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여행을
박래녀(여)
아들과 여행을 떠났다. 한 나절 여행이지만 즐거웠다. 아들의 운전은 부드럽다. 모든 것은 처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 해군으로 군대에 갔던 아들은 운전병을 했다. 해군 장군을 모셨단다. 초년병 시절 바짝 긴장해서 상관을 모셔야 했던 아들의 운전 습관은 부드럽고 안전하다. 시아버님께서 칭찬할 만큼 운전 실력이 안정적이다. 아들 옆에 앉아 느긋하게 풍경을 즐긴다.
두 아이가 어미를 챙길 때마다 남편은 이런 말을 한다.
"자식은 엄마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맞는 말이다. 어미는 자식을 뱃속에 잉태할 때부터 모성에 눈 뜬다. 어미의 모든 것을 무의식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 태교다. 두 아이의 태교에 신경 쓴 것도 꽉 찬 나이에 어미가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두 아이는 첫돌 때까지 젖을 먹였다. 친정아버지께서 늘 자랑스럽게 ‘너거는 쇠새끼가 아니라 사람 새끼다.’라는 말을 했었다. 30여 년 전에는 우유 붐이 불었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모유를 먹는 것이 아니라 우유를 먹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던 추세다.
두 아이는 천주교 재단의 큰 병원에서 태어난 덕도 봤다. 그 병원은 갓난아이에게 초유를 먹이게 했다. 해산을 하고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도 시간 맞추어 산모는 신생아실에 가서 아이를 안고 젖꼭지를 물렸다. 젖을 먹고 자란 아이라서 그런지 어미 정이 유별난 점도 있다. 나 역시 두 아이를 사랑으로 키웠다. 젊은 때는 부부 싸움도 오지게 했다. 부부 싸움은 늘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꽁했다가 터지고 아물면서 진정한 부부애를 키워가는 것은 아닐까. 그 사이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된다. 부부가 이혼을 생각할 만큼 심각할 때도 아이가 있으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사람이다. 우리 부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엄마들은 흔하게 말한다. 남편이 미워도 애들 때문에 못 헤어지고 산다고. 아이들이 어릴 때는 어미 없이 자랄 아이들이 불쌍해서, 혹은 계모에게 눈칫밥 먹게 할 수 없어서 남편과 못 헤어지고 살았다는 말을 한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는 온갖 힘든 시절 넘기며 살아온 것이 억울해서 산다는 말도 한다. 늙어 기운 빠져서 더는 내 인생 돌려달라는 말을 할 처지가 못 돼 참고 산다는 말도 한다. 따져보면 용기가 없어서, 경제적 두려움에, 남의 눈이 무서워서, 혼자 살 자신이 없어가 아닐까. 간혹 남편을 너무나 사랑해서 못 헤어지겠더라. 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희귀종 취급을 받는다. 대부분 그렇게 사니까.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아야 하는 줄 알고 참고 살았다는 인내 파는 칠팔 십 넘은 할머니들이다.
나는 어디에 속할까. 아이들이 농담처럼 ‘엄마 아빠는 이혼하고 싶은 적 없었느냐’고 물을 때 있다. ‘물론 있었지. 너희들 때문에 살았다.’ 가볍게 대답했지만 가만히 그 말을 곱씹어 본 적이 있다. 물론 아이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혼자가 싫었다. 가정에 안주하는 것이 좋았다. 남편에 대한 미움도 연민도 사랑이다. 안정된 가정이 좋았다. 남편이 원하는 여자는 될 수 없지만 남편을 따라 사는 여자는 될 수 있었다. 환갑 진갑을 다 지난 지금도 우리 부부는 밍밍하게 살지 않는다. 자주는 아니지만 화끈하게 싸우고 화끈하게 푼다.
오늘처럼 여행 갈 계획을 세웠다가 시어른 때문에 접어버리는 남편에 대한 불만을 ‘아들과 바람 쐬고 올게. 당신은 쉬세요.’ 이런 식으로 냉정하게 풀어버린다. 마음에 짐을 지고 있기보다 놓아버린다. 아들과 죽이 잘 맞는다. 아들이 어미의 의견을 잘 경청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부 사이에 나쁜 감정이 일 때는 생각할 수 있는 적당한 간격을 두는 것이 좋다. 더구나 감정의 중간키를 잘 잡아주는 아들 때문에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작가인 엄마와 작가를 지망하는 아들과 대화의 폭은 넓다. 예전에는 아들에게 가르쳤지만 지금은 아들에게 인생을 배우고 있다.
나무그늘이 아늑한 국도를 따라 천천히 달렸다. 여행은 넓은 길보다 옛길이 좋다. 적당히 호젓하고 적당히 나무그늘이 진 소로를 따라 천천히 달리다보면 편안한 쉼터를 만난다. 쉼터에 걸터앉아 숨고르기도 하고, 마늘과 양파를 수확하고 모를 심는 사람들을 본다. 내가 일을 할 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한 적도 있다. 나는 바빠 죽겠는데 놀러 다니는 저 사람들은 무슨 복을 탔나. 시샘을 하기도 했다. 나 역시 농사꾼 아낙이라 한동안 정신없이 살았다. 아들 덕에 여유를 부린다.
하동 북천의 개양귀비 축제는 끝났고 들판은 을씨년스러웠고, 초고속 기차역은 적막했다. 이병주 문학관에 들렸다. 텅 빈 주차장, 고요한 산자락이다. 대학원생인 아들의 꿈은 작가다. 아직 그 꿈을 버리지 않았고 그 쪽으로 매진하고 있다. 글을 쓰는 엄마와 글쟁이가 되고 싶은 아들이라 대화는 늘 풍부하다. 소설 쓰는 스타일은 다를 수밖에 없다. 독서의 질과 양도 다를 수밖에 없지만 아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속이 꽉 찬다. 문학이란 공동의 화제 덕에 여행이 즐겁다. 식성도 비슷하다.
“슬슬 배가 고픈데 뭐 먹을까?”
“청학동 가서 파전에 막걸리 한 잔 해요.”
사실 아침 일찍 가족 여행을 떠났었다. 삼천포 사랑도를 목표로 출발을 했는데 시아버님 호출이 왔다. 아들과 떠나는 가족여행은 취소되었다. 중간에서 돌아와 아들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큰 병원에 다녀왔다. 오후에 남편은 감산에 일하러 간단다. ‘그럼 우리끼리 다녀올게요. 저녁도 해결하고 올 테니 당신은 알아서 드세요.’ 냉정하게 아들과 여행에 나선 길이었다. 남편이 빠지면 더 신난다. 남편 눈치 안 보고 아들과 유유자적 할 수 있으니 땡 잡았다.
지리산 청학동으로 향했다. 도인촌과 삼성궁은 낯익은 곳이다. 삼성궁은 갈수록 폐쇄적이고 상업적으로 바뀐 것 같다. 돈을 내지 않으면 골짝 입구조차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어 놨다. 입장료가 개인 7천 원이었다. 차도 갈 들어갈 수 없고 오로지 두 다리로 걸어야 하는데 마고성은 넓다.
“엄마, 들어가 봤자 볼 것도 없는데 그냥 가요. 가다가 파전에 막걸리나 먹지요.”
그러나 청학동 음식점은 아직 손님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대부분 고사리 꺾고, 죽순 꺾느라 비어 있거나 음식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주말에만 잠깐 관광객이 몰리기 때문일 게다. 지리산자락은 해거름이 짙어오고 있었다. 청학동에서 산청 중산리 쪽으로 길을 잡았다. 청학동은 하동이지만 굴 하나를 건너면 중산리다. 내 눈에는 자꾸 말끔한 고사리 밭이 눈에 들어온다. 고사리 밭이 말끔한 것은 아직 고사리를 꺾고 있다는 증거다.
“엄마, 고사리는 놓아버리세요. 우린 진작 끝냈잖아요.”
“그러게. 이것도 직업병이다. 어딜 가면 고사리 밭만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지리산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왔다. 중간에 맛집에 들려 해물찜으로 저녁을 먹었다. 집에 오니 남편도 혼밥을 먹고 설거지까지 말끔하게 끝내 놨다. 빙긋 웃었다. 아들과 시원하게 맥주잔을 부딪쳤다. 아들과 함께 한 멋진 하루였다. 어미를 배려할 줄 아는 아들이란 것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가족여행은 딸이 방학하고 돌아오면 같이 가기로 했다. 둘이서 날짜를 잡아본단다. 1박 2일이든, 2박 3일이든 알아서 준비하라고 일임했다. 나는 가만가만 아들에게 속삭였다.
“아들, 우리 행복했지? 고마워”
첫댓글 아들과 오붓한 여행에서 행복이 뚝뚝 흘러요~
저도 아들과 코드가 제일 맞는편 이지만, 아직 어려선지 아직은 저만 중한 이기주의자지요
아들과 딸은 장단점이 있어요.^^ 딸은 섬세해서 부모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꼭 챙겨주고 아들은 든든해요. 함께 있으면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 주니 편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