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8개 구단 감독들. 왼쪽부터 롯데 자이언츠 양상문, SK 와이번스 조범현, LG 트윈스 이순철, 한화 이글스 김인식, 기아 타이거즈 유남호, 두산 베어스 김경문, 삼성 라이온즈 선동열, 현대 유니콘스 김재박 감독.
영화 <반지의 제왕>이 아니다. 2005년 한국프로야구가 치열한 ‘중간계 전투’를 치르고 있다. 삼성과 두산이 전반기 막판 들어 다소 힘이 빠진 모습을 보였지만 2강으로 분류되는 건 여전하다. 한화, LG, SK, 롯데, 현대, 기아(이상 7월8일 현재 순위)가 포스트시즌행 티켓 두 장을 놓고 피 말리는 순위 싸움을 벌이고 있다.
7월 중순의 올스타브레이크는 프로야구에서 단순한 휴식기를 뜻하는 게 아니다. 올스타전 이후 각 팀은 진정한 ‘내공 겨루기’에 들어간다. 무더위와 체력 고갈, 여차하면 순위 싸움서 탈락하는 초절정 긴장감 속에 매 경기를 찌푸린 눈으로 치를 수밖에 없다. 전반기가 끝나도록 4위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팀이 없다는 점은 흥행 면에선 호재다. 반면 각 팀 감독들에겐 악재일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를 물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려들기 때문이다.
순위 때문에 가슴 ‘벌렁’
한화가 전반기 막판에 부쩍 힘을 냈지만 그 누구도 안정권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힘을 못 쓰고 있는 기아도 4위로 점프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삼성과 두산을 빼면, 그 어떤 팀이라도 3연승, 혹은 3연패 한 번에 순위가 2, 3계단씩 뛰어 오르거나 곤두박질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요즘 프로야구 감독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스포츠신문에서 순위표를 볼 때마다 한숨이 푹푹 나온다”고 말한다. 특정 팀이 3게임차로 앞서 있는 상대를 잡기 위해선 한 달쯤 걸린다는 게 일반론. 그만큼 승수 쌓기가 힘들다는 것을 증명하는 얘기지만 올시즌은 다르다. 5월 이후 기아를 제외한 모든 팀이 한두 번씩 4위권에 진입했다가 다시 밑으로 처지는 다람쥐 쳇바퀴 돌기를 반복했다.
가장 부침이 심한 팀은 LG다. 꼴찌권에 있다가 4위로 껑충 뛰고, 다시 축 내려앉았다가 또다시 4위까지 올라서는 등 롤러코스터 같은 모습이다. 오죽했으면 이순철 감독이 “우리 팀은 도깨비 같은 팀이야”라고 말했을까.
LG는 그나마 행복하다. 외국인타자 마테오를 내보내고 대체선수로 데려온 새 투수 왈론드가 이후 2경기에 선발 등판, 16이닝을 2실점으로 막아내며 2승을 모조리 챙겼다. LG 관계자들은 “보물이 굴러들어왔다”며 웃음이 가득이다. 기존의 왼손 에이스 이승호와 함께 왈론드가 원투펀치 역할을 해준다면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이 한결 높아진다며 기대를 걸고 있다.
몰락한 명가, 현대는 총체적 난국이다. 캘러웨이를 제외하곤 선발진에서 제몫을 해주는 투수가 없다. 내야 수비도 붕괴 수준이다. 김재박 감독은 현금을 써서라도 다른 팀으로부터 내야수를 트레이드해오려 노력했지만, ‘현대에는 못 내준다’는 정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고, 여타 팀들은 현대의 잠재력에 여전히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김 감독은 한여름의 힘겨운 레이스를 이겨내기 위해 내야진의 위치 변동을 시도하고 있으며 주포 중 한 명인 송지만을 1번에 기용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스트레스 ‘잠 못 이루는 밤’
한화 김인식 감독은 적어도 겉으로는 천하태평이다. 비 때문에 경기가 취소된 날, 선수들이 자체 훈련을 실시하려고 하면 김 감독은 “야, 너희들 뭐 하는거야. 그냥 쉬어, 쉬어”라며 만류하는 스타일이다. 예년과 달리 한화 선수단의 응집력이 높아진 것도 지난해 말 새 사령탑이 된 김 감독의 역할이 컸다.
김 감독은 취재진과의 사적인 자리에서도 승부에 연연하는 모습을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속으론 부글부글 끊을 때가 왜 없을까. 지난해 뇌경색 증세로 쓰러진 뒤 재활을 거쳐 건강을 거의 회복한 김 감독은 요즘 경기 중 소속팀 선수들의 본헤드플레이가 나오면 덕아웃에서 얼굴 가득히 짜증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김 감독이 밝힌 페넌트레이스 생존 전략은 하나다. “우리 팀은 백업 멤버까지 총동원돼 있는 상황이잖아. 부상이 없어야 돼. 두세 명 부상이라도 당하면 우리 팀은 끝장이야, 끝장”이라고 말했다. 매 3연전서 2승1패를 거두겠다는 목표는 다른 감독들과 다르지 않다.
SK 조범현 감독은 요즘 밤마다 잠에서 깰 때가 많다고 하소연이다. 순위 싸움에 대한 중압감이 숙면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로 어깨가 자주 뭉쳐 트레이너로부터 마사지를 받기도 한다.
침몰 직전까지 갔던 SK는 6월 한 달 간 꾸준하게 상승하며 중위권 전쟁의 유력한 승자로 거론되고 있다. 조 감독은 “삼성 감독은 얼마나 편하겠어”라며 농담삼아 스트레스를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SK의 광속구 투수인 엄정욱은 언제 1군에 등록될지 기약이 없다. 대신 어엿한 중견투수가 된 왼손 이승호가 올스타브레이크 이후 1군을 밟을 것으로 보여 잠재적 에너지가 큰 팀으로 분류된다.
롯데 양상문 감독. ‘가을에도 야구하자’라는 희망찬 메시지가 사직구장에 내렸다가 6월 말에는 ‘이래가 야구하겠나’라는 플래카드로 바뀌는 걸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페넌트레이스가 당초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 다소 당황해하고 있다. 삼성과 두산이 3위팀과 10게임 차 이상으로 달아나며 다른 팀들을 잡아주길 원했지만 현실은 약간 다르다. 이미 삼성과 치른 경기수가 많은 롯데는 7, 8월에 상대적인 반대급부를 누리려 했지만 현재로선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양 감독은 라이온과 펠로우, 두 용병타자 가운데 한 명을 교체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6월 말까지 채 4할이 안 됐던 홈승률을 높이는 게 주요 과제라면 15경기가 사직 구장서 열리는 7월이 롯데의 고비다.
선동열 감독 ‘연패의 추억’
강팀 삼성도 고민은 있다. 예상 외로 올시즌 3연패 이상의 침체 현상을 보이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6연패에 빠졌다가 에이스 배영수 덕분에 수렁에서 빠져나온 적이 있다. 모든 감독들이 연패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꾸준하게 1승2패를 기록하는 팀에겐 희망이 있지만, 장기간의 연패는 자칫 헤어날 수 없는 데미지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삼성 선동열 감독은 요즘도 지난해 5월의 악몽과도 같았던 10연패 과정을 입에 올린다. 10연패를 하던 날 밤, 당시 수석코치였던 선 감독은 김응용 감독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대구 시내의 모음식점에 김재하 단장과 함께 있으니 오라는 전갈이었다. 음식점에 도착하자마자 맥줏잔에 가득 따른 소주를 4~5차례나 받아 원샷한 선 감독은 침통한 분위기 때문에 고기가 다 타도록 안주 한 점 집어먹지 못했다고 한다.
바로 그 순간, 김응용 감독이 “팀이 꼴찌까지 떨어졌으니 내가 감독직을 그만두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김재하 단장과 선 감독이 한 시간 넘게 애걸복걸하며 만류한 덕분에 당시 김응용 감독의 사퇴는 없던 일이 됐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삼성은 기적 같은 연승 행진을 펼치며 정규시즌 2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 후 선 감독은 팀에 연패 조짐이 있을 때면 일부러 ‘10연패의 밤’에 갔던 음식점에 들르는 경우가 잦아졌다. 일종의 징크스지만 연패를 끊기 위해서라면 뭐든 못할까. 감독의 심정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