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刊朝鮮 2002년 2월호에 「발굴 특종-국가 작성 6·25 拉北者 8만명 名簿 발견」 題下(제하) 기사가 보도된 직후 기자는 6·25 전쟁 납북자 가족들로부터 여러 통의 이메일과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걸어온 6·25 전쟁 납북자 가족들은 60代에서 70代의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납북된 부모나 형제들의 생사확인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기업 사장으로 있다가 정년 퇴직한 후 서울 지방법원 민사조정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車炯東(차형동)씨가 보낸 이메일에는 납북자 가족들의 공통적인 생각과 바람이 들어 있다.
<(前略) 제 부친의 성함은 車潤弘(차윤홍)입니다. 6·25 전쟁 때 납북 당하셨습니다. 그동안 여러 경로로 부친의 생사를 알아보려 노력했으나, 오늘까지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습니다.
제 부친은 1904년생이십니다. 우리나라 헌법제정 기초전문위원을 하셨고, 초대 국회 의사국장, 상공부 상역국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아직 생존해 계실 가망은 희박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지낼 수는 없는 것이 저희들의 심정입니다.
일단 명부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니 부친의 소식을 직접 들은 듯한 기분입니다.(後略)>
납북자 가족들은 납북된 부모나 형제가 생존해 있다는 소식도 아니고 대한민국 정부가 작성한 납북자 名簿(명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납북된 가족의 소식을 들은 것 같다』며 기뻐했다. 명부에 찾고 있는 가족의 이름이 들어 있는 납북자 가족의 경우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납북된 부모와 형제들의 소식에 목말라 했던 것이다.
6·25 전쟁 납북자 가족들은 『북한이 납치해 갔다는 사실이 정부 작성 문서로 밝혀졌으므로 정부는 북한에 공식적으로 6·25 전쟁중 납북인사들에 대해 송환을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북한에 송환을 요구해야 그들의 최소한의 소망인 납북된 부모와 형제들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여순반란 사건 사진전시회 열었다고 납치
이희철(61)씨는 아버지 李東浩(이동호·1914년생)씨가 납북됐다. 月刊朝鮮 2002년 2월호에 공개된 공보처 통계국 작성 「서울특별시 被害者 名簿」 10쪽에 납치로 기록돼 있다. 나이는 37세, 납치일은 7월30일, 납치장소는 명동 2가 40번지, 직업은 사진재료상으로 돼 있다.
李씨의 아버지는 「사진문화」라는 잡지의 발행인이었다. 사진을 직접 찍기도 하고 잡지도 발행하는 한편 사진재료도 취급을 했다. 李씨는 아버지가 납북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버지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그 중에 여순반란 사건 사진전도 있었는데 그게 밉보였던 것 같습니다. 반란군들의 잔악상을 찍은 사진들을 전시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납북된 이후 李씨는 1952년에 어머니(홍성희)마저 잃었다. 李씨는 『사는 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기억을 끄집어내기조차 싫다』는 말로 과거의 겪은 일 모두를 설명했다.
납북자 가족들은 가장인 아버지가 납치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희철씨와 마찬가지로 전태희(60)씨도 아버지가 납북됐다. 田씨의 아버지 田鳳彬(전봉빈·1908년생)씨는 납북 前 국회 전문위원으로 있었다. 자택에서 보안서원 두 명과 인민군 장교 두 명 등에 의해 납치됐다. 田씨는 아버지가 피랍 도중에 처형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납북 인사들이 평북 강계에 끌려가 있을 때 부근에 국군포로들도 있었답니다. 아버지가 2代 국회에 경북 영주에서 출마했었는데 영주 출신 국군 포로 중 한 명이 아버지를 알아보았답니다. 그분이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포로교환 후 우리집에 찾아와서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해 주었답니다』
그 이후로 田씨는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살아 계시리라는 기대도 접은 지 오래다.
『어느 정권도 6·25 납북자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순서상 남북이 제일 먼저 해결해야 될 일이 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조건 없이 보내 주면서 왜 북한에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에 대한 송환 요구는 못 하는 겁니까. 비전향 장기수들의 북한 가족들이 애를 끓이며 가족을 기다렸다면 우리는 그 이상 애가 끓었을 겁니다. 그들은 생사여부나 알았지만 우리는 그것조차 몰랐던 것 아닙니까』
金智慧(김지혜·60)씨도 아버지 金占碩(김점석·1913년생)씨가 납북됐다. 金占碩씨의 납북 당시 직업은 변호사였다. 광복 후 서울지검 부장 검사로서 송진우 암살사건, 여운형 암살사건 등을 담당했다. 1949년에 변호사 개업을 했다. 「피해자 名簿」에는 연령 48세, 직업 변호사, 소속 및 직위 대한변호사회 총무, 피해종류 납치 등으로 기록돼 있다.
1950년 7월8일 北으로 납치됐다. 1951년 1·4 후퇴 직전 평북 만포진에서 아버지를 본 사람이 있다는 소식이 아버지와 관련된 최근의 소식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것으로 확신하는 金健雄(김건웅·60)씨의 소원은 아버지 金相烈(김상열·1908년생)씨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아는 것이다. 납북 당시 金相烈씨의 직업은 서울대학교 학무과장이다.
『1950년 9월22일 밤 12경에 인민군과 청년들이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아버지(金相烈)를 납치해 갔습니다. 당시 國大案(국대안)을 반대하던 좌익 학생들에 의해 납치된 것 같습니다』
金씨는 『연좌제를 통해 정부가 납북된 인사들의 가족을 감시한 것은 남북 대치라는 현실적 상황 때문에 이해가 간다』면서도, 『납북인사를 월북인사 수준에서 관리한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납북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우리 남한의 엘리트들은 다 잡아간 것 같다』면서 『명부 발견을 계기로 정부는 떳떳하게 북한에 대해 6·25 납북자 송환을 요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李最永(이최영·68)씨네 가족의 바람은 납북된 아버지 李鍵(이건·1897년생) 목사의 유해 송환이다. 李鍵 목사의 납북 당시 직업은 서울신학교(現 서울신학대학교) 교장이었다.
李씨는 『북한이 우리들의 부모와 형제를 납치해 간 것은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테러』라면서 『지금이라도 정부가 특별법을 서둘러 제정해 납북인사 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아원 앞에 아들 버리고 통곡도
金玉粉(김옥분·74)씨는 남편이 납북된 경우다. 金씨의 남편 權慶晶(권경정·1920년생)씨는 마포형무소 간수부장으로 있다가 납북됐다. 마포 형무소 부근 친구 집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잡혀간 이틀 후 탈출에 성공했으나, 탈출한 다음날 다시 납치당했다.
남편이 납북된 후 정부에서 남편 대신 여자 간수로 일할 수 있도록 해 주었지만 만삭의 몸이라 할 수 없었다.
『남편의 납북으로 살길이 막막해진 저는 이를 악물고 고아원 앞에다 아이를 버렸습니다. 아이가 너무 울어대어서 부둥켜안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金씨는 고향인 경북 봉화에서 행상과 포목장사를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서후식(68)씨와 서정식(67)씨는 사촌 간이다. 두 사람 다 아버지가 납북됐다. 형제가 납북된 것이다. 후식씨의 아버지는 徐承杓(서승표·1905년생)씨로 경성제대를 나와 광복 전에는 평북 운산 군수, 강계 군수 등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대한중석 총무이사로 있다가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납치됐다. 사촌 동생인 정식씨의 아버지 徐承根(서승근·1907년생)씨는 東京大 상대를 졸업한 후 대법원 행정처 경리과장으로 있다가 납북됐다.
정식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몰라 아버지의 생일을 제삿날로 삼고 있다』면서 『인간의 도리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것부터 해결해 나가는 게 진정한 햇볕정책』이라고 말했다.
『정부 상대 소송 내겠다』
부부가 납북된 경우도 있었다.
李憲(이헌·본명 이상규·1892년생), 黃基成(황기성·1902년생) 부부가 그들이다. 李憲씨는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한민당 결성에 참여해 정치활동을 하다가 납북됐고, 부인 黃씨는 당시 「婦人(부인)」 잡지의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대한부인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가 납치됐다. 당시 납북됐던 玄相允(현상윤) 고려대 총장이 자신의 명함에 대학(고려대)을 중도에 그만두고 전주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제자 李哲承(이철승)씨를 위한 응원연설을 부탁하는 글을 적어 보냈을 정도로 黃씨의 지명도는 높았던 것 같다. 두 사람은 피해자 名簿에 납치로 기록돼 있다.
玄相允 총장이 黃씨에게 보낸 명함 메모를 갖고 직접 찾아온 李憲씨의 손자 李武憲(이무헌·60)씨는 『부친(李釋文·이석문·1995년 사망)의 유언이 할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지정토록 하는 것이었다』면서 『이번에 납북과 월북을 가려 주는 문서 덕분에 독립유공자 지정이 한결 수월해질 것 같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서울지방 검찰청 부장 검사로 있다가 피랍된 李柱臣(이주신·1910년생)씨의 3남 이경찬(63)씨는 『정부에 대해 6·25 납북자들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물을 계획이었다』면서 『정부가 작성한 납북자 명단이 그 증거이므로 자료가 완비되는 대로 그동안 책임을 방기한 정부에 대한 책임을 묻는 법적 소송을 하겠다』고 밝혔다.
납북자 名簿가 공개된 후 「6·25 전쟁 납북자 가족협의회」(회장·李美一)는 1월31일 주무부서인 통일부에 6·25 전쟁 납북자들에 대한 정부의 본격적인 조사와 이들 가족들에 대한 정신적·물질적 보상을 요구했다. 「6·25 전쟁 납북자 가족협의회」는 이와 함께 6·25 납북자 문제를 다룰 특별전담기구 구성과 특별법 제정 등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2월2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통일부의 관계자는 『6·25 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공개질의서는 검토중』이라는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