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된 빌라 재건축, 그 어려운 걸 9세대 주민이 해냈습니다
설계 담당한 건축사 이종철·최지안 부부
엘리베이터 없는 30년 된 빌라. 녹물이 나와 수도의 필터 사용은 기본이고, 비가 많이 오는 날엔 누전으로 정전되기 일쑤였다. 층간소음이 심해 위층 거주자의 화장실 소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새집이 절실했다. 깨끗하고 전망이 시원하면서 건물의 가치도 높아져야 했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새집 짓기가 가능할까. 게다가 건축주가
가장 허름한 집으로 통했던 30년된 빌라는 9세대 주민들의 주도로 ‘우리 가족이 살고 싶은 집’이자 동네에서 가장 밝은 집으로 재탄생했다.
이종철(42)·최지안(37) 소장(건축사사무소 이안서우)이 건축주들을 만난 건 3년 전. 막 신축을 결정하고 다수의 건축 관계자들을 만나는 단계였다. 건축주들은 두 건축사에게 오래된 집에 대한 에피소드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건축주들은 앞으로 살고 싶은 공간에 대한 꿈 등 집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만난 다른 건축사는 다들 세금, 사업 규모 등 금전적인 부분을 먼저 언급했었나봐요.”(이종철)
재건축 이전 그늘이 많고 좁았던 빌라(왼쪽사진)와 진입로. 건축사사무소 이안서우 제공
1종 일반주거지라 층수를 욕심껏 올릴 수도 없었고, 빌라 앞 골목도 좁았다. 건축주들은 건물 서쪽 교회 주차장으로 트인 전망을 살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헌집에 대한 ‘원한’만 쌓인 건 아니었다. “30년 전 내가 직접 지은 집”이라 말하는 토박이 건축주도 있었고, 직접 조경 작업을 한 정원과 경사 지형을 잘 살린 기존 디자인에 대한 애착도 컸다. 두 건축사는 한 달 이상 집에 얽힌 각 가족의 역사를 들었다. 경청의 자세가 건축주들의 마음에 들었다고 해서 바로 낙점된 건 아니다. 건축주 9인은 4팀을 대상으로 공모 형태를 띤 “설계 경기”를 열었다.
“저희가 그리는 그림이 무엇인지 볼 수 있는 배치도, 평면도, 단면도, 3D컷과 건축 개요를 담은 계획안을 드렸어요. 건축주 9분이 9표를 놓고 투표했고, 운 좋게 저희가 만장일치로 된 거죠.”(이종철)
“건축주들은 기존 9가구의 평형이 비슷했으니, 새집의 유닛도 공평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일단 트여 있는 서쪽으로 거실 등 주요실을 배치했어요. 도시형생활주택으로 2개 동이 나오는 규모인데, 다른 한 동이 뒤(동향)를 바라보지 않도록 3개의 매스(덩어리)로 나눴죠. 한 가구라도 안쪽에 위치해 환경적으로 불리하다면 그 자체가 공평하지 않으니까요.”(최지안)
기존 빌라가 좁고 그늘이 많아 음습한 느낌이었던 게 마음에 걸린 두 건축사는 3개의 매스 사이로 빛과 바람이 들도록 설계하는 데 주력했다. 채광도 엄연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건축주들의 주문에 따라 서쪽으로 큰 창을 내자 동네에서 보기 드물게 트인 전망이 고스란히 살았다. 최진보 사진가 제공
■문제 제기, 설득, 회의 그리고 투표
만장일치의 설계라 할지라도 원안대로 완공되는 경우는 드물다. 시행사에서 각기 다른 3매스의 레벨을 평행하게 맞춰보자고 했다. 공사비 절감이 목적이었다. PM사의 주요 역할이기도 했다.
“건축하다 보면 이런 일이 굉장히 흔하거든요. 건축가가 생각하는 그림이 시공성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점점 평이하게 변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죠.”(최지안)
‘지하층을 더 파서 주차장을 넓혔으면 좋겠다’ ‘연립주택 사업성이 더 좋다는데’ 등등의 의견이 제기됐다. 갈등 양상이 벌어질 때마다 건축주들은 투표를 했다. 과반수 찬성에 힘을 싣는 목적이 아니라, 설명과 설득을 통해 결국은 9가구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몇백가구 사례였다면 동의하지 않는 소수가 있어도 진행할 수는 있겠죠. 건축주들은 한 분이 반대하건, 두 분이 반대하건 만장일치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물론 고성이 오가고 안 좋은 상황도 있었겠지만,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또 쉬는 시간을 갖고 다시 얘기했어요.”(이종철)
건축주들은 평소에는 단체대화방으로 소통하고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는 공유오피스 회의실을 빌려 모였다.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도 건축사가 만들어온 새집 모형을 보며 건축사의 설명을 함께 들었다. 설계 원안이 얼마나 합리적이며 좋은 집을 짓기 위한 것인지에 대한 브리핑을 들은 건축주들은 원안대로 짓자는 데에 찬성표
기존 25평대 집은 30평대로 조금 넓어졌고 내부 공간은 환해졌다. 최진보 사진가 제공
가장 민감한 절차는 가구 선정이었다. 기존 빌라와 동일한 형태의 재건축이라면 동호수를 유지하겠지만, 규모와 컨디션이 바뀌는 상황이었다. 25평대에서 30평대로 공간은 조금 넓어졌고 사업비 충당을 위해 신규분양용 3가구를 늘려 12가구가 된 상태였다. 대단지 아파트처럼 추첨을 할 수도 없는 일.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지점이었다.
“다들 선호하는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어요. 저층보다는 고층을 선호하기도 하고, 다락이 있던 탑층 거주자는 계속 다락방을 사용하고 싶어 했고요. 일단 가구별 집의 가치에 대해 감정 평가를 받았어요. 그걸 바탕으로 추가 분담금에 대한 고민을 거쳤죠. 가구 선정을 앞두고 매주 회의를 했는데, 서로 양보를 꽤 하신 걸로 알아요.”(최지안)
건축사는 프라이빗하게 정원쓰기 좋은 집, 수납이 좋은 집, 화장실이 더 넓은 집 등 호별 장단점을 공유했다. 설계 당시에는 강박적일 만큼 ‘공평’을 추구했는데, 서로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같은 유닛 안에서도 변형이 가미됐고 결론적으로는 호마다 조금씩 다른 개성이 얹혔다.
‘빌라 드 루’의 주차장 입구. 건물 이름도 건축주들의 투표로 정해졌다. 최진보 사진가 제공
“서로 집을 트레이드하기도 하셨어요. 사실 쉽지 않잖아요, 물건도 아니고(웃음). 결론적으로는 해피엔딩이었습니다.”(최지안)
공사를 앞두고 일부 건축주는 이웃한 빌라로 세를 얻어 이사했다. 매일같이 내 집이 지어지는 과정을 폐쇄회로(CC)TV처럼 지켜봤다. 공사 현장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전송되는 영상을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며 내 집이 지어지는 과정을 즐겼다.
문제 제기, 설득, 회의, 투표 등의 과정을 거치느라 공정은 더뎠다. ‘업자’가 추진했으면 1년이면 끝났을 작업이 두 해를 넘겼다. 그사이 코로나19가 덮쳤다. 재택근무가 늘면서 서재 공간에 대한 일부 레이아웃 변경도 추가됐다. 골조 작업이 끝나고 인테리어 자재 선정을 위해 지하주차장에 모이던 날에는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발열 체크를 했다. 드디어 2020년 ‘빌라 드 루’의 입주가 시작됐다. 다락이 있는 집이라는 뜻을 담은 빌라 이름도 주민 투표로 결정됐다. “다세대는 뭐예요?”라며 기초적인 질문을 하던 건축주들도 건축 전문가가 다 됐다.
대부분의 건축주는 새집에 입주해 살고 있다. “가장 허름한 데 사셨는데 가장 밝은 집이 됐네요”라는 인사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최 소장은 “시선이 너무 겹치지 않으면서도 각 가구가 마주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담아 설계했는데 그 부분을 알아주시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했다. 건축가의 의도대로 주민들은 창문 밖 나무로 계절의 흐름을 읽고, 정원에서 캠핑을 하고 개 산책도 시킨다.
■공동주택도 내 주도로 재건축 가능
오래된 다가구·다세대 주택이 늘고 있는 현실에서 빌라 드 루 프로젝트는 참고할 만한 선례가 될 수 있다. 막연히 재건축을 기다리면서 간단한 집수리조차 유예하며 매일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대대적인 개발붐이나 전문업자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가능하다. 소규모 공동주택의 이웃이 걸림돌이 아니라, 재건축이라는 힘든 여정을 함께할 든든한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는 실례가 빌라 드 루
빌라 드 루의 설계를 담당한 최지안·이종철 건축사. 건축사사무소 이안서우를 함께 운영하는 부부 건축사는 “합리적이고 밸런스가 좋은 건축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강윤중 기자
“금액적으로 보자면, 이 사업은 서래마을(서울 서초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상황이기도 해요. 그러나 하나의 대안으로, 그 과정 정도는 들어볼 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이종철)
보통 개발업체는 땅을 구입하고 원주민을 이주시키고, 일정 규모의 공동주택을 지어 분양한 뒤 빠진다. 분양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주거 공간 자체보다는 수익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복사·붙여넣기 한듯 똑같은 집들이 지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동주택 재건축을 하려면 방향성에 대한 건축주들의 사전 협의가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업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딱 그 수준의 집이 나와요. 만약 추가 가구의 분양이 안 될 경우 그 리스크는 건축주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합니다. 빌라 드 루가 사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건, 모두가 살고 싶은 집을 지으려 했고 그게 시장에서도 먹혔기 때문이에요.”(최지안)
최 소장은 만약 건축주, 시행사, 시공사가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좋다고만 했다면 지금의 결과가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건강하고 투명한 논의 덕분에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최악은 “(다 짓고 나서) 그때 그렇게 할걸” 하는 것이라고 이 소장이 응수했다. 재건축 작업에 참여한 모두가 좋은 파트너로 남았다는 것도 흥미롭다.
입지 외에도 남다른 지점은 있다. 재건축으로 ‘경제 공동체’가 되기 이전부터 건축주들에게는 요즘 공동주택에서 보기 드문 끈끈한 유대가 형성돼 있었다. 누전으로 정전이 되면 릴선을 연결해 이웃집 냉장고부터 살리는 미덕이 있었다.
“많은 건축주를 만났지만, 빌라 드 루 건축주들과는 정말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나는 내 집을 짓는다’는 말씀을 가장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설계비도 정확히 산정해 적절한 비용을 지불하셨고요. ‘설계 경기’에 참여했던 4개팀 중 저희 설계비가 가장 높았다고 들었어요(웃음). 그런 비용에 대해서는 아깝다는 생각을 안 하셨던 거죠.”(이종철)
최지안·이종철 소장은 빌라 드 루 재건축 작업이 의미있었다고 말했다. 강윤중 기자
이종철·최지안 소장은 부부 건축사다. 이 소장은 이로재, 폴리머, 엠오엠 건축사사무소를 거쳤고, 최 소장은 진아건축도시, 나우동인종합, 해안종합 건축사사무소에서 경력을 쌓았다. 최 소장의 출산 후 경력단절 구간을 최소화하자는 취지에서 부부가 의기투합해 2015년 이안서우를 설립했다. tvN <신박한 정리>를 즐겨 봤다는 최 소장은 명쾌함을 좋아하는 성격답게 “합리적이고 밸런스가 좋은 건축을 지향한다”고 이안서우의 지향점을 설명했다. 부부 건축사는 다수의 단독 및 공동주택을 설계했으며, 최근엔 서울문화자원센터(통합수장고) 현상설계 공모에 당선돼 “즐겁게” 작업에 임하고 있다.
두 건축사는 빌라 드 루 프로젝트가 힘들었지만, 의미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자신이 거주하는 환경에 대해 끊임없이 들려주시는 얘기가 저희가 설계를 잘할 수 있는 동력이 됩니다. 건축주와의 합은 정말 중요해요. 그래서 항상 ‘여러 사람을 만나보시고 자신에게 맞는 건축사를 찾으시라’ 말씀드립니다. 내 집 짓는 거, 정말 즐겁잖아요.”(이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