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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묵상글 ( 대림 제4주일. - 내가 원치 않는 것,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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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22 04:10
- 내가 원치 않는 것,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성탄이 가까이 오면 전례는 주님의 오심을
직접적으로 준비하고 맞이한 인물들에 대해 얘기합니다.
주님 오실 길을 앞서 닦아야 할 세례자 요한의 부모에 관한 얘기와
주님의 부모가 될 요셉과 마리아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
대림 4주일의 전례는 그중에서도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상봉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두 분은 친척 간인데
하나는 늙은이이고 하나는 애송이를 갓 벗어난 아가씨입니다.
너무나 대조되는 두 분의 공통점은 애를 낳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고
그런데 지금 애를 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분의 상봉을 상상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할망구가 뒤늦게 임신하여 벌써 여섯 달이 되었고
처녀 마리아가 찾아왔을 땐 이미 배가 많이 불러 배를 내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마리아의 문안을 받는 엘리사벳이 인간적으론 많이 부끄러웠을 겁니다.
늙은이가 주책바가지이지 애를 배고 있으니 말입니다.
옛날에는 많이 있었던 일이지만
어머니가 며느리와 같이 애를 낳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그때 시어머니는 너무 부끄러워 애를 제대로 건사치 않아
며느리가 도련님 젖까지 먹이곤 하였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오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때 우리는 뭐가 잘 못 돼서,
또는 내가 무엇을 잘 못 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어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봐야 하고
생명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렇게 봐야 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인간적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임신을 한 분들이고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임신을 한 분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두 분의 임신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에 의한 임신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 인간적인 부끄러움이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바치는 성모송을 기쁨에 넘쳐 부르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이라고 성모를 칭송합니다.
그러나 이런 칭송은 성모 마리아께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벳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분이고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도 그렇게 믿고 받아들인 분들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싫고 두렵지만
하느님 때문에 받아들이면
성령이 임하고
그 성령으로 마리아처럼 주님을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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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강원도 춘천의 한 거리에서 맥주 2,000병을 싣고 가던 트럭의 적재함이 열리면서 순식간에 길이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쏟아지며 깨진 맥주병 때문에 자칫 2차 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이 상황은 소동이 일어난 지 30분 만에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해결의 시작은 사고를 우연히 지켜보던 시민들의 자발적인 청소였고, 인근 가게 주인까지 빗자루를 들고 나와 동참했습니다. 이렇게 30분 동안의 청소가 모든 상황을 종결했습니다. 이를 기사화한 2022년 6월 30일 자 중앙일보 기사는 이렇게 마지막 문장을 남겼습니다.
“사태 수습을 도운 시민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각자 갈 길을 떠났다.”
이것이 함께 사는 세상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세상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 이익이 먼저라고 생각하면서 사랑 실천에 무관심으로 대응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이 세상이 더 각박한 세상이 되어가면서 힘든 세상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우리 모두 이 사랑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자기 갈 길을 떠나야 합니다. 보상을 세상이 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분명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임신한 두 여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 모두 임신으로 인해 큰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처녀의 몸으로 잉태했다는 사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어려움과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상태에서 두 분이 만납니다.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는 ‘아인카림’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계셨던 나자렛에서 150km나 떨어진 먼 고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먼 거리까지 찾아온 성모님에게 엘리사벳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성모님도 엘리사벳에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큰 힘이 되면서, 지금의 어려움이 피해야 할 일이 아닌 오히려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이었음을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인정받으려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혼자서는 하느님의 일을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 힘이 되어 주면서 하느님의 일이 우리와 함께 이루어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대림초의 모든 불을 밝히는 대림 제4주일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나요?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주님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어떤 사람은 자기가 늘 불행하다고 자탄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행복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이다(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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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대림 제4주일입니다. 성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오실 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며, <복음>에서는 ‘오시는 분’이 어떻게 오시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오실 분’에 대한 네 가지 정보를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분은 ‘보잘 것 없는 작은 고을 베들레헴’(미카 5,1)에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는 인간의 능력에 따라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오신다는 사실이요, 둘째는 “해산하는 여인의 아기”(미카 5,2)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셋째는 “목자로 나서리라.”(미카 5,3)는 것, 곧 그분께서 백성을 인도하고 먹여주고 보호해주고 안전하게 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넷째는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미카 5,4)는 것, 곧 그분께서는 평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평화이신 당신을 건네 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오시는 분’이 짐승의 피로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놓으실 ‘대제사장’으로 오실 것이요, 그것은 ‘당신의 뜻’이며 바로 그 뜻을 이루러 왔다(히브 10,7)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2독서>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라는 말씀의 실현을 보여줍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문장에 다 같이 들어있는 말은 “이루다”는 단어인데, 앞 문장에서는 능동형으로, 뒤 문장에서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오시는 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안에서 그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며, 우리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응답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이 당신의 뜻에 따라 일하시도록 수락하고 승복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이 주인이 되시어 일하시도록 허용해드리는 일이요,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신뢰의 극치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고 이해하고 명확하게 알고서 응답하려 합니다. 마치 “하느님의 뜻”을 확실히 알기만 한다면 그것에 응답할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마음이 불신에 가려졌거나, 그 뜻을 알아야 하는 자신을 앞세우거나, 자신이 그 뜻을 이루고 싶어서 “하느님의 뜻”의 불확실성을 탓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뜻”은 본질적으로 계시되어 있지만, 동시에 신비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한 뜻’(마태11,26;루카10,21)을 지니신 주님의 사랑과 호의에 의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마더 데레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영성 안내자로 살아가고 있는 존 캐버너가 자신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캘커타에 봉사활동 하러 갔을 때에, 수녀님께서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존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 되물었습니다. “무엇을 기도해 드릴까요?” 존이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당신이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존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또한 믿고 있는 분처럼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수녀님께서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한 번도 확실하게 알고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사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느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길’은 우리가 이끌려가게 될 곳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 목적지를 알려주거나 지도를 마련해 주지도 않으면서 “떠나라”라고 하셨고, 그는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지만 신뢰로 믿음의 길을 갔었듯이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이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믿음의 길은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의 동행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의 선한 뜻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 모범을 보여주었던 샤를르 푸고의 기도를 함께 드려 봅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제 영혼을 바칩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이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알고 이해하기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행할 때 실현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밝혀주고 있는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뜻이나 바람을 이루어진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저를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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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한없이 주고 싶어서 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고 그 아들을 통하여 구체적인 사랑을 체험케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마리아라는 한 인간의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이 시간 믿음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는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쳤습니다(히브11,17).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느님을 온전히 만났습니다.
번제물을 바치러 산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아들 이사악이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물음입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데 아들이 그 제물이 어디 있느냐? 고 묻는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차마 ‘제물은 바로 너다’ 하고 말하지 못합니다.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죽이려 할 때 천사가 나타나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 아이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말합니다.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이레” 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의미입니다(창세22장).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주님께서는 롯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천사들을 통해 그 가족들의 살길을 알려줍니다. 롯의 사위들은 그 소리를 우습게 여겼고, 천사들은 결국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말했습니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창세19,17). 마침내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퍼부어졌고 온 성읍들과 온 들판들이 땅 위에 자란 모든 것들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창세19,26). 돌아보지 말라고 했으면 돌아보지 말아야죠. 왜 돌아봅니까?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 살려주신다고 길을 알려주었는데 그대로 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서 벌을 내렸다고 원망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민수기 21장4절 이하에는 구리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대바다로 가는 길에 들어서서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21,5). 그러자 주님께서 불 뱀을 보내어 그것들이 백성들을 물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죽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뱀을 치워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하자 주님께서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놓았습니다. 뱀에게 물렸어도 그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민수21,9).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에서 멀어집니다. 이 죽음 역시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정말 믿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갑니다. ‘서둘러 갔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마리아에게 신앙은 알고 있는 지식과 마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입니다. 신앙에 ‘어영부영, 우물쭈물, 할까말까’는 없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를 알면서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말하였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대로만 움직여야 합니다. 종에게는 주인에 대한 의무만 있을 뿐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종을 자처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고 빛이신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이 말한 대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에” 행복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사람은 성모님을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이기 때문에 행복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9). 이 말씀은 행복하려면 ‘말씀을 품고 살아라’ 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이리저리 계산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때 상상하지 못했고,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 바를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노력하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1코린 15,58).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안에 주님의 탄생을 가져왔듯이 이제 우리의 믿음으로 이 세상에 구세주 예수님을 낳아드려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빛이 되어, 또 하나의 작은 예수님이 되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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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 신자임을 드러내는 도구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묵주’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은 자동차 안에 ‘묵주’를 걸어 놓기도 합니다.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기도 합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주해를 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꾸르실료 교육의 봉사자들도 늘 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면서 봉사합니다. 저도 손에 묵주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성지순례를 할 때면, 버스 안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의 전구로 안전한 성지순례가 될 수 있도록 청하였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묵주기도의 신비"라는 회칙을 발표하며 "빛의 신비"를 추가하였습니다. 이제 묵주기도는 20개의 신비(환희, 빛, 고통, 영광)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울 대교구는 2027년 세계 청년대회를 위해서 묵주기도 10억 단을 봉헌하기로 했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3주간 대림 시기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신앙인은 두 가지 차원의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물리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우주의 역사는 150억 년,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며, 구세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깨어있다는 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가난한 이들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깨어남입니다.
대림 제2주일의 주제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로 정했습니다. 사람은 성별, 이념, 세대, 피부색, 계층으로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이, 가장 헐벗은 이, 가장 아픈 이, 감옥에 갇힌 이에게 사랑을 주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과 언덕은 평평해지고, 골짜기는 메워질 것입니다.’ 원의 중심에서 원의 둘레는 모두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같습니다. 지위도, 능력도, 업적도, 학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만, 욕심, 허영, 이기심이라는 언덕과 산을 깎아내려야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나눔, 헌신, 희생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대림 제3주일의 주제는 ‘자비’입니다. 자비의 또 다른 말은 ‘공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시는 이유는 바로 ‘죄, 악,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유도 나의 죄를 대신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공감의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선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은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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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제 취미 중 하나는 연극이었습니다. 연극을 보는 것도 좋아하고 또 직접 연기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신학생 시절 연극에 빠져서 산 때도 있습니다. 제 첫 작품의 제목은 ‘크리스마스 죽이기’입니다. 제가 맡은 역할은 악마 우두머리였습니다. 주인공은 4명의 건장한 악마입니다. 그 악마들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크리스마스를 없앨 계획을 세웁니다. 여러 가지 방법들을 냈는데, 이런 의견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첫째, 지구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크리스마스를 지내지 않을 테니까요.
두 번째, 가족들 사이에 분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들이 좋기는 한데, 일회적이라는 데에 모든 악마가 동의하였습니다. 한번 쓰면 또 쓰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때 막내 악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축제로 만들면 어떨까요?’
저를 포함한 다른 악마들은 ‘바보’라고 놀렸습니다. 그런데 막내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축제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흥청망청 놀고, 먹고 마시게 하고, 술에 취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즐기게 하면 자연히 크리스마스는 주님이 오신 날이 아닌, 그냥 노는 날, 쉬는 날이 되리라는 것이었지요.
악마들은 이 의견에 합의했고, 사람들을 유흥과 술에 취해 즐기게 하자고 단합하여 연극을 마치게 됩니다.
엘리사벳이 오늘 마리아에게 ‘당신은 행복하시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놀아서도 아니고, 쉬는 날이어서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겠다고 말한 것이지요!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무엇입니까? 그냥 축제라서 기쁜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에 기쁜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기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볶음 카레
저는 카레를 좋아합니다.
밥이랑 함께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카레만 먹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 안에 모든 재료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채소도, 고기도….
그런데 카레를 조금 색다르게 즐길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매일 만드는 그런 방법 말고요.
우선 재료 준비는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재료들을 준비한 후 먼저 기름을 충분히 두른 웍에 고기와 채소를 볶아주세요. 당근도 감자도 고기도 다 익을 때까지 볶아주세요.
카레 가루는 물을 첨가해 되직하게 만들어주세요. 이 되직한 카레 물을 다 볶아진 채소와 카레에 섞어주세요. 그리고 다시 볶아주세요. 그렇게 한번 신나게 볶아낸 후 밥과 함께 비벼 드세요.
지금까지 먹던 카레와는 또 다른 맛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똑같은 매일매일 안에 가끔은 변화와 새로움이 필요합니다. 그 변화와 새로움이 우리에게 활력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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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키엣 대주교님.
세상의 모범이신 성모님
폭설이 쏟아지는 어느 추운 겨울 밤, 술에 취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술집 밖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10살 어린 아들이 아버지가 남긴 눈밭의 깊은 발자국 위에 작은 발을 올려놓으며 비틀거리며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천천히 걷는 아들을 보고는 거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잘 걷고 있냐?”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네, 저는 아버지를 따라 잘 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 앞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이들에게 어떤 모범이 되고 있습니까?
교회는 인간의 깊은 사랑, 아름다운 발걸음을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발걸음,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랑이 가득한 발자국, 사랑과 봉사에 대한 성모님의 헌신의 발자국에는 세상의 냉정함을 따스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그 어떤 교리나 말씀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단지 사랑과 순명의 빛나는 모범만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성모님의 삶은 세상에 남겨진 아름다운 역사의 한 페이지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뜻을 버리는 삶,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집중한 삶, 고통의 삶이었지만 성모님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견디셨습니다.
우리 각자는 일치와 평화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은 이기심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화와 기쁨, 행복을 가져 다 줍니다. 사랑이 없다면 인생은 메마른 시냇물과 같습니다. 흐르지 않는 강, 서로에게 활력도, 생명의 원천도 될 수 없습니다. 나와 너의 삶이 보살핌을 받고 보호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인생이 충만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어딘가에는 사랑에 울고, 버림받은 사랑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어딘가에는 사랑이 부족하여 분쟁과 전쟁과 증오가 남아 있는 곳이 있습니다. 아직도 어딘가에는 사랑의 물 줄기가 흐르지 않아 여전히 의심과 비난, 오해, 질투가 남아 있습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나보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고, 그를 위해 헌신과 사랑의 밝은 촛불을 밝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성모님, 우리 형제들을 향해 걸어가는 사랑의 발걸음에 성모님께서 언제나 함께 해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이번 성탄절 예수님께서 세상에 전하시는 메시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사회와 세계의 평화는 내 마음의 평화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3. 지금 나의 만남들은 나는 물론 그에게도 기쁨의 만남이 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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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겸손, 순종, 섬김”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 모든 이가 갈망하는 이여,
두벽을 맞붙이는 모퉁이돌이시니,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인간을 구원하소서.”
대림 제2부, 오늘 12월22일의 애절한 "오후렴"입니다. "마라나타!" 예수님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우리 인간을 구해달라는 간원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어떤 분입니까? 바로 우리의 길잡이가, 인도자가 되는 분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되시는 분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두가 되시는 분입니다. 도대체 예수님 아니고는 누구를, 무엇을 이 자리에 놓을 수 있을런지요?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라"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평생 우리 삶은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따라야 할 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제가 다음과 같이 자주 즐겨 고백하는 분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어제 뜻밖의 책 선물도 각별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빠는 아니지만 “아빠! 아버지!”(로마8,15)라 부르는 하느님을 닮은 수도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꼭 읽어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 5분, 아빠 목소리” 책 제목에, ‘태교 동화를 읽는 시간, 지혜를 배우는 아이’ 였고, 이어 ‘마음과 생각이 함께 자라는 이야기, 나답게 크는 이야기, 세상을 꿈으로 채우는 이야기’ 세부분의 제목도 아름다웠습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탄생 전 요셉의 태몽, 마리아의 태몽,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아름다운 만남이 태중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태교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었겠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옛 어른이 지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바닥으로 내려갔을 때, 그 사람의 바탕이 드러난다.”<다산>
“날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더디 시듦을 알게 된다.”<논어>
예수님의 진면목은, 바탕은 바로 사랑임을, 소나무, 잣나무잎처럼 끝까지 남아있는 독야청청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겸손과 순종, 섬김의 사랑으로 요약되는 예수님의 본모습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보고 배워야 할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 그리고 섬김의 사랑입니다.
첫째, 사랑의 겸손입니다.
사랑의 표현이 겸손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천명하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예시되는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그 아득한 옛날 미카 예언서의 말씀이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탄생할, 동시에 모시고 살고 있는 예수님의 묘사같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올라간다....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외관상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탄생지 베들레헴이 상징하는바, 예수님의 “작음, 겸손, 온유, 착함, 평화”입니다. 험하고 거친 광야와 같은 세상,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운 덕목들인지요! 이래서 "우리의 착한 목자 겸손한 예수님"이라,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존재자체가 겸손이신 분, 평화이신 분, 바로 예수님입니다.
둘째, 사랑의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의 모범입니다. 사랑의 자발적 순종입니다. 사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일에 순종이 생활화될 때 마지막 순종의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도 가능합니다. 참영성의 표지가 순종이요, 예수님은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순종의 여정은 그대로 비움의 여정이 됩니다. 모전자전, 그대로 "예스맨"이신 마리아 어머니의 순종을 닮았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도 이를 입증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어머니 마리아의 고백을 닮았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이루러 세상에 왔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순종의 삶, 그대로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 진리에 순종합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순종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명명했던 성 아우구스티노, “진리의 협력자”라 명명했던 베네딕도 16세 교황도 생각납니다. 심지어 불교의 대선사 고 성철스님도 “진리에 몸바치는 삶”이 당신의 좌우명이라 했습니다.
셋째, 사랑의 섬김입니다.
섬김 역시 참 영성의 표지입니다. 우리에게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뿐이요,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하나뿐입니다. 예수님 역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설파하셨습니다. 고 이형우 아빠스의 모토도 “서로 섬기자(Serviamus invicem)”였고 "나는 공동체의 심부름꾼"이라 고백했던 취임식때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공동체를 섬기는 심부름꾼이 바로 장상입니다.
오늘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 어머니의 모습이 심상치 않습니다. 나이 적은 분이 연장자를 찾아가는 것이 예의이기도 하지만 주님의 어머니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함축합니다. 바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모범을 보여 주시듯 태중의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을 찾아 오신 것이지요!
성모님을 통해 태중의 예수님의 섬김의 사랑에 감격한 엘리사벳이요, 즐거워 뛰노는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입니다. 엘리사벳의 성령충만한 기쁨과 감격의 고백은 늘 들어도 참신합니다. 사랑의 표현이자 믿음의 표현이 바로 섬김입니다. 섬김은 바로 사랑의 척도요 믿음의 척도가 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모전자전, 성모 마리아의 믿음의 순종과 섬김을 고스란히 닮은 예수님이요, 오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태중의 예수님은 물론 요한에게도 참 좋은 태교가 됐을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 모습은 겸손과 순종, 섬김으로 요약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주님의 길을 잘 준비하도록 합시다. 바로 겸손과 순종, 섬김의 삶에 정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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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에게>
하느님께서 내 안에
내가 하느님 안에
비할 데 없는 행복에
머물고픈 바로 그 순간
외로운 벗 하나
더욱 눈에 밟혀온다네
서둘러 달려가
품에 안을밖에
내 안의 하느님께서
하느님 안의 내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걸음에 달려갈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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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대림 제4주일이며 예수 성탄 대축일 준비의 절정에 이르는 시기입니다. 지난 대림 3주일의 복음이 기쁨에 대해서 얘기했다면 오늘 대림 4주일의 복음은 행복에 대해서 말합니다. 기쁜 성탄 준비를 위해 마리아와 같이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복음은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가장 복된 여인으로 칭송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의 순종적인 참된 겸손과 마음의 평화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리아의 마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겸손을 바라보면서 구체적으로 우리는 삶안에서 어떤 겸손을 지녀야 하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보호하려 하고 그 사람을 위해 책임을 지려하며 다른 사람의 약점을 참아주려하고, 특히 그와 함께 행복과 불행을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나와 다르고 낯선 사람을 위한 투신의 삶, 다른 사람의 힘든 처지를 받아들일 줄 아는 개방된 자세, 아무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의 삶을 긍정하는 마음가짐입니다.
또한 마리아의 기쁨안에 담겨져 있는 평화로운 모습속에서 복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평화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음은 행복에 이르기 위한 길입니다. 평화로움은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고 감사하는 힘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쁨과 슬픔이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평상심입니다.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동요하지 않고 순종하는 마리아의 평화로운 마음처럼 어떤 고통과 박해에 직면해서도 두려움을 갖거나 동요하지 않는 마음의 평화를 간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 아오스딩의 고백처럼 하느님과의 근본적인 사랑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행복의 가장 올바른 정의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완전한 자기실현의 결과이며 자기의 부족함을 먼저 각성하지 않고는 완전한 자기실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서 참된 행복에 이르지 못합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삶을 사는 길 말고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참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체험에서 이러한 행복을 발견합니다. 성 아오스딩은 “삶의 참된 행복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가장 완전하고 가장 행복한 구원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참으로 행복할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이미 와 계심을 말해 주는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마리아 처럼 모든 일을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겸손의 사람,
어떤 고난과 역경에속에서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
그리고 하느님 사랑으로 모든이들 대하고 모든 일을 해 나가는 사람이 될 때
마리아처럼 진정 복된 사람이고 그 사람안에 아기 예수가 잉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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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도(聖徒) 이야기
앞서는 두 개의 주를 가지고 있는 운터발덴(Unterwalden)이 언급되었다. 이 운터발덴은 작은 세모꼴의 나라이다. 이 나라는 엔겔베르크(Engelberg) 산을 통해서 이탈리아와 접해 있었다. 이 산은 옛날에 천사의 요청으로 이 곳에 수도원이 세워졌다 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과 인접한 곳에는 다른 높은 산이 우뚝 서 있다. 이 산은 프락콘트(Frackont)라 불리우며, 그 끝이 구름에까지 뻗어 있기 때문에 보통은 빌라도산(Pilatusberg) 이라고도 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 산의 꼭대기에는 작은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이 호수에서 천국에 가지 못한 본시오 빌라도가 악마에 사로잡혔었다고 한다. 갈리엔(Galien : 프랑스)과는 브뤼니히(Brunig)가 인접해 있는데, 이 브뤼니히는 그 끝이 별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상당히 높은 산이다. 이 산은 사방이 트여 있어서 건너서 넘어갈 수 있었다.
내 생각에는 이 나라가 양 측면, 가파른 계곡 기슭에 커다란 숲이 놓여 있고, 그 숲속 깊은 곳에 이 나라가 있어서 기름지고 초목이 무성하기 때문에 운터발덴이라 불리게 된 것 같다. 이 나라는 호수와 목초지, 그리고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 많다. 또한 이 나라는 비르질리우스 (Virgilius)가 노래하고 있듯이 커다란 숲을 중심으로 둘로 나뉘어져 있다.
“도시 가운데는 쾌적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숲이 있다" 이처럼 그는 카르타고(Karthago) 쪽의 높은 봉우리에 대해서 노래 한다.(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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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혹여 읽었거나 들어서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세계적인 지휘자로 명성이 높은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교향악단 단원들과 연습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연습을 훌륭히 마치고 단원들은 토스카니니의 열정적인 지휘에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그에게 일제히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박수갈채와 환호가 멈추자, 토스카니니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박수갈채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바로 베토벤입니다.” 그렇습니다. 토스카니니의 겸손한 표현처럼, 세례자 요한도 박수갈채와 환영을 받아야 할 분은 자신이 아니고 예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대림 시기의 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분이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실 때가 되자 자신의 임무가 끝났음을 알고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기에 자신이 머물고 있던 과거의 자리로 물러나 예수님께 새로운 자리를 기꺼이 내어드립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또 다른 훌륭한 조연인 엘리사벳 역시 메시아의 오심을 깨닫고 기쁨으로 성모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잉태한 어머니 마리아께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두 분께서 상봉하는 대목을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본디 아이를 갖지 못했던 여인인데 하느님의 돌보심으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합니다. 한편 마리아는 동정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지요. 그런데 혼인 이전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왜 엘리사벳을 찾아갔을까요 ? 누군가의 보호와 격려가 필요했기 때문일까요 ? 엄청난 사건을 겪었다는 동일한 처지에서 만들어진 연대감이 마리아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이끌었을까요 ? 어쨌든 하느님의 신비하고도 놀라운 계획을 몸소 체험한 두 사람의 만남 또한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한 일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서둘러> 엘리사벳의 집으로 갔다고 루카는 전합니다.(1,39)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유다 산악 지방으로 올라갔으니, 사나흘쯤 걸리는 거리로 젊은 처자라고 해도 쉽지 않은 여행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여행길을 나선 것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마리아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단초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인사하자,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놉니다. 그리고 엘리사벳도 기뻐하며, 성령으로 마리아가 임신한 아기가 온 인류의 주님이심을 알아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1,44) 장차 태어날 요한이 오실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처럼, 엘리사벳도 마리아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에게 자신을 낮춥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께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1,42)하고 고백합니다. 우리 또한 매일 성모송을 외울 때마다 엘리사벳과 동일한 마음으로 어머니 마리아께 인사해야 합니다. 여기서 엘리사벳이 언급한 마리아의 복됨은 세속적인 의미의 복됨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잣집 딸로 태어나서 아쉬운 것 없이 호강하고 자라서 대학 졸업한 여자, 돈 잘 벌고 지위 높은 신랑을 만나서 똑똑한 자녀들을 낳고 여유 있게 사는 여자들을 복된 여자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런 부류의 여자들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어머니 마리아의 일생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고 십자가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엘리사벳으로부터 그리고 오늘 우리로부터 복된 여인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복됨은 무엇입니까?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말대로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리라 믿었기에 복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비워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기에 복된 여인이 된 것입니다. 마리아가 구세주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신 것은, 아름다운 얼굴과 단정한 용모 그리고 남다른 재능과 재주 흑은 상당한 재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 구원사업의 도구로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은 마리아가 이런 것들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과 겸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마리아의 겸손과 믿음이, 닫혔던 하늘의 문을 열게 하여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 땅에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마리아의 복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처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1,38)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 역시 자신을 비우는 겸손한 사람, 그리고 하느님의 손길에 자기 자신을 모두 내맡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리아의 믿음과 겸손을 통해서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듯이,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기 지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 신앙인들의 참된 믿음과 겸손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성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믿음으로 이집트의 재상이 될 수 있었고, 모세는 믿음으로 이집트 파라오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소년 다윗은 믿음으로 골리앗을 쳐 이겼습니다. 마리아 역시 믿음으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어 이 땅에 새 역사의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믿음으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굳건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참된 믿음을 지닌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아는 겸손한 사람이 하느님 앞에 겸손할 수 있고 세상에 대해서 관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고신 극기를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겸손한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만큼 세상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믿음과 겸손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어 역사하십니다.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믿음과 겸손으로 자신을 가꿀 때 하느님의 사랑받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저를 포함해서 오늘 현대인들은 믿음도 없고 겸손함도 없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 대신에 돈과 권력을 섬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2012년 12월 22일은 마야 달력으로 세상 종말의 날이었지요. 그로 인해 중국에서는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고 하더라고요. 또한 첨단 과학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도 없고 겸손함도 없는 인간들 가운데 하느님은 언제나 침묵하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는 곳에, 하느님께서 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기고만장한 인간들의 오만함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오만과 불신앙이 초래한 불행한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향락과 안일을 추구하면서 돈과 재물의 위력을 믿고 과학 문명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 믿는 오만한 현대인들 가운데서 이러한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우리는 염려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제 곧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하신 이유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마리아가 복된 여인으로 칭송받는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작고 약한 어린 아기로 탄생하셨는지 그 신비를 묵상해 봅시다. 지금은 믿음과 겸손으로 우리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실 자리를 마련하는 시간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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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자신만의 차분한 기다림의 시간을 /
박윤식 [big-llight] 241221. 17:48 ㅣNo.178658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다림이다. 부랑자 두 사람은 나무 밑에서 하염없이 ‘고도(Godot)’를 기다린다. 누구인지, 또 언제 올지 모르면서. 구원자일 거라는 추측만 할뿐. 그가 오지 않자, 그들은 나무에 목매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 끈이 끊어져 실패다. 그때 누가 내일 목을 매자기에, 다른 이가 "만일 온다면?"하고 묻는다. 그러면 그때는 "구원되지."라고 답한다. 그들은 간절히, 더 오랜 기간 구원해 줄 ‘고도’같은 이를 기다렸단다.
이처럼 인간은 나약하고 불안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때로는 그 어려움이나 고통을 되도록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조바심으로 서두르는 것 같다. 이는 자신의 고통을 다른 이에게 드러내는 것을 약한 모습이라고 여기기에. 그래서 가끔 있는 고통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힘든 일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혼자 감당할 경우, 때로는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안기리라.
천사가 다녀간 후 마리아는 길을 떠나 유다 산골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그때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그녀는 성령이 넘쳐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이 들리자 저의 태 안의 아기마저 즐거워 뛰놉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렇게 마리아는 임신 육 개월이 훨씬 지난 엘리사벳을 찾았다. 늦둥이를 잉태한 그녀와는 달리, 남자도 모르고 아기를 잉태한 처지이다. 아마도 마리아는 기쁨은커녕 불안과 초조함으로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리라. 그런 마리아를 그녀는 따뜻하게 위로한다. 두 여인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이해하기 힘든 일을 서로 위로하며 시간을 보냈을 게다. 서로를 버텨 주고 용기를 주는 새로운 삶의 ‘버팀목’을 찾으려는 우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얼마나 다정한 위로인가?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찬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정말 큰 힘이 되었을 게다. 사실 내가 어려울 때, 누군가 내 곁에 마냥 있어 주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때로는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해 주어야만 할게다. 이처럼 고통과 슬픔, 병이나 연약함은 혼자만이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니다. 다른 이에게 힘을 주는 존재라면, 나는 더 큰 힘을 받으리라.
이처럼 하느님께서도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러 이 땅에 오실 때에 정말 치밀했다. 먼저 남자를 모르는 수줍은 마리아의 동의를 구하고자 가브리엘 천사를 나자렛으로 보내 설득했다. 그녀와 약혼한 요셉을 면담으로 다독이기는 거북해, 꿈에서 양해를 구했다. 또 길잡이 요한을 앞서 보내고자 사제 즈카르야에게도 통보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를 유다 산골 엘리사벳에게 보내, 태중의 두 아이 만남을 사전에 성사해 메시아 탄생 예고를 최종 ‘리허설’로 확인까지 한다. 그렇게 하느님의 ‘예수’라는 이름으로 지상 순례의 여정을 계획하실 때 참으로 치밀했다.
우리도 때로는 지친 몸 이끌고 조용한 곳에서 묵상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갖자. 누군가가 그리워 질 때, 만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자. 이렇게 오늘을 사는 우리는 가끔 자신을 되돌아보도록 하자. 지난 일들을 묵상하며 다가올 일들을 차분히 준비하는 시간 만들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우리에게 오실 ‘기쁜 성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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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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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마리아의 인사를 받은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여기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예수님께서 복되시다고 말합니다.
'복되시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좋게 말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마리아와 예수님을 좋게 말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즈카르야의 노래에도
이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찬미받으소서'라고 번역되었고
그 대상은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입니다.
즈카르야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말을 시작합니다.
즈카르야가 하느님께 사용한 단어를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예수님께 사용합니다.
이것은 엘리사벳이 이미 예수님을
하느님과 같은 찬미의 대상으로 보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말 '내 주님의 어머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표현으로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같은 단어가 마리아에게도 향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하느님에 대한 것과 마리아에 대한 것을
구분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신앙의 대상이지만
마리아는 공경의 대상입니다.
그럼에도 엘리사벳이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사실에서
하느님께 향하는 찬미를 같이 받게 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도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잉태할 때
우리도 마리아처럼 그 찬미를
함께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과 함께 그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도 예수님을 잉태해야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살아가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 노력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영광을 우리에게 줄 것이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엘리사벳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참행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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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추운 겨울의
여정 안에
우리의
성탄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행복이
절실히
필요한 요즘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의
삶 앞에
임박한
하느님의
성탄입니다.
성탄의 길은
마리아의
길입니다.
마리아의 길은
말씀의 길입니다.
말씀의 길은
정신의 길입니다.
정신의 길은
뜻을 따르는
뜻의 길입니다.
뜻의 길은
행복의
길입니다.
행복의 길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함께하는
협력의 길입니다.
협력의 길은
진심어린
기도의 길입니다.
기도의 길은
참된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의 길은
사람이 되는
성탄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말씀으로
희망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의
성탄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성탄은
말씀과 함께
이루어지고야 말
구원의 뜨거운
시작입니다.
그 시작을
간절히
기다리는
뜻깊은
대림 제4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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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봅시다!
인간적 시선으로만 바라보면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이제 겨우 열서너 살 된 천진난만한 소녀 마리아가 아이를 가져 난감한 상태였습니다.
나자렛에 그대로 있자니, 동네 우물가 아낙네들의 입방아를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겠죠.
엘리사벳 역시 삶을 잘 마무리해야 할 노년기에 아이를 가져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기상천외한 일이었기에, 엘리사벳은 바깥출입도 않고 숨어지냈습니다.
이런 두 여인이 오늘 아인카림에서 만나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노래를 주고 받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둘 다 맛이 갔구나, 하면서 혀를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루카 복음사가는 믿을 수 없는 일을 믿는 소녀와 놀라운 기적을 이루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파를 경이로운 시선, 기쁨과 찬미의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사건을 성령의 바람을 탄, 단순하고 가벼운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특별한 체험을 한 그들이었지만,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보며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며, 복잡한 마음을 단순화시켰습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인류 구원을 위한 청사진에 기쁜 마음으로 호응하며, 전폭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 결과 맑은 정신, 깨어있는 마음으로 안갯속같이 희미한 자신의 신앙 여정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순탄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야 합니다.
단순해야 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때 삶에서 마주치는 작은 것들 안에서도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본보기가 되어주신 마리아와 엘리사벳에게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우리도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봅시다.
때로 너무나 나와 다른 그이기에 잘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유심히 바라볼 때, 그 안에 현존해계시는 하느님을 명확히 뵐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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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엘리사벳의 이 말은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의 느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의 전례는 깨어 기다림의 표본이 되시는 마리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복음 전 노래를 부른다. 이 마음의 자세는 새로운 강생의 기적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필요한 자세이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태어나시지 못한다면 이 성탄은 나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미가서는 유다의 땅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예언의 내용이다. 오늘 복음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벳 모두가 아기의 출산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내용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게 집중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태중에서 뛰었다는 것은 역사가 이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서둘러 간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29절)은 나자렛에서 150km 이상 되는 예루살렘 서쪽 6km 지점에 있는 ‘아인카림’(Ain-Karim)이다. 마리아가 이 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이 컸었음을 말해 준다.
마리아가 걸음을 서둘러 길을 떠난 것은, “그 예언을 의심해서이거나 천사가 알려준 내용이 불확실해서거나 그 증거에 대한 의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기뻤고 바로 그 내적인 기쁨에서 오는 열정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총으로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S. Ambrosius, In Lucam 2,19). 곧 해산하게 될 늙은 친척을 돕기 위한 이 먼 여행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강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보다 힘든 여정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41절)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마리아를 만났을 때는 이미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인식하고 있었다(43절). 그리고 성서는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를 구약의 계약의 궤와 같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엘리사벳은 자기 집으로 그 하느님의 현존이 옮겨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큰 소리로 마리아께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42절) 분이라고 찬양한다.
마리아가 이렇게 위대하게 된 것은 그녀의 신적인 모성(母性)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이 주어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완전한 신앙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신앙으로 ‘계약의 궤’가 되었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여기서 엘리사벳은 최초로 축복의 인사를 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아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5절). 이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언자를 거쳐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흘러 내려온 이 신앙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하느님의 위대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하신 대로’(루카 1,38)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그분께 온전히 맡겨드림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알고 또 그렇게 실천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보다도 더 온전히 당신을 아버지께 의탁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바치시기까지 하셨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뜻을 항구히 아버지께 봉헌함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희생을 실현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을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주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이 희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곧 다가오는 성탄의 축제를 통해 거행하게 될 강생의 신비는 근본적으로 파스카 신비에 정향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은 성금요일의 희생적 봉헌을 위한 것이며, 부활 날 다시금 그 몸을 둘러싸게 될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치 엘리사벳이 한 것처럼 마리아도 받아들이게 된다. 마리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삶을 본받을 수 있을 때, 즉 ‘길을 떠나 서둘러’(루카 1,39) 이웃으로 향할 수 있을 때, 비록 그 여정이 험하고 고통을 수반하겠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즉 사랑을 낳아줄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또한 십자가의 신비와 파스카의 기쁨도 아울러 충만히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쁨 때문에 우리는 더욱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릴 수 있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리아께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아 주실 수 있었던 그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그 삶을 본받아 실천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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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물의 세례를 받지 않고 불의 세례를 받으면 벌어지는 일
어떤 사람이 그릇 빚는 노인의 숙달된 솜씨와 작업대 위에 얹혀있는 갓 빚은 옹기들에 대하여
감탄하면서 감상했습니다.
모두가 근사하고 멋있는 모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옹기장이의 그 모든 수고가 헛되이 끝나 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옹기들이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 일부 그릇들이 금이 가고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왜 어떤 것들은 금이 가고 깨어지는지 알기 위해 옹기장이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습니다.
“같은 흙을 사용하면서 당신이 어느 것은 잘 빚고 어느 것은 못 빚었습니까?
아니면 어느 것에다가는 더 수고를 기울이고, 어느 것에는 수고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릇 만드는 과정에서 어느 것에는 어떤 재료가 부족했습니까?”
옹기장이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옹기가 손상되는 이유는 그 그릇들이 불에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물의 세례와 성령의 불의 세례를 말합니다. 물의 세례란 무엇일까요?
그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와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올바른 삶을 일일이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물의 세례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께 파견된 자에게 순종하려는 의지’.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불의 세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루르드에서 성모님은 베르나데트를 당신 대리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베르나데트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면
그들이 베르나데트가 손으로 파서 솟아 나오는 기적수의 효과를 볼 수 있었을까요?
믿음이 없어서 그 물을 마셔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의 능력을 믿지 않고 교회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성체성사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교회를 믿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밀떡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오게 될 것임을 믿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성체성사를 하더라도 효과가 없습니다. 효과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가리옷 유다처럼 그 불을 감당할 수 없어 몸이 터져버릴 수 있습니다.
전에 하루도 빠짐없이 뽀뽀하고 자려는 의지로 80년 결혼생활 동안 한 번도 싸우지 않은 부부의 사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의지 없이 결혼이라는 불의 세례는 오히려 두 사람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에 먼저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체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1943년, 미시시피의 한 감옥에서 클로드 뉴먼이라는 청년이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죄목은 매복하여 한 남성을 총으로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형을 앞두고 그는 다른 죄수의 목에 걸려 있는 메달을 보게 되었습니다.
클로드는 그 메달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 죄수는 화를 내며 메달을 땅바닥에 던지며 말했습니다. “가져가라.”
그 메달은 기적의 메달이었고, 클로드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는 누구를 상징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메달을 집어 자기 목에 걸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손목을 누군가가 건드리는 것 같은 느낌에 잠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그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빛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은 두려움에 떨던 클로드를 진정시키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어머니로 모시고, 내가 너의 어머니가 되길 원한다면, 가톨릭 신부를 부르도록 하여라.”
클로드는 자신이 유령을 본 것으로 생각하며 곧바로 가톨릭 신부를 불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튿날 교정 사목 신부인 로버트 오리어리가 클로드를 만나러 왔습니다.
오리어리는 문맹이었던 클로드가 이미 성모님께 배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성모님께 서약했던 내용까지 알고 있음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클로드는 세례를 받고 사형당했지만, 기쁘게 주님 곁으로 갔고 이후 기적과 같은 일들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을 유령으로 여기는 클로드를 사제에게 보내 당신에 대해 더 알게 하시고 교회를 통해 성사에 참여하며 당신께 나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현대의 세례자는 가톨릭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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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tia
– 가장 완전한 자존감: 낳음
엘리사벳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을 믿으신 것을 축복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단순히 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내적 자존감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낳으실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이것이 행복의 원인입니다. 결국 자존감의 하락은 ‘나는 누구도 낳을 수 없는 존재야!’로 측정되고 자존감의 상승은 ‘나는 누구도 낳을 수 있는 존재야!’로 귀결됩니다.
제가 만났던 한 자매는 7년간 아이를 갖지 못해 심각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소화가 하도 안 되어 매일 선식만을 먹어야 했습니다. 아기를 갖지 못하는 스트레스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김상운 방송인이 쓴 책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한 여인은 아기를 낳은 후 누군가 아기를 훔쳐 갈까 두려워 아파트 자물쇠를 바꾸고 창문에 창살을 치며 자신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어머니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아기를 낳고 키우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존감이 없으면 자녀도 낳거나 키울 수 없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행복과 자존감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복권에 당첨되거나 장애를 입는 극단적인 사건이 있더라도, 몇 달 후 사람들은 본래의 행복 수준으로 돌아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외부 조건보다 내면의 믿음과 자존감이 행복의 근본임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자존감과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복의 예가 여러 번 나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사라와 사무엘기 상권 1장에서 한나입니다. 이들처럼 누군가를 ‘낳을 수 있다’라는 믿음은 가장 강력한 자존감을 형성합니다. 루카 복음 1장에서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를 축복하며 “제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루카 1,43)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모두 자녀를 낳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했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자존감을 잃은 것과 상반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잃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극심한 고난 속에서 자라며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10년간의 고된 노동에 지쳐 탈출하여 자신을 거두어주었던 집을 찾았습니다. 동네는 알았지만, 정확한 집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나환자가 사는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보기에 너무나 무서운 나환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는 친절하게도 집을 찾아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였고 극단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환자들에게로 가시며 “저들도 사는데 넌 왜 못 사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자존감이 되었습니다. 이 자존감이 ‘나도 살 수 있고, 나도 결혼할 수 있고, 나도 자녀를 낳아 키울 수 있다!’라는 자존감을 준 것이고 이 자존감이 없었다면 저희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존감을 얻는 시간이 바로 ‘기도’입니다. 특별히 묵상기도입니다. 아무리 내 주위에 좋은 모범이 있더라도 그것이 성령으로 나에게 이해되지 않으면 힘이 되지 못합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이러한 자존감 회복의 강력한 사례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죄와 아픔을 마주하며 스스로를 용서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는 자신이 한 여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임을 느끼며 자존감을 회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여자 주인공 또한 어머니에 대한 깊은 상처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새로운 신뢰와 사랑을 발견합니다. 이는 자신이 또한 한 남자를 변화시킬 힘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람을 낳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갖게 한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새로운 생명을 낳는 기쁨은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가장 큰 축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완전한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수난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결국엔 행복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행복을 주는 믿음은 무엇을 낳을 수 있느냐는 믿음에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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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기쁨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1)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라는 말입니다.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 라고 부른 것은, 마리아 태중의 아기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이고, 이 ‘주님’이라는 말은 곧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라는 말은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 라는 믿음을 고백한 신앙고백입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엘리사벳이 첫 번째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즉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신앙인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바로 그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45절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주님’은 ‘하느님’입니다.
<엘리사벳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가리켜서 모두 ‘주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했고,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2) 41절과 44절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라는 말은, 엘리사벳 자신의 큰 기쁨을 나타낸 말입니다.
<자신의 기쁨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태아가 어찌...” 라고 의문을 가질 사람도 있겠지만,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기쁨을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말이 연상됩니다.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7-30)”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 강생을 기뻐하였고, 또 한 사람의 예언자로서 자신이 메시아의 일을 미리 준비하는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메시아께서 본격적으로 일하심으로써 자신이 ‘작아지게’ 되는 것을 기뻐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기쁨은 이기심이 하나도 없는, 순수하게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3) 엘리사벳의 기쁨과 세례자 요한의 기쁨은,
“예수님은 기쁨의 주님”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기쁨의 주님’이라는 것을 증언한 증인들입니다.>
‘기쁨의 주님’이라는 말은, 주님은 영원하고 참된 기쁨의 원천이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에게 그 기쁨을 주시는 주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2-1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쁨’은 ‘구원’을 뜻하기도 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을 뜻하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설교 때에 다음 시편을 인용했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사도 2,28).”
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신앙생활은 그 기쁨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면서, 동시에 ‘지금’ 주님 안에서, 또 주님과 함께 그 기쁨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4) ‘성령으로 가득 차’ 라는 말은, 엘리사벳이 성령의 힘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외쳤다는 뜻이 아니라, 엘리사벳이 주님에 대해서 증언하고 신앙을 고백할 때 성령께서 도와주셨다는 뜻입니다.
엘리사벳은 분명히 자신의 의지로, 자기 자신의 믿음과 기쁨을 고백했습니다.
성령의 도움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고, 응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마리아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했을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믿었고, 마리아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모두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고,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기와 마리아 태중에 있는 아기가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를 깨달았고, 그래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이 작용했지만,
엘리사벳 자신도 ‘믿으려는 노력’으로 ‘응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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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39-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등산을 좋아하는 한 젊은이가 산 중턱에서 길을 잃고 밤을 맞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을 헤매던 중에 그만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미끄러졌는데, 천만다행으로 벼랑 끝에 있는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지요.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는 큰 소리로 도움을 청했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없어요? 저 좀 구해주세요!”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그 어떤 응답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점점 손에 힘이 빠져 모든 걸 체념할 때쯤, 위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를 구해주리라.” 젊은이가 이젠 살았구나 싶어 안도하는데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거라.”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젊은이가 주저하자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믿느냐?”. “예, 믿습니다. 그래서 매주 성당에도 나가고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렇다면 어서 그 나뭇가지를 놓아라.”, 그러자 그 젊은이는 한참을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위에 하느님 말고 누구 다른 분은 없나요?”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나도 그 젊은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하느님 말씀대로 그 나뭇가지를 놓을 수 있을까요? 이런저런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내가 바라는대로 해주겠다고 유혹하는 다른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지요? 그러니 믿음이 약해지지 않으려면, 세상에 다시 오실 주님을 끝까지 잘 기다리다 맞이하려면, ‘오실 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세상에 오실 구세주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들을 알려주고 있지요. 첫째, 구세주께서는 강대국의 명문가에서 태어나시지 않고 이스라엘의 보잘 것 없는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는데, 그분 존재의 뿌리는 유한한 인간 역사에서 비롯되지 않고, 아득히 먼 태초시절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합니다. 둘째, 구세주께서는 해산하는 여인의 아기로서, 즉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합니다. 셋째, 구세주께서는 왕으로서 다스리고 군림하러 오시는게 아니라, 목자로서 당신 백성을 먹이고 보살피며 참된 행복의 나라로 안전하게 인도하기 위해 오신다고 합니다. 넷째, 구세주께서는 이 세상에 참된 평화를 주시는데, 힘으로 약한 이를 억누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즉 당신 자신이 직접 참된 평화가 되심으로써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그 평화에 참여케 하신다고 합니다.
한편, 오늘의 제2독서인 히브리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시는 분께서 어떤 소명을 띠고 오시는지, 다시 말해 무엇을 하기 위해 오시는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심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십계명에 담아주신 근본정신인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며 그분 뜻에 전적으로 순명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만족과 과시를 위해 허영심과 위선으로 제물과 예물을 바치고 그것으로 자기가 하느님께 할 도리를 다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당신 아들의 희생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는 것이지요. 구세주께서는 당신을 통해 그런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실현되도록 기꺼이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봉헌하신다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이 가장 조심해야 할 임신초기에 나자렛에서 산골마을 아인카림까지 대략 160킬로미터나 되는 험준한 산길을 서둘러 가신 것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는 큰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찾으신 겁니다. 늙은 나이에 잉태하여 벌써 임신 6개월차에 접어든 이모 엘리사벳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하느님께서 그녀와 그 아들을 통해 이루실 일에 적극 협력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기꺼이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내 코가 석 자’인 상황에서 자기보다 힘든 이를 돌본다는 것은, 아무리 하느님으로부터 큰 은총을 받아 감사한 마음을 지녔다고 해도 쉽게 실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기꺼이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께서 받은 큰 은총을 사랑으로 완성하셨기에 참으로 복된 분이십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덕행은 참된 믿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습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자기 힘만 믿고 덤벼들었다가 실패하면 절망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지만, 하느님을 굳게 믿으며 그분께서 반드시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실거라고 신뢰하는 이들은 실패를 마주하더라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성공으로 가는 과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행복과 구원을 위한 가장 좋은 뜻을 마음 속에 품고 계시며, 반드시 그 뜻을 실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 구원의 진리를 믿고 기다리면 되지요. 하느님의 뜻은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납득한 뒤에야 실행하겠다고 버티지 않고, 일단 믿고 즉시 행할 때 실현됩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두고 “행복하십니다”라고 선포한 이유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 뜻에 순명하는 이들에게 행복은 언젠가 조건을 다 갖춘 뒤에 누리게 될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즉시 누릴 수 있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상태인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증거를 요구하지 말고, 수용하기 위한 대가를 바라지도 말고,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행하면 될 일입니다.
참된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과 뜻을 아는 것에 그치면 그분은 내 관념 속에 갇혀계실 뿐이지만, 그분 말씀과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데까지 나아가면 주님은 내가 사는 그 자리에 실제로 현존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탄생을 기념하며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 그러니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말씀을 믿고 따라야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실천하는 만큼 깊고 단단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만큼 행복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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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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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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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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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 제4주일.
세상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삶
<2024.12.22>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10:1~7절)
❝세상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삶❞
❚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았음에 감사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며 충성되이 살아가야 합니다.
✔ 무엇에 집중하는 삶이어야 합니까?
➲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3절).
시편 110편은 다윗의 메시아 예언시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 즉 새롭게 즉위하는 왕에게 주신 첫 번째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나의 주’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 왕을 자기 오른쪽 보좌에 앉히셔서 원수들을 왕의 발아래 굴복시키실 때까지 다스리라고 하십니다(1절). ‘오른편’은 영광과 특권을 상징하는 자리로서 경건한 사람들이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는 자리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왕에게 내어 보내셔서 주의 원수들을 다스리도록 청하고 있습니다(2절). 이처럼 권능의 날, 주님의 통치가 완전히 성취되는 그날은 주의 백성들에게는 즐거운 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며,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 앞으로 나아와 즐거이 헌신하면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3절).
예수 그리스도는 육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계셨으며,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인간을 죄에게 구원하시기 위해 육체를 입고 다윗의 자손을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단순히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왕으로서 이 땅을 통치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인류의 모든 역사를 다스리시고,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위엄 있고 영광스럽게 도래할 주님의 날에 거룩한 주님의 백성답게 영광과 즐거움 가운데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날마다 새벽에 하나님의 소유인 이슬과 같은 복된 청년처럼 주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과 역사를 영원히 통치하시는 세상의 왕이신 그리스도께만 집중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4절).
하나님의 말씀이 왕에게 새롭게 임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여호와의 맹세로 나타나는데, 이는 맹세하는 이가 어떤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겠다는 증거, 또는 어떤 악한 행동을 범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파기할 수 없는 약속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맹세하시며, 자신의 말씀의 진실성을 맹세로 보장하시는데,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되게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그리스도는 영원한 제사장이 되십니다. 그분은 시작과 끝이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존재인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영원하고 완전하신 제사장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대로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셔서 십자가 구속을 통해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셨고, 지금도 하늘 우편에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환경과 상황과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므로 약속하신 모든 것은 분명히 이루시고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가운데로 다가오신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기쁨을 이 땅에서 풍성하게 누리며,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만 집중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재림하시는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5~7절).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모든 왕들을 쳐부술 것입니다(5절). 그분은 악한 나라들과 세력들에 대한 완전한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시체가 쌓이고 통치자들이 깨진다는 것은 원수들의 철저한 패배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왕은 전쟁터에서조차 힘이 쇠하지 않고, 길가의 시냇물을 마실 정도로 때를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6~7절).
세상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악한 세력은 주님의 분노로 인하여 진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가 역사와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이 사실을 분명히 믿고, 신뢰하여 흔들림 없이 믿음과 경건의 생활에 더욱 힘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시 오실 그리스도는 최휘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았음에 감사하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며, 마지막 날까지 충성된 종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거룩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께만 집중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인생의 영원한 통치자가 되시며, 구원자가 되시고,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만 집중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은혜를 날마다 찬송하며,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믿음의 삶이 될 수 있기를(시 110:1~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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