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57
8월22일[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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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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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czPJDPNecc
[서울대교구 송제원 안드레아(사목국 교육지원팀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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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님께서 천상의 여왕이 되신 이유는?>
저희 살레시안들은 저녁 식사 설거지가 끝나면 자동으로 모이는 곳이 있습니다. 야외에 서계시며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시고 도와주시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 상 앞입니다.
한 형제의 선창으로 묵주기도를 시작합니다. 형제들이 함께 수도원 경내를 천천히 산책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이 시간, 일과 중,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묵주기도가 끝나갈 무렵, 발걸음은 다시금 성모상 앞으로 향합니다. 기도 끝에는 어김없이 성모님 노래를 합창합니다. “마리아 모후여, 어지신 어머니~”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모후’라는 말은 ‘왕의 어머니’, 또는 ‘여왕’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가장 충실히 협조하셨던 성모님의 머리 위에 빛나는 왕관을 씌워드린 것을 경축하며 ‘여왕’ ‘모후’라는 칭호를 붙여드렸습니다.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 바치실 때, 제일 마지막 5단은 어떤 신비를 묵상합니까?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워드림을 묵상합시다.”입니다. 일종의 대관식 장면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삼종기도 첫구절은 어떻습니까? “천상의 모후여,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태중에 모시던 아드님께서 알렐루야!” 보십시오! 여기서도 천상의 모후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모님 성가 중에 아주 유명한 성가 있습니다. “하늘의 여왕 되시는 오 마리아!” 매일 수도자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이런 찬미가를 부릅니다. “여왕이시며 사랑에 넘친 어머니”
보십시오. 하늘이 여왕이신 성모님에 대한 표현이나 이미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 여기저기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여왕’ ‘모후’라는 호칭은 단순하고 소박하신 성모님, 고향에 계신 우리 어머니 같은 성모님께 그리 잘 어울리는 호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는 분,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마니피캇 찬가의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어 버리십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자리에서 내치십니다. 부요한 자들을 빈손 돌려보내십니다. 목에 잔뜩 힘주는 사람들, 잔뜩 폼 잡는 사람들을 바닥으로 내치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한결같은 충실함으로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셨던 지극히 겸손하신 성모님께 큰 축복을 내리시어, ‘모후’‘여왕’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모후요 여왕이기는 하시지만, 동시에 한없이 겸손하신 여왕이십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갖은 고통과 상처로 힘겨워하는 어린 양들을 측은지심의 눈빛으로 굽어보시고, 살뜰하고 극진히 챙기시는 봉사의 모후이십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천상 모후의 관을 받으신 후에도, 한결같이 자애롭고 온유한 모습으로, 죄인인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봉사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성모님께 여왕이란 어마어마한 칭호를 붙여드린 이유는 그분이 하느님의 여종으로서 최선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평생토록 침묵 속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고, 계속되는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기도하고 희망하며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이것이 여왕이 되신 이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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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BD_y5gOxj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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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례를 잘못 받고 있습니다>
신학교 때 예비군 훈련을 하면 신학생들은 수단을 벗고 예비군 군복을 입고 밖으로 나갑니다. 비군복장은 군대 제대할 때 입고 나왔던 옷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옷만 입으면 사람들이 바뀝니다. 말년 병장으로 모두 변하는 것입니다.
모자를 비뚜로 쓰고 윗도리는 밖으로 내고 담배를 뭅니다. 돌아올 때는 술도 거나하게 취하여 워커 끈을 다 풀은 채로 복귀합니다. 그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복장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겉은 군복을 입었지만 속은 여전히 수단을 입고 있는 신학생들도 발견이 됩니다. 절대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밖의 복장보다 내면의 복장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입어야 할 옷은 종의 옷이며, 사람들을 만날 때 입어야 할 옷도 종의 옷입니다. 내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대한 믿음에 따라 우리 삶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 잔치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혼인 잔치에서 쫓겨납니다. 그는 분명 자신은 혼인 잔치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은 그 삶의 태도를 그에 합당하게 바꿉니다. 혼인 잔치를 망치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힘으로 무화과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습니다.(창세 3,7 참조) 자기들 스스로 하늘나라에 합당한 존재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가죽옷을 만들어주셨습니다.(창세 3,21 참조) 하느님을 만나 생겨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옷은 곧 정체성입니다.
새 정체성은 만남을 통해 얻어집니다. 만약 내가 미혼 남성이었는데, 어떤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면 이제 그 여인 때문에 나는 남편이라는 새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이 되면 이전 정체성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만나오던 여자들이 있었다면 새로운 정체성을 위해 그 관계들을 끊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전 옷을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성사로 치면 이 과정이 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세례는 어떤 옷, 곧 어떤 정체성을 가지게 할까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6-27)
저희 성당에서 강론이 끝나고 우리는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입니다.”를 외칩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녀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리스도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로마 6,3-4)
우리가 그리스도께 감사해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죄로 살던 이전의 내가 죽었고 이젠 그리스도를 입어 그리스도로 믿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나를 그리스도로 살게 하고 하늘나라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갖춘 존재로 만듭니다.
50조 사업가 ‘댄 페냐’의 쓴소리를 들어봅시다. “당신은 당신과 어울리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친구를 보여주세요. 당신 미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누구와 어울리나요? 당신은 빌 게이츠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스티브 잡스나 워렌 버핏도 아닙니다. 당연히 일론 머스크와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나요? 그들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일론 머스크의 일과 삶에 균형을 이룬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스티브 잡스가 살아있을 때의 일과 삶의 균형을
이뤘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빌 게이츠처럼 사나요? 헨리 포드처럼 살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세상의 부를 만든 사람 중 아무도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면 왜 당신은 그들이 가졌던 것을 가질 것으로 생각하세요? 20년 또는 30년 후에 당신이 있고 싶은 곳에 있는 사람을 찾아서 지금 그 사람에게 가세요.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자존감을 키우고 싶다면 일론 머스크처럼 사십시오. 그러면 높은 자존감은 일론 머스크와 커피를 마실 시간을 마련해 줄 것입니다.
은행에서 돈을 받고 싶다면, 당신 나라 대통령처럼 옷을 입으십시오. 당신 나라 총리처럼 옷을 입어요. 당신에게는 첫인상을 남길 기회가 한 번뿐입니다. 그러나 당신들 대부분은 당신들 옷차림 때문에 부끄러울 것입니다.
두 번째 인상은 입을 열 때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가장 큰 존경심을 가지고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더듬거리고, 중얼거리고, 땀을 흘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출처: ‘50조 사업가: 부자 되려면, 옷부터 똑바로 입어야’, 유튜브 필미필키TV]
저 같은 경우는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믿기 위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를 자주 외웁니다. 그리고 마치 그리스도의 그 심장이 나의 심장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혼인 예복을 입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를 입고 그리스도라 믿지 않았다면 진정으로 세례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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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입니다. 뉴욕에 있는 분에게 송금할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카카오 뱅크처럼 미국에도 간편하게 송금할 수 있는 ‘벤모와 젤’이 있습니다. 수수료 없이, 소액을 송금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송금의 한도가 있습니다. 저는 송금 한도가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몇 번에 걸쳐서 송금하니, 은행에서 온라인 뱅킹을 막았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해결하려 하니 복잡했습니다. 은행에 가서 이야기하니,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은행을 통해서 송금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같은 금액을 몇 번에 걸쳐서 송금하려 했을 때, 은행은 제게 전화도 하고, 문자도 보냈다고 합니다. 제가 그것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은행은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온라인 거래를 막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은행의 계좌는 본인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볼 수 있으면 곤란할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있는 사제관은 게이트가 있습니다. 게이트를 열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알아야 합니다. 단지에서는 비밀번호를 3개월에 한 번씩 교체하고 있습니다. 단지에 있는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무엇이 새 마음이고, 무엇이 새 영일까요? 새 마음과 새 영은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비밀번호’와 같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넣어 주신 ‘숨’입니다. 아담이 선과 악을 아는 나무를 먹으면서 상실했던 하느님을 닮은 마음입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려는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려는 사양지심의 마음입니다. 겸손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위치의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이 겸손입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수오지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용서해 주셨고,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하리라.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하리라.” 우리의 죄가 크고, 많아서 하느님께 갈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회개는 하늘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와 같습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는 시비지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과 교만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을 잘 안다고 했지만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식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탐욕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율법과 계명을 이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과 자캐오의 나눔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세리였지만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식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간다는 것은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기쁨, 자유를 얻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이미 천상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 역시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함께 기도하고, 주님의 자녀로서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좋은 선택을 하였고,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봉사가 주님의 잔치에 함께 할 수 있는 예복이 될 것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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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2,1-14: 혼인 잔치의 비유
주님의 잔칫상은 그 자리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혼인 잔치에 비길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당신의 친구들을 잔치에 초대했다.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4절)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 버렸다. 밭으로 간다는 것은 세상일에 몰두하는 것이고, 장사하러 가는 것은 세상에서의 활동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다른 것에 몰두해 있으므로 임금이 차린 혼인 잔치에 가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초대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를 전하는 이들을 박해하기까지 하고, 더러는 죽이기까지 하였다. 임금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들을 불살라 버렸다.”(7절) 초대를 거부하는 것은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잔치는 치러져야 한다. 임금은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8-9절) 종들은 거리로 나가서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고,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잔치의 모습은 악인들과 선인들이 모여 있는 현세의 교회를 의미한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을 둘러보려고 임금이 왔다. 임금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한다. 여기서 혼인 예복은 사랑인데, 그는 믿기는 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다. “이 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13-14절) 손과 발을 묶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못 하게 한다는 것이다. 바깥 어둠은 거룩한 영광과 완전히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옷은 의로움의 옷이며 준비를 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 가운데 추궁당하고 손발이 묶여 바깥으로 던져진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 넘치는 만남의 초대인 것임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영원을 내다보며 기쁨으로 바꿀 줄 아는 믿음의 자세를 보이는 것을 뜻한다. 우리 마음 안에서 이미 언제나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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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마태오 복음서에서, 임금이 준비한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가지가지 이유를 앞세우며 오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 21장에서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았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여기에 해당하고(마태 21,23-27 참조),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말을 듣고도 가지 않은 아들이나(21,28-32 참조)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도(21,18-22 참조) 그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임금이 보낸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거부하였음을 의미하고, 임금이 군대를 보내어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게 파괴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다시 초대된 이들은 처음 초대받았던 이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21,31) 들어가고 있는 세리와 창녀,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나중에 초대받은 이들에 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혼인 예복입니다. 초대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그 초대를 받은 사람 편에서 초대에 알맞게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 선물은 효력을 잃고 맙니다. 먼저 초대받았던 이들이 밭과 장사를 앞세웠기 때문에 그 초대를 잃어버렸다면, 그 뒤에 초대받은 우리도 이 초대보다 다른 무엇을 앞세울 때 그 초대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마침 오늘 입당송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입니다. 하늘나라의 초대를 소중히 여기고 잘 간직하여 깨끗한 혼인 예복을 입고 그 나라에 들어갈 날을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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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늘나라의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치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2-10)
1) 하늘나라의 혼인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2코린 11,2ㄴ)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혼인 잔치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입니다. 따라서 ‘나’는(모든 신앙인은) 하늘나라의 혼인 잔치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공입니다. 그 잔치는 바로 ‘나를 위한’ 잔치입니다. 내가 무사히 하늘나라에 잘 도착했음을 환영하고 축하하는 잔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초대’라는 표현과 ‘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그것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을 하는 것처럼 하는 사람들을 꾸짖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내가 원해서 하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대받은 손님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는 집으로, 아버지의 집이면서 동시에 ‘나의 집’인 그 집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2) ‘혼인 잔치’라는 말에서, ‘혼인’은 예수님과 신앙인의 ‘일치’를 나타내고, ‘잔치’는 “하느님의 나라는 곧 기쁨의 나라”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치’와 ‘기쁨’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제시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고, 그 일치 자체가 곧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된 것이고, 나중에(종말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기쁨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그 기쁨을 ‘지금’ 누리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5절의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간 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다른 것에서, 즉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에서 기쁨을 찾는 자들입니다. 과연 그런 것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서 잠깐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 즐거움은 금방 허무하게 사라집니다.
3) ‘혼인 잔치의 비유’는,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 또 신앙생활을 하긴 하는데 세속의 생활을 신앙생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겨냥한 비유입니다.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진 위선자들도 포함됩니다. 잔치에 참석하지 않고 밭으로 가거나 장사하러 간 자들은, 참석하겠다고 응답을 했으면서도 실제로 참석하지는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마태 7,21) <원래 이 비유는 유대인들을 겨냥한 비유이고, 그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이방인들에게로 구원의 은총이 넘어간다는 뜻인데,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이나 그들의 구원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우리 자신의 구원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다고 해도,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것은 처음부터 신앙인이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가?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신앙생활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또 진지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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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혼인은 한 사람이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일생 동안의 통과 의례 가운데 한 단계입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였습니다.(요한 2,1-12 참조)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중요성도 두 번씩이나 언급하시는데,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확실한 계명(마태 5,31-32 참조)과 함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라는 선언을 통하여 강조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를 드실 때도 혼인은 좋은 예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인 ‘혼인 잔치의 비유’가 그렇고, ‘열 처녀의 비유’(마태오 25,1-13 참조)도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인 ‘혼인 잔치의 비유’를 묵상합니다. 임금이 혼인 잔치를 열고 종들을 보내어 초대받은 사람들을 불러오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참석을 거부하고 심지어 임금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분노한 임금은 군대를 보내 복수를 하고, 종들에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 잔치에 데려오게 합니다. 마침내 혼인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찹니다. 그런데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는 하인들에게 그의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혼인 잔치는 가장 풍성한 잔치였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화려하게 치장을 하였고 손님들도 합당한 예복을 갖추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랑 신부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거리에서 불려 온 사람들은 종들을 무작정 따라나선 것이 아니라, 모든 준비를 마치고 초대받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입성을 혼인 잔치의 초대로 비유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늘 준비하고 있어야만 하는 믿음의 자세를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땅히 갖추어 입고 준비해야 할 우리의 예복을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알려 주십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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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예수님의 비유의 중심 주제는 늘 하느님 나라이고, 이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잔치로 비유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 속의 혼인 잔치는 이스라엘 백성의 저녁 식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언제나 문을 잠그지 않고 저녁 식사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의 잔치는 기쁨과 무상성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잔치에서 이런 무상성의 특성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누가 잔치를 연다고 초대하면 벌써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무엇을 들고 가야 하나?’ ‘얼마쯤 넣어 가야 하나?’ 나아가 ‘꼭 가야 하나?’ 등의 별의별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또 요즘 세상에서 공짜는 실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공짜라고 해 놓고 실제로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입니다. 무상의 초대가 사라져 버렸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을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초대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상성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모두 불러오라는 비유 속 주인의 말은 속상할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로마 5,6)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이가 초대받아 풍부하게 나누고 먹을 수 있는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그 잔치는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예복을 마련하는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초대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하느님 나라의 삶의 양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잔치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거기서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 욕심만 차리고 저만 위하여 사는 사람이 내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만 아는 이들 속에서 기뻐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옷과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 옷, 곧 하느님 나라에 걸맞은 양식으로 살려고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 음식을 즐길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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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실 부르심을 받는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22,14)
예전 초등학교 다닐 땐 자주 친구들과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먼저 해야 할 숙제나 과제물 준비를 미처 해놓지 않아서 등교할 시간이 되어 허둥대고 울다가 학교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기억이 떠오르면 참 씁쓸해집니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차츰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구별하게 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흔한 표현으로 아무리 바느질이 급하다고 하더라도 바늘허리를 묶어서 옷을 꿰맬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중요한 일, 먼저 해야 할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 일에 몰두하고 ‘all-in올인’한다, 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일은 바로 일의 우선순위를 아는 것이고, 자기 능력과 시간을 어떻게 선용할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일을 하던지, 항상 자신이 늘 준비하고 있는 존재로 살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늘 깨어 준비된 존재여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저는 이 비유에서 초점은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보다 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어떤 자세로 참석하느냐에 관건이 있다고 먼저 전제하고 들어가고 싶습니다. 예전 누이들의 혼인 잔치는 대개 집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손님들을 초대해서 베풀었기에, 단지 음식의 풍요로움만이 아닌 일가친척들로 북적거리는 집 안 공기가 얼마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혼인 잔치하면 이런 시끌벅적거림과 풍성함, 즐거움으로 넘쳤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그때가 그립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혼인 잔치의 이상한 점은 처음엔 제한된 사람만 초대했다가 차츰 모든 사람에게 다 개방하고 초대합니다. 왜 처음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기쁨이 넘친 혼인 잔치에 만사 제쳐 놓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기기 위해서 달려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복음에선 처음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별로 내키지 않아서 거절하자, 재차 종들을 보내어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이제 잔칫상을 다 준비했으니 오라고 했건만 그들은 그런 초대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지만”(22,5), 그 이외에 나머지 사람들의 반응은 더 가관인데 보낸 심부름꾼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22,6)까지 하였으니 초대한 임금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속상했으면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22,7)라고 전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비유에서 초대를 아랑곳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이며,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지 못한 사람들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잔칫상을 이미 마련한 임금은 그 잔치에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라고 종들을 보냈고, 종들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모든 사람을 데려오니 마침내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지요. 물론 이를 본 임금은 흐뭇하고 한결 마음 편해져 잔칫방을 둘러보고 사람들을 만나는 데 그 방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혼인 예복을 갖추지 않은 것을 보고, 그 사람을 밖의 어둠으로 내던져 버리게 합니다.(22,13참조) 왜 그를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던져 버렸을까요? 처음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그 잔치가 썩 달갑지 않아서 자기 의지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들을 보내어 이번엔 초대장도 없이 마구잡이로 아무나 길에서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해 놓고서 미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바깥 어둠으로 내던져 버렸다고 하니 도대체 그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의문이 생깁니다. 바쁘게 사느라 힘든 사람 데려올 때는 언제고 혼인 예복을 입었느니 입지 않았느니 자격을 따지고 있으니, 왜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은 일, 황당한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러기에 서두에 제가 전제를 드렸지요. 초대한 사람보다 초대받은 사람이 어떤 처지에서든지 늘 깨어 준비하고 살아야 한다, 고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먼저 하느님에게 혼인 잔치와 초대는 무척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생명과 사랑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생명과 사랑으로 인간과 다시 결합 되길 원하셨기에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사랑으로 파견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과 사랑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 초대했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로 초대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런 연유에서 구원의 혼인 잔치에 모든 사람이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우리는 초대받은 혼인 잔치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의 예복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 혼인 잔치에는 어떤 예복을 입어야 하고 어떤 예복이 적합할까요?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으십시오.”(에4,22/콜3,9참조)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늘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답게 그리스도의 얼과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복을 입어야 하리라 봅니다.
하늘나라는 사랑의 나라이기에 그 혼인 잔치에 맞는 예복은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복음 선포의 첫 마디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4,17)라고 선포하시며, 이 하늘나라(=구원)는 누구에게나 곧 선한 사람 악한 사람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에게나 곧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겐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혼인 잔치에 적합한 예복은 사랑인 하느님 아드님의 혼인 잔치이니만큼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우선해야 할 것이며, 그다음으로 사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곧 그 사람의 존재 자체보다 지금 여기 혼인 잔치에 적합한 예복을 갖추고 있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만을 강조하시고 구원에 있어서는 아무도 예외가 없이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리라, 고 기대하지만,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해야 한다고 요구할 권리는 없다는 사실 또한 맞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씀이라고 느껴집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는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22,14) 독일의 신학자인 한스 큉은 그의 책 「믿나이다.」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스스로 원하지 않는 사람도) 구원 하고자 하신다는 것! 그러나 하느님이 모든 인간(=스스로 원하지 않는 사람)을 구원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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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주일 오후, 한가하게 텔레비전을 보며 쉬고 계시던 형제님께서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아내가 휴대전화에 자기를 뭐라고 저장했을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아내 휴대전화가 앞에 있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술 단지’라는 호칭이 아내의 휴대전화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인생의 동반자이자 아이들의 아버지를 술 단지라고 부른다는 것에 너무 화가 났고 그런 아내가 너무나 얄미웠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얄미운 여자’라고 바꿔서 저장했습니다.
며칠 뒤, 아내가 이를 알아챘나 봅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울며 따지기 시작합니다. 스물여섯 살에 시집와 이사만 열네 번씩 하며 어렵게 아이들을 키웠는데, 어떻게 그 많은 호칭 중에 ‘얄미운 여자’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었지요.
남편 역시 자기도 할 말이 없지 않다면서, ‘술 단지’ 호칭에 대한 말을 꺼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큰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휴대전화에 저장한 호칭 하나로 가정에 불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남편은 그 순간에 화가 많이 났지만, 자기가 속 좁은 모습을 보였다고 반성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에, 연락처 속 아내의 호칭을 ‘평생 고마운 사람’이라고 바꿉니다.
며칠 뒤, 아내가 저장한 자기의 호칭을 우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오직 한 분’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말이 절대 틀리지 않는다면서, 요즘에는 서로 좋은 말만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말을 주고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이익과 편리를 생각하면서 때로는 상대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면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늘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주님께 우리는 과연 무엇을 봉헌하고 있을까요? 받는 것만 당연하고, 더 나아가 받는 것에도 불평불만으로 원망의 기도를 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많은 사람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잔치에 참석하기는커녕 몹쓸 짓만 합니다. 그들을 벌하고 다른 사람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풀지만, 이 중에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혼인 잔치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혼인 잔치에 오지 않은 사람,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모두 임금의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무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미래는 밝지 않습니다. 혼인 잔치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면서 혼인 잔치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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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혼인예복은 마음의 옷>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혼인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오랫동안 관심과 사랑으로 배려했던 이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믿었던 이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오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기에 풍성하게 준비를 했는데 즐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쳐 그들의 속을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급기야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여 잔치방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받은 은혜보다도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그들은 당장 내가 먹고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내가 아니어도 축하객이 많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의 잔치는 매우 성대하였고 귀한 선물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초대 받은 사람은 핑계 아닌 핑계를 댐으로써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물을 차지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초대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선택된 사람은 적었고 이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하는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묵시록 3장 20절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드리는 역할은 나의 몫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준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잔칫집에 가려면 그에 걸맞은 예복을 입어야 하듯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한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배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헛배가 부르면 정말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헛배가 불러 다른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미사참례, 성지순례, 피정이나 세미나, 교육, 봉사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 매우 어렵지만 그래도 기도시간을 챙겨야 합니다. 영적인 풍요로움을 찾지 않는다면 갈수록 영혼이 메말라 신앙이 죽게 됩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심지어 죄를 범하는 경우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도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한다면 그는 결국 뽑힌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예복도 없이 천상을 갈망한다면 허황된 꿈에 불과할 것입니다. 교부들은 혼인예복을 사랑, 선행, 의로움의 실천으로 해석했습니다. 혼인예복은 마음의 옷이며 마음을 어떻게 가꾸었느냐에 따라 아름다움이 더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 3,5-6) 혹 준비가 미흡하다면 지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회개와 행동하는 믿음의 예복으로 단장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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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때>
마태오 22,1-14 (혼인 잔치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때>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그분께서
나를
부르시는
때는
그분께
내가
부르심 받고 싶은
때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부르시고 싶은
때랍니다
내가
그분께
응답하는
때는
내가
그분께
응답하고 싶은
때가 아니라
내게
그분께서
응답받고 싶은
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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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성소;聖召)은 선물이자 과제이다”>
-예닮의 여정-
새벽 일어나 강론 쓰기전 일별해 보는 인터넷뉴스와 동영상 제목입니다. 특히 동영상 제목만 봐도 국내외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몇 가지 눈에 띈 제목입니다.
“탈영, 병역기피 5만 명, 러, 심상치 않은 분위기”
3년째 계속되는 러시아-우크라이나의 무의미한 전쟁에서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음은, 살고 싶음은 젊은이들의 너무나 당연한 욕구입니다.
“시카고 등장한 오바마 부부, 연설 천재 사자후에 열광, 미셸 오바마 ‘더 높이 가자!’”
미국은 대선 열기로 뜨겁게 달궈지고 있고 오바마 부부의 열정적 연설은 군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습니다. “더 높이 나가자!” 정말 멋진 미셸 오바마의 구호이자 좌우명입니다. 주님께 불림받은 우리도 주님을 향해 날마다 더 높이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밖에도 무수한 국내외 동향을 알리는 제목들이지만 이만 생략합니다.
정말 쏜살같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입니다. 모두가 지납니다. 휴가 떠난 형제들도 순식간에 돌아오고, 2주 단위의 머리 깎기도 순간입니다. 1주일도, 한달도, 봄-여름-가을-겨울 1년도 순간입니다. 흡사 기차 타고 떠날 때 창밖 지나는 풍경처럼 그렇게 세월은 흐릅니다. 며칠 전 서울대교구 젊은 사제가 57세 병환으로 선종했다는 소식이었는데, 어제 또 38세의 젊은 사제가 병환으로 선종했다는 소식입니다.
오랫동안 정주의 삶을 살다보니 세월의 흐름도 보입니다. 36년이 훌쩍 지나니 많은 형제자매들이 세상을 떠났고, 젊었던 수도형제들도, 꽃같이 젊었던 봉사자 자매들도 노년의 가을, 또는 겨울 인생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새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죽어야 하나? 자문하게 됩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정말 소중한 선물이자 동시에 과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삶의 지침이 됩니다.
“몸의 평안함은 애써 추구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착한 본성에 따라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다.”<다산>
“좋은 맛을 구하고, 미색을 구하고, 편안함을 구하는 것은 본성이다. 하지만 지켜야 할 천명이 있으므로, 군자는 본성이라 하지 않는다.”<맹자>
한마디로 각자 주어진 성소에, 천명에 충실할 때 저절로 몸의 평안함이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믿는 우리들의 삶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 여정 중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삶은 선물이자 과제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라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은 뚜렷합니다.
역설적으로 성소에 충실히 응답하여 주님을 닮아갈수록 참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참나로 익어가는 삶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세월의 흐름은 정직하고 자연스러워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니 배밭에서도 서서히 과일 익어가는 푸근하고 넉넉한 열매 향기가 납니다. 봄의 꽃향기보다 더 그윽하고 깊은 열매 익어가는 가을 향기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계속되는 성인 기념일입니다. 엊그제의 성 베르나르도, 어제의 성 비오 10세, 그리고 오늘은 동정 마리아, 모두 선물이자 과제 인생을 100% 성공적으로 살아낸 성인들이며 오늘 기념하는 성모님은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의 유래를 나눕니다. 모후란 임금의 어머니를 말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임금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이심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시고 성모 마리아는 왕의 어머니가 됩니다. 1954년 비오 12세께서 제정하고 반포한 교서의 내용입니다.
“‘그의 아들이 왕이 되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된다.’고 했던 천사의 말씀과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부른 성경 구절을 기초로할 때, 이 두가지 성경은 당신 아들의 왕권 때문에, 마리아 역시 그에 상응하는 위대성과 탁월성을 갖고 계심을 보여준다.”
1925년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지정된 이후부터 성모 마리아가 왕의 어머니시라는 축일도 정해져야 한다는 요청이 쇄도했고, 비오 12세는 “하늘의 여왕께” 라는 회칙을 통해 마리아께서 여왕이심을 선언했고, 1954년 성모성년의 폐막식을 기념하여 선포한 축일로 교황 비오 9세가 1854년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마리아 대축일’을 선포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참으로 당신 성소의 선물을 100% 과제의 완성으로 살아냈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어제에 이어 하늘나라의 비유입니다. 어제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였고, 오늘은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새삼 우리 인생을 혼인잔치 하늘나라 축제인생임을 깨닫습니다.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축제인생 혼인잔치에 초대 받은 이들은 무지에 눈이 멀어 한결같이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하고 혹자는 초대 사절로 온 종들을 때리고 죽입니다. 주님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을 뜻하지만 우리일수도 있습니다. 초대받은 은총의 사실을 잊고 마구 되는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받았다고 보장된 구원이 아니라 날마다 하루하루 하늘나라 초대 잔치에 응답하여 축제인생을 살아내야 합니다. 선인과 죄인이 함께 공존하는 하늘나라 우리 교회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하늘나라 교회 공동체내에 몸담고 있다하여 무조건 구원이 아니니 바로 혼인잔치 예복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임금이신 주님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이에게 말합니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물으신후,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속으로 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우리에겐 바로 죽음이 심판과 구원의 갈림길입니다. 이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기도하라, 회개하라, 사랑하라 연장되는 삶이요, 살아있을 때 기도요 사랑이요 회개이지 죽으면 다 끝입니다.
혼인예복이 상징하는바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의 책임인 과제입니다. 밀렸다 한꺼번에 과제 다 못합니다. 하루하루 넘어야 하는 첩첩산중의 삶처럼, 하루하루 과제를 다하며 넘어야 하는 산같은 인생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선물인생에 충실한 과제 이행으로 응답한 이들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택 역시 우리가 스스로 책임의 과제를 다할 때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부르심에 따른 성사의 은총이 우리를 돕기에 도저히 핑계댈 수 없습니다. 에제키엘서에서 약속한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실현되고 있으니 용기백백하여 하루하루 책임의 과제를 이행할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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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체험의 단계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
간땡이가 붓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면, 망령이 단단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임금의 초대를 그리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진정 그들의 임금이었다면 그 신하나 백성이 임금이 초대한 아들의 혼인 잔치에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을 우습게 생각한 것이고 아무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비유를 생각하며 우리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성찰했고,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한다면 우선 두려움의 하느님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지혜의 시초라고 했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겸손으로 인해 하느님 두려워할 줄 안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눈에 뵈는 것이 없어서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하였는데 큰 시련을 격음으로 인해 그 교만이 깨어지고 자기의 한계를 체험할 때 비로서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다음의 하느님 체험은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나는 너무도 미천하며, 하느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나는 너무도 죄인이며, 하느님은 지극히 영광스러우시고 나는 너무도 초라합니다.
그러나 이런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런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초대하심을 대단한 영광으로 삼는 겁니다.
그다음의 하느님 체험은 사랑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은 크고 두려우시며, 높고 영광스러운 분이실 뿐 아니라 참으로 자애와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심을 더 나아가 체험하는 겁니다. 아버지 같으신 하느님에 어머니 같으신 하느님 체험까지 하는 거지요.
하느님의 이 사랑을 사랑하는 우리는 하느님이 보고 싶어 달려가고, 그리워서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그다음은 기쁨과 즐거움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이 어머니의 품처럼 그립고, 편할 뿐 아니라 세상 어떤 것보다도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세상 그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분이십니다.
이때의 하느님은 아마 연인과 같은 하느님일 것이고 이때에는 하느님께 기쁘고 즐겁게 나아갈 터인데, 솔직히 저는 이 정도의 하느님 체험은 아직 못했고, 성인들이 그러한 것을 보고 짐작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예복을 입지 않음에 대해서도 그 뜻이 무엇일까 짐작해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신 것이고 그러니 혼인 잔치에 먼저 초대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이고, 나중에 고을 어귀 길거리에서 초대된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리고 먼저 초대된 이스라엘 백성이건 나중에 초대된 이방인이건 하느님의 구원 잔치에 초대되었다면 그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하는데 그 예복이란 것이 바로 우리의 합당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 마음가짐이란 하느님께 대한 합당한 두려움이요, ‘황공무지로소이다!’라고 할 때의 그 마음이요, 어머니에게로 갈 때의 그 그리움과 편안한 마음이요, 연인에게 달려갈 때의 그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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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부르심과 응답!>
오늘 복음(마태 22,1-14)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준비해 놓고,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임금의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초대받은 이들에게 보내자,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의 갈 길로 가고, 종들을 붙잡아 때려죽입니다. 그러자 임금이 진노하여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임금이 종들에게 말합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8) 그러자 잔치방은 손님들로 가득찹니다. 그런데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 호되게 그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부르심(초대)과 응답!'
혼인 잔치의 비유가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큰 잔치'를 준비해 놓으시고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하느님과 그 부르심에 응하지 않는 이들 안에, 그리고 '혼인 예복'을 갖추어 입지 않고 온 사람을 호되게 꾸짖고 쫓아내시는 하느님의 분노 안에 머물러 봅니다. 그리고 '혹시 하느님을 분노하게 하는 사람이 나는 아닌지?'에 대해서도 머물러 봅니다.
'선포된 하느님의 나라와 매일 거행되는 미사'는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큰 잔치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큰 잔치를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몸과 마음으로 응답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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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실 부르심을 받는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 14)
누구나
초대 받지만
응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교만과 믿음은
하늘나라에
함께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만이
고집센 우리를
바꿀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선택의 자리도
바뀝니다.
우리자신을
던지지 않고서는
부르심도
선택도
다 놓치게
됩니다.
하루를
사는 일도
선택의
연속입니다.
모후이신
동정 마리아는
언제나 하느님의
부르심에
깨어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끝과 마무리가
더 중요합니다.
초대받는 자격은
새로워진 생활과
고마운 은총으로
이루어지고
주어집니다.
초대하시는
하느님과
초대받는
우리는
하나입니다.
겸손과
참된 믿음의
혼인 예복으로
하느님의 초대에
기쁘게 응답하는
우리들의 발걸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말씀의
자리입니다.
말씀의 자리에서
새로워지는
생활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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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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