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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의 희극이다. 극중 등장하는 주인공격 인물은 두 명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노숙자다. 그들은 앙상한 나무 밑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들은 둘이서 잡담도 나누고, 지나가던 두 사람 포조와 럭키를 만나기도 한다. 그들의 기다림은 분명한 목적을 가졌다. 그들은 고도라는 인물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고도는 오지 않는다. 1막의 결말부엔 고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고도는 오늘 올 수 없지만, 내일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한다.
1막에서 하루가 지나 2막이 되었다. 하루 만에 죽은 듯 앙상했던 나무는 잎을 달았다. 블라디미르는 에스트라공과 함께 다시 고도를 기다린다. 그들은 포조와 럭키를 다시 만난다. 그러나 포조와 럭키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포조는 눈이 멀어 있고, 럭키는 벙어리가 돼 있다. 2막의 결말부에 등장한 인물 역시 고도가 아니라 고도의 메시지를 전했던 소년이다. 소년 또한 그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블라디미르는 소년이 전할 말을 먼저 묻는다. ‘오늘 올 수 없지만 내일 반드시 올 것’이라는 얘기냐며 묻는다. 소년은 ‘네’라고 대답하고 떠난다. 두 노숙자는 여전히 고도를 기다린다.
작품을 읽고 난 뒤 처음 떠오른 의문은 ‘고도는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고도에 대한 묘사는 소년이 말한 내용이 전부다. 그는 소년의 형을 때리지만 소년에겐 잘 대해 준다. 그럼에도 불행하지 않느냔 블라디미르의 질문에 소년은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한다.
고도는 누군가에겐 불행을 선사한다. 그러는 한편 누군가에겐 좋은 대우를 한다. 하지만 대우의 대상에게 고도를 만나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는 대답 밖에 할 수 없다. 고도는 그런 아리송한 존재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두 사람은 지금까지 고도를 기다려왔고 앞으로도 기다릴 것이다. 고도는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고, 두 사람은 기다림을 반복할 거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앞으로도 영원히 고도를 기다릴 수 있을까? 아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언젠가 끝나게 된다. 그들에겐 분명한 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일 목이나 메자. 고도가 안 오면 말야.」
그들이 목을 맬 때 기다림은 끝난다. 고도는 죽음이다.
「그놈의 시간 얘기를 자꾸 꺼내서 사람을 괴롭히지 좀 말아요! 말끝마다 언제 언제하고 물어대다니! 당신, 정신 나간 사람 아니야? 그냥 어느 날이라고만 하면 됐지. 여느 날과 같은 어느 날 저놈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 거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테고.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요. 어느 같은 날 같은 순간에 말이오. 그만하면 된 것 아니냔 말이오?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가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
‘어느 날’은 불특정한 시간이다. 우리 모두 불특정한 때 태어나고, 불특정한 때 살며, 불특정한 때 죽는다. 언제 태어나고, 얼마나 살며, 언제 죽을지 예상은 해봐도 정확한 순간은 결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모두 언젠가 죽을 거라는 것. 이 세상도 어느 날 연기와 같이 소멸할 것이라는 사실. 결코 바꿀 수 없는 불변의 진리다. 우린 모두 그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살고,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아이는 살고, 다시 밤을 맞는다.
하루 만에 장님이 돼 버린 포조, 그는 ‘어느 날 깨어보니 캄캄하다’고 증언한다. 그가 어찌 자신의 운명을 예지했겠는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일이 일어난 이상 그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늘도 먼 눈으로 럭키와 함께 걷는 거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작중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함께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닌가? 고도를 기다리는 건 블라디미르뿐, 에스트라공도 종종 고도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포조와 럭키는 고도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갈 길을 간다. 이들이 모두 고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왜 그들은 그냥 지나치는가.
삶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산다. 그저께도 그랬고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일도 그럴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다들 당연히 내일도 우린 살아갈 것이라 생각한다. 불확실을 확실한 줄 착각한다. 우린 하루하루 허락된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 현실에 눈이 흐려진 채 살아간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겠는가. 어느 날 나는 갑자기 눈이 멀 수 있고 벙어리가 될 수 있다. 바로 내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린 거기에 대비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설마 내가 내일 장님이 된다 해도 난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린 그저 살아갈 뿐이다. 모르기에 사는 것이고, 모르기에 겪을 뿐이다. 비로소 알게 될 때에도 우린 살 수밖에 없다. 그것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픽노블 <왓치맨>의 캐릭터가 떠오른다. 이름은 홀리스 메이슨. 그는 히어로가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나이트 아울’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1세대 히어로 중 한 명이다. 그는 오래 전 정체를 밝히고 은퇴하여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고 있다. 작중 시점엔 노인으로, 자동차를 수리하거나, 그의 뒤를 이어 2대 나이트 아울로 활동했던 대니얼 드라이버그와 담소를 나누거나, 할로윈데이에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는 것이 일상이다. 그는 그렇게 작중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과 동떨어져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할로윈데이, 2대 나이트 아울 대니얼이 감옥에 갇힌 안티 히어로 로어셰크의 탈옥을 돕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소식을 들은 불량배들은 분노한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1대와 2대, 홀리스와 대니얼을 혼동한다. 그들은 홀리스의 집으로 몰려간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홀리스는 아이들에게 줄 사탕을 챙긴다. 그러나 문을 두드린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었다. 불량배들은 홀리스에게 달려들어 폭행한다. 홀리스는 죽는다.
홀리스는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일은 갑작스럽게, 우연히 벌어졌다. 홀리스는 전조를 보았다. 망토를 쓴 남자(나이트 아울)가 사람들을 구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히어로로 활약하던 때를 그리워하던 대니얼은 그 일탈을 계기로 로어셰크 구출을 꾀했다. 그가 그 생각을 한 것도 우연이고, 신문 발행을 늦게 한 신문사가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바로 기사화 한 것도 우연이며, 불량배들이 홀리스보다 먼저 그 소식을 접한 것도 우연이다. 불량배들이 두 사람을 혼동한 것도 우연이고, 그 날이 할로윈 데이였던 것도 우연이며, 홀리스가 경계 없이 문을 연 것도 우연이다. 기막힌 우연들이 겹치며 홀리스는 죽었다. 그가 이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홀리스는 죽은 것이다. 그는 절대 대비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비극적이며 뜻밖의 일이다. 홀리스는 은퇴 이후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으며 건강했다. 홀리스뿐 아니라 그 누구도 그가 그때 죽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홀리스는, 우리 모두는, 어느 날 갑자기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삶이란 축복에 무뎌진 우리가 그 사실을 잊었을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항상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렇다. 우리는 평생 무덤에 걸터앉아 살아가지만 그것을 직시하지 못한다, 고개를 돌려보자. 항상 내 옆에 있는, 내 이름이 새겨진 묘비를 발견할 수 있을 거다. 그걸 볼 때 어떤 마음이 드는가. 공포, 슬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오히려 기쁨이나 감사를 느낄지도 모른다.
난 쉴 새 없이 죽어간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 반대편엔 죽음만큼이나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난 지금 살아 있다. 이 사실은 별로 특별하지 않다.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라면 어떤가. 죽음이 당연한 것이고 삶이 특별한 것이라면 어떤가. 이 사실을 인지한다면 삶은 당연한 것이 아닌, 값진 것이 된다. 삶의 가치는 죽음의 허무함에 비례한다. 죽음이 당연한 사실임을 알 때 우린 삶이란 것에 더욱 감사하게 된다.
삶이란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느끼고 그것에 감사할 때, 우리 삶은 비로소 빛을 발한다. 당연함은 삶이 있을 곳이 아니다. 빛나는 감사의 자리야말로 삶이 마땅히 있어야 할 원위치가 아닐까.
첫댓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노숙자다.(->'두'는 빼도 될 듯)
보통.이렇게 물음표는 정말 강하게 물어볼 때만 쓰고 그 외에는 물어보는 식이지만 사실 묻는 거라고 할 순 없다. 그래서 주로 물음표보다는 그냥 마침표를 찍는 게 더 좋다. 느낌이 더 잘 전달된다. ~ 할 원 위치가 아닐까.
<고도를 기다리며> 다음 주 일괄 과제로 내려고 했는데 네가 먼저 써버려서.. ㅎㅎㅎ 고민 중... 다른 아이들도 낼까 말까.
고도가 '죽음'을 상징한다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다.
11번째 단락(여기서 문제가 있다~) 2~3번째 줄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두 번 반복된다.
<왓치맨>을 예로 든게 절묘하다 생각한다.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너무 당연하게 느껴져서 종종 잊는다. 함께 언제나 깨어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