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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47회 : 고려광종, 제국의 아침을 열다 (2002.2.23.)
방송일: 2002223 조회수 : 15816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구성안}}{{ 고려 광종, 제국의아침을 열다}}
▶VCR원고 ▶ 방송예정일: 2001년 2월 23일 / 담당PD: 김형운 / 작가: 김경민
프롤로그
-백두산 줌아웃 14 (흘리다가-)
해발 2천 744미터, 한반도를 하나로 잇는 백두대간의 정점인 백두산-
-사람들 올라오는 풀샷 4 지난 1월,
-발 9 체감 온도 영하 40도를 밑도는 날씨에 백두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해 강렬히 비치고 올라가는 8 (흘리고-)
-최재성, 김상중 얼굴보이고 10 KBS 새 역사드라마 <제국의 아침>의 배우들과 스텝들-
-백두산 천지 팬 18 (흘리다가)
<제국의 아침> 제작진의 최종 목적지는 백두산 천지였다.
-큐사인주고 배우로 팬하는 12 고려 4대왕 광종의 일대기를 그리는 드라마 <제국의 아침>-
그 첫 촬영이 백두산 천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백두산에서 주고받는 대사 왕요: 우리 고려가 뻗어가야 할 곳은 바다가 있는 남쪽이 아니라 끝없이 펼쳐져
있는 저 대륙, 고구려의 옛 고토 중원이야
왕소: 강력한 제국의 아침을 열어라, 제국의 아침을...
아버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옵니다.
강력한 제국의 아침을 말이옵니다
-해뜨는 천지에서 "고려 광종, 제국의 아침을 열다."
{{}}
ST.1
# 천지 앞에서 MC
지난 1월 북한 백두산 천지에서는 역사적인 촬영이 이뤄졌습니다.
세간의 많은 관심을 끌었던 KBS 새역사드라마 <제국의 아침> 촬영이 그것이었죠.
남한의 배우들과 스텝들이 북한에 직접 가서 그것도 백두산 천지에서 드라마를 촬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드라마 <제국의 아침>의 첫방송이 드디어 다음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 일년 6개월간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이 내일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3월부터는 <제국의 아침>이 새롭게 선보이게 되는 것이죠.
오늘은 KBS가 준비한 대하드라마 <제국의 아침>을 통해서 고려 광종 시대의 역사와 드라마의 제목인
<제국의 아침>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의미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먼저 <제국의 아침> 제작현장으로 가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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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제국의 아침, 어떤 드라마인가?
-말달려 오고 18 (보다가-)
지난 3일, 드라마 <제국의 아침>의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모니터하는 연출 "너무 떨어져.."
-말타고 다시 달리다가 떨어지고 11 (보고-)
-사람들 달려오고 김상중 보이고 5 (보고-)
-다친 손에서 김상중으로 줌아웃 7 배우의 부상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촬영은 숨가쁘게 재개됐다.
-긴장한 표정의 김상중과 최재성 6 얼마 남지 않은 첫방송-배우들도 다소 긴장한 모습이었다.
-모니터로 연기 보이고 컷소리 8 (보고-)
-달려가는 두사람 뒷모습 4 드라마는 태조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함께 뛰는 사이드 3 태조의 임종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두 아들-
-정종 얼굴 3 3대왕 정종이 되는 왕요와
-광종 얼굴 3 4대왕 광종이 되는 왕소다.
-뛰어 들어가는 뒷모습 풀샷 4 (흘리고-)
- 김상중 인터뷰 =이번 제국의 아침에서 제가 맡은 광종은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웠던 노비안검법,
과거제를 처음 시행한 그런 왕으로만 알고 있다. 이번 제국의 아침을 통해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그런 모습 뿐만이 아니고 이면에 가려진 것들을 많이 조명을 할거다.
-야외세트장 부감 팬 7 국내 최대 규모인 2만여평의 문경 오픈 세트-
-세트장 전체 풀샷 10 <제국의 아침>은 드라마 <태조왕건>의 배경무대를 새롭게 제작해서 사용한다.
-대도구 끌고가는 엑스트라들 5 첫회 야외씬에 동원된 엑스트라는 200여명,
-말타고 어슬렁거리며 준비 5 동원된 말만도 백여마리나 된다.
-뭔가 지시하는 사람 "... 양옆으로 빠지라고 그래!.."
-포그 하얗게 뿌리는 5 (보고-)
-환풍기 돌고 촬영시작되고 19 (보다가 말달려 오면)
편당 1억원이 넘는 사상 최대의 제작비와 최대 인력을 동원해 만들어지는 <제국의 아침>-
-항공 부감 샷 17 드라마 <태조 왕건>에 이어 고려의 역사가 새롭게 펼쳐질 것이다.
-문경 풀샷 팬 10 태조 왕건이 사망한 직후, 고려는 최대 혼란기를 맞게 된다.
-고사지내는 제작진 9 한반도의 영토는 통일됐지만 국가의 체제나 제도는 아직 정비되지 않았을 때-
-배우들 모습 스케치 10 태조 왕건이 키운 신료들은 무한정 세력을 팽창하고 있었고 민심은 흩어지고 있었다.
-주연 두사람 절하는 10 그러한 시기에 고려 4대왕이 되는 광종은 강력한 추진력으로 중앙 집권적인 왕권을
확립해 나간다.
-안영동주간 인터뷰 =태조 왕건이 영토의 삼국통일이라고 한다면 제국의 아침은 정신적인 삼국통일,
그러니까 호족이라든지 개국공신들이 갈갈이 찢어져서 개인의 이권 챙기기에 급급한 시기에 정신적인
삼국통일을 엮어서 민족 전체를 하나의 축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게 혜종이나 정종 시기에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비로소 광종이라는 왕이 등극함으로해서 실질적인 삼국통일을
이룩했다는데 큰 의의를 두고 저희는 제국의 아침을 후삼국의 통일로 보고 있습니다.
-비행기 부감 풍경 7 광종의 정신적인 삼국통일 과정을 그리게 될 <제국의 아침>-
-비행기 안 최재성과 김상중 6 그 통일의 염원을 담아 드라마 제작진은 역사적인 촬영을 시도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12 고려의 주 무대였던 북한에서 <제국의 아침> 드라마 장면을 촬영하기로 한 것이다.
-버스 TR 6 (흘리고-)
-을밀대에서 팬 의상입은 배우 16 고구려 평양성의 일부였던 을밀대-
배우들이 고려시대 의상을 갖추고 <제국의 아침> 타이틀 제작을 위한 촬영을 가졌다.
-촬영하는 모습에서 배우들 6 북한에서 이뤄진 국내 최초의 드라마-
-김상중과 전혜진 4 남한 배우들과 제작진이 직접 북한에 가서
-최재성 4 우리의 카메라로 촬영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눈길트래킹 7 본격적인 드라마 촬영을 위해 제작진들이 찾은 곳은 백두산-
-백두산으로 줌인 8 (흘리고-)
-걸어올라오는 요와 소 왕소: 백두산이란 산 이름은 흰돌이 머리처럼 위에 얹혀져 보인다하여 그리 불려졌다
하옵니다...
왕요: 우리 삼한 백성들도 또한 단군 시조께서 탄강하신 성지로 오래 전부터 신성시 해왔다 들었네..
-올라가는 뒷모습 5 왕요, 왕소 두형제가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장면이 연출됐다.
-백두산 천지 팬 7 (흘리고-)
-뜨는 해 바라보는 두사람 7 백두산 천지 앞에서 이뤄진 두사람의 대화는 앞으로 전개될 고려의 미래를 암시
한다.
-드라마 대사 왕소: 강한 군주만이 강한 나라를 만들고 유지할 수 있사옵니다.
왕요: 그래, 강한 군주.. 강한 나라.. 참으로 좋은 말이다.
우리 형제가 해내자꾸나
왕소: 형제가 아니라 형님이시옵니다.
왕요: 어차피 황실의 다음을 우리가 책임져야 하네, 네가 할 일이 많을 것이야
왕소: 이를 말이옵니까? 지금 우리 형제는 백척간두에 서 있사옵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 형제의 목숨을 노리고
있사옵니다.
-백두산 팬하면 걸어 내려오는 10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고려 4대왕 광종이 즉위하기까지 펼쳐지는
치열한 왕위쟁탈전과
-걸어내려가는 뒷모습 10 그동안 역사 묻혀졌던 광종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전개될 것이다.
{{}}
ST. 2
# 기본 세트에서
그러니까 <제국의 아침>에서는
태조 왕건에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는 혜종, 정종, 광종대까지의 고려 역사가 펼쳐지게 되는 거군요.
특히 광종의 일대기가 주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광종, 고려 4대왕 광종이라,
과거제를 처음 실시한 왕이다-
는 정도를 기억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대부분은 광종이 어떤 왕이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으실 겁니다.
여길 한번 보시죠-
# 최승로 글 발생하고
고려초 문신이었던 최승로의 글입니다.
여기 광종에 대해 짐작해 볼만한 내용이 있는데요, "광종은 특이한 풍채와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
태조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고 돼있습니다.
광종의 기질과 풍모가 비범했음을 알려주는 글귑니다.
광종,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그의 출신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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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광종의 출신성분 분석
-마을 트래킹 7 충청북도 충주시의 한 마을
-마을에서 당간으로 팬 8 이 마을 어귀에 거대한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당간틸업 12 당간지주란 큰 사찰의 입구에 세우는 절의 상징물인 당간을 지탱시키던 석조물이다.
-당간에서 사역으로 팬 13 숭선마을에 남아있는 당간지주는 오래전 이곳에 큰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올라가면서 토기 줍는 "마을에서 중심사역으로 올라가면 많은 기와파편들이 발견"
-토기들 TS 9 수없이 많은 기와와 토기 파편들이 마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발굴당시 현장 풀샷에서 줌인 9 이 곳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진 것은 지난해 7월-
-사역에서 팬하면 사람들 11 조사결과 밝혀진 사찰의 규모는 만여평-
신라시대 최대 사찰이었던 8천평의 황룡사보다 규모가 더 컸다.
-기와 파편들 쌓아놓은 "조사과정에서 수습된 토기조각들... 신라시대나 조선시대와 구별되는 이런 어골무늬는
고려시대 유물.."
-충청대 안 TR 6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던 사찰-그 곳은 어떤 사찰이었을까?
-박물관 수장고로 들어가서 20 발굴지에서 나온 유물들은 현재 충청대학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유물들 꺼내오면 고려 초기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다양한 유물들- 그 가운데 사찰의 정체를 밝혀줄
-유물들로 줌인 유물이 있었다.
-명문기와 "숭선이라고 적혀있다..."
-숭선 글씨 발생 10 숭선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는 기와조각-그 사찰의 이름이 숭선이었음을 말해준다.
-고려사 기록 20 고려시대에 창건된 숭선사라는 사찰-
고려사에서 그 절에 대한 기록이 발견된다.
광종이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다는 절이 바로 바로 숭선사였다.
-박물관장 기와들고 "무척 화려하다는 증거로 이런 서까래 기와가 있고..
-관장 연봉장식 들고 설명 금색 도금한 형태의 연봉 무늬 장식의 못이 있어.."
-연봉무늬 장식 8 연꽃 봉오리 모양의 금빛 청동 장식-국내 최초로 발견된 고려시대 유물이다.
"기와 윗부분에 이와같이 못을 박는 구멍이 있는데..연봉무늬 장식이 이렇게 상면부를 장식했을 것이다.."
-사찰 모습 그래픽 49 연꽃 봉오리 모양의 화려한 장식이
지붕위에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던 숭선사-
(줌아웃되면-)
광종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당대 가장 크고 화려한 사찰을 어머니의 고향인 충주에 지었던 것이다.
-고려사 기록 16 숭선사의 주인공인 신명순성왕후 유씨는 충추 호족세력인 증태사 내령부 유긍달의
딸이었다. 그녀는 태조왕건과 결혼해 고려 3,4대왕이 되는 정종과 광종을 낳았다.
-드라마 세트장으로 들어가고 9 (흘리고-)
-왕건에서부터 부인들로 크레인 7 태조 왕건의 부인은 광종의 어머니인 신명순성왕후 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에서 부인들 달리 8 태조 왕건의 부인은 모두 스물아홉명-
-오씨와 유씨 6 대부분 지방 호족 세력의 딸들이다.
-출신 그래픽 15 후비들의 출신지역을 살펴보자.
신정왕태후를 포함한 8명의 후비가 황해도 출신이며, 경기도 출신은 4명, 충청도와 강원도는 각각 3명,
경상도 출신의 후비는 모두 6명이었다.
-김기덕 인터뷰 =태조 부인이 29명- 태조가 여자를 밝혔나 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호족 세력을 연합하려는 혼인정책...
-가계도 그래픽 (태조대) 24 29명의 부인에게 난 태조의 자식은 모두 25남 9녀-
(잠시 보다가-)
그런데 이상한 점은 스물다섯명의 아들 가운데 11명이나 되는 아들들이 태자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태자란 왕위 계승권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김기덕 인터뷰 =이 태자라면 왕위계승자로 1명, 그런데 저마다 태자라 칭하는 것은 왕권의 부인들이 내아들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욕심에서 태자라고 칭한 것...
-정윤 그래픽 8 그래서 왕건은 장자인 태자 무를 바른 계승자라는 뜻의 정윤으로 따로 책봉한다.
-달려들어오는 요소 "아바마마"
-정종과 광종 "왜 이제 왔는냐, 얼마나 기다렸는데.."
-혜종 스틸 8 정윤으로 책봉된 맏형은 이미 다음 왕위를 잇는 계승자로 지목돼 있었고,
-정종 스틸 8 수많은 형제들이 저마다 태자라 부르며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고 있었던 때-
-광종 스틸 7 광종이 왕위에 오르는 일은 실로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
ST.3
# 훈요십조 앞에서
이것은 태조 왕건이 유훈으로 남겼다는 훈요10좁니다.
후세 왕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열가지 항목들이 열거돼있는데요,
그 가운데 세 번째 항목을 잠시 보시죠.
"왕위는 맏아들 세습을 원칙으로 한다"
태조는 임종할 때까지 자신이 낳은 많은 아들들로 인해서 발생할 왕위세습 문제가 매우 염려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왕은 일찌감치 장자 태자 무로 정해놨었지만, 그 이후 일어날 왕위세습에 대해서는 자신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기에, 이렇게 원칙을 정해놔서 분쟁을 막고 싶었던 것이죠.
그러나 태조의 염려는 혜종의 죽음 이후 결국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고려 조정은 왕위 계승을 노린 정치적 암투에 휘말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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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3 왕위 계승을 노린 각 세력들의 삼파전
-삼엄한 궁궐밖 7 (흘리고-)
-부인들에서 혜종으로 크레인 7 태조의 대를 이어 고려 2대왕 혜종이 되는 장자 무-
"아바마마, 제발 기운을 차리옵소서"
-왕건 TS 7 태조 왕건은 임종을 앞두고 혜종을 위한
-혜종 TS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혜종 모 오씨 4 혜종의 어머니인 장화왕후의 외가는
-광종 모 유씨 3 다른 아들들의 외가에 비해 그 세력이
-오씨 2 너무나도 약했다.
-큐사인 흘리고
-박술희 들어오고 10 그래서 태조는 자신의 죽음 이후, 혜종의 뒤를 봐줄 비호세력을 선정한다.
-박술희 대사 "폐하 신 술희옵니다. 불러 계셨사옵니까?"
-박술희 스틸 18 박술희- 열여덟살때 궁예의 부하장수가 되었다가 왕건 휘하에 들어왔던 무장-
왕건과 함께 수많은 전투에 참여해 많은 공을 세웠으며 특히 혜종을 정윤으로 책봉할 것을 간청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혜종과 박술희 10 태조 왕건은 당시 막강한 무장세력이던 박술희를 혜종의 후견인으로 지목했다.
-박술희 TS 7 태조의 뜻으로 혜종의 후견인이 된 박술희-
-혜종 그래픽 13 결국 박술희는 태조의 아들 가운데 유독 지지기반이 약했던 장자 태자 무의 비호세력이 된다.
-궁궐밖 외경 6 그런데 혜종은 즉위하자마자 병석에 눕게 된다.
-조당의 촛불로 줌인 8 병약한 왕을 둔 고려조정에서는 보이지 않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왕규부터 신하들 팬 10 태조와 사돈을 맺은 많은 대신들이 저마다 자신의 외손자를 왕위에 올리려는 야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박수문과 왕규 대사 박수문: 특히나 왕공께서는 두분의 따님을 폐하의 비로 올리셨소이다.
그리고 또 한 따님을 황태자마마께 비로 올리셨구요. 양대에 걸쳐서 위 아래로 장인이 되시니 얼마나 걱정이
크시겠소이까?
왕규: 허허.. 거 꼭 하시는 말씀이 뭔가 가시가 있는 것 같소이다. 시중어른-
-왕규 스틸 잡히면 10 왕규- 두딸을 태조 왕건에게 바치고 또 한명의 딸을 혜종에게 바친 대표적인 외척
세력이었다.
-왕규 시선 돌리고 3 (흘리고-)
-옥좌 보이고 10 그도 자신의 외손자를 왕위에 올리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픽 광주원군 13 왕규가 심중에 두고 있던 인물은 태조 왕건의 아들이었던 광주원군-
왕규는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혜종 다음의 왕으로 밀고 있었다.
-촬영현장 연출에서 배우로 팬 6 (흘리다가 배우들 보이면-) 차기 왕위를 노리는 치열한 쟁탈전에는
-촬영현장 부감 4 왕실종친도 끼어 있었다.
-왕식렴 대사 왕식렴: 혜종은 얼마 못가.. 그럼 나랏일은 사실상 왕규가 다스리게 될 텐데..
박수문: 그러게 말입니다.
왕식렴: 대책을 세워야지.. 왕실을 저 가짜 왕씨 왕규에게 목숨을 내걸게 해선 안돼지.. 저 왕규가 ..
언제부터 왕씨인가.. 나라의 국정이 됐어..
-왕식렴 스틸 16 왕식렴- 고려 제2의 수도였던 서경인 평양의 총책임자며 태조 왕건의 사촌동생이다.
그는 외척세력들이 고려 조정을 뒤흔들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정종 요 광종 소 그래픽 13 외척에 휘둘리지 않을만큼 강한 인물-
왕식렴은 태조의 아들 왕요와 왕소를 재목감으로 생각하고 그들과 결탁했다.
-삼파전 그래픽 24 이렇듯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혜종을 보필하는 박술희와 자신의 외손자 광주원군을 옹립
하는 왕규, 그리고 왕요, 왕소 두형제를 미는 왕식렴이 팽팽한 삼파전을 벌이고 있었다.
-고려사 22 그런데 혜종2년, 삼파전의 양상을 바꿔놓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려던 왕규가 벽을 뚫고 혜종의 침전에 침입해 난을 일으킨 것이다.
-말달려오는 11 이 소식을 들은 왕식렴은 왕규를 체포하기 위해 서경의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
-말달려가는 풀샷 10 (흘리고-)
-성밖의 군사들 달려들어오고 16 개경에 도착한 왕식렴 부대는 순식간에 왕규 일당을 체포했다.
쟁쟁한 라이벌이었던 왕규를 합법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고려사 24 왕규의 최후에 대한 고려사 기록을 보자
왕식렴이 군대를 이끌고 왕규 일당을 처단했는데 그 수가 300여명이었다고 돼있다.
왕식렴은 왕규와 손을 잡고 광주원군을 지지하던 모든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해 버린다.
-삼파전에서 왕규제거 그래픽 14 왕위쟁탈전에서 왕규는 왕식렴에게 완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그 즈음 혜종이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번개조명 3 (흘리고-)
-환풍기에서 팬하면 박술희 14 (환풍기 돌고 팬해서 박술희 보이면)
그때 박술희는 어떤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을까?
-박술희ts 8 자신이 후원하던 혜종은 끝내 숨지고 말았지만 왕요, 왕소가 집권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군대 지켜보는 박술희 7 박술희는 일단의 무리들을 이끌고 반역을 도모하고 있었다.
-고려사 기록 25 그런데 고려사에 따르면 정종이 박술희의 그러한 뜻을 눈치채고 귀양을 보냈는데,
왕규가 정종의 왕명을 조작해 박술희를 죽였다고 돼있다. 왕규가 박술희를 죽인 것이다.
-삼파전 그래픽 14 박술희마저 제거되면서 결국 왕위 쟁탈 삼파전은 왕요, 왕소 형제를 지원하던 왕식렴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됐다.
-박술희와 왕규 부감 6 그런데 삼파전의 결과에는 미스터리한 부분이 남아있다.
-박술희 2 박술희의 죽음에 대해서다.
-왕규 6 이미 왕식렴에게 죽임을 당한 왕규가 어떻게 그를 죽였다는 걸까?
-심재석 인터뷰 =요와 소가 집권한 뒤에 통치의 부담이 되었던 박술희를 제거한 다음 왕규에게 뒤집어 씌운
것으로 생각-
-옥좌로 줌인 8 결국 고려 3, 4대왕이 되는 왕요과 왕소-그들의 즉위 뒤에는 피를부른 왕위쟁탈전이 있었다.
-고려사 20 고려사는 이 시기의 왕위쟁탈전에 대해 혜종, 정종, 광종 세왕이 왕위를 계승하는 동안
문무관리의 반이 살육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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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4
# 붉은 천이 흐르는 배경 앞에서 MC 타이트하게
광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습니다.
때로는 자신들의 외손자를 왕위에 올리려고 하다가, 또 때로는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왕소 형제, 즉 정종과
광종에 의해 숙청을 당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피의 숙청이 광종의 즉위로 끝난게 아니었습니다. 자, 여길 한번 보시죠.
# 가계도 태조부터 차례로 발생하면서 고려를 건국했던 태조 왕건에게는 2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장화왕후 오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2대왕 혜종입니다.
그리고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에게 난 자식이 3대왕 정종, 그리고 4대왕 광종이죠.
태조의 뜻과는 달리 결국 4대왕까지 모두 태조의 아들들이 왕위를 세습하는 결과가 발생하고 말았죠.
그런데 광종은 왕위에 오른 뒤 역모를 꾸미는 신하들뿐만 아니라 그 왕족들까지 과감하게 처단해 버립니다.
# 흥화군과 경춘원군 발생
광종은 형님인 고려2대왕 혜종의 아들을 제거합니다. 바로 이 흥화군입니다.
또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형 정종의 아들까지 숙청합니다. 그 사람이 이 경춘원군이죠.
이 두사람은 별다른 역모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광종은 왕권에 위협이 될 지도 모르는 이들을 제거해 버립니다.
# 효은태자 발생
광종은 심지어 형제까지 죽입니다.
광종의 수많은 형제 가운데 효은태자라고 있습니다.
효은태자는 동양원 부인 유씨가 낳은 자식으로 태조의 대표적인 무장세력이었던 유금필의 외손잡니다
이 효은태자가 광종에게 살해당합니다.
효은태자가 반역을 꾸밀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죠.
왕족의 숙청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경우 그 누구라도, 그것이 자신의 형제라 할지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광종의 강력한 엄포였습니다.
# MC로 줌인들어가며
광종은 혜종이나 정종과는 달리 강력한 군주의 모습으로 왕권을 위협하는 자들을 대처했습니다.
나에게 대항하는 자들은 단칼에 숙청하겠다-
호족이나 신하들이 감히 왕위를 노릴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군주가 되겠다-
이러한 광종의 의지는 26년이라는 재위기간동안 끊임없이 추진된 개혁정책들 속에서 나타납니다.
자, 그럼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강력한 군주가 되겠다는 광종의 이러한 의지가 어떻게 반영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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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4 <제국의 아침>제작현장에서 본 광종의 개혁바람
-드라마 제작센터 줌인 10 드라마 <제국의 아침>의 실내 촬영이 이뤄지는 KBS드라마 제작센터-
-세트짓고 있는 8 3백여평의 스튜디오에 <제국의 아침> 전용세트가 만들어지고 있다.
-공포 올리는 13 <제국의 아침> 전용세트는 일반적인 간이세트와 달리 스튜디오 안에 실제 집을 짓듯이
제작된다
(이하 현장음 듣고-)
-세트 디자이너 설명 "이런 기둥은 배흘림 기둥이라고 고려 양식.. 저건 공포.."
-배흘림 기둥 원목 10 기둥 하나도 고려초 유행했던 기둥양식을 살려 실제 원목으로 사실감 있게 제작했다.
-나무 결구법 20 우리 목조 건축의 독특한 방식인 결구법-
<제국의 아침> 세트장의 공포를 제작할 때는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의 기법이 그대로 도입됐다.
-마지막 결구하는 모습 7 (흘리고-)
-내전 달리 11 광종이 신하들과 열띤 회의를 벌이게 될 80여평의 편전 세트-
-세트장 틸업 14 역사적인 고증을 바탕으로 고려 궁궐의 모습과 가장 흡사하게 제작되었다.
광종의 강력한 왕권 확립의 과정을 보다 사실적으로 뒷받침해주게 될 것이다.
-커텐 수놓아져있는 10 소품의 색상과 질감 하나하나에도 강한 군주의 모습을 상징하기 위해 세심한 손길이
닿았다.
-수 TS 5 (흘리고-)
-옥좌 줌아웃 7 <제국의 아침>세트장은 강력한 군주의 모습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여배우들 풀샷 "들어왔어요, 큐!"
-여배우들 팬 9 그렇다면 <제국의 아침> 의상에서는 광종대의 모습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을까?
-장신구들 TS 12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성들의 장신구가 매우 화려해졌다는 것이다.
-자문회의실로 들어가고 8 의상팀은 광종대에 일어나는 패션의 변화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매주
자문회의를 가진다.
-스케치한 그림 보여지고 (현장음)
-자문단들의 지시 "감은 좀더 하늘하늘한 천으로... 지금은 너무 두꺼워.."
-관복 풀샷 3 의상팀이 가장 심열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TS 틸업 7 <태조왕건>대의 관복과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백관들의 관복이다.
-자문단 현장음 "자단비녹.."
-고려사 뒤지는 8 그럼 의상팀이 관복을 새롭게 제작하고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고려사 기록 12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광종 11년에
백관들의 관복 제정이 이뤄졌다고 돼있다. 백관들의 관복에 일대 혁신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픽 궁궐 들어가면 신하들 7 광종 11년 이전에는 백관들이 모두 제각각의 디자인과 색상의 관복을 입고
있었다.
-옷 색깔 정비되고 12 등급에 따라서가 아니라 세력과 부의 정도에 따라 마음대로 관복을 입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복을 광종은 등급별로 구분하여 입게한다.
-스틸, 색깔별 등급 40 10등급 이하 고위 관리들은 자삼 즉 자색 웃옷을 입게 했다.
그리고 그 아래 문신 10등급 이상과 무신 5등급 이상은 단삼 웃옷을 입었으며
8등급 이상의 문신들은 진홍색 웃옷인 비삼까지 입을 수 있었고, 10등급 이상의 문신과 무신 외 기타 관직은
녹색 웃옷을 착용하게 했다.
-김기덕 인터뷰 =관복을 제정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냐겠지만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옷색깔에 따라 등급을 달리했던 것인데...왕권강화 이후에 등급에 따라서 관복을 입고서 내앞에서 조아려라,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이후로 대대적인 숙청이 이뤄진다.
-고려사 줌인되고 넘어가면 10 광종은 관복을 제정한 그 해부터 본격적인 공포정치를 실시한다.
-기록 발생 20 광종11년 조정의 핵심인물이었던 대상준홍과 좌승왕동 등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참소가
들어오는데 광종은 이들을 숙청대상 제1호로 삼았다.
-말달려오고 8 그 사건 이후, 광종은 왕권에 도전하는 모든 이들을 처단하는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
-왕식렴 보이고 3 (흘리고-)
-박수경 부자 "서경총관어른 아니시옵니까 박수경이옵니다.
어서 오십시오 총관어른"
-스틸 16 태조 이래 최고의 권력을 행사했던 박수경 일가-
광종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박수경 삼부자는 당시 조정의 가장 중요한 요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숙청의 단칼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려사 기록 28 광종은 박수경의 세아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참소를 받고 세아들을 한꺼번에 제거한다.
일가의 몰락으로 박수경은 화병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만다.
아무리 고위관직이라도 왕권에 도전하는 이들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김기덕 인터뷰 "통일 이후에는 예쓰맨이 필요하다"
-고려사 기록 22 광종대의 문신이었던 최승로는 광종에 이어 경종이 즉위했을 때, 공신들과 무장들은 모두
죽고 옛신하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40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상했다.
-신하들 풀샷 16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옛신하들을 숙청하며 강력한 군주가 돼가는
-스틸 화면 두컷 광종의 모습이 기록을 바탕으로 보다 역사적인 진실에 가깝게 그려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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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5
# 카메라 궁궐 정문을 지나 신봉문으로 향하면 광종은 백관들의 공복을 제정하는 개혁외에도 중요한 두가지
프로젝트를 더 실시합니다.
# 노비안검법 글씨 발생
광종 7년,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발표합니다.
노비안검법이란 예전에 자신의 신분이 양인이었음을 신고하면 노비에서 구제해주는 그런 정책이었습니다.
전쟁중 포로가 되었다가 노비가 되었거나 강제로 노비로 전락한 양인들을 구제하는 제도로 민심을 수습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훈구세력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약화시키려는 목적이 더 컸습니다.
당시에는 노비들이 노동력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병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광종은 노비안검법으로 일단 훈구세력의 힘을 약화시킨 다음,
# 과거제 발생
광종 9년에 최초로 실시한 과거제를 통해 훈구세력의 정치력마저 무너뜨립니다.
이전에는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정계로 자동진출할 수 있었지만 이 때부터는 시험을 치뤄야지만 관직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공복제정 발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복을 제정해 군주와 신하의 위치를 분명하게 못박은 것이죠.
광종의 개혁정치들을 가만히 뜯어보면 통일직후 무한정으로 확장되고 있던 훈구세력들의 날개를 꺾어 자연스럽게
왕권을 강화하려는 데 모두 일관돼있습니다.
하지만 광종의 꿈은 강력한 군주가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광종에게는 고려라는 나라를 통해 반드시 이루고 싶은 또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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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제국의 아침을 열어라
-청주시 철당간 10 청주시 시내 중심거리, 그 곳에 큰 당간이 하나 놓여져 있다.
- 철당간 틸업 11 2개의 화강암지주와 20개의 철통으로 이뤄진 높이 13미터의 당간- 이렇게 철당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예는 거의 없다.
-앙각 6 당간을 이루는 세 번째 철통에는 명문이 남아있다.
-명문 팬하고 6 당간의 건립 유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용두사 12 그곳에 용두사라는 절이름이 뚜렷이 보인다.
이 곳에 있었던 사찰의 름이 용두사라는 것이다.
-준풍 16 그런데 용두사를 건립했던 임술년, 즉 광종13년을 준풍3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준풍- 그것은 당시 고려에서만 독자적으로 사용하던 연호다.
- 김기덕 인터뷰 =연호라는 건 당시의 연대 계산법.. 누구를 기점으로 연대를 계산하느냐인데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연대를 계산.. 근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중국에 대비해서 우리도 독자적인
황제국이다는 나름대로의 계산을 하겠다, 이런 의미이기 때문에 이것은 일종의 황제국의 선포나 다름이 없다.
- 광덕 기록 14 광종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은 즉위한 그 해부터였다.
광종 원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광덕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반포한다.
- 개경 개칭 황도 15 그리고 광종은 준풍이라는 새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광종 11년, 수도 개경의 지명을 황도,
황제가 사는 수도라는 뜻의 황도로 고친다.
-그래픽 궁궐 18 개경을 황도라 부른 것은 고려는 황제국이며 광종 자신은 그 고려제국의 황제라는 선포였다.
-궁궐 주위 궁성 황성 표시되고 6 그리고 황제가 머무는 궁궐을 둘러싼 성의 이름은 황성이라 불려졌다.
-하남시 TR 6 그럼 광종 이후 다른 왕들은 어땠을까?
-마애약사불 좌상 틸업 10 경기도 하남시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마애약사불 좌상-
그곳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불상으로 줌인 10 93센티미터의 불상 조각옆에 몇 줄의 명문이 남아있다.
-글씨 발생 14 태평 2년에 황제의 만세를 기원하기 위해
"태평 2년에 불상을 다시고쳐 불상을 고친다는 내용-
황제의 만세를 기원하다." 태평 2년은 경종 2년, 즉 광종의 아들인 경종을 황제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 기록 12 또 고려사에 따르면
"신하들이 만세를 세 번 불러 고려 15대 왕 의종도 황제라고 불렀으며
황제(의종)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신하들은 황제에게나 하는 만세삼창을 외쳤다고 한다.
-궁 발생 18 그럼 고려 왕실 체제는 어땠을까?
궁성과 황성 사이에는 많은 별궁들이 있었다. 이 별궁들은 왕의 종친들에게 내려준 궁이었다
-박종기 인터뷰 =역시 고려가 국왕이 거처하는 곳을 황성이라고 칭하고 왕자들 종친들이 거처하는 곳을
궁이라고 하는 것은 역시 고려가 하나의 황제국 체제를 지향한다는 중요한 증거, 작위제도도 마찬가지..."
-성들이 둘러지고 6 황제는 다섯 개의 문을 지난다는 원칙도 지켜지고 있었다
-고려궁궐 5개의 문 그래픽 10 고려의 왕은 정전이었던 회경전 문에서부터 황성까지 다섯 개의 문을 지나야
궁궐을 벗어날 수 있었다.
-경복궁 3개의 문 10 조선이 제후국 체제로 근정문, 홍예문, 광화문까지 세 개의 문을 지났던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북치는 모습 3 (흘리고-)
-불교의식 16 고려의 국가적인 불교행사였던 팔관회-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각 지역의 행사가 일제히 이뤄진 고려 최대의 축제였다.
-공물 바치는 외국인들 15 그런데 이 팔관회에는 외국인들도 참석했다.
각 나라의 대표들은 차례로 들어와 세번 무릎 꿇고 절하고, 세번 만세를 외치며 예물을 진상했다.
-심재석 인터뷰 =팔관회에 참석했던 많은 송나라 상인이라든가 아라비아 상인, 탐라, 여진족 이런 사람들이
팔관회에 참석해서 고려 왕을 배알할 때 마치 황제를 대하는 의식을 갖췄다. 따라서 이 팔관회는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갖췄다는 여러 가지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천지 팬 28 천년전 고려는 황제의 나라였다.
그 제국의 문을 활짝 열었던 이가 바로, 고려 제4대왕 광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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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SING
# 제국의 아침이 밝아오는 세트
고려 4대왕 광종은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 고려를 황제의 나라, 제국이라고 만천하에 선포한 왕이었습니다.
태조 왕건이 화합과 통합 정책으로 삼국의 영토를 통일한 왕이었다면 광종은 강력한 군주, 위엄있는 황제의
모습으로 어지럽던 고려를 정신적으로 통일한 왕입니다.
오늘 드라마 <제국의 아침>을 통해 본 고려 4대왕 광종은 아버지 태조왕건이 세운 최초의 통일국가 고려에
황제가 사는 나라, 제국의 아침을 활짝 열어준 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