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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잡히다
행 21:27-40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행 21:27-40 / [성전에서 체포된 바울] 이레가 거의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 안에 있는 바울을 보고 군중을 선동하여 그를 붙잡은 후에 말하였다. 28)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우리 말을 들어주오. 이 자는 우리 민족을 반대하고 모든 사람에게 유대인의 율법을 거역하라고 가르치고 있소. 게다가 이 신성한 성전에까지 이방인들을 끌어들여 성전을 더럽히고 있소.' 29) 그들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온 드로비모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으레 그를 성전으로 데리고 들어온 줄로 알았던 것이다. 30)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흥분해서 소란을 피우며 들끓기 시작하였다. 몰려든 군중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자 성전 문이 곧 닫혔다. 31)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할 때에 예루살렘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말이 로마군 파견대장의 귀에 들어갔다. 32) 그는 즉시 장교와 군인들을 인솔하여 현장으로 갔다. 군인들이 오는 것을 보자 폭도들은 바울을 때리는 것을 멈추었다. 33) 파견대장은 바울을 체포하여 부하들에게 두 겹 쇠사슬로 묶으라고 명령한 뒤 군중을 향해 바울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고 물었다. 34) 그러나 군중들이 제각기 다른 소리로 떠들어대기 때문에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파견대장은 이런 소동과 혼란 속에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바울을 병영으로 연행하라고 명령하였다. 35) 그러나 층계에 이르렀을 때는 군중이 점점 더 난폭해져서 바울을 메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36) 군중은 `그 놈을 죽여라. 죽여 버려라!' 하고 뒤에서 떠밀어 대며 소리 질렀다. 37-38) [바울의 해명] 병영문 앞에 이르렀을 때 바울이 파견대장을 보고 `부탁을 드려도 좋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 말에 파견대장은 놀라서 `헬라 말을 할 줄 알다니, 그러면 바로 당신이 수년 전에 반란을 일으키고 자객 4천 명과 함께 광야로 도망친 그 애굽 사람이오?' 하고 반문하였다. 39) 바울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꽤 큰 도시인 저 유명한 길리기아의 다소 태생입니다. 저 사람들에게 말을 좀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40) 파견대장이 허락하자 바울은 층계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들이 곧 잠잠해지자 바울은 히브리 말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매우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로마군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사도 바울을 체포합니다.
바울이 붙들리다(27-29)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서 모세의 율법대로 결례를 행합니다. 그리고 그 결례의 기간이 거의 마쳐질 무렵 또 다른 오해로 인하여서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바울이 붙잡힙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바울을 알아봅니다. 더욱이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은 바울이 시내에서 드로비모와 함께 있음을 보고 동행자로 여겼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여러 구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전의 가장 중심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 밖으로는 이스라엘의 뜰이 있고, 성전의 가장자리에 여인들의 뜰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밖에 1.5미터 정도의 담 너머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방인은 오로지 이방인의 뜰까지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예배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를 어기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 정부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헬라인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는 오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30-40) 온 성이 소동합니다. 흥분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예루살렘의 치안을 맡은 천부장이 소동이 일어났음을 알고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고 바울을 체포했습니다. 바울은 죽음의 위기를 면했습니다. 하지만 천부장은 바울을 범죄자로 여겨 결박합니다. 흥분한 유대인들의 함성은 천부장으로 하여금 소동의 진상을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천부장은 진상을 파악하고자 우선은 바울을 안토니아 요새 안으로 데리고 갑니다. 하지만 백성의 무리가 바울을 죽이고자 따라갑니다.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성경은 바울이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말을 합니다. 바울을 이전에 소요를 일으킨 애굽인으로 착각한 천부장에게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며 길리기아 다소의 시민임을 밝히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시민임 알리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수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이 나사렛 예수의 사도가 된 것을 설명하며 또한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적용: 사도 바울은 어느 때이든지 주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신에게 주의 복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주의 복음 앞에 온전히 나아가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의 예측과 상상을 한참 벗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을 알 수 없으며 그분의 계획을 측량조차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어떤 일은 우리가 보기에 매우 기이하기도 하고 어떤 일은 도무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같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지함속에서 그 도우심을 거부하기도 하고, 불순종하기도 합니다.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시고, 다시 세우시기 위해 간구하되 끝까지 기도하되 전부 내려놓고, 엎드리되 목숨까지 내어 드리고 깊이 들어가는 간절함을 필요로 하십니다.
< 설 교 >
체포된 바울
행 21:27-40 / 정용섭 목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선동
사도행전 독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이미 20:17절부터 여러 번에 걸쳐서 들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제 그 시련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정결의식은 곧 율법 문제로 인해서 불거진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갈등을 풀어보기 위해서 바울이 선택한 궁여지책이었다. 그런데 누가가 서술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진행을 따르면 이 정결의식이 오히려 바울에게 닥친 시련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물론 바울이 정결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시빗거리가 불거졌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본문 27절 말씀은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레 동안의 정결 기간이 거의 끝난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로가 성전에 있는 것을 보고 군중을 선동하여 그를 붙잡고.” 군중을 선동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에페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다. 에페소는 바울이 3차 선교여행에서 가장 큰 선교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기를 경험한 곳이기도 하다. 에페소 대극장에 모인 군중들은 “에페소의 여신 아르데미스 만세!” 하고 두 시간 동안이나 외쳤다고 한다.(19:34). 사람들은 천성에 따라 살기도 하지만 문화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런 열광적인 도시 에페소에서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이제 지난날 그들이 에페소에서 경험했던 그런 방식으로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군중들을 선동하는 중이다.
원래 바울이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에 들어가 공개적으로 정결의식을 행한 이유는 주로 팔레스타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에게 품었던 의혹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이 율법과 할례를 부정한다는 이 의혹이 이번의 정결의식으로 인해서 해소되었는지 아닌지, 누가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 대신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등장시켰다. 왜 그랬을까? 누가는 바울과 사도들 사이에, 즉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율법 문제로 인해서 벌어진 갈등 구조의 방향을 바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싸움으로 바꾸려 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헬라파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예루살렘 공동체 사이에 놓인 갈등이 아무리 심각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건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별로 지혜롭지 않았을 것이다.
에페소 출신의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가한 비난은 이미 앞에서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야고보와 원로들이 바울에게 충고한 내용과 다를 게 없다. 바울은 “율법과 성전”을 반대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28절). 다만 에페소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할례 대신 성전을 강조했다는 사실만 다르다. 이렇게 할례 문제가 성전문제로 바뀐 이유는 이들이 시비를 걸고 있는 그 장소가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율법과 할례를 상대화한다는 소문만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힘들다고 보고, 성전을 모독했다는 실증을 앞세운 것이다. 29절에서 우리는 그들의 음모를 읽을 수 있다. “그들은 바울로가 시내에서 에페소 사람 드로피모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필경 바울로가 그 이방인을 성전에까지 데리고 들어갔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죄는 이렇게 어림짐작으로부터 시작된다.
로마군 파견대장의 개입
에페소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선동에 따라서 예루살렘 온 도시가 소란해지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전통에 의하면 성전을 더럽힌 사람은 죽여야만 했다. 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냈다. 성전 문지기는 더 이상 성전이 더렵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문을 닫았다. 누가는 31절에서 거기에 모여들었던 군중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다고 설명한다.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는 증거도 없으며, 최소한의 종교재판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다는 건 약간 과장된 진술로 보인다. 특히 그 당시에는 사람의 생사여탈권이 로마 총독에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실제로 바울을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가는 이미 앞에서 바울에게 심각한 위기가 닥쳐온다는 사실을 예고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그 예고의 진정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로마군 파견대장이 예루살렘 성안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백인대장들을 대동하고 직접 현장에 출동했다. 파견대장이 출현하자 바울을 향한 유대인들의 린치는 그쳤다. 파견대장은 바울을 체포하고 쇠사슬 둘로 그를 결박했다. 거의 죽음 일보 직전에 이를 정도로 가혹행위를 당한 바울을 다시 두 개의 쇠사슬로 묶었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지는 조치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누가는 이를 통해서 행 21:11절이 성취되었다는 걸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베드로도 감옥에서 두 명의 간수 사이에서 쇠사슬로 묶였든 적이 있다.(행 12:6).
폭동으로 비화할 수 있는 현장을 일단 제압한 파견대장은 이런 일들이 벌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군중들에게 질문했다. 오늘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군중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를 하며 소란을 피워서 진상을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34절)고 한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어떤 분명한 죄목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다른 소리’를 내지르고 ‘소란’을 피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교회 밖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 내의 사람들이 바울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관되었을 것이다. 바울을 공격하는 그들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단지 교회 공동체를 시끄럽게 만들 뿐이었다고 말이다.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 파견대장은 바울을 병영으로 끌어가게 했다. 그러나 군중들이 난폭하게 굴어서 바울을 끌고 가던 군인들은 바울을 둘려 메고 난간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이런 장면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건 아니다. 군인들이 바울을 둘러멘 채 흥분한 군중들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지금 그런 장면을 정확하게 기술하려는 게 아니라 그때의 분위기만을 전달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부자연스런 묘사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군중들이 뒤따라오며 “그놈을 죽여라!”(36절) 하고 외친 장면은 에페소 군중들이 “에페소의 여신 아르데미스 만세!”라고 외친 장면과 흡사하다. 바울은 이렇게 비이성적인 집단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반론 기회를 얻는 바울
군중은 선동에 약한 법이다. 에페소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서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거의 광기에 가까운 행동을 보였다. 그런데 본문은 전혀 새로운 장면으로 독자들을 이끌어간다. 미친 듯이 떠드는 군중을 뒤로 한 채 바울과 파견대장은 둘만의 사적인 대화를 나눈다. 병영 문 앞까지 끌러간 바울이 먼저 파견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한 말씀 드려도 좋겠습니까?”(37절). 그는 왜 로마 파견대장에게 로마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말을 걸었을까? 그는 출생 때부터 로마 시민권 소지자였기 때문에 라틴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가 헬라어를 구사한 이유는 그 당시에 라틴어보다는 헬라어가 훨씬 고급의 언어로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든지 이 대목은 바울의 학문과 지성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현대 신학계에서 바울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는 차치하고 그가 당대에 최고의 석학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예수의 복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바울을 통한 신학화 작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는 곧 바울을 통해서 일어난 기독교의 헬라화가 기독교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인간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헬라와 로마 문명이라는 토대에서 해석하고 적용한, 그래서 논리화한 바울의 신학 작업을 기독교의 변질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바울의 고급 헬라어를 전해들은 파견대장은 이렇게 반문한다. “당신은 그리스 말을 할 줄 아오? 그렇다면 당신이 얼마 전에 반란을 일으키고 자객 사천 명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던 그 이집트 사람이 아니오?” 파견대장이 거론하는 이집트 사람은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이다. 이 사람은 펠릭스 총독의 재임 기간 중에(52년부터) 반로마 무력투쟁을 이끌었다고 한다. 본문에 자객으로 번역된 ‘시카리’는 ‘시카’, 즉 단도라는 단어에서 온 것인데, 예수의 제자 중에도 여기 출신이 있었다.
바울은 다시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길리기아의 다르소 출신의 유대인으로 그 유명한 도시의 시민입니다.”(39절). 바울의 이 대답이 실제로 바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인지 우리가 확인할 길은 없으며, 또한 부정할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는 이 대답에서 누가의 신학을 읽을 수 있으면 충분하다. 바울을 무력혁명가와 비교한 파견대장의 말은 그 당시에 헬라파 기독교 공동체를 향한 로마 정부의 의혹을 담고 있을지 모른다. 또는 기독교를 적대하는 어느 집단이 퍼뜨린 소문의 일부일 수도 있다. 누가는 차제에 이런 의혹을 완전히 불식시키려고 한다. 여기서 바울은 반로마 무력투쟁의 두목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직할인 다소 출신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반(反)로마가 아니라 친(親)로마라는 뜻이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과 어떤 관계였는가를 파고들려면 한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매우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다. 예수의 공생애와 원시 기독교와 교부들, 급기야 밀랑 칙령으로 기독교를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로마 제국과 숙명적으로 얽혀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긍정적이든, 혹은 부정적이든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중심 주제로 삼지 않았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로마 제국에 의해서 부정될 때는 순교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투쟁했지만, 그것이 인정될 때는 지나칠 정도로 로마 제국에 협조적이었다. 어쨌든지 지금 누가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반로마 무력투쟁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중이다.
군중들에게 한 마디 하게 해달라는 바울의 요청을 파견대장이 받아들였다. 바울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답지 않게 흡사 파견대장과 같은 권위로 군중들을 조용히 시켰다. 누가는 그 장면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들이 아주 잠잠해지자 바울로는 히브리말로 연설하였다.”(40절). 여기서 우리는 누가의 두 가지 신학적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첫째, 로마는 기독교에 우호적이다. 로마의 권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둘째, 유대인들은 결국 바울의 영적인 권위 앞에서 잠잠해질 것이다. 바울의 복음 선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드디어 체포된 바울
사도행전 21:27-22:1 / 서금석 목사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바울이 율법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며 바울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결례를 네 사람과 함께 지키며 그 비용을 부담해서 바울로 하여금 율법과 규례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하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타협했다기보다는 어떻게든 복음을 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은 유대인에 맞게, 이방인은 이방인에 맞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그 제안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를 놓고 보니까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체포되어 죽을 위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전략은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전략은 실패한 전략이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무엇을 보십니까? 신앙생활하는 데는 전략이 꼭 필요한 것입니까?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이왕 예수 믿으려면 고지식하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너무 융통성이 많아지면 신앙의 힘, 능력을 잃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편협하게 예수 믿느냐?", "왜 그렇게 촌스럽게 예수 믿느냐?" 이렇게 비판해도 개의하지 마세요. 이왕이면 독하게 믿으세요.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 성 수하세요. 아무리 급한 일 있다 하더라도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부터 드리세요. 주일에 예배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 아직 신앙이 제대로 자라잡지 못한 것입니다. 십일조-이왕 하려면 철저히 하세요. 남에게 한 두마디 들은 것 가지고 말하지 마세요. 자녀 교육-신앙중심으로 철저히 하세요. 조금 조금 양보하다가 나중에는 다 빼앗겨요. 존경받는 지도자의 자녀가 교회에 잘 다니지 않으니까 '주일만 지켜라' 타협했습니다. 나중보니까 주일도 안 지켜요. 아닙니다. 철저하게 가르쳐 해요. 가끔 보면, 남의 얘기 가지고 자기 소신인양 이러쿵저러쿵하는데 자신이나 잘 믿어요. 이왕 믿으려면 '전략이다 적당한 양보다'하지 말고 고지식하게, 독하게 예수 믿으세요. 바울을 보면서 제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왕 믿으려면 처음부터 독하게 믿으세요. 새벽기도도 하고, 청소도 하고, 등.....
1.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킨 이유(27-29)
사도 바울은, 바울 자신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로 다른 사람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 비용까지 대라는 야고보의 제안대로 성전에서 결례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유대인들에게 붙잡힙니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할까요? 성경의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에베소로 짐작됩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를 쉽게 알아보았지 않습니까? 에베소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바울이 3년간 복음을 전하던 곳이었습니다. 기적과 능력도 많이 나타나긴 했지만, 소란과 역경도 많았습니다. 바울의 손으로 하나님께서 비상한 기적을 행하게 하시고,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나가자 에베소에 사는 수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두려워하여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데 에베소에 3년이나 머물렀다는 것은 그만큼 에베소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는 사랑과 열정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온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열심히 전도했던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은혜를 주먹으로 갚는 격 아닙니까? 바울이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인생 살다 보면 우리도 가끔 경험하는 일 아닙니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문제삼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반대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28절) 유대인은 이방인과 가깝게 지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과 친하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저들을 사랑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못할 짓 했다 이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으라' 해 놓고서는 '율법으로는 구원얻을 수 없다' '이방인은 할례받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으니, 율법을 반대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입장은 분명히 다르지만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에게 '할례 받으라' 권한 것도 바울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율법으로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까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이지 율법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성전을, 이방사람인 헬라 사람과 함께 들어갔으니 성전을 더럽힌 것 아니냐? 그러니까 바울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성전은 지성소와 제단, 제사장의 뜰, 유대인의 뜰(남자들만), 유대 여인의 뜰, 그리고 계단 내려가 낮은 곳에 이방인의 뜰이 있는데, 이방인들은 이방의 뜰까지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는 큰 벽이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방인은 이방인의 뜰 이상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두 뜰 사이에는 '이곳을 지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된다'는 경고문도 있습니다. 성전을 거룩하게 보존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이방인을 멸시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짙게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실제로 이방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성전에 들어갔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유대법으로 한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사형 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29절을 보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일 뿐, 바울이 드로비모와 함께 성전에 들어간 일이 없어요. 바울이 이방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성전에도 함께 들어갔을 것이라는 생각-이것이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바울이 미웠어요. 어떻게든 바울을 없애버리고 싶었어요. 무슨 건수만 있으면 잡으려 했어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니-마음 바탕에 이런 마음이 깔려 있으니 지레 짐작하고는 "옳지 됐다"하고는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리 싫어했습니까? 그리 미워했습니까? ·하나는 바울이 헬라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비주류 유대인이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사니 이방인과는 크게 상관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헬라파 유대인들은 온 세계에 퍼져 사는 유대인들이었기에 언제나 이방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문제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제기 했지만, 직접 들고 나선 것은 히브리파 유대인들로 추측됩니다. 그 밑바닥에는 주류, 비주류의 감정이 깔려 있는 것으로 봅니다. ·바울이 지성인이기 때문에 미워했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철학자였습니다. 공부도 못한 무식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무시해도 될 터이지만 높은 학문을 쌓은 지성인이 주장하면 따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 문제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어요. 돌로 맞기도 했어요. 바울을 죽이려고 악착같이 쫓아다니지 않았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단순하게 신앙의 문제만이었을까요?
여러분들 사이에도 갈등이 있지요? 없으면 좋겠지만 갈등이 있어요.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그 갈등이 서로 간에 신앙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입니까? 신앙과는 아무 관계없는 것들도 많지 않습니까? 신앙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하는 경우보다 인간성, 사람됨됨의 문제 때문에 갈등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유대인과 바울의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감동으로 복음을 통해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구원받게 하는 바울을 유대인들은 그냥 봐 줄 수가 없었어요. 수많은 군중들을 휘어잡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왜요? 시기와 질투심 때문에. 결국 밑에 깔려 있는 것은 시기심과 질투심-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기 질투하면서 공부해요. "질 수 있느냐?" 시기 질투하면서 사업해요. 운동도 이기려고만 하니 운동이 제대로 되겠어요? 목회도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으니 말해 뭣하겠어요? 마음이 잘못되면 오해하기 쉬워요. 상대방이 문제가 아니라 오해한 내가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런 눈으로 바울을 보니까 드로비모가 들어가지도 않은 성전에 함께 있었다고 짐작하고 사실처럼 얘기하지 않습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 사람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세상 얘기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도 이런 모습이 보여진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되고, 서기관이 되고, 장로가 되고, 그래서 교회에서 존경받게 되었는데, 한순간에 바울이 나타나서 외치니 백성들이 다 그리로 쏠려요. 그러니 볼 수 있겠습니까?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경계할 것 -시기질투입니다. 시기질투 때문에 신앙이 무너집니다. 시기질투 때문에 평안이 깨어집니다. 분명히 기억하셔야 할 것은 시기 질투 뒤에는 반드시 마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기 질투 버리세요. 사랑하세요. 세워드리세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강을 주십니다. 명심하세요. 많은 경우에 마음에 평안이 없는 까닭은 알게 모르게 내 속에 있는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이기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함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 핍박받는(두드려 맞는) 바울(30-36)
율법을 훼방하고 성전을 더럽혔다는 말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왜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을까요?
성전 내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성전 밖으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는 바울을 죽이겠다는 적극적인 표현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 성전 뿔을 잡는 자는 누구도 해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바울이 성전 뿔을 잡는다면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성전 뿔을 잡지 못하도록 재빨리 끌고 나간 것입니다. 30절 후반절 봅니다. 바울이 성전 밖으로 끌려나가자 성전의 '문들이 곧 닫히더라' 이때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나는 이제 죽었구나' 무슨 생각했을까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돌 던지는 사람 뒤에서 '잘한다'하면서 옷 지키고 있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사울-바울 아니었습니까?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성전 밖으로 끌려나왔고, 성전 문은 닫혔고, 이제 끝장입니다. 32절 끝을 보니 천부장과 백부장과 군사들이 오기까지 바울은 두드려 맞았어요. 왜 때렸어요? 31절 보니까 죽이려고.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죽음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생각해보면, 바울은 이미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에 올라오면 붙잡힌다는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어쩌면 죽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둔 바울의 고통과 절망은 어떻겠습니까?
이때 천부장이 백부장과 군사를 거느리고 소요현장에 나타난 것입니다. 천부장은 로마군 1000명의 지휘관이죠. 백부장은 100명의 지휘관입니다. 오순절에는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세계 각 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도시에 수십 만 명이 한꺼번에 모여든다는 것은 정치가들, 치안 담당관들에게 퍽이나 신경쓰이는 일이지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위쪽에 안토니아 탑이라고 하는 로마군의 망대에서 천부장이 치안 질서 유지를 위해 진두 지휘하고 있었는데 마침 소란하다는 정보가 천부장에게 보고되었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군사와 백부장을 거느리고 현장에 당도해보니 바울이 죽도록 두드려 맞고 있었습니다. 천부장과 군사들이 도착하니 그들을 보고 때리기를 멈추었습니다. 33절로 35절을 보면 우선 바울을 결박하여 격리시킨 후에 이 사람(바울)이 누구며 무슨 일로 때리느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소리를 하니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군대의 병영 안으로 끌고 가는데 36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봅니다. "큰 무리가 따라오면서 '그 자를 없애 버려라!'하고 외쳤다" 바울 죽이려고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되십니까? 시기질투처럼 무서운 것 없어요. 마귀 짓입니다. 이겨야 해요.
여기서 하나 생각합니다. 동족에게 맞아 죽어가는 바울을 구해 준 것이 누구였습니까? 천부장이었습니다. 그냥 단순히 천부장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천부장을 통해 바울을 구해주셨습니다. 사람은 세상 살면서 위기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기 때에 누구 구해 줍니까? 누구를 의지할 수 있습니까? 돈이요? 돈으로 다 되는 것 같아도 못하는 것이 더 많아요. 지식요? 아는 사람이 더 답답하고 불안한 법 아닙니까? 의사요? 고치는 병도 많지만 못 고치는 병이 얼마나 많습니까?
위기의 때에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복 있는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이 성경 말씀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지금은 비록 고난의 가시밭 길 같이 느껴질지라도 분명히, 반드시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해주실 줄 믿고 믿음으로 하나님 사랑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3. 바울과 천부장(21:37-22:1)
영문을 모르게 되자 천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대화하기 시작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교양있는 헬라어 엑센트로 말하자 깜짝 놀라 묻습니다.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주후 54년 경 한 애굽인이 예루살렘에 왔었습니다. 이 사람은 선지자 행세를 하면서 유대인들을 로마 사람들의 손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선동하여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특별히 로마의 축제기간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정치인과 관리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가슴에 단도를 몰래 품고 다니던 4000명이 있었는데 '애국적 암살단'이라 칭했습니다. 유대인들 마음에 로마사람들에 대한 한(恨)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로마군의 즉각적인 진압으로 흩어졌고 주모자는 몰래 도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천부장은 바울이 바로 그 사천명의 자객을 거느렸던 애굽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바울은 애굽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명 때문에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당당하게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작은, 촌 동네가 아니라 길리기아의 지방의 수도 다소 태생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바울 시대의 다소는 정치, 경제 학문이 상당히 수준 높은 도시였습니다. 신분과 출신지역을 분명하게 말하고는 천부장에게 말합니다. "부탁입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한번 말할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천부장이 기회를 주어 바울이 말하는 내용이 사도행전의 다음 본문 아닙니까?
여기서 저는 두 가지만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 바울은 어떤 형편이었습니까? 천부장이 오기 전까지 유대인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죽이려는 마음으로 때렸으니 온 몸이 피투성이었을 것입니다. 천부장이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할 수만 있으면 빨리 이 위험을 피해 안전한 곳에서 쉬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천지에 바울을 안전하게 지켜줄 사람도 없었고, 편히 쉴 곳도 없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면 이 천부장이 지켜 줄 수 있고 이 영문이 쉴 곳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피곤하고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바울은 그냥 주저앉지를 않았습니다.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이 백성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천부장에게 요청하고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 놓고 실컷 두들겨 팼으니 그들이 승자입니까? 아니면 피묻은 얼굴로 그들 앞에 다시 선 바울이 승자입니까? 누가 승자입니까? 누가 패자입니까? ·또 하나 도대체 바울은 그 지경이 되어서도 백성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나도 할 만큼 했다. 이제 너희 구원은 너희 문제다'하고 주저앉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내 할 도리는 다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저도 모르겠습니다'하고 물러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서고 있습니다. 왜였습니까? 죽음 앞에서도 사도 바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예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다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중요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내게 예수님이 중요합니까? 나 자신이 중요합니까? 묻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위해 내가 필요한 것입니까? 믿음의 딜레마입니다. 예수 안 믿는 게 아닙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필요한 수준에 우리 믿음이 머문다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다니면서도, 예수믿는다 하면서도 내 입장과 내 형편이 먼저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예수 믿는 기쁨은 언제나 절반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것 접어두고, 자존심까지 접어두고, 피투성이가 되어 백성들 앞에 서 있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정리하면서
신앙생활하면서 여전히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때나 지금 우리의 때나 시기와 질투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신앙을 무너뜨리고 평안을 깨뜨립니다. 시기와 질투 뒤에는 반드시 마귀가 역사하고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하여 이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천부장을 통해 바울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며 믿고 따라주는 자를 선한 길로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백성들 앞에 선 바울의 마음을 헤아려 봅시다.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아니었습니까? 고지식하게 예수 믿고 전하는 바울. 우리 신앙은 어떻습니까? 성도 여러분. 고지식하게 신앙생활해 보세요. 신앙은 산보가 아닙니다. 독하게 신앙 생활해 보세요. 믿음이 여러분에게 능력이 되어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죄 없는 죄수
행 21:27-22:1 / 김 조 목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롬3:10) 하심으로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어떻게 할까요? 하심은 예수를 시험코저함이라. 그 때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하심으로 양심에 가책 받은 자가 다 가버렸고 예수님도 여인을 용서해 준 것이 요8:1-11에 있습니다. 죄 없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 되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바울사도가 유대인들의 대적자가 되어 온 성이 소동하여 바울을 죽이려하니 달려온 천부장과 군인들이 군중 속에서 바울을 구하며 누구인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면서 쇠사슬로 결박하자하여 죄수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죄 없는 죄수”라 제목하고 말씀드리려합니다. 왜 죄 없음에도 죄수처럼 되었을까를 생각하여 은혜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배경을 보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에베소교회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부터 유대인들의 배척을 받았고 아가보와 빌립의 딸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바울사도가 결박과 환란을 당한다고 성령의 감흥으로 말했으나 사명 다 하기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와서 그 동안의 선교 보고 했을 때 예루살렘교회 감독이었던 야고보가 바울 사도를 오해하는 유대인을 위해 나실인 결례를 청하므로 바울도 평화를 위해 결례를 행하게 하였으나 성전에서 바울을 본 에베소에 온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를 죽여야한다고 충동하였다. 그 때 천부장과 군인이 달려와 그를 결박했다. 그럼에도 소리치는 군중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에서 죄 없는 바울사도가 왜 죄수처럼 되었을까?
1. 잘못된 신앙적 오해로 죄수처럼 되었습니다.(27-30절)
유대인들은 선교지에서 바울의 가르침이 모세를 배반했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아니해도 된다. 할례 받지 말라했고 예루살렘 성전도 무시하여 성전의 신성함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또 그들의 추측으로 이방사람 드로비모를 성전에 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이스라엘백성이 들어갈 뜰이 있고 “바깥뜰”이라는 이방인들이 갈 수 있는 뜰도 있었는데 그 때에 선을 그어 놓고 이방인이 조금만 범해도 실제로 돌로 쳐서 죽였던 선민사상, 우월주의로 가득 찼기에 성전 모독이 되었다. 예수님께도 이렇게 죄목을 붙였는데 예수께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케 하려 함이라.”하심으로 형식만 같은 율법이 아니라 그 참 뜻을 이루어 갈 것을 강조했던 것으로 바울 사도도 할례 받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으니 할례냐 무할례냐는 형식이 문제가 아님을 (고전7:18-19)말했고 실제로 디모데에게 할례 받도록 하게도 했었으나 형식만을 추구한 잘못된 신앙적 오해로 죄 없는 바울을 죄수취급하게 했습니다. 성도여!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선민의식의 자만과 형식에 빠진 율법주이가 하나님의 참된 뜻은 저 버리고 의식만으로 행함으로 구원 얻고자 하는 일은 우리는 없는가? 살펴봄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바로 바로 깨닫고 실천하는 지혜로운 성도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복음 전파에 열심히 죄수처럼 되게 하였습니다.(39-2:1)
자기의 사명이 복음전파이기에 상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 만큼 열심히 전했고 유대인들의 오해로 천부 장에게 결박을 당하였으니 저들에게, 말하게 해 달라 하여 복음을 전한 것을 보면 복음전파의 열심히 그들 죄수처럼 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죄수처럼 결박당한 이래로부터 약 5년 동안에 옥중생활이 시작이 되었고 로마로 호송되어 가면서도 거기서도 복음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언제 어디서나 식어지지 아니 하였기에 죄수처럼 당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그러했습니다. 성도들이여! 우리도 이러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단의 공격도 있고 억울한 일 당해도 사명 다하려고 하는 자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복 주십니다. 우리도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자 되어 언제 어디서나 승리하시고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위해 죄수처럼 되었습니다.(31-33절)
현상적으로 볼 때 바울사도가 결박당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니 온 성이 소동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할 때에 천부장과 군인들이 결박한 것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로마로 호송되어 갈 수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뜻을 바울을 통해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바울사도를 적대시하는 유대인들이 법도 무시한 채 죽이려 했고 무슨 일인지 모르면서 군중 심리적으로 혼동을 받아 온 성이 소동되었으며 훗날에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자가 40여명이나 된다고 했으니(23:12,13) 군인들이 보호하지 아니하면 로마를 갈 수 없었으니 죄수로 결박당한 것도 로마 가기 위한 것이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으로 흩어진 성도 통해 전 세계 복음화가 시작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작은 환란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됨이니 감사와 찬송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성도되시기 바랍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열심 하는 바울사도를 왜 죄수처럼 쇠사슬로 결박을 당하게 하셨는가? 잘못된 신앙의 오해가 자기 교만 판단으로 죄수처럼 되게 했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신앙생활 돌이켜야 합니다. 사명 다하려는 그 열정이 죄수처럼 되었으니 우리에게 이 열심 주시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역사를 이루시기 바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죄수처럼 되게 하심이니 우리 삶에 작고 큰 문제를 인제 낙심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 아멘-
과격파와 성전 모독의 문제(김영규 목사)
죄수로서의 바울의 사역
본문부터 사도행전 28장 마지막까지는 바울이 체포당하여 죄수로서 보낸 기록입니다. 이 부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부분은 예루살렘에서(21:27-40) 보낸 기록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가이사랴에서(24장-26장) 보낸 기록입니다. 세 번째 부분은 로마로 가기까지, 또한 로마 도착 이후의 기록입니다.(27장-28장)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머물렀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세분됩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로마군에게 인계 되기까지입니다.(21:27-40) 둘째는, 유대인 군중들에게 해명하는 장면입니다.(22장) 셋째는, 공회 앞에서 변론하는 장면이고(23:1-11), 넷째는, 가이사랴로 호송되는 장면입니다.(23:12-35)
오늘 읽은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에게 체포당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유인으로서 세 차례의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와 유럽에 수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인으로서의 사역 못지않게, 죄수의 신분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6:19-20)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죄수로 있을 때에 몇 권의 성경을 기록하여 보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죄수 아닌 죄수가 되었는지, 그 배경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죄인들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 없는 로마 시민권자였으나, 붙잡혀서 심문 당하고 로마까지 압송당하여, 순교당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역사입니다.
과격파 유대인들의 선동
바울이 체포당하게 된 시발점은 과격파 유대인들의 선동입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27) 유대인 중에서도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주동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란 에베소를 수도로 하는 지금의 터어키의 한 지역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약 3년 동안이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온 것은 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나, 초막절, 혹은 오순절과 같은 절기에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이때는 아마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다수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은 것 같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기회다 싶어서 갑작스럽게 소리 높여 고발했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28) 이들이 바울을 고발한 죄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민족을 비방했다는 죄목입니다. 둘째는 율법을 비방했다는 죄목입니다. 셋째는 성전을 비방했다는 죄목입니다.
물론 이들의 선동은 전혀 거짓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비방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비방한 적이 없고, 성전을 비방한 적도 없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 바울이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단지 추정일 뿐입니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 함이러라.”(29) 예루살렘 시내에서 바울과 드로비모가 함께 있는 것을 본 것으로, 성전에도 함께 있었다고 추론했습니다.
종교가 됐든지, 사상이 됐든지, 목적 달성을 위해서 폭행을 선동하는 것은 아주 나쁜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거짓 죄목과, 군중 동원, 폭동으로 맞섰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랑의 희생으로 마주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을 대적한 무리들도 예수님을 대적한 무리들과 똑같습니다. 거짓 고발, 군중 동원, 폭동의 수순을 그대로 밟고 있습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30,31)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35-36)
인간 세상에 과격파가 항상 문제입니다. 과격파들은 인간보다 그들의 목적을 더 중시합니다. 과격파는 사람의 생명보다 이념이나, 사상을 앞세웁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여깁니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이 그랬습니다. 스탈린, 김일성, 김정일, 킬링 필드의 폴 포트 같은 사람들은 이상 사회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수 천 만에서 수 백 만 명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테러를 저지르는 알카에다, 스킨헤드, kkk, 북한 공산당도 마찬가집니다. 이들은 앞에 종교나 민족을 내세우지만 명목 뿐입니다. 회교도들을 보면 자기네 종교 안에서도 종파에 따라 무참히 죽이고 죽습니다. 목적이 아무리 선하다 해도, 인간을 담보로 하는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전 국민을 폭력 아래 굶어죽게 만드는 북한 정권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활동하는 과격파 운동가들도 그렇습니다. 사회를 개선하는 것은 좋지만 사람을 제물로 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과격파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이 목표지만, 강제로 건설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 전파가 목표지만 강제로 전파하지는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 좋은 목표가 있다 해도, 누구라도 서로를 적대시 하면서 이루어 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이유 불문하고 과격파는 되지 마세요. 온건파가 되세요. 온유함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온유함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온유함은 모세의 성품이고 사도 바울의 성품이요 대인관계의 지침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3:2)
선동을 받은 군중들은 이유도 모른 채 떠들고 날뛰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선동하는 아시아 유대인보다, 선동 당하는 예루살렘 유대인들이 더 문제입니다. 무리들은 이유도 모른 채, 바울을 붙잡고, 때렸습니다. 천부장이 죄수가 누구이며, 죄목이 뭐냐고 물으니, 도대체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34) 요즘 거리로 나서서 선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동가들은 어떤 목적으로 선동합니다. 어느 시대든지 선동가는 있습니다. 히틀러도 선동가이고, 트로츠키도 선동가이고, 모택동이도 선동가이고, 김일성이도 선동가이고, 오늘날 툭 하면 거리로 나서는 무리들도 선동가들입니다. 문제는 선동에 놀아나는 군중들입니다. 선동자들이 자빠지든 엎어지든 선동에 놀아나지 말고, 차분히 생각하면서 신중하게 행동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전 모독의 이슈로 죽이려 하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성전 문제입니다.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 함이러라.”(28-29) 성전을 더럽혔다! 다른 어떤 이슈보다 유대인 군중들을 자극하는 발언입니다. 성전 문제는 예수님 당시부터, 사도행전에 말미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왜 유대인들에게 성전이 그렇게 특별한 주제가 되었는가? 성전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광야 시절에 성전은 이동식 성막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졌습니다. 이 성전을 역사적으로 제1성전이라고 합니다. 제1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BC 586년 바빌론의 느브갓네살 군대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무참하게 무너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포로지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했습니다. 이들이 성전에 얼마나 애착을 가졌는지는 시편 84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4,10) 성전 처마에 둥지를 튼 참새나, 제비를 부러워할 정도로 성전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B.C.520년경 다시 돌아 와서 성전을 세웠는데 이를 스룹바벨 성전 또는 제2성전 이라고 부릅니다. 스룹바벨 성전 역시 솔로몬 성전터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제2성전은 급하게 지은 것이어서 솔로몬 성전처럼 화려하고 견고하지는 못했습니다. 곧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스룹바벨 성전 이후 성전이 다시 세워진 것은 헤롯 시대입니다. B.C.20년경 유대지역의 왕이었던 헤롯대왕에 의해서 성전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것을 헤롯성전 혹은 제3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헤롯은 절반은 에돔인 절반은 유대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거창하게 재건했습니다. 일차 공사는 약 9년간의 공사 끝에 마쳐졌습니다만, 주변 공사는 계속되어서 예수님 당시에도 공사를 계속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당시에도 착공한지 46년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이 공사는 그 후에도 계속되어서 착공한지 82년이 지난 주후 63년경 알비누스 총독때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거창한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명절 때면 세계 각처에서 사람들이 이 성전으로 몰려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모독과 함께 성전 모독을 가장 큰 신성 모독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도 성전 모독죄로 죽임을 당하셨고,(마27:40,막14:58) 스데반 역시 성전 모독죄로 죽임을 당했습니다.(행6:13-14) 바울 사도 역시 성전 모독 죄에 걸려들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은 성전에 끌어들였다는 죄목입니다. 당시 성전의 구조를 보면 영상으로 보여드린 그림과 같습니다. 헤롯 성전은 대단히 넓은 구역에 세워졌습니다. 성전 대지는 남북으로 450m, 동서로 300m에 이릅니다. 이 대지 한 복판에 동서 방향으로 성전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성전 건물은 14개 계단을 거쳐 올라가야 되는 약간 높은 위치에 지어졌습니다. 이 성전 건물 지역과 계단 아래의 외부 지역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습니다.
이 울타리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분리의 벽입니다. 이 울타리 바깥 마당을 “이방인의 뜰”이라 불렀습니다. 이방인은 성전 내부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 벽은 상징성이 큽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영원히 하나 될 수 없다는 유대인의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에 보세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4-19)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벽을 십자가로 허물어버리셨습니다.
사실이 아니지만, 만일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끌어들였다면 얼마나 큰 처벌을 받아야 할까요? 당시 이방인의 뜰과 성전 지역을 나누는 울타리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경고 문구가 들어 있었습니다. 1871년과 1935년에 울타리에 붙어 있던 헬라어로 된 경고문이 발굴된 바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어떤 이방인도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내부로 들어올 수 없다. 만일 누구든지 이런 일로 체포당하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헬라어와 라틴어로 씌여 있는 것은 비유대인은 누구든지 죽임을 당한다는 경고입니다. 라틴어는 로마의 언어입니다. 지배자였던 로마 정부가 이런 경고 문구를 허용한 것은 그만큼 성전에 대한 유대인의 계율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기로 결심한 이상 이 죄목은 벗어날 수 없는 올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랬고, 스데반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의 성전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 성전 문을 닫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제 이 성전은 영원히 닫혀지고 맙니다. 주후 70년 로마군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초토화 되었습니다. 82년에 걸쳐서 지어진 성전이, 완공 된 지 불과 7년 만에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입니다.
이 없어질 성전 때문에 군중들은 외쳐댔습니다. 없이 하소서!(눅23:18, 요19:15) 죽여라! 죽여라! 예수님을 향해 외치던 소리, 스데반을 향해 외치던 소리가, 이제 바울을 향하고 있습니다.
로마군이 바울을 보호하다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31-34)
아이러니 하게도 바울을 구한 것은 로마 군대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지역의 서북쪽 모퉁이에 헤롯이 건축한 안토니아 요새가 있었습니다. 이 요새에는 약 600명에서 1천 명 이내의 로마 대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이나, 폭동을 진압하는 것이었습니다. 안토니아 요새는 성전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전 뜰에서 일어난 소동은 즉각 천부장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천부장은 몇 명의 백부장과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백부장의 수가 複數로 된 것을 보면 최소한 200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한 것 같습니다. 유대인이 죽이려 한 바울을 이제 로마 군이 구출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완수하시기까지는 아무 원수들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까지는 어떤 자들도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간적인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명에 매달리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안전을 책임져 주십니다. 사명에 죽고, 사명에 사는 사람들이 되세요. 복음 전도의 사명, 교회 건설의 사명, 자녀 교육의 사명, 사회 정의의 사명, 사명에 충성하세요. 환경이 어떻든지 신경 쓰지 마세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개의치 마세요. 오직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귀를 기울이세요.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옛 성전은 헐고 새 성전을 지으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성전의 이슈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성전 때문에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도 바울 역시 성전 때문에 체포되어 로마까지 가서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이 뭡니까?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성전에 대해서 뭐라 하셨습니까? 옛 성전을 헐어버리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정말 존중받아야 될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정말 존중 받아야 될 성전은 주님의 몸 된 성도 여러분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교회 안에서 눈에 보이는 건물, 눈에 보이는 물질 때문에, 사람을 홀대하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짓기 위해 힘쓰세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눈에 보이는 성전에 매달리다 보면, 온갖 다툼과 분쟁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교회들의 다툼이 어디서 일어납니까? 다 건물 때문입니다. 예배당 짓는다고 다투고, 시비를 일으키고, 반목합니다. 건물은 적당히 간수하면 됩니다.
더 소중한 진짜 성전은 성도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인격의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신앙의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이런 성전을 짓는 사람은 절대로 싸우지 않습니다. 남을 모독하지 않습니다. 화평을 이루고, 영혼을 얻습니다. 위대한 교회 건설자가
응답받은 바울
헹 21:27-36 / 신성종 목사
여러분들 가운데서 주님 앞에서 기도의 응답의 체험을가지신 분들은 한번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고, 마음으로 믿어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참 재미는 기도가 응답될 때에 옵니다. 믿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바울이 그처럼 기도했던 로마방문의 기회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응답의 성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응답됩니다. 다만 기도응답의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기도응답은 크게 세 가지로 응답됩니다. 첫째는 [그래 원하는 대로 주마 (Yes)]하는 응답이 있고, 둘째는 [기다려라. 아직 때가 아니다 (Wait)]하는 응답이 있고, 셋째는 [안된다. 그것은 너에게 해롭다 (No)]의 응답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래 원하는 대로 주마]라고 할 때의 경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때에 하나님께서 긍정적 응답을 하십니다만 그러나 방법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한다는 점입니다.
돈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돈을 줄 때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돈 대신에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응답된 것을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됩니다. 믿습니까?
1. 바울의 기도는 무엇이었는가?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활동의 세계가 너무 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전혀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릇이 크다 작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 그것은 기도의 범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자기와 가족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그릇이 작은 사람이고, 자신과 가정은 물론 교회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그릇이 큰 사람이고, 가장 그릇이 큰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의 사람입니까? 그릇이 큰 사람이기를 축원합니다.
행 19:21절에 보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에 들린 후에 로마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땅 끝을 서바나(스페인)로 생각하였는데 그리로 가기위해서는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로 가야만 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원하는 대로 금방 기회가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차 선교가 끝날 무렵에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로마를 금방 갈 수 있는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방법으로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를 보면 바울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로마서 1장 10절에 보면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고 바울의 로마 방문의 소원을 기록하고 있고, 그 다음 11절에는 로마 방문의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5:22~25절에는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
바울의 소원은 세상끝인 서바나까지 선교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로마를 교두보(beachhead)로 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에서 교두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수영에서 [diving]이란 종목이 있는데 이 때에 발판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전쟁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아프카니스탄을 공격하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나라, 그 중에서도 파키스탄을 교두보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항공모함을 교두보로 사용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교두보의 활용은 목회에서도 그렇고, 선교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선교사들이 여기 저기 많이 흩어져 있는데 이들이 바로 선교의 교두보가 됩니다. 저는 뉴욕의 줄리아니 시장을 얼굴도 이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9.11 테러사건으로 인해서 그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힘들지만 그것이 줄리아니 시장에게는 기회였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어려움이 많지만 그러나 그것이 기회인 것을 믿으시고 선교와 전도의 기회를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바울의 기도를 응답하셨는가?
바울이 기도한 그대로 로마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기도응답의 방법은 바울이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습니다. 바울은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로마에 가기를 원했으나 그러나 실제로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도생활의 신비입니다.
■ 저의 간증을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유학생활이 끝나고, 제가 항상 기도했던 제목은 “하나님, 제에게 세계적으로 가르치는 교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이 기도가 응답되지않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교수로서 있을 때에 제게는 그런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목회 만년에 [망원경 식 성경 연구]라는 책을 쓰게 하시고, 다음에는 한국에 보내셔서 국민일보를 통하여 많은 글을 쓰게 하였습니다. 성경이야기는 이미 출판이 되었고, 이번에는 평신도 신학이란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런책 을 통해서 세계의 여러 선교 지와 교회에서 가르칠수 있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젊어서는 저를 그냥 내버려두셨던 하나님께서 늙은 뒤에 사용하시는 점이 정말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할렐루야.
마치 모세를 젊어서는 버려두셨다가 늙어서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바울이 원하는 대로 로마서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바울을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도록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너무도 신비합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는 다섯 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1.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하기 때문에 많은 높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만약 그가 원했던 대로 선교사로서 로마를 가게 되었다면 그는 일반 사람들만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감으로 인해서 [수많은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왕들까지 만나게 되었습니다. 재판한다는 이유로 벨릭스 총독, 베스도 신임 총독은 물론, 아그립바 왕도 만나서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는 하나님의 소관이고 바울이 할 일은 말씀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저도 많은 재판기록을 보았습니다만 그러나 바울의 재판 기록은 그 자체가 성경이고, 간증이고, 전도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로마 방문은 바울이 원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선교사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죄수의 몸으로 간 것이 오히려 더 많은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요 방법입니다.
2.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했기 때문에 생명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바울이 선교사로 로마에 갔다면 로마로 가는 중간에 암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천부 장까지 동원하여 그를 보호했습니다.
천부장을 거느리고 가는 것은 황제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십 부장 (열 사람의 우두머리), 오십 부장 (오십 명의 우두머리), 백부장(백명의 우두머리), 그런데 본문에는 천부장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바울은 외형적으로는 죄수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전권대사로 로마 병정들의 보호 아래에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할렐루야.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죄수의 몸으로 보냈다는 말입니다. 참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방법입니다.
3.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한 것이 재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바울은 솔직히 로마로 선교여행을 할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수의 몸으로 가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의 국고 비용으로 배도 타고, 음식도 먹으면서 갈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니라 천부 장이 함께 갔기 때문에 수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갔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요, 계산방법입니까? 따라서 바울은 로마의 재정으로 로마의 선교를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놀라우신 방법입니까?
4.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하게 된 것이 홍보적인 차원에서 놀라운 방법이었습니다.
선교를 하려면 홍보를 잘해야 하는데 바울은 천부 장 같은 수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갔기 때문에 [홍보가 자동적으로] 되었습니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갈 때 천 부장을 비롯한 수많은 군인들이 따라갔으니 아마 저들은 수군수군했을 것입니다.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잡혀간데? 그런데 왜 저렇게 많은 군인들이 둘러싸있지? 극악 범인가? 아니래, 예수를 믿는다는데, 예수가 누구이기에 저렇게 잡아간데? 하면서 민간 홍보가 저절로 되었을 것입니다.
저도 따지고 보면 별 볼일 없는 평범한 목사입니다. 그런데 매번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의 방법을 사용하여 저를 홍보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보다 더 광고가 되었고 유명해졌습니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도 이름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5.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갔기 때문에 [최고의 시설을 갖춘 선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마이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 가서 제가 본 것은 수 만 명이 함께 모여도 다 들을 수 있도록 자연적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의 선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개인 전도를 하였고, 또 때로는 재판형식의 간증집회를 하였고, 또 때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변명형식의 복음증거를 하였습니다. 앞으로 계속되겠습니다만 바울은 최고의 시설을 갖춘 선교를 하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요 방법입니까?
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도응답의 방법에 순응하면서 날마다 기도의 확신과 계속적인 기도생활을 가져야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최고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방법만을 고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1. 먼저 [기도의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요 14:14절은 저에게 기도의 확신을 주신 말씀입니다. 아주 간단한 말씀입니다만 확신을 줍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다음은 마7:7~8절의 말씀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더 이상의 말씀이 필요 없습니다. 이 두 구절은 저에게 항상 기도의 확신을 주는 구절입니다. 솔직히 저도 때로는 기도의 응답에 의심을 가질 때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은 제게 음성으로 응답하십니다. 할렐루야.
2. 다음은 [계속적인 기도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기도가 응답 받게 된 이유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다른 것은 하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호흡처럼 [하나님과 계속적인 교통]을 하라는 것입니다. 호흡은 항상 합니다. 의식적으로도 하고 무의식적으로도 합니다. 주님을 생각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꿈으로 응답하실 때도있잇고, 음성으로 응답하실 때도 있습니다.
다음은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다가 쉴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도 응답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쉽니다. 피곤해서 쉽니다. 시험을 받아 쉽니다.
맺는 말
오늘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기도에 응답을 받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이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돈 한 푼 드리지 않고, 선교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고, 계속해서 기도하면 우리들에게도 이런 응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계속해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양향모 목사
사도 바울이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것을 반갑게 맞이해주면서 환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염려되는 것이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교회에 있는 유대인들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제정해주신 율법이나 제사제도나 관습들을 지키지 말라고 선동하여서 모세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으로 오해를 하고 만나면 혼을 내주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를 비롯한 교회의 장로들이 사도 바울에게 서원한 사람들과 함께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게 하고 그로서 그들이 바울도 율법을 지키고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는 사람으로 알게 하여서 잘못된 오해를 풀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서원을 하고 그에 따른 결례를 행하는 것 자체가 복음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또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배반자로 여겼고 유대교를 없애려고 하는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반드시 잡아서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부터 그런 유대인들과 사도 바울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유대교를 옹호하고 율법과 성전을 옹호하는 유대인들과 하나님께서 율법이나 성전을 통해서 주시고자하는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사도 바울과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도 성전에 왔다가 사도 바울을 발견하였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잡아서 죽이든지 항복을 받든지 하여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드디어 만났습니다.
그 때가 유월절 절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다른 나라에 가서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서 절기를 지켰고 사도 바울도 더 많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절기에 맞춰서 예루살렘에 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을 충동해서 사도 바울이 율법과 성전을 비방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을 붙잡아서 성전 밖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으니까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거기 모인 유대인들이 나쁜 사람들이거나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에 열심을 냈던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저 멀리 아시아(지금의 터키 지방을 말함)에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만사를 제쳐놓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의 죄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율법을 비방하고 이곳(성전)을 비방하고 헬라인 즉 이방인들과 함께 다니면서 이방인들을 데리고 성전에까지 들어와서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주 특별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선택해서 특별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주셨다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신들에게만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성전을 주셨다는 것이 엄청난 자랑이었고 그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과 거기 따른 여러 가지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했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의인이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죄인으로 죽임을 당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신 때가 언제였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흉년을 피해서 가나안 땅에 살지 않고 애굽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애굽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서 400여 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모세를 보내서 그들을 구원해내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을 거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되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만 섬기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기 위해서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애굽에서 애굽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서 400년 동안을 사는 동안 그들에게는 노예로서의 근성이 그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지켜주는 법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아닌 개나 돼지와 같은 짐승처럼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아야 하는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서 사는 법을 만들어주셨는데 그것이 율법입니다. 애굽 사람들처럼 온갖 잡신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노예에게 대하는 것처럼 함부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때리고 죽이는 비인간적인 삶을 살지 말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두 마디로 집약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주신 법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입니다. 노예처럼 살지 말고 노예를 학대하는 애굽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자유인으로서 자유를 누리며 서로를 사랑하면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잡신들을 섬기지 말고 우상숭배를 하지 말고 심지어 하나님을 섬길 때도 우상숭배를 하는 것처럼 섬기지 말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노예가 되어서 또 다른 노예의 삶을 살고 있었고 율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착취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니까 율법을 지키기는 하는데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지키는 시늉만 합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은 없고 공의만을 내세우고 자기 의만 세우고 다른 사람은 정죄하는 일에 사용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율법을 다 잘 지킬 수가 없는 타락한 인간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식적인 사람이 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 더 큰 죄인이 되게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합니다. 율법의 가장 큰 뜻이 이것인데 이런 큰 뜻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가졌다는 자부심만 내세우고 그 뜻을 알려주는 사도 바울을 오히려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런 유대인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해서 주신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내 모습을 비추어 보고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이 죄악에서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이며 그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를 알 수 있는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몇 가지 지켰다고 착한 일 좀 하면서 살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속에는 시커먼 죄악들을 가지고 살면서 겉으로 착한 척해서 자신은 의로운 사람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알량한 몇 가지 의로움 때문에 십자가를 붙잡지 못하고 믿음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며 가장 어리석은 바보들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따라 바른 삶을 삶으로 세상의 종 사탄의 종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성전에서의 제사도 우상숭배를 하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알고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 짐승처럼 비참하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 죄인이며 장차 저 어린 양으로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도 하나님의 뜻과 달랐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특별한 백성으로 불러 주셨는지를 그들은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복을 주신 것은 그 후손들을 통해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이방인들을 멸시했고 이방인들과 함께 하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유대인을 배반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런 마음이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나만 구원 받으면 되고 나만 신앙생활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복음을 주신 것은 특별히 우리 광성교회처럼 복음을 확실히 알게 해 주시고 복음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게 해 주신 것은 이 복음의 위대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확실한 복음을 받고 이렇게 믿음이 위대한지를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이런 귀한 일을 하는 교회를 위해서 충성된 일꾼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기쁘게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위해서 이 복음만을 전하는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헌신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본문 31-34절에 “31.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도바울 죽이려고 달려들자 이로 인해서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동이 천부장에게까지 들렸다고 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치안유지를 위해서 로마 군인들이 파송되어 있었습니다. 그 부대의 천부장은 부하를 천여 명을 거느린 부대의 장을 말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23장에서 글라우디오 루시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소란한 현장의 소식을 들은 천부장이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데리고 현장으로 달려가게 하셨습니다. 천부장이 달려가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치고 죽이려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이 사도 바울을 쇠사슬로 묶으라고 명령하고 그들에게서 격리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이렇게 사람을 치고 죽이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거기 모인 유대인들이 뚜렷하게 바울의 죄상을 말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이런 말로 어떤 사람은 저런 말로 소리만 지르니까 진상을 알 수가 없어서 바울을 부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잘 따져보고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를 잘 살펴보고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누군가가 선동을 하니까 그 말만 듣고 흥분해서 이성을 잃고 달려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같이 시내로 다니는 것을 보고 이방인을 성전까지 데리고 갔다고 오해를 하고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도 사도 바울이 왜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바울을 싫어하는 몇몇 사람의 선동에 의해서 아주 나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참 이성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가 못합니다.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그냥 따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들이 하면 그것이 유행이라고 다 따라하고 남들이 입고 다니고 남들이 들고 다니면 다 그냥 따라하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좀 생각을 해보고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따져보고 따라하든지 말든지를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지 싫어하실 일인지를 분명히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이일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성전에서 끌고 나와서 죽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에서 파송된 군대의 천부장을 동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일에 개입을 하시지만 특별히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위해서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일에 함께 하셨듯이 우리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성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우리의 삶에 역사하십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셔서 천부장을 통해서 그들 손에서 사도 바울을 구해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알지 못하고 복음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을 비웃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복음이 성경의 핵심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편에서 역사하심을 믿고 복음을 믿는 믿음을 귀하게 여기고 힘써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