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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익은 이슬
김기하
음력력 九월 밤하늘의 달은 말 할 수없이 맑고 깨끗하고 환하게 보인다.
그달이 더욱 밝게 보일 때는 내가 누구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을 대라는 것을 느끼게 하고 있다. 객지에서 달을 쳐다보면서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 얼굴이 그려지는 것도 그래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 달이 밝다기보다 맑고 깨끗하고 참으로 정결하게 보여 지고 있다.
지난 음력 九월 九일에 경북의 북방 오지 英(영)陽(양)郡(군) 首(수)比(비)面(면) 公(공)水(수)下(하)里(리) 금아산 자연 휴양림 깊은 숲속 콘도에서 하루를 쉬면서 높은 나뭇가지 사이로 벽옥같이 파아란 하늘 한 가운데 희디흰 구름 한 조각을 이끌고 가는 맑고 깨끗하게 빛나는 달을 쳐다보면서 오염된 마음의 찌꺼기를 깨끗이 털고 돌아 왔다.
달을 쳐다보는 버릇은 아주 어릴 때(1930년대) 모기 불을 피워놓은 멍석 깔린 마당에 누워 여름밤 하늘을 쳐다보면서 생긴 버릇이지만 그 달이 참으로 맑고 깨끗한 친구로 느껴진 것은 어느 소녀의 ‘가을 채비’란 시 한 수를 만나고부터이다.
늦여름 방학이 끝난 어느 날 영양 문학관에서 작품 심사가 있다고 하기에 조금 늦게 갔더니 벌써 심사원 몇이서 일차 심사를 마치고 두 번째 거르기에 눈길들이 바빠 보였다.
제외된 작품을 모아 꼼꼼히 뒤졌다. 혹시 떨어진 낙수나 하나 건져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어설픈 시 한수에 눈이 버쩍 떠진다. 틀림없이 그때 내 눈에서는 반짝이는 빛이 나 있었으리라고 믿고 싶다. 제목은 평범했다.
가을 채비
영양여고 2년 이신향
덜 익은 이슬 따다
긴 머리 적셔 감고
흰 달 곱게 찧어
분인 양 바른다.
반딧불 죄다 잡아 만든 등을
가을님 오시는 길목마다 놓아두어야지
어서어서 서둘러라
서둘러라 소녀야
가을님 오시다 텅 빈 그길 보고
삐쳐 돌아가면 어떡하니
이 시를 다시 검토해 줄 것을 요청했고, 토의 끝에 고등부 장원으로 뽑아서 ‘英陽 文學誌’에 실었다.
이 시는 1993년 조병화 시인을 뫼시고 ‘영양문학’ 하기 세미나를 할 때 청소년 백일장(영양군, 봉화군, 청송군의 초 ․ 중 ․고등 학생대상)을 열어서 제출 된 작품들이었다.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려고 하면 꼭 머리를 감는다. “덜 익은 이슬......”열매나 이슬이나 다 익으면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땅에 떨어지기 전에 덜 익은 작은 이슬을 하나하나 따 모아서 긴 머리, 소녀의 머리를 적셔 감는다......, 기가 막힌다. 선동(仙洞)에서나 있을법한 말씨가 아닌가!!
가장 오염 되지 않은 깨끗하고 또 깨끗한 이슬 물로 머리를 감는 지극한 여심의 정성......, 이 이상 더 어떤 단어로 자신의 지극한 정성과 정결을 표현 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자기 자신을 덜 익은 이슬로 암시하고 있지 않는가!
아!! 그 생각주머니에 내 자신을 넣어 보았으면......! 나도 그런 발상의 세계에 이를 수가 있을까?
또한 여자가 남자를 만날 때는 분단장을 꼭 한다. 세속의 화장품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오염되어 있는 게 흠이리라.
지극히 맑고 깨끗한 창공에 매어 달아 놓은 흰 달을 빻아서 그 깨끗한 달 가루로 그리고 야단스럽지 않은 달 색깔로 화장하고......, 그러면서 사람 손 한 번 가지 않은 가장 순결한 창공의 달덩이로 자신을 암시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이렇듯 가장 순결하게 자신을 준비하는 지극한 정성의 여심을 몇 자 안되는 시말에 실어서 가을님(다 익은)을 맞이한다는, 얼음 속의 얼음 알과 같은 소녀의 혼을 만나고부터는 나의 달에 향해지는 마음은 한없이 순결해지면서 그 달의 숭고한 친구로 느껴지고 있다.
나는 이 시에 비치어지는 나의 생각 주머니가 어지간히 오염돼 있음도 숨길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나는 심사원들을 보고 참으로 엉뚱하게도 이 시를 우리나라의 민요로 작곡해 보겠다고 말해 버렸다. 우리나라에는 옛날 민요는 많은데 근대 민요가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더 없는 민요풍의 시말에 너무 심취해서 제 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 후 시월 달 어느 날 초저녁에 모임이 있어서 소주 한 잔 한 것이 나의 감정을 감당할 수 없게끔 정을 들끓게 만들었다.
보름달이 환하게 모교 운동장에 달빛을 쏟아 부어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 아니가?
교실 문을 따고 전자오르간 앞에 앉았다.
“아매요 후래후래......” 어릴 때 배운 「비의 부르스」일본노래인데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오르간 앞에 앉으면 이 노래부터 짚어 보는 게 내 버릇이었다. 오늘도 마음이 풀릴 때까지 월광(月光)을 받아 안으며 마냥 짚는다?
그 노래 가운데는 「가에리 고노 고꼬로(心)노 아오소라(靑空)」‘내 어차피 돌아 갈 마음의 푸른 하늘이여......!’라는 내 철학과 같은 생각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 있어서 그렇다.(조금 변조해서)
그러다가 내 정이 솟구치는 대로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 짚다가 노래 가락이 하나 되어 버렸다. 그 노래 가락에 맞춰서 이신향의 시를 꿰어 맞춰 보았다.
덜 익은 이슬
시 : 이신향
곡 : 김기하
덜 익은 이슬 따다
긴 머리 저셔 감고
희달 곱게 빻아
분인 냥 바른다.
고운 님 붙들자
가을 님 맞이하자
어서어서 서둘러라
서둘러야 소녀야
고운 님 삐낄라
서둘라 소녀야!
서툴러서 노래곡이 민요가 못되고 대중풍이 되어버린 것에는 아쉽지만 며칠을 두고 다듬어서 오선지에 정리하고 이신향을 초대해서 노래도 들려주고 악보도 주었고 그 학교 영양 ‘여자고등학교‘ 교장님과 음악 선생님에게도 드렸다.
얼마 후 ‘영양 문학의 밤’이 있었는데 나는 내가 있던 학교(영양국민하교)학동들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서 그날 밤에 노래를 발표까지 해버렸다. 시원치는 않았지만 박수는 억수같이 받았다. 결국은 이신향의 시에 심취한 나의 정서를 노출시킨 샘이 되고 말았다.
조용한 몸이 된 요즈음 마음이 잔잔해지면 피아노 앞에 곧잘 앉는다. 달 밝은 밤이면 어김없이 맑고 깨끗한 친구를 쳐다보면서 끝없는 하늘의 즐거움을 느끼며 ‘덜 익은 이슬’을 생각한다.
우주의 맑고 깨끗한 고요의 평화를 느끼면서 샘솟는 정을 달래보곤 한다.
감사하면서......, (^.^)
1998年 10月 鹿野怨 2號
佳松 해달뫼 金基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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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맑고 깨끗하고 참으로 정결하게 보여 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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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고요와 평화속에서 편안삶 누리시길 기도 드립니다.
선생님의 삶이 그러하니까요,
자연은 마음 먹은데로 보는데로 보여진다 잖아요 선생님,
아름다운 글, 선생님의 삶을 들여다보게 만들어 주는 글 잘 읽었습니다.
늘
양평에서 이강촌 드림
강촌님 참으로 반갑습니다
전에 것은 천리아 홈페지에
올려 있는것을 링크해서 오린 것인데
천리안이 폐쇄되어 버렸습니다.
평화와 사랑의 가정
모두 두루 건강 튼튼 하시지요 ^.^
항상 곱고 즐겁고고요하고 평화로운 기를
담아 보내 주시는 강촌 님
참으로 감사 감사합니다.
사랑 감사 행복 충만하시고
가내 모두 만수 무강하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