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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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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당 조정육의 그림과 인생 스크랩 <현종, 며느리 양귀비를 아내로 맞아들이다.>
무진당 추천 0 조회 1,198 10.12.25 17:31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조정육의 옛 그림 읽기-그림, 스토리에 빠지다 ③

 

 

<현종, 며느리 양귀비를 아내로 맞아들이다.>

                                        -양귀비-

 

그녀가 죽었다. 목매달아 죽었다. 남편이자 시아버지인 현종이 보는 앞에서 양귀비 혼자 쓸쓸하게 죽었다. 한 때 현종은 그녀가 잠자는 모습을 보고 해당화가 봄잠을 잔 것이라 말했다. 그런 현종이 해당화가 꺾여 짓이겨지는 것을 보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녀의 죽음을 묵인했다. 그의 나이 71세, 양귀비의 나이는 38세였다. 22살에 현종을 모시기 시작하여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16년 동안 부부로 살았던 시간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참혹하게 무너졌다. 그녀의 꽃비녀는 땅에 떨어진 채 거두는 사람이 없었고 보배로운 장신구도 버려졌다. 그녀도 버려졌다. 황제와 일행은 그녀의 시신을 보라색 수레 깔개에 싸서 길가에 던지고 길을 떠났다. 살아보겠다고 황급히 떠났다.

 

 

#며느리를 아내로 맞아들이다#

양귀비(楊貴妃)의 본명은 양옥환(楊玉環:719-756)이다. 현종(玄宗:712-756 재위)은 죽은 무혜비(武惠妃)를 닮은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였다.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18번째 아들 수왕(壽王)의 아내였다. 수왕은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낳은 왕자였다. 하필 일이 꼬이려니 며느리와 시아버지로 만났다. 장애물이 있었지만 현종은 터질 듯한 젊음이 내뿜는 양옥환의 향기를 맡고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무혜비를 잃고 오랫동안 슬픔에 빠져 있던 현종에게 양옥환의 모습은 찬란했다. 언제 무혜비를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새로운 사랑에 탐닉했다. 36년이란 나이 차이는 문제되지 않았다. 기나긴 세월을 오로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살아온 것만 같았다. 그녀만 취할 수 있다면 어떤 오명을 뒤집어써도 상관없었다. 저렇게 황홀한 꽃을 꺾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꽃을 꺾는 것도 순서가 있는 법. 아들의 마음도 다스려야 하고 사람들 눈도 피해야 했다. 그는 충실한 수족인 환관 고력사(高力士)를 불러 양옥환을 여도사(女道士)가 되도록 명했다. 여도사는 노자를 숭배하는 도교의 수도자를 의미한다.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韋氏)성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해주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양옥환에게는 태진(太眞)이란 도호를 하사한 후 그녀가 있는 도교 사원 ‘태진궁(太眞宮)’을 자주 찾았다. 시간이 흘러 740년에 양옥환은 태진궁에서 황궁으로 들어갔다. 양옥환의 나이는 22세였고 현종은 58세였다.

 

 

작자미상, <귀비가 말에 오르다(귀비상마도)>, 둥근 부채, 비단에 색, 남송, 25×26.3cm, 미국 보스턴미술관: 여러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양귀비가 황궁으로 떠나기 위해 말에 오르고 있다. 그런 양귀비를 현종이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둥근 부채에 그려진 <귀비상마도(貴妃上馬圖)>는 이제 막 수도 생활을 끝낸 양옥환이 황궁으로 가기 위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여러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말에 오르고 있는 양옥환을 곁에서 현종이 사랑스런 눈으로 지켜 보고 있다. 양옥환의 자태는 부드러우면서도 유연하다. 당나라의 여인상이 대부분 풍만하고 토실토실한 것에 비해 <귀비상마도>의 양옥환은 약간 여위고 수척하다. 송대(宋代) 미인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궁전 건물은 자를 대고 그린 듯 정밀하고 꼼꼼하게 그렸는데 이런 계화(界畵) 역시 송대에 유행했다. 특정 장면을 클로즈업해서 부각시키는 기법과 넓은 공간감의 표현은 남송(南宋) 화원(畵院)들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특징이다.

 

#양귀비의 시대#

양옥환은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숙부 손에 자랐다. 몸매는 풍만하고 요염했으며 가무에 능하고 음악에도 정통했다. 특히 비파는 그녀의 장기였다. 그녀의 미모는 숱한 시인들이 찬탄해 마지 않을 정도로 출중하고 빼어났다. 오죽했으면 시아버지가 온갖 비난을 무릎 쓰고 며느리를 아내로 맞이했을까. 그녀가 궁궐에 오자 현종은 오로지 그녀한테 빠져 나라 일을 등한시하게 되었다. 현종은 양옥환의 꽃다운 얼굴에 반해 금실 끝에 방울을 단 금보요를 만들어주었다. ‘연꽃 방장이 드리운 포근한 봄밤을 함께 지샜으며’‘봄밤이 짧아 안타깝게 아침 해가 떠오르면 조례를 빠지게 되었다.’(백거이,「장한가」중에서) 궁중에 아리따운 궁녀가 3천 명이 있었으나 3천명에게 베풀 사랑을 한 사람에게 쏟았다.

구영, <인물고사도>, 책, 명, 41.1×33.8cm, 북경 고궁박물원:황금으로 꾸민 궁전에서 양귀비가 곱게 화장을 하고 있다. 구영은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묘사로 당나라 궁실의 현장을 생생하게 복원했다.

 

구영이 그린 <인물고사도(人物故事圖)>를 보면 ‘황금으로 꾸민 궁전에서 곱게 화장하는’(백거이,「장한가」) 양옥환의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녀는 이렇게 꽃단장하고 구슬로 만든 누각에 나아가 술상을 차리고 기다리는 현종 앞에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에 맞춰 춤을 추었으리라. ‘느린 가락 느슨한 춤이 빈틈없이 음악에 어울리니 임금은 넋 잃은 채 진종일 물릴 줄 모르고 쳐다’보았다. 양귀비의 자태를 본 이태백(李太白:701-762)은 그녀를 ‘이슬 머금은 붉고 탐스러운 한 떨기 꽃’으로 비유했다.(이태백은 양귀비를 찬탄하는 시를 지어 높은 벼슬을 기대했지만 환관 고력사의 음모로 와해된다. <이태백>편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745년에 현종은 27살 양옥환에게 귀비(貴妃)라는 첩지를 내렸다. 귀비는 내명부의 1인자로 황후가 없는 상황에서 황후나 다름없었다.

양귀비에 대한 총애는 양귀비 집안 사람은 물론이고 양귀비와 연줄이 닿은 사돈의 팔촌한테까지 무더기로 쏟아졌다. 양귀비의 생부에게는 사후에 제국공이라는 벼슬이 추증되었고, 모친은 양국부인에 봉해졌다. 숙부와 6촌 오빠도 높은 벼슬이 내려졌고, 사촌 오빠인 양국충에게는 40여개의 관직이 내려졌다. 특히 양국충은 동생 덕분에 쥐게 된 권력을 지나치게 휘두르다 안녹산의 난을 자초한 사람이다. 양귀비 집 앞에는 부와 현에서 청탁을 위해 올라오는 관리들로 북적거렸고 그들의 곳간은 금은보화로 가득 찼다. 양귀비의 출현은 ‘마침내 천하 모든 부모들이 아들 낳기를 중히 여기지 않고 딸 얻기를 중하게 여기도록 했다’.(백거이,「장한가」)

양귀비에게는 언니가 세 명 있었는데 그녀들 역시 양귀비 못지 않게 재주와 외모가 출중하였다. 현종은 그녀의 큰언니를 한국부인(韓國夫人)에, 셋째언니는 괵국부인(?國夫人)에, 여덟째 언니는 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했다. 국부인(國夫人)은 한 나라의 왕의 부인에 버금가는 직위였다. 그녀들의 권세는 천하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드높았다.

 

장훤, <괵국부인유춘도>(부분), 송 휘종 모본, 당8세기, 비단에 색, 52×148cm, 요녕성 박물관:양귀비의 자매인 괵국부인의 화려한 봄나들이를 그린 장면이다. 그녀는 현종에게 양귀비만큼 사랑받았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장훤(張萱:714-742활동)이 그린 <괵국부인유춘도(?國夫人游春圖)>는 양귀비의 셋째 언니 괵국부인이 봄나들이를 가는 장면을 묘사했다. 비록 송나라 휘종황제의 모사본이긴 하지만 화려하고 사치스런 당대의 마차의장행렬을 비교적 정확하게 전해준다. 그림 속에서 괵국부인은 ‘미인이 손수 옥화총의 고삐 잡으니/날래기는 놀란 제비가 나는 용을 탄 듯하고’ 현종이 있는 경광궁에 들어가려 ‘금채찍으로 길을 다투니’ ‘보물 비녀가 떨어졌다’는 싯귀절이 생생하게 느껴진다.(소식(蘇軾),「괵국부인야유도」중에서)

그런데 당시에는 여러 친족이 황족과 통혼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현종은 양귀비뿐 아니라 괵국부인하고도 공공연히 정을 통했다. 어느 날 이 사실을 안 양귀비가 질투심에 불타서 괵국부인을 입궐시키라는 현종의 명을 거역하게 되었다. 결국 양귀비는 사춘오빠인 양국충의 집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양씨 집안의 운명이 오직 양귀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안 양국충은 환관 고력사와 의논하여 한가지 꾀를 내었다. 그것은 현종과 양귀비를 화청지(華淸池)로 보내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화청지는 장안 동쪽에 있는 온천 별궁으로 그곳에 양귀비의 욕실 연화탕이 있었다. 현종은 매년 10월이 되면 양귀비와 함께 화청궁에 행차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양국충과 양귀비의 세 자매들이 동행했다. 그들의 행차가 얼마나 화려했던지 가는 길에는 시종들이 착용했던 금비녀, 나무 덧신, 진귀한 구슬 등의 금은보화가 길에 가득 떨어졌고 짙은 향기가 사방에 진동했다. 아무튼 두 사람의 계략은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양귀비가 목욕하고 나온 모습을 본 현종은 양귀비에 대한 새로운 사랑에 흠뻑 젖었다.    

 

강도, <화청출욕도>, 청, 비단에 색, 120.2×66.1cm, 천진시예술박물관: 화청지에서 목욕하고 나온 양귀비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백거이의 「장한가」를 소재로 그렸다. 엷은 비단천 사이로 양귀비의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청(淸)의 옹정(擁正:1723-1735) 건륭(乾隆:1736-1795) 년간에 활동한 강도(康濤)는 <화청출욕도(華淸出浴圖)>에서 화청지에서 목욕하고 나온 양귀비의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의 제목은 백거이의「장한가」의 한 귀절, ‘싸늘한 봄 황제의 은총이 내려 화청지에서 목욕할 새/ 온천물 부드럽게 기름진 살결을 씻어 내리네 //나른하여 예쁜 그녀를 시녀들 부축하여 일으키자/ 비로소 황제의 은총 새롭게 받게 되었네.’에서 따왔다.

그림은 비록 청대(淸代)에 그려졌지만 당대(唐代)의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양귀비의 몸매를 풍만하게 그렸다. 이제 막 목욕탕에서 나온 양귀비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붉은 비단옷을 입고 있다. 투명하게 비치는 겉옷 속으로 속옷을 입고 전족을 한 그녀의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목이 마른 그녀에게 시녀가 바치는 것은 여지(?枝)일까? 양귀비는 특히 여지라는 열매를 좋아했다. 중국 남쪽 지방에서 나는 여지를 운반하기 위해 현종은 곳곳에 준마를 배치해서 양귀비가 항상 싱싱한 여지를 먹게 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구덩이에 쓰러지고 골짜기에 뒤집어진 채 서로 겹쳐 베고 누워 있어’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다.(소식,「여지를 한탄하노라」)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현종과 함께 촉나라로 피난 가다 죽음을 당한 날도 양귀비에게 바칠 여지가 현장에 도착했다. 

 

#누구의 잘못인가#

천하의 모든 땅이 양귀비 일가에게 바쳐졌다. 현종은 국정을 재상이 된 양국충과 새로 부상한 안녹산에게 맡긴 채 현실세계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현실궁중에 아악원(雅樂院)을 설치해 음악을 즐겼고, 시인과 예술가들을 좋아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특히 그는 도교에 심취했는데 임인발(任仁發:1255-1328)이 그린 <장과견명황도(張果見明皇圖)>를 보면 그가 도사를 황궁에 끌어들여 도술을 감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인발, <장과견명황도>(부분), 두루마리,원, 41.5×107.3cm, 북경 고궁박물원:장과는 흰 종이 나귀를 거꾸로 타고 하루에도 수백 리를 갈 수 있었다. 쉴 때에는 나귀를 곱게 접어 종이처럼 얇은 상자 속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하면 물을 뿌려 나귀를 일으켜 세워 타고 갔다고 한다. 오른쪽에 앉은 늙은 도사가 도술을 부리자 어린 소년이 나귀를 풀어준다. 노새가 황제를 향해 달려가자 현종이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고 옆에 선 대신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고 있다. 

 

화청궁에서는 ‘붉은 낙타의 봉우리를 푸른 솥에서 삶아내고/ 수정 쟁반으로는 흰 생선을 담아냈다’.(두보,「고운 여인들을 노래함」) 황제가 화청궁에서 환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이 상황을 두보(杜甫:712-770)는 이렇게 탄식했다. ‘귀족들 집안에는 술과 고기 썩는데/ 길가에는 얼어 죽은 시체가 뒹구는구나/ 지척에서 부귀와 가난이 이처럼 다르니/ 슬프도다 더 이상 말할 수가 없구나’(두보,「서울에서 봉선현으로 가며 느낀 감회 오백자」). 이 시는 화청궁 앞을 지나던 두보가 아들이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었다. 자식 잃은 아비의 비감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시다.

 

이소도, <명황행촉도>(송 모본), 축, 비단에 색,55.9×81cm, 북경 고궁박물원

 

그런 어느 날 안녹산(安祿山:705?~757)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양귀비와 가까이하며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안녹산이 궁중 내에서 자신을 후원했던 재상 이임보가 죽고 양국충과의 대결에서 밀리게 되자 무력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그는 군사를 일으킨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성(省)들을 거침없이 무너뜨렸고 756년 여름에는 장안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위험에 빠진 현종은 양국충 가문의 세력 기반인 쓰촨(四川)으로 피난을 떠났다. 당나라 때 활동한 이소도(李昭道:약 675-741)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명황행촉도(明皇幸蜀圖)>는 명황(明皇은 현종의 시호)이 촉나라로 피난 가는 모습을 그렸다. 험악한 산세를 보여주듯 거대한 산봉우리가 구름에 걸렸다. 구불구불한 길을 말을 탄 피난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이소도는 아버지 이사훈(李思訓:651-716)의 뒤를 이은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의 대가답게 산과 바위를 불투명한 채색으로 장식했다. 그런데 장식적인 경향이 두드러지다 보니 피난민을 그린 것인 지 아니면 유람하는 사람을 그린 것인 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현실감이 떨어진다. 바게트빵처럼 부풀어 오른 산봉우리와 피난민들이 입고 있는 현란한 색채가 어우러져 그림은 더욱 장식적이고 화려하다.

이렇게 떠난 피난 행렬은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그들이 마외(馬嵬)라는 곳에 도착할 때쯤이었다. 현종을 수행하던 군대가 양국충을 살해했다. 한국부인과 진국부인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러고도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양귀비에게 있다고 생각한 그들은 현종에게 양귀비를 요구했다. 양귀비를 내주지 않으면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 현종은 쉽게 그녀를 포기했다. 그리고 피난길을 떠났다. 양귀비는 결국 죽임을 당한다. 안녹산의 난은 현종의 아들 숙종에 의해 진압되었다. 난을 진압한 숙종은 바로 황위에 등극했고 현종은 은퇴하여 762년에 죽었다. 양귀비를 보내고 겨우 6년 더 살았다. 덤으로 받은 6년 동안 현종은 그저 그런 날들을 무의미하게 살다 죽었다.

 

장훤, <명황합락도>, 당, 화첩, 비단에 색, 29.5×81cm, 50cm, 대북 고궁박물원

 

장훤이 그린 <명황합락도(明皇合樂圖)>는 현종이 침상에 누워 퉁소를 불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양귀비를 그렇게 보내놓고 그도 힘들었을 것이다. 황위도 양위하고 사랑도 버린 후 현종은 ‘잠 못들고 뒤척거리며 양귀비를 그리워했다’고 한다.(백거이,「장한가」) 백거이를 비롯한 모든 시인들이 양귀비를 욕하고 현종을 동정했다. 정치도 잘하고 현명했던 현종이 어쩌다가 양귀비의 미색에 빠져 정신 못차리고 인생을 망치게 되었는 지 모르겠다는 것이 시인들이 양귀비를 평가하는 일관된 논리다. 그 과정에서 죄 없는 현종은 동정표를 받고 팜므 파탈적인 매력으로 황제를 홀린 양귀비는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전락한다. 전형적인 마녀사냥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라가 혼란에 빠진 것이 다만 양귀비의 잘못이었을까. 아들과 잘 살고 있는 며느리를 꼬드겨 아내로 삼은 사람은 현종이었다. 자신이 총애하는 여자가 사랑스러워 외척에게 막대한 권력을 준 사람도 현종이었다. 그런 사람이 일은 자신이 저질러놓고 막상 문제가 터지자 혼자 살겠다고 아내를 죽인 것도 현종이었다. 그의 행동은 황제답지 못했고 비겁했다. 치사하고 비열하게 사랑을 버리고 목숨을 댓가로 받았다. 욕을 먹어야 될 사람은 양귀비가 아니라 현종이다. 양귀비의 죄가 있다면 다만 아름다웠다는 것 밖에 없다. 현종을 사랑하고 그가 준 사랑을 받아들였다는 것 밖에 없다. 그것이 결정이고 허물이며 죄였다.

김미윤 시인의 <사랑과 미움>이란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랑은 밤에/ 이불만 덮어 주는 게 아니다/ 과거도 덮어주고 상처도 덮어준다.’ 그런데 현종은 상처를 덮어주기는 커녕 죽음을 덧씌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허물이 있다면 그것은 곧 나의 허물이 아닌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양귀비가 죽었을 때 현종도 함께 죽었어야 한다. 그랬더라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쿨(cool)한 남자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지금 그는 겨우 몇 년 더 살자고 아내를 버리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한 초라한 늙은이로 기억될 뿐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다시 태어난다면 현종은 시린 사랑이 무엇인 지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현종의 몽매한 사랑은 어쩌면 우리의 오래된 미래일 지도 모른다. 황제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일깨워주는 오래된 반면교사. 그래서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 한 양귀비의 전설은 계속될 것이다.(조정육)

 

 

 

 

*참고문헌

-리처드 반하트,『중국 회화사 삼천년』,학고재, 1999년

-빙심, 동내빈 외,『그림으로 읽는 중국문학 오천년』, 예담, 2008년

-샹관핑,『황제를 지배한 여인들 后妃』,달과소, 2007년

-송철규,『송선생의 중국문학교실-첫째권』,소나무, 2008년

-이원섭,『두보시선』, 현암사, 2006년

-이원섭,『이백시선』, 현암사, 2003년

-장기근,『신역 백낙천』, 명문당, 2002년

-황견 엮음,『고문진보 전집』, 을유문화사, 2010년

-황위평,『시는 붉고 그림은 푸르네1』,학고재, 2004년

-『故宮博物院 4-明の 繪?』, 日本放送出版協會, 1998년

-『中國繪畵全集』1-28. 文物出版社 , 1997년

-『晋唐古?』, 上海??出版社, 2003년

-허영환 외,『동양의 명화 3-중국1』, 삼성출판사, 1989년

 

Yuhki Kuramoto - ROMANCE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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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2.25 23:04

    첫댓글 봉건시대의 여성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수 없었기에 양귀비 역시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한계상황 속에 짧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네요! 현종과 양귀비에 관한 글을 읽으며
    <왕의 곤룡포엔 수많은 업이 생겨나고, 스님의 가사장삼엔 수많은 업이 소멸된다>는 글귀가 떠오릅니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양귀비의 얼굴은 곱고 순해보이는데...무상한 권력의 희생양으로 시아버지의 아내가
    되는 기구한 삶을... 흔히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양귀비에 관한 통념들이 무진당님의글을 읽으면 바뀔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 작성자 10.12.26 08:42

    '왕의 곤룡포엔 수많은 업이 생겨나고, 스님의 가사장삼엔 수많은 없이 소멸된다'
    아, 좋은 말이네요.
    저는 이 책에서 역사를 장식한 20명의 인물들을 조명해볼 생각인데
    처음 시작한 자세는
    이 분들을 '천도시킨다'는 생각으로 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행여 우리가 관념때문에 잘못평가했다면 제대로 평가하고
    우리가 빚진 것이 있다면 감사를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년동안 치러지는 긴 천도제를 잘 진행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세요~!

  • 10.12.26 14:03

    선생님 안목을 넓혀주셔 감사합니다.()

  • 작성자 10.12.26 20:33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 10.12.26 15:20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양귀비였나 봅니다
    비련의 여주인공과 현종의 무능함에 ㅎㅎ
    역사 속에는 저런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즘도 저런 남자 있을까요

  • 작성자 10.12.26 20:34

    요즘은 여자들이 워낙 똑똑해서 그런 남자가 있으면 금새 알아볼 거예요.
    비겁한 현종.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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