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릉군(原陵君) 원균(元均) 묘
2015년에 다녀온 곳을 블로그에 올리지 않아 뒤늦게 사진만 찾아 올린다. 최근에 로드뷰로 확인해 보니 묘역은 그대로 이고 주변 환경만 다소 변해 있었다. 그래서 사진 위주로 올리니 이해 바란다.원균은 평가가 많이 엇갈리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왕이었던 선조로부터 권율, 이순신과 더불어 선무1등공신으로 책록된 인물인데도 충무공 이순신 전기에는 이순신을 모함한 인물로 나와 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게 새겨진 인물이기도 하다. 후손들이야 당연히 조상이신 원균장군의 치적과 업적을 높이 사서 묘역이나 사당에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묘역을 살펴보면 넓은 터에 앞으로는 저수지를 두고 멀리 조산은 멋진 금봉을 앞에두고 있어 후손들이 재물이 넉넉한 터로 인식된다. 원균장군 후손들은 조상님을 잘 두었다고 생각된다.
원릉군(原陵君) 원균(元均) 본관은 원주(原州). 고려 태조 때의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 병부령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이다. 자는 평중(平仲)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른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 데도 공을 세웠으며, 1592년(선조 25)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그 해 4월 13일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양국간의 전쟁 준비 격차로 말미암아 전쟁 발발 초부터 일방적인 패주의 연속이었다. 이에 거진(巨鎭)의 명관들은 다투어 도주하고, 백성들은 모두 산간으로 피난해 성읍이 모두 텅 빈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 제일의 요충인 경상좌수영의 군사도 수사 박홍(朴泓) 이하 모든 장병이 도주해 싸워보지도 못한 채 완전 궤멸되었으며, 우수영 관할의 장병들도 거의 흩어져 휘하에는 약간의 장병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조정과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흩어진 군사를 수습해 고군분투하였다. 몇 차례에 걸친 원병 요청 끝에 마침내 이순신의 원병이 도착하자 합세해 옥포(玉浦)·당포(唐浦) 등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그러나 포상 과정에서 이순신과의 공로 다툼이 심해 불화가 발생하였다. 급기야 1593년 8월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직에 임명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크게 반발해, 이듬해 12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다. 병사로 재직 중에도 여러 차례 수군 작전에 관한 계획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번 수사로 재기용할 것을 검토하던 중,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울로 잡혀가 국문을 받게 되자, 1597년 2월에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 수군을 통제하게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이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군을 이겨야 한다는 각오 아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중인 것도 모르고, 조정의 무리한 명령에 따라 삼도 수군을 이끌고 부산의 적을 공격하던 중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해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1604년 이순신·권율(權慄)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책록되어,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원릉군(原陵君)에 추봉되었다. 1605년 왕이 내린 치제문과 숙종 때의 대사헌 김간(金幹)이 찬한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統制使元均贈左贊成公行狀)」이 있다. 이순신이 민족의 영웅으로 각광을 받은 것과는 달리, 원균은 대표적인 비겁한 장수로 기록되어 오기도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원균장군묘(元均將軍墓)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마을 뒤편 야산 언덕 위에 위치한다. 1980년 6월 2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되었다. 원균(元均, 1540~1597)은 임진왜란 때의 장수로, 이순신(李舜臣)과 협력 또는 경쟁하면서 크고 작은 해전에서 승전을 거듭하다가 1597년(선조 30)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에서 전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권율(權慄), 이순신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다. 묘역 규모는 400㎡이다. 묘역은 도일동 마을 뒤쪽 야산에 조성되어 있다. 묘소 아래로 내리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봉분을 중심으로 상석(床石)이 있고 그 앞으로 장명등(長明燈)을 배치하였으며 좌우로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을 각각 한쌍씩 배치하였다. 석물들은 모두 근래에 후손들에 의해서 마련된 것들이다. 봉분의 오른쪽에는 원래 것으로 추정되는 묘비가 위치하고 있으며, 근래 조성한 새로운 묘비가 봉분 왼쪽 높다란 계단 아래 위치하고 있다. 묘소 아래로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이 역시 근래에 세운 것으로 왕이 내린 교서(敎書)와 장군의 행적을 국한문 혼용체로 기록하였다. 근래에 와서 새로 마련된 사당(祠堂)은 1991년에 향토유적지 제3호로 지정되었고 1992년에 중건하여 종중(宗中)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1604년(선조 37) 이순신·권율(權慄)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록된 사실이 ‘원릉군원균선무공신교지(原陵君元均宣武功臣敎旨)’에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보물 제1131호로 지정되어 문중에서 관리해오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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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지정 | 경기도 기념물 제57호 |
문화재명칭 | 원균장군묘(元均將軍墓) |
소재지 |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산82 |
관리자(연락처) | 원주원씨 |
▼ 재실인 모선재(慕先齋)
▼ 모선재(慕先齋)에서 바라본 원릉군(原陵君) 원균(元均) 장군 묘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묘(元均將軍墓) 홍살문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묘(元均將軍墓) 안내문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묘역 입구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묘 계단 아래에 세워진 치제문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묘비... 묘역에는 오랜된 묘비가 있고 새롭게 묘역 아래에 세웠다.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묘 측경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묘 전경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묘 석물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묘역에서 바라본 신도비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묘표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묘 측후경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묘 입수도두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묘 후경... 멀리 조산과 명당수를 모아놓은 저수지가 인상 깊다. 후손들의 넉넉한 재물을 보는듯 하다.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묘 후경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신도비 원경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신도비... 사진이 흐릿하게 찍혔다.
▼ 원릉군(原陵君) 원균장군(元均將軍) 애마총... 장군이 전사하자 유품을 물고 고향까지 왔다고 전한다.
원균장군(元均將軍) 묘 위쪽으로 장군의 기념관, 사당 등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답사하지 못했다. 추후 답사하게 되면 보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