 기사와 의서가 다수 수록된 藝文考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에 소문난 조선 사람들 책사랑. 增補文獻備考
『증보문헌비고』· 藝文考 歷代書籍조에서 의약문헌과 관련 대목을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조문이 눈에 띈다. 우선 고려 문종 12년(1058) 충주목에서 新雕黃帝八十一難, 川玉集, 傷寒論, 本草格要, 小兒蘇氏病源, 小兒藥證病源一十八論, 張仲景五臟論 99판을 바쳤고 이듬해에는 安西都護府에서 新雕肘後方 73판, 黃帝八十一難, 疑獄集 11판, 川玉集 10판을 바쳤다고 되어 있다.
또 고려 宣宗 8년(1091)조에 호부상서 李資義와 예부시랑 魏繼廷 등이 송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아뢰기를 중국의 황제가 우리나라 서적 가운데 좋은 책이 많다고 들었으니 관원에게 명하여 구해 볼 책의 書目을 주었다고 하였다. 이에 비록 권질과 차제가 부족해도 옮겨 베껴서 부쳐온 것이 128종에 달하였다고 적혀있다.
그 가운데 의약서가 분명한 것만 거명해 보아도 古今錄驗方 50권, 張仲景方 15권, 深師方, 黃帝鍼經 9권, 九墟經 9경, 小品方 12권, 陶隱居效驗方 6권, …… 桐君藥錄 2권, 黃帝大素 30권, 名醫別錄 3권 등이다. 대부분 이제는 사라져 실물이 전하지 않는 책들이며, 당시 고려에만 전해지던 매우 희귀한 문헌들이었다.
그래서 이 때 黃宗懿 등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 『黃帝鍼經』을 바쳤는데, 이 때 보낸 고려본『침경』을 토대로 중국에서 진즉 없어진『황제내경영추』를 복원하여 펴냈다고 하니 지금 우리가 보는 『황제내경』의 태반은 고려의 침경이 밑거름이 된 셈이다.
세조 8년(1462)초에 집현전을 없애면서 거기에 소장했던 서적들을 예문관으로 옮겨 보관하게 하였는데, 세종 때 어렵게 모아놓은 서적들이 흩어져 버릴까봐 양성지에게 명하여 분류대로 모아서 간수하게 하였다. 생각하건대 아마도 이 때 세종임금이 펴낸 『의방유취』초편본 365권도 예문관으로 이관되어 양성지의 손에 의해 교정을 거듭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세조가『醫藥論』을 손수 지어 임원준에게 주해하여 印頒할 것을 명한 것도 이 무렵이다.
또 세조11년(1465)에는 신숙주 등 12인에게 명하여 각기 郎廳 1인씩을 거느리고 여러 부류의 서적들을 분류 취합(諸書類聚)하게 하였는데, 무릇 12문으로 나누었으니, 易, 天文, 地理, 醫藥, 卜筮, 詩文, 書法, 律呂, 農桑, 畜牧, 譯語, 籌法 등이었다. 이때 대사헌 양성지가 이에 대해 상소를 올린 바가 있으니 이 일이 아마도 『의방유취』교정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또 동지중추 徐居正에게 馬醫書를 편집하도록 하명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고려 말에 이루어진 東人經驗 牧養法과 『新編集成牛馬醫方』에 담겨진 전통수의학이 조선조에서 넘어와서도 면면히 이어져 전승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때 만들어진 마의서가 오늘날에 온전하게 전하지 않음이 몹시 애석할 뿐이다.
중종 13년(1518)에는 金安國의 주청으로 세종, 성종조에 간행했던 고사를 본받아 辟瘟方과 瘡疹方을 펴냈는데, 이와 함께 農書와 蠶書를 번역하여 간행하였다고 하였으니 앞서 말한 2종도 역시 언해본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이 이 무렵에 발행한 『五倫行實圖』서문에 그대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법의서는 역대로 형조에서 관할한 듯한데, 세종대에『세원록』이 나왔고 숙종 26년에는『무원록』을 인출하여 제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정조 연간에 이르러 『增修無冤錄』이 완성되었는데, 형조판서 徐有隣 등이 교정을 거듭하고 한글로 번역한 끝에, 활자로 인쇄하여 반포한 것이다. 역대 문헌에는 조선사람들이 서적을 몹시 좋아하여 종류를 가리지 않고 구하였으며, 중국에서도 없어진 책들이 조선에 남아 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한다.
면면히 이어온 조선의서의 宗脈. 增補文獻備考
『증보문헌비고』· 藝文考 · 歷代書籍조에서 의약문헌과 관련 대목을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조문이 눈길이 간다. 특별히 이 책의 245권에는 列朝御定諸書가 실려 있는데, 역대 임금의 재위 중에 왕명을 받아 편찬된 서적이나 직접 親撰한 글들이 열거되어 있다. 이 중에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것들도 눈에 띄는데, 그 처음은 세종조 최치운에게 명하여『무원록』에 주석을 달도록 한 사실이다. 이른바 『무원록주』라고 기록된 법의서이다. 또 세조조에는 서거정에게 명하여 편찬한 馬醫書가 올라 있다.
가장 관심이 가는 대목은 역시 인류문화유산인『동의보감』25책이다. 이 책은 잘 알다시피 선조조에 어의 허준에게 찬집을 명하여 이뤄진 것으로 그 주석에 보면 다음과 같은 언급이 들어 있어 주목하게 된다. “(동의보감)板本이 중국에 流入되어 중국 사람들이 크게 칭송하고 감탄하여, (이 책을)간행하여 널리 천하에 유포하였다. 番禹사람 凌魚가 서문을 지었다.”(板本流入中國, 大爲華人所稱賞, 刊布天下,有淸人番禹凌魚所纂序.)고 적혀있다.
이 책의 권246 · 藝文考 · 의가류에는 본격적으로 의방서가 열거되어 있는데, 고려시대에 편찬한 서적부터 차례로 나열되어 있다. 맨 처음은 『御醫最要方』(2권)으로 시작하는데, 서명은 아마도 ‘어의촬요방’의 오기일테지만 최요방이라 하는 말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고려시대에 李奎報가 서문을 짓고 茶房에서 수집한 처방을 모아 간행한 이 책의 정식명칭은 ‘新集御醫撮要’라고 한다.
의가류 서적 가운데 가장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책은 『鄕藥濟生集成方』(30권)이 아닌가 싶은데, 저자가 ‘中樞 金希善撰’이라고 밝혀져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陽村 權近의 서문을 아주 길게 인용하고 있는 것이 다른 책에서와 달리 한눈에 보이는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글에서는 책의 편찬과정과 거기에 관계된 인물들의 면면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아마도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이후 본격적인 의료복지 시책의 일환으로 펼쳐진 이 향약의서 간행사업에 중차대한 의미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 이후 濟生院을 설치하고 향약을 채취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각도에 의학원을 분치하고 의학교수를 보내어 施藥과 敎習을 병행케 하였다. 특히 官藥局의 의관으로 하여금 여러 의방서를 검토하여 未備된 전문의방서를 갖추도록 하는 한편, 東國의 의약경험(東人經驗)을 모아서 병증문에 따라 분류하여 편찬하였으며, 그 이름을 ‘향약제생집성방’이라고 부른다는 취지가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여기에 덧붙여 강원도관찰사 김희선이 牛馬醫方을 곁들여 간행하였다는 것은 鄕藥과 牛馬, 이 2가지가 조선 초기 의료정책에 있어서 주축을 이루는 분야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임원준의 『瘡疹集』, 양례수의 『醫林撮要』(13권), 노중례의 『胎産集』, 허임의 『경험방』, 安景昌의 『治腫方』과 『辟瘟方』, 『辟瘟新方』 등은 오래 동안 책의 간행 사실이나 저자가 불분명한 상태로 지내왔는데, 역대서적조의 기록은 이러한 사실관계를 분명하게 밝혀 주는 근거자료로 쓸 수 있다.
또 增補萬病回春(10권), 壽親養老書(3권), 醫脉眞經(1권) 등은 그간 중국의서로만 여겨져 왔는데, 여기에 버젓이 올라 있다는 것은 이 책들이 조선의서로 간주되어 왔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어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