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 기행
주말 잠시 틈을 내어 내가 맡은 업무인 교지 발간의 교정을 보았다. 앞으로 두 차례 더 교정을 봐야 인쇄 제본이 되지 싶다. 교정지를 인쇄소에 넘기느라 창원 역전 사무실에 들렸다. 몇 가지 미흡한 부문을 보완해 주십사고 일러주고 신마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구산면소재지인 수정으로 가는 녹색버스를 탔다. 주중엔 기온이 많이 내려간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날씨가 그리 춥지는 않았다.
버스는 가포를 지나 덕동 하수처리장을 돌아 유산마을 앞으로 갔다. 유산마을을 지나 해안선 산모롱이를 돌아 수정을 앞둔 야트막한 고개에 정류소가 있었다. 그 정류소 이름이 골매마을 입구 정류소였다. 내가 구산 갯가로 여러 차례 다니면서 이름이 특이하고 산모롱이가 감싸 마을은 보이지 않아 궁금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골매마을을 둘러보려고 한적하고 좁다란 길을 따라 걸었다.
시멘트 길은 자동차가 교행 되지 못할 정도로 비좁았다. 마치 작은 암자로 가는 길처럼 호젓했다. 십여 분 정도 비스듬한 비탈을 걸어가니 해안가에 민가가 나타났다. 울타리도 없고 대문도 없는 집들로 모두 헤아려보니 여섯 가구였다. 논은 한 자락도 없고 텃밭 같은 밭뙈기는 조금 있었다. 덕동 포구에서 합포만으로 나아가는 통발 입구처럼 잘록한 지점이었다. 저만치 등대가 보였다.
더 멀리는 진해 연안엔 군사 시설물들이었다. 여섯 가구가 살았지만 인기척은 갯가 한 집에서만 났다. 중년 사내가 마당 솥단지에 불을 피워 홍합을 삶고 있었다. 내가 갯가 풍광을 폰 카메라에 담으니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왜 사진을 찍느냐고 퉁명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갯가를 구경 나온 사람으로 바다가 운치 있어 사진으로 담는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내는 경계심을 풀었다.
그 사내에게 골매라는 이름에 왜 붙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는 예전부터 그렇게 불려왔지 그 뜻은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마을에서 비탈을 다시 되돌아 올라왔다. 아까 내가 버스에서 내렸던 정류소에선 골매마을에 사는 한 아낙이 다가왔다. 아마 시내로 나가 생필품을 마련해 오는 걸음인 듯했다. 내가 먼저 갯가를 구경 나온 사람으로 마을을 둘러보고 나가는 길이라고 했다.
수정마을을 앞둔 고개에는 만월사 이정표가 있었다. 비포장 길을 따라 만월사를 찾아갔다. 마을과 제법 떨어진 깊숙한 산기슭에 들어선 작은 절이었다. 특이하게도 절간 진입로와 법당 마당에 태극기를 달아 놓았다. 요사채엔 스님과 신자의 인기척이 없어 아주 조용했다. 나는 법당 아래 돌계단에서 두 손을 모으고 절간을 빠져나왔다. 수정마을 뒤에는 벼농사를 짓는 논들이 조금 있었다.
초등학교와 면사무소가 있는 골목에 반점이 있었다. 우동을 한 그릇 시켜 두어 아침나절 시간 걸으며 소진된 열량을 보충했다. 점심 식후 수정마을 골목을 지나 매립지로 갔다. 수정만 매립지는 조선소 납품되는 부품을 만드는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죽전마을로 가는 진입로 아래 바닷가는 홍합을 선별하는 작업장이 줄지어 떠 있었다. 그곳에선 뭔가 일을 하는 아낙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죽전마을 진입로는 정남향으로 볕이 아주 발랐다. 간간이 바람이 일어 낙엽이 날리긴 해도 아주 따뜻했다. 마을 어귀까지 가서 되돌아 나왔다. 산언덕과 이어진 진입로 축대엔 파릇한 쑥이 보였다. 햇쑥 같기도 하고 묵은 쑥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배낭에서 칼과 비닐봉지를 꺼내 검불을 헤집고 쑥을 캐 모았다. 죽전마을 어귀에서 수정만 해안선 들머리까지 나오면서 쑥을 캤다.
쑥을 다 캐고 나서 다시 수정마을을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을회관과 겸용으로 쓰는 어촌계 사무실이 나왔다. 이층 지붕엔 ‘대한민국 홍합 1번지’라는 구호가 걸려 있었다. 보건진료소와 어린이집을 돌아 구남중학교 구산분교로 가 보았다. 방학이라 학교는 조용했다. 면사무소 뜰 쉼터에서 아까 캔 쑥의 검불을 가려냈다. 곧 이어 시내로 들어가는 녹색버스가 다가와 하루 여정을 끝내었다. 2016.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