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한다(자언)-13. 親交(1)
親交(1): 먼저 간 친구들을 회상하다
무술년 시월에 친구 규명이 떠났다. 離言絶廬의 아픔으로 그를 보냈다.
그를 보내면서 제문을 썼다.
祭圭明文.
戊戌年十月吾友文圭明將大歸, 最愛友人擧觴送之曰, 公雖在世常厭世, 今所貴處, 無衣食之營, 迎候拜揖看一下問遺禮, 又無炎涼之態, 是非之聲, 只有淸風明月· 野花山鳥, 公可從此而長閒矣, 又高沈無憂今事明運, 知心知言, 相應頷之, 尙饗. 愚谷
(무술년 시월에 규명을 묻었다. 그때 나는 제일 친한 벗으로서 술잔을 들어 그를 마지막으로 보내며 말했다. ‘그대는 세상에 있을 때 늘 세상을 싫어했다. 이제 영영 가는 곳은 먹을 것, 입을 것 마련할 일도 없고, 손님 맞고 눈치 볼 예법도 없고, 염량세태나 시비를 따지는 소리도 없는 곳일 것이다. 다만 맑은 바람과 환한 달빛, 들꽃과 산새들만이 있을 것이니 그대는 이제부터 한가롭고 지금을 근심하고 내일의 운세를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다. 내 심정을 이해하는 친구의 말이라고 그대는 분명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흠향. 우곡)
어제, 9월 14일, 규명(圭明)의 묘소에 다녀왔다.
경북 의성군 남평면의 야트막한 산기슭의 아늑하고 양지바른 가족 묘지에 그는 4년째 잠들고 있다. 햇살이 따뜻하고 미풍이 불며 앞 전경이 트이고 좋아서 가히 명당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외가 마을인 이곳 남평엔 내 젊은 날의 아픈 기억도 있다. 고등학교 마치고 재수 때 친구들과 그의 외가에 와서 놀며 장난치다가 내 입술이 찢어져 늦은 밤길에 허둥지둥 십여 리 떨어진 도리원까지 나갔다. 그 옛날 시골 초라한 한 의원의 문을 두드렸는데 자다가 깬 늙은 의사는 마취를 한 후 봉합 실을 찾지 못하여 이미 마취가 깨어 버린 나의 생살을 가로 늦게 봉합하였다. 그때의 서툰 의술은 지금도 흔적이 약간 남아있지만 어쨌든 그분이 째보(언청이)를 면하게 해준 것도 사실이다.
부복하여 그에게 술을 따르면서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규명아, 내가 와서 너에게 절을 하니 좋아? 하고 웃었다. 초추의 陽光이 따뜻하고 산자락에 부는 부드러운 바람이 그저 평화로워서 아, 여기에서 잘 지내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성묘 온 그의 동생 圭一 군과 아들 載盛이 음복주를 권했다. 작은 소주잔을 들고 홀짝이면서 그제서야 평생 그와 지내온 일들이 만감으로 밀려와 슬픔으로 다가왔다.
시골에서 대구에 나와 학교에 다니던 고등학교 시절, 그는 나에게 처음으로 흡연을 가르쳤지만 그는 심성이 선하고 너그럽고 의리가 있으며 다정하였다.
봉덕동의 하숙방에서 李憲錫, 박장수, 최재열, 강박인, 천명원, 장범, 임순채 등의 친구들과 참 많이도 술을 마셨다.
동가식서가숙 하던 대학 시절 나는 오랫동안 그의 집에서 한 방에 뒹굴면서 생활했다. 그를 떠나서 나만의 생활이 없었을 만치 우리는 일심동체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님은 참으로 현명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었다. 지금 90세를 넘기신 어머님은 요양원에 계시는 데 규명이를 찾으시다가 늦게 아들의 죽음을 알고 나선 일체 말씀을 안 하신다고 한다.
그와 나는 슬플 때 슬픔을 받아주고, 기쁠 때 기쁨을 함께 나누었으며, 고통과 아픔을 함께 하고자 했고, 잘못이 있을 때에는 바로잡아주기도 했다.
나이 들어 그는 뚜렷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평생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그래도 얼굴 한번 찡그린 적 없이 군자의 풍모가 있었다. 그가 결성하고 내가 명칭을 지은 갈돕회는 아직도 서로 친하게 모임을 갖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친구들이 모여들었고 그를 중심으로 서로 교류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많은 위성이 그를 도는 행성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늙어서 생각도 하지 못한 병이 찾아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수성동 방천 시장 골목의 아뜨리에를 떠나 청도 이서에 집을 얻어 홀로 지내면서 병을 이기고자 힘을 쏟았다.
나는 수시로 그를 찾아갔다. 즐기던 술도 못 마셔 내 혼자 마시면서 천행으로 그가 낫기를 내 몸처럼 바랬다.
내가 용돈을 줄 때마다 그는 고맙단 말 한번 한 적이 없다. 그만큼 우리는 말하지 않고도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사이였다.
경북대 칠곡병원에서 숨을 거두기 며칠 전 찾아가 용돈(?)을 주는 나에게 뼈만 남아 수척한 그는 이 돈 이젠 쓸 일이 없어 하고 웃으며 우리 죽어서도 다시 만나자고 했다. 살아 마지막으로 만나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차 안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아, 세상은 그렇게 쉽고 편하고 재밌는 곳이 아니다. 니가 없는 매일 허전하고 슬퍼 때로 홀로 눈물을 흘린다.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나도 언젠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용어가 친구이지만, 가장 얻기 힘든 존재가 친구일 것이다. 우정이란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는 두 마음이지 하나의 마음이 두드리고 또 두드리는 것이 아니다.
저세상에 또 다른 삶이 있다면 서로 만날 것이라고 믿고 싶다.
思故圭明 /규명을 생각하며
今夜思君何處見 오늘밤 그대 생각지만 어디에서 볼수 있나
起君此日萬無方 그대 부르고 싶어도 방법이 없구나
與爾相逢五十秋 처음 만난 것이 오십년 전
小少交情老深敦 소년부터 사귄 정 늙을수록 깊고 두터워
三間矮廬歸臥夕 삼칸 오두막에 돌아와 저녁 잠자릴 누우면
夢中如前君笑來 꿈 속에서 전날과 같이 그대가 웃으며 오네
今吾多病年稀耋 이제 나도 병 많은 칠십 늙은이 되었으니
非久泉臺君相逢 머지 않아 그곳에서 그대를 만나겠군
愚谷 (2021.6.29)
조영호는 내 고등학교 동기이다. 교정의 잔디밭에 누워 앞날의 꿈들을 서로 얘기했다.
대구를 들어가려면 그의 집 땅을 밟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던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러다 임종이 가까웠을 때 그 많은 재산은 아예 없었다.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처가 미국 여행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후에 매일이다시피 그녀의 무덤을 찾아 비탄에 잠겼다는 말을 들었다. 불로동에서 만취하도록 술을 나누었는데 불로는 커녕 얼마 지나지 않아 명을 달리하였다.
그를 영영 보내고 애도의 시를 지었다.
사라지는 것이
사람의 목숨뿐이랴.
문득 밤하늘 별 하나 지워지듯이
그렇게
이 세상의 무엇 하나
영원히 남아 있을 수 없음을
모두 알고 있다.
생각하면
지금 같은 여름
짙푸른 담쟁이 무성한 교정에 누워
푸른 구름을 가슴에 안고
가야 할 먼 길
가슴 두근거렸건만
이제와 보니 모두
떠날 때가
오늘인지 내일인지
남은 시간을 알 수가 없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빨리 지듯이
아까운 사람도
먼저 죽는가 보다.
사라지는 것이 어디 사람의 생명뿐이랴
잊혀지는 것이
어디 사람이 인연뿐이랴.
살아있음이 고통이라면
죽어서 이승의 것 죄다 잊고
그대 사랑하던 아내 다시 만나
아픔 없는 생을
이어 살아라.
(2009.7.24.)
연극인 이영규는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다. 같은 문예반에 속했으며, 그때 문예반에서 나승호, 박경동, 장병찬, 김인수 등이 함께 어울려 지냈다.
영규는 그때부터 오직 연극만이 그의 삶의 의미이자 목표였다. 중앙대학교 연극연화과에 진학하여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극인의 생활이란 가난 그 자체이기도 한 시절이었다. 어느 날 내가 지방 출장을 가려고 강남 버스터미널에 갔더니 거기에서 그의 부부를 만났다. 도저히 서울에서 경제적으로 살아갈 길이 없어서 대구로 내려가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내가 회사를 그만둔 뒤 부산에서 살게 되면서 대구에 가면 둘이 만나 술을 “억수로” 퍼마셨다.
대구 시립극단 초대 예술감독을 맡아서 참 의욕적으로 열심히 일했다.
부산 경성대학에 공연을 하기 위해 부산에 몇 번 오기도 했다. 경성대학은 동기 허균의 동생인 허은이 연극 영화과 주임교수로 있는 곳이기도 했다.
공연하고 난 날의 저녁에 법부법인 청률의 대표변호사로 재임하고 있던 동기 김문수 변호사와 내가 교대로 그의 연극 팀 일행을 광안리 칠성횟집으로 데려가서 몇 차례 회식을 부담했던 일이 있었다.
우리가 연극하는 가난한 예술인들에게 그렇게 대접(?)한 것이 그에겐 단원들에게 체면을 세워주기도 했던 모양으로 무척 고마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의 죽음은 참 삶의 허망한 기분으로 나에겐 그 허전함이 오래갔다.
영규英圭에게
문득 니가 생각나는
이 초저녁
영규야, 네가 없구나
불콰한 네 얼굴
이제 볼 수가 없구나
빈 주머니
큰 소리
네 한스런 웃음소리
이제 들을 수 없구나
소주잔 마주하면
차라리 내가
더 초라하구나
연극이 인생을
속일지라도
속힘에 순진한 너의
아름다움을 어디서 만나랴
먼저 가서 우릴
기다리려는가
그렇게 먼저 가다니
무슨 탓인지도 모르게
이놈의 가슴이 아려오는
산 그림자 내려앉는
이 해거름에
오늘따라
네가 왜
이렇게
보고 싶으냐
돌아보아도
영규야
네가
없구나
(2007.2.13.)
박해수는 참 순진하고 착한 시인이었다.
대륜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시를 잘 지었다.
만년에 대구 문인 협회 회장 감투도 썼다. 비록 간이역에 세워지는 詩碑를 자기 시로 채웠다고 욕도 들었지만, 그것은 그가 식솔을 먹여 살려야만 하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水山 최현득 군과 동행해서 부산에 와 나를 만나서 광안리 횟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면서 좋아하던 그의 순진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병원에서 검진하다가 그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니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살아 있으면 오래 만나면서 술잔을 나눌 텐데 아쉽기만 하다.
사우思友
-박해수를 기리며
이 도시에는 누군가의
죽음이 일상이듯
너의 죽음도 하나의 일상일 것이다
태어나는 일이 삶의 한 부분이듯
죽음도 살다보면 일어나는 것 중의 하나일 것
저무는 하루
누군가는 태어나고
또 누군가는 죽는 이 시간
3일만에 완료되는
이별 예식
삶이 사연이라면
죽음은 기억의 문제일 것
때로 문득
허리 통증처럼 찾아오는
네 생각
너의 죽음
‘저 바다에 누워
물새가 될지라도’
해수야
또 얼마냐 외로우랴
(2015.1.16.)
첫댓글 명 제문 읽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먼저 간 규명,영규,영호,해수의 영혼이 외롭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