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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제천의병의역사
문대식 추천 0 조회 81 19.12.24 19: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천의병의역사
청일전쟁을 통하여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제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중전 민씨를 살해하였다. 그들은 여론의 반발을 호도하기 위하여 이른바 '내장개혁'을 친일내각에 강요하였다. 그 주요한 내용은 관제를 개혁하고, 군현제도를 개편하며, 양력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의 조치였다.
오랜 전통 속에서 정비된 제도에 대한 급격한 개혁은 결국 기존의 역사와 단절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특히 을미년(1895년) 음력 11월에 강행된 단발령은 분노를 터뜨리게 하는 결정적 계기다 되었다.
그것은 문화적 자존심을 짓밟는 폭력적 조치였다. 머리터럭 하나까지 부모가 주신 것이라면서 존중하던 이들에게 단발을 강행하니 거리에는 사람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당시 제천의 장담에는 화서학파의 계보를 이은 유중교가 이주한 1889년 이래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강학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중교의 사후에도 그의 문도들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척사의 정신을 천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발이 강행되자 현실에 대처할 방법을 논의했고, 그 자리에서 당시를 '중화가 오랑캐가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극한상황'이라고 진단하였다. 그리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것과, 국외에 망명하여 도맥(道脈)을 계승하는 것, 그리고 조용히 자결하는 것 등의 방안이 제시되었다.

유인석은 망명의 길을 선택하였으나, 일부의 소장과 문인사우(門人士友)들은 의병봉기의 길을 선택하였다. 안승우는 지평의 고향으로 돌아가 이춘영과 포수 출신의 김백선 등과 합하여 원주의 안창에서 봉기의 깃발을 올렸다. 11월28일의 일이었다. 그들은 제천으로 즉시 진격하였고, 이필희가 대장으로 추대되면서 장담의 선비들의 의진에 모여들었다. 단발을 강요하던 군수 김익진은 도망가 버렸다. 의병들은 밀려오는 적을 단양의 장회협에서 맞아 싸워 귀중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휘부는 포군(砲軍)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승전에도 불구하고 포군들은 영남지역으로 흩어져 버렸고, 이필희는 지휘권을 이춘영에게 넘겼다. 이춘영이 영남으로 내려갔던 포군들을 다시 수습하고, 제천과 강원도의 영서지역을 돌면서 포군을 모아온 안승우의 부대와 합친 것은 영월에서였다. 그들은 의병을 성공하기 위하여는 권위있는 지휘부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유인석에게 대장을 맡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유인석은 모친상과 능력부족을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결국 영월에서 호좌의진 대장의 자리에 올라 의병봉기의 명분을 팔도에 고하니 을미년 12월 20일이었다.

제천으로 진주한 의진은 일거에 인근 여러 균현을 장악하였다. 제천의병은 친일적 태도를 보이던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먼저 처단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제천의병을 충주성의 공략에 나섰다. 충주성을 바뀐 지방제도에 따라 20개군을 관할하는 관찰부의 소재지였다. 각군에서 시행되는 개화정책은 일차적으로 충주관찰부의 지시를 받드는 것이었다. 당시 관찰사 김규식은 단발령을 시행하여 원성이 높았다.

제천을 출발한 의진은 두 부대로 나누어, 주력부대는 주포가도를 통하여 박달재를 넘어 충주성에 육박하였고, 별동대는 은밀히 청풍쪽을 우회하여 마수막재를 넘어 들이 닥쳤다. 이에 충주성은 일거에 의병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병신년(1896년) 1월 5일 저녁이었다. 당초 제천의병은 충주성을 장악한 후, 인근의 호응을 받아 서울쪽으로 진출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충주지역의 호응이 기대에 못미친 대신, 충주성을 되찾으려는 일본군과 관군의 집요한 공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중군장 이춘영은 조령일대를 장악하여 영남지역의 역량까지 동원하려는 구민타개책을 내놓았고, 이를 위하여 수안보를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의진내에 비중있는 인물이었던 주용규는 충주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결국 제천의병은 고립된 상태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월 25일에는 보름넘게 장악하였던 충주성을 버리고 근거지인 제천지역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나 주요한 전투부대는 충주쪽의 내창이나 강령지역까지 진주시켜 가흥의 적과 접전하면서 공세적 방어태세를 취하였다.

제천의병이 제천에 물러서 있는 동안, 주요한 공략의 대상은 가흥과 수안보에 있는 일본군의 병참이었다. 일본군이 두 곳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남한강 물길을 이용한 수송수단에 의존하고 있던 제천일대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다. 식량과 소금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이런 국면을 호전시키기 위하여 제천의병은 충주 쪽의 적을 방어하고 있는 후군장 신지수, 좌군장 우기정과 우군장 안성해등으로 하여금 선봉장 김백선과 함께 공략하도록 하는 한편, 이강년의 유격군을 수안보 조령일대에 보내어 영남지역에서 소모 활동을 하던 서상렬의 부대와 협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 사이의 공동작전이 실패함에 따라 가흥공격도 실패로 돌아가고, 조령작전도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장수들간의 갈등이 증폭되어 선봉장 김백선이 희생되는 사건이 있었다. 한편, 정부는 국왕의 아관파천과 친일내각의 수립을 계기로 집요하게 의병 해산을 촉구하였다. 강화진위대장 장기렴은 병력을 이끌고 충주 쪽으로 진주하여 의병의 해산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완강히 해산을 거부하면서 제천 인근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후 한 달 넘게 남한강을 주요 경계선으로 한 관군과 의병의 대치상태가 지속되었다. 소규모 전투와 함께, 서신을 통하여 의병의 해산을 촉구하고 거의의 명분을 천명하는 공방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제천의병은 영남으로 근거지를 옮기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그러나 제천을 둘러싼 인근 군현을 사실상 지배하면서 그곳으로부터 군수물자의 지원을 받으면서 투쟁을 이어갔다.
결국 4월 13일에 장기렴의 군대가 청풍 쪽으로부터 제천으로 쳐들어왔다. 제천의병은 독송정· 남산·수도산 등의 요새지를 구축하고 감연히 맞서 싸워 관군을 물리쳤지만, 갑작스런 비바람으로 의병들의 화승총이 기능을 잃게 되자 관군은 제천을 일거에 장악하였다. 남산성에서 전투를 독려하던 중군장 안승우화 종사 홍사구는 피신하지 않고 감연히 의를 부르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제천을 상실한 유인석은 잔여병력을 이끌고 인근의 군현을 전전하면서 관군과 부딪혔지만, 한번 기울어진 형세를 만회할 길이 없었다. 유인석은 5월 23일 정선에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의병봉기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서행길에 올랐다. 본래 의도는 서북지역에서 용감한 용사들을 모집하여 재기하려는 것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북부 간도지역으로 건너가 일단 병사를 해산하였다. 이후 유인석은 도맥을 계승하고 복수의 날을 준비하는 새로운 과업에 몰두하였다. 이것이 훗날 해외독립운동기지건설의 효시가 됨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을미의병 해산된 후, 일제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하였다. 특히 친일세력을 동원하여 일진회를 조직하여 앞장서도록 하였다. 의병에 가담하였던 선비들은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결속을 다지고, 때로는 위정척사적 성향을 강하게 띠는 향약운동을 통하여, 또는 비밀결사체를 구성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05년에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이어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나아가 각종의 이권을 빼앗기 시작하였다. 이에 을미의병때 한때 제천의병의 중군장이었던 원용석이 제천과 가까운 주천 쪽에서 을미의병 당시의 인맥을 이용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제천의병의 전군장이었던 정운경은 단양에서 봉기를 시도하였다. 이들은 문화적 전통을 수호하고자 하였던 을미의병에 비하여 구체화되어가는 국권침탈을 통렬히 공박하면서 깃발을 들어 올렸으나 주체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체포되고 말았다.

그후, 강제된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은 잠재하고 있던 의별들이 일시에 들고 일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을미의병 당시 유격장이었던 이강년의 봉기가 대표적이다. 해산된 원주진위대에서 무기를 받은 수많은 의병장들도 일시에 제천으로 모여들었다. 다시 제천은 의병천하가 되었다.
천남전투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격퇴한 의병진은 주천으로 이동하여 체제를 정비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강년은 호서의병자으로 추대되었다. 일본군은 제천에 불을 질러 의병의 근거지를 완전히 초토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강년은 이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활발한 의병활동을 별여나갔다. 특히 산악전에 능하였던 그는 끊임없는 이동과 기습으로 일본군 부대를 공격하였다. 그의 활동 무대는 제천·청풍·단양·영춘의 사군(四郡)은 물론이요, 영원·원주 등의 강원도 영서지역, 그리고 영남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광범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때는 경기도 양주까지 진출하여 서울 입성을 노리기도 했으나, 일본군의 토벌이 심해지면서 점차 약화되어 의병활동이 활개된 서벽·재산전투는 그가 지휘한 최후의 대규모 전투였다. 그후 이강년은 병력을 정비하기 위하여 다시 제천 쪽으로 이동하였다가 1908년 6월 4일에 청풍 금수산에서 일본군·순사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었다. 이강년이 제천으로 돌아온 것은 그해 말, 과천에 임시 묻혔다가 제천의 두학으로 이장할 때였다. 비록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그가 남긴 뜻을 이어'합방' 이후까지 항쟁을 지속했던 감상태도 옥사하여 이강년의 무덤 옆에 묻혔지만, 제천의병의 숭고하고 강인한 저항정신은 결코 땅에 묻히지 않았다. 이후 식민지 체제가 강화되어 가면서 제천의병은 일찌기 유인석에 의해 주도된 해외에서의 무장투쟁의 역사로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구완회(세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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