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CG로 재현한 신라의 왕경(王京), 서라벌 전경
◆ 고려시대 개경의 거리입니다.
아시겠지만 고려시대 개경에는 알라딘 궁전같은 이슬람 사원과 아라비아 타운도 존재했습니다.
고려때의 개경도 추정인구 50만에 [외국인 타운]이 존재할 정도로 국제적인 무역도시였습니다만, 신라 서라벌도 그에 못지 않게 대단했습니다. 8세기 전세계 4대도시 는 콘스탄티노플, 장안, 바그다드, 그리고 신라 서라벌 이었습니다
일연이 집필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신라의 전성기 때 수도에 17만 8936호가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보통 1호를 5인으로 잡는데 이대로 17만 8936호를 계산하면 90만정도의 인구가 됩니다. 현재 울산광역시의 인구가 100만 정도임을 감안하면 천년 전 경주에 90만명이 살았다는 것이 선뜻 믿기지 않을것입니다.
하지만 끝자리 수까지 세세하게 밝혀놓은 기록을 쉽게 무시할수도 없습니다.
신라시대에 과연 인구조사를 저렇게 철저하게 했겠냐는 의문이 들겠습니다. 일본 동대사 정창원에 소장된 신라 촌락 문서를 살펴보면 당시 인구가 연령별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가축의 숫자까지 상세히 적어놨습니다.
이 시대에 이미 치밀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삼국사기에 보면, 영흥사에 화재가 나서 민가 350채가 한꺼번에 불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주택 밀도가 매우 높았다는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신라에서는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를 제한하는 법령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삼국사기 옥사조에 진골은 24척, 6두품은 21척, 5두품은 18척, 4두품 이하는 15척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는 택지 면적을 규제할만큼 인구가 증가했다는 뜻입니다.
집터 규모를 알 수 있는 동천동 지역을 근거로
당시 경주에 몇 명 정도가 살 수 있는지 추산해 볼 수 있습니다. 가로 14m, 세로 20m 집터에 집 3채가 있었으니 8000평 규모의 방(坊)에 150채 정도의 집이 들어설 수 있습니다.
360방으로 환산하면 약 5만 4000가구, 27만 정도의 인구가 살 수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당시 경주는 360방보다도 넓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고분입니다.
왕릉이 생활 공간 안에 있는것이 신라 수도의 특징입니다. 축조될 당시부터 이미 도시 범위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6세기 이후 왕릉은 360방의 범위를 벗어나 외곽에 자리 잡게됩니다.
도시가 그만큼 외곽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경주에는 도시의 경계가 되는 나성이 없는 대신 수도 방비를 위해 쌓은 산성이 있습니다.
경주의 산성은 축조시기에 따라 3단계로 나뉩니다.
가장 바깥쪽의 산성들이 후대에 쌓은 것입니다.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21킬로미터쯤 가면 울산시와 경계가 되는 관문성이 나옵니다.
722년에 쌓은 이 성은 경주의 3단계 산성 가운데 하나로, 왜군을 차단하고 신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이 관문성을 경주의 동남쪽 경계로 삼았다고 전합니다.
신라 경주는 360방을 훨씬 벗어난 지역까지 확장되었고 그 범위는 시, 군이 통합된 현재의 경주시와 거의 일치합니다. 이렇게 확대된 도시의 외곽지역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경주 경마장 부지 발굴현장의 집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둥구멍과 보조 아궁이, 무덤과 집터, 숯을 굽던 가마터 20기가 발굴되었는데 전국에서 발견된 가마터가 40기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가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 된다면 기록에서 정확히 밝혀놓은 90만명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 아래는 당시 신라의 수도, 서라벌의 모습을 그림으로 복원한 신라 왕경도(新羅 王京圖)의 일부입니다.
신라 왕경의 360방 전체도
대궁지 복원도
신라왕경의 월성 복원도
남산신성 서북쪽 부근(창림사, 오릉, 천관사 부근)
신라왕경도 내의 황룡사, 분황사, 안압지 부근 복원도
신라황경도 내 남산의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황복사, 보문사 부근
조선 후기의 한양 인구가 20만인것을 볼 때, 그로부터 1,000년 전의 도시 인구가 100만이란것은 정말 대단한 수치인것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단지 인구만 많은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위의 [왕경도]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는 대단한 계획도시였습니다.
우선 천년 전 신라인이 걸었을 길은 집과 집 사이로 반듯하게 나 있습니다. 또한 골목마나 출입문이 있어 치안상태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서라벌은 몇번째 골목, 몇번째 집 하는 식으로 주소만 알면 집찾기도 매우 쉽게 되어있습니다. 집터에서는 아궁이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숯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미 신라시대의 풍로가 출토된 바로 미루어 실내에선 온돌 대신 풍로를 놓고 숯을 피워 난방을 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숯을 때면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쾌적했던 것 같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서라벌에는 집에 금을 입힌 금입택이 30채나 되었다고 합니다. 배수시설도 완벽 히 되어있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수십개의 우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또 당시 신라의 도로는 인도와 마차가 다니는 차도로 나뉘어있었습니다. 그 도로는 규격별 로 나뉘어 있었고, 길을 지나다니는마차의 폭도 고구려의 예를 들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서라벌은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 으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고구려도 마찬가지로서 우리나라 계획도시의 역사는 이미 1500년이 넘은것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역사' 하면 조선을 떠올리며 그 이전의 시대는 조선보다 못했을거라고 넘겨짚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조선보다 훨씬 번영했고 자유로웠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 도자기로 만든 의자에 앉아 바둑두는 고려 귀족들 입니다.
< 당시 아랍쪽의 신라 관련 기록 >
「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는다 」
- 창세와 역사서<마크디시(al-Maqdi shi>,966년(신라가 망한 직후)
「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
-이드리시(이슬람 지리학자)-1154년에 신라가 포함된 지도를 만듦
「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대단히 좋은 나라다.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 아주 좋은 향기)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곧 치유된다.」
-무슬림이 남긴 것이라고만 전합니다-
「 중국 저쪽에 산이 많은 ‘신라(Shila)’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고 물 맑고 공기가 좋아 한번 간 무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
- 후르다드베(Ibn Khurdadbeh)의 '제 도로와 왕국 총람' (이슬람)
신라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된 기록을 종합해 보면 첫째, 신라가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단(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으며, 둘째, 바다(태평양)에 에워싸여 있다는 것으로서 아주 정확하다.
‘사막의 아들’로부터 일약 ‘바다의 아들’로 변신한 아랍-무슬림들에게 산 좋고 물 좋고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는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넉넉한 부의 혜택을 누리는 이상향적인 곳이었다.
중세 아랍 문헌에는 신라의 역사에 관한 기술도 있다. 그 중 신라와 중국(당) 간에 선물이 교환되지 않으면 천벌로 가뭄이 든다는 ‘하늘의 뜻’을 빌려 양국 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점과, 특히 양국 간에 상호성에 기초한 선물 교환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 대목이 주목된다.
첫댓글 조선시대에 유교를 국가의 기본 이념과 규율로 정하여 상공업을 천대하니 나라가 쇄락하고 식민지로 전락한게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