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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군은 쫓기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북경을 떠날 때만 해도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이 이렇게 비참한 패배로 끝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수나라군은 살수에서 전멸했다.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을 침략할 때 동원한 병사는 113만명에 달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양 전쟁에서 십만명 이상의 병력이 동원된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을 볼 때 가히 고대사 최대의 전쟁이라 하겠습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바로 이 수나라 군대의 별동대 30만을 살수 오늘의 청천강에서 몰살시킵니다.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 이것은 세계 전쟁사에 기록될 승전보입니다. 수나라는 삼백 여년 만에 중원을 통일한 나라입니다.
인구, 국토, 병력의 규모에 있어서 고구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헌데 그런 수나라가 고구려 땅에서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중국 강소성 양주에 있는 한 무덤. 수양제의 무덤이다.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제국 수나라 황제 무덤 치곤 너무 작고 초라하다. 묘지석에 벼락이 쳐서 한 부분이 깨졌지만1) 수리하지 않은 상태다. 수양제는 618년 양주에서 신하의 손에 죽었다.
그는 스스로 약을 먹고 자결하게다고 했지만 신하 우문화급은 스스로 죽을 권리조차 주지 않았다. 무덤 앞엔 그의 업적과 과오가 새겨져 있다. 요동에서 일을 버리다 천하를 잃었다. 고구려을 정벌하려다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612년 중원을 통일한 수양제는 백만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한다.
고구려로 가는 첫관문 요동성. 견고한 성에 의지한 고구려의 저항은 완강했다. 수나라 백만대군은 몇 달이 지나도 요동성 하나를 깨뜨리지 못했다. 중원을 통일한 초강대국이 요동의 작은 성에 막혀 진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마음이 급해진 수양제는 별동대 30만을 평양으로 보낸다. 대동강으로 진입하는 수군과 합류해 평양을 공격할 의도였다. 산둥반도 봉래를 출발한 수나라 수군은 대동강에 상륙했다. 평양성 60리 앞까지 진출한 수군을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한다.
고구려군은 평양성 안으로 도주하고 만다. 수군사령관 내호아는 여세를 몰아 4만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진군한다. 마침내 수나라 수군은 평양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수도에 적군이 진입한 것이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평양성 안에 매복해 있던 고구려 군이 급습하자 수군은 대패한다. 살아돌아 간자는 불과 수천명. 수나라 수군은 전투력을 상실한다.
한편 수나라 육군 30만은 평양성 30리 앞까지 진출했다. 이 누란의 위기를 역전시킨 사람이 고구려군의 지휘관 을지문덕이었다.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을지문덕은 성밖 들과 집을 비워 수나라 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을 막았다.
보급이 끊긴 수나라군이 성급하게 공격해오자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화살과 돌멩이를 비오듯 쏟아부었다. 이미 식량이 바닥난 수나라 별동대는 평양성을 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수나라군은 평양성 30리 앞에서 철수한다. 그 뒤를 고구려군이 쫓으며 공격했다. 쫓는 고구려군과 쫓기는 수나라 군사.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 후퇴하던 수나라 군은 살수 지금의 청천강에 도착한다. 청천강은 평안남북도 사이를 흘러 서해로 흐르는 200km의 강이다.
수나라 군대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이 지휘하는 고구려 군대는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수나라 군을 쳤다. 고구려 군은 도하하는 수나라 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강과 강변으로 병력이 나눠진 수나라 군사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지휘관 신세웅도 전사하고 만다.
다급한 수나라 군은 하루에 450리를 달아났다.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고구려 군은 패주하는 수나라 군대를 추격하며 생멸했다.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수나라 별동대의 99%가 사망했다. 30만 5천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사람은 2700명이라고 중국측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살수대첩은 우리나라 역사를 통털어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승이었습니다. 전쟁에 패배한 수나라는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고대세계 최강의 슈퍼파워였던 수나라를 완파한 고구려 군.
그들은 과연 어떤 무기와 전략으로 싸웠던 걸까요. 고구려의 유적에서는 많은 화살촉들이 발견되고 있는데요. 활과 화살은 고구려 군의 주력 무기였습니다. 이것은 아차산에서 발견된 고구려 군의 화살을 복원한 것인데 화살촉의 평균 탄소량은 0.51%로 오늘날의 특수강의 맘 먹는 순도 높은 강철입니다.
이 철갑옷은 고구려 중장비병이 입었던 찰갑옷을 복원한 것인데 이 상위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을 단조해서 만든 천여 개가 넘는 작은 조각들을 일일이 이렇게 가죽 끈으로 연결해서 만들게 됩니다.
제철기술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텐데요. 그렇다면 이렇게 철갑으로 중무장한 고구려 군들은 어떻게 전투를 했었을까요.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차산. 고구려의 군사 요새 보루가 발견된 지역이다. 아차산에서만 20여 개가 넘는 보루가 나왔다. 1600여 년 전 이곳은 고구려 군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아차산에서는 고구려의 주력 무기가 대량으로 나왔다. 철재 칼, 도끼, 창 그리고 수천 개의 화살촉이 나왔다. 이런 무기들이 안악 3호분 벽화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철갑옷을 입고 장창을 든 중장기병, 갑옷을 입지 않은 경기병, 철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중장보병, 경보병, 도끼를 든 부월수, 그리고 화를 든 궁수가 보인다.
아차산에서 나온 자료를 가지고 고구려 화살을 제작하기로 했다. 고구려는 철을 단조해 살촉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살촉은 특수강 수준의 강철이다. 만들어진 화살촉에 화살대와 깃을 붙여 화살을 복원했다.
고구려 군은 어떤 활로 화살을 쐈을까. 고구려의 활은 몰소의 뿔을 넣어 만든 각궁이었다. 각궁은 평소에 둥글게 휘어서 보관한다. 활을 쏠때 거꾸로 펴서 활 모양을 만든다.
완성된 각궁은 고구려 벽화 속 모습과 같다. 각궁과 고구려 화살의 파괴력을 어떨까. 초고속 카메라를 동원해 화살이 철판을 뚫는 순간을 정밀하게 촬영해 보기로 했다. 세계민족궁대회 입상자가 활을 쐈다. 화살은 함석판 5장을 그대로 관통했다.
지금도 발굴이 한창인 경주 쪽샘지구. 신라 귀족의 무덤 수십기가 발굴된 지역이다. 지난 6월 이곳에서는 중장기병이 입었던 철갑옷과 각종 무기류가 공개됐다.
발굴된 철갑옷은 작고 얇은 수많은 철편들을 엮어 만든 찰갑옷이었다. 말들 덮었던 철갑 위의 사람이 입는 찰갑옷이 최초로 원형 그대로 발굴됐다. 전문가들은 이 갑옷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 때 영향을 받아 제작된 찰갑이라고 주장한다.
직접 철판을 잘라 찰갑옷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철편에 부식을 막기 위해 옻 칠을 두 번하고 옻에 철분을 섞은 흑칠을 세 번 했다. 흑칠을 한 철편은 검은색이 된다. 작은 철편 조각을 일일이 가죽 끈으로 엮어야 한다.
찰갑옷 제작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위 하나에만 1300여개의 철편이 필요하다. 이렇게 만든 찰갑옷을 사람이 입고 편하게 전투할 수 있을까. 찰갑옷은 기대 이상의 활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철갑옷의 강도를 실험해 보기로 했다. 먼저 철판을 통째로 이어 부친 판갑옷. 큰 철판 조각들을 리벳으로 이었다. 화살은 그대로 판갑옷을 뚫었다. 발사한 모든 화살이 판갑옷을 관통했다.
화살은 갑옷을 뚫고 깊이 박히어 빼내기가 어렵다. 사람이 입었으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번엔 고구려의 찰갑옷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찰갑옷에도 그대로 화살이 박혔다. 그런데 반복해 발사하자 화살이 튕겨 나오는 경우가 생겼다.
박힌 줄 알았던 화살을 찰갑이 튕겨내는 것이다. 철편은 뚫리지 않고 휘어져 있었다. 가죽 끈으로 연결된 작은 철조각들은 유연하게 안으로 밀리면서 화살의 힘을 흡수한 뒤 튕겨냈다.
찰갑옷으로 말과 자신을 감싼 고구려 중장기병은 어떻게 싸웠을까. 고대 전투는 진과 진의 싸움이었다. 럭비경기처럼 두 개의 진이 서로 충돌한다. 진이 유지되는 한 전투는 팽팽하게 진행된다. 진을 깨뜨리는 자가 승리한다.
팽팽하게 진행되는 싸움. 진이 붕괴되는 순간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고 대량 사상자가 발생한다. 전투에서 고구려 중장기병은 진의 앞에 위치했을 것이다. 궁수가 원거리 사격을 가하고 기병이 돌진한다. 철갑과 장창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은 적의 진을 돌파해 후방에서 공격한다. 이때 보병이 돌진해서 앞을 공격한다. 진이 깨쳐 찰갑기병과 보병에 둘러싸인 적은 전멸한다.
고대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철갑옷을 복원한 것입니다. 큰 철판조각을 그대로 이어 붙인 것입니다. 이는 창, 칼, 화살과 같은 공격용 무기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철갑옷은 화살을 정통으로 맞을 경우 이렇게 탄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뚫리고 맙니다.
반면 고구려군의 찰갑옷은 화살을 막아 냈습니다. 화살을 맞을 경우 이 가죽 끈으로 연결된 철편들이 안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화살의 힘을 충격을 흡수하고 다시 튕겨내게 됩니다. 화살을 정통으로 맞을 경우에도 이렇게 철편들이 부러지지 않고 그냥 이렇게 휘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찰갑옷의 장점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전투 중에 갑옷이 손상되더라도 이렇게 다른 철편으로 손쉽게 수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지휘했던 수양제는 무모한 전쟁을 해서 나라를 망친 군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헌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혼란기의 중국을 300여 년 만에 통일한 고대 세계의 슈퍼파워 수나라. 이 나라의 황제가 수양제입니다. 헌데 그런 그를 고구려 침략의 모든 것을 건 무모한 폭군으로만 기억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양제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또 그는 왜 고구려를 침략해야만 했던 걸까요.
고질적인 중국대륙의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중국왕조가 장강의 물줄기를 북으로 이었다. 경향대운하는 북경과 항주를 이어주는 운하를 말한다.
수양제는 통제거, 산양독, 강남하 세 개의 운하를 건설해 황하, 장강, 휘수를 연결했다. 풍부한 강남지방의 물산을 북쪽으로 빠르게 운송해 교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운하를 건설한 것이다.
운하 건설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양주 고운하에는 동관고도가 있다. 동문 밖의 선착장이라는 뜻이다. 동관고도 문 아래엔 수양제가 운하를 건설한 후의 모습들이 새겨져 있다.
수양제는 미인들을 거느리고 자신이 건설한 운하를 자주 유람했다. 사치스런 연회도 자주 열었다. 벽화엔 다른 한쪽엔 수의 깃발아래 모인 병사들이 보인다. 이들은 왜 여기 있을까.
중국을 통일한 수양제는 남으로 방향을 돌려 베트남의 임읍국, 오키나와의 유구국 그리고 말레이 반도의 마자가국까지 정벌했다. 서기 610년 정월. 지금의 낙양인 동도에서 각국이 수나라에 조배를 올리는데 채색기를 든 자만 18000명이었다고 한다.
수나라는 주변국가를 복속시키고 대제국의 위용을 자랑한 당대 초강대국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영양왕은 수의 입조요구를 거절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용납할 수 없었다.
산동성 래주 해변에서 대규모 전함건조가 시작됐다. 배 건조의 책임자는 유주총관 원홍사(元弘嗣). 그는 가혹하게 일군들을 다루었다. 물속에서 주야로 일을 하게 해서 사람들이 일을 피하기 위해 손발을 자르고 복스러운 손, 복스러운 발로 불렀다고 전한다.
그리고 300척의 배가 완성됐다. 고구려를 놔두면 다른 민족들의 이반이 이어질 것을 두려워 한 수양제는 전쟁을 선포한다. 우문술이 지휘하는 좌군 12군, 우중문이 지휘하는 우군 12군, 수양제의 친위군 6군. 모두 합쳐 113만 3800명이 국경에서 고구려로 출발했다.
행렬의 길이만 960리에 달했다. 수군도 산동반도를 출발 대동강으로 향했다. 사상 유례가 없는 대출정이었다
당시 수나라는 890만 가구 인구는 4600만명 정도였습니다. 고구려의 당시 가구수는 69만호 정도였는데 한 가구당 가족을 5명으로 계산한다면 인구는 400만명 정도였을 겁니다. 수나라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숫자입니다.
참전한 수나라의 군인은 113만명 지원병까지 합친다면 200만 명이 넘는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당시 수나라의 군사 수는 고구려 남성 전체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습니다. 전투에 동원 가능한 성인남자의 수를 계산한다면 수나라의 병력규모는 고구려를 압도합니다.
수나라 100만 대군은 요하로 몰려들었다. 요하는 요동을 차지한 고구려로 가는 첫 관문. 요하 건너편에 고구려 군이 있었다. 수나라군은 요하를 건너기 시작했다. 선봉대는 강을 건너기 위해 부교를 설치했다.
그러나 부교가 짧아 강 건너 편에 닿지 못했다. 수나라 군은 강으로 뛰어들어 건너편 언덕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나라 1군 사령관인 맥철장(麥鐵杖)이 전사하고 말았다. 수나라군은 첫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
본진이 합류하자 수나라는 한달 만에 겨우 요하를 건널 수 있게 됐다. 수나라가 강을 건너 공격하자 고구려는 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요동성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수나라 대군이 요동성으로 몰려 들었다. 수양제가 단번에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데려온 백만 대군이 요동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 전투는 치열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고구려의 성벽은 너무 높고 튼튼했고 고구려의 저항도 완강했다. 2월에 수양제가 요동성에 도착했지만 넉 달이 되고 6월이 돼도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수나라 군은 3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강한 군대였다. 지휘관과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강남에서 북쪽의 돌궐까지 온갖 종류의 군대와 싸운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백만 대군이 요동성 하나를 깨지 못한다.
진노한 수양제는 장수들을 질책했다. 그대들은 스스로 지휘가 높고 좋은 가문임을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대우하려 하느냐! 그대들이 내가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 것은 아마 이 낭패를 볼까 염려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수행을 보아 목을 베려 함이다. 그대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전력치 아니하니 내가 그대들을 능히 죽이지 못할 줄로 여기느냐!
치는 앞으로 튀어나온 방어용 성벽이다. 적이 공격하면 성벽 위에서 포위해 집중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옹성 역시 적을 포위해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어긋문은 엇갈린 두 개의 성벽 사이에 만든 문이다. 문으로 들어오는 적은 고립된다. 당시 고구려의 축성술은 매우 뛰어났다.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요동성도 치와 같은 방어시설을 갖춘 난공불락의 성이었을 것이다.
병서 무경총요엔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공성용 무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성을 공격하는 기본 장비인 사다리차 운제(雲梯), 성의 높이만큼 올라가서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소차(巢車, 상하이동식 공성무기)가 보인다. 성벽에 돌을 던지던 투석기를 복원해 보기로 했다.
당시 투석기는 사람의 힘을 이용해 돌을 던질 수 있게 한 구조다. 밧줄이 많이 연결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투석기를 당길 수가 있다. 작은 투석기는 40명, 큰 것은 120명의 병사가 밧줄을 동시에 잡아 당겨 돌을 날려 보낸다. 그러나 요동성은 요지부동이었다.
고구려 군은 수나라와의 전면전을 피해 요동성 안에서 수성전을 완강하게 펼쳤다. 이때부터 수나라 백만 대군의 보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당시 고구려 군의 전술은 육군사관학교 수업에서도 인용된다. 청야입보(淸野入保). 청야는 들을 비운다는 말. 입보는 성안으로 철수해 수성전을 벌이며 적을 고갈시킨다는 말이다. 고구려 군이 사용한 청야입보 전술은 19세기 초까지 서양에서도 유효한 전술이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했을 때 러시아 군도 청야전술을 구사합니다. 들판을 불태우고 러시아 내륙 깊숙이 프랑스 군을 끌어드리는데 추운 겨울 보급선이 끊어진 나폴레옹 군은 배가 주리자 도망치듯 철군하다 러시아군의 기습에 밀려 엄청난 수에 사상자를 내고 맙니다.
이렇게 전쟁에서 진 나폴레옹은 황제자리에서도 쫓겨나게 됩니다. 을지문덕도 수나라 군을 고구려 땅 깊숙이 유인해 살수에서 마지막 일격을 가합니다.
끝내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수나라 군은 요동성을 우회한다. 수양제는 30만 별동대를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직접 내려 보낸다. 병력 수에서 열쇠였던 고구려 군은 이동로를 장악하고 게릴라 전을 벌었다. 평양성으로 가는 수나라 군의 보급부대가 주요 목표였다.
남하하던 수나라 군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군과 대치하게 된다. 이때 고구려 수나라 전쟁을 통틀어 가장 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한 고구려 장수가 홀연히 수나라 진영을 찾아 온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고구려 군의 지휘관 을지문덕이었다. 그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항복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의 지휘관 우중문, 우문술과 거짓으로 항복 협상을 벌이면서 수나라 진영을 염탐했다. 왜 고구려 군의 최고 지휘관이 이런 위험한 임무를 직접 수행했을까.
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을지문덕을 우중문은 사람을 보내 돌려 세웠다.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수군 진영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고구려 군 지휘관 을지문덕을 잡으려는 수나라의 술책이었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수나라 군은 적의 사령관을 눈 앞에 두고 놓친 것이다. 이후 고구려 군은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면서 수나라 군을 고구려 평양성 가까이 끌어 들었다. 시간을 지연시키면서 수나라 군의 식량을 고갈시키려는 을지문덕의 작전이었다. 수나라 병사들은 100일치 식량을 가지고 요동성을 출발했다. 하지만 많은 지친 병사들이 무거운 식량을 이미 모두 몰래 버린 상태였다.
을지문덕의 전략은 적중했다. 을지문덕의 청야전술은 수나라 군이 고구려 현지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들엔 곡식 한 톨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수나라 군이 평양성 30리 앞에 오자 을지문덕은 역사에 남을 시 한 수를 우중문에게 보내 조롱한다.
神策究天文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에 달했고,
妙算窮地理 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했구나.
戰勝功旣高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知足願云止 족한 줄 알고 그만 둠이 어떠하리.
“마지막 구절에 ‘공은 이미 하늘에 다했으니 돌아가시게’라는 말은 사실은 너희들의 식량은 이미 떨어진 사정을 다 알고 있다. 너희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어떡하겠느냐는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너가 이미 다 공을 이루었으니 돌아가라.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더 이상 할 것이 없지 않느냐! 점잔이 말했지만 우리가 너희들이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철수를 종용하는 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먹을 것이 바닥나 전투를 할 수 없었던 수나라 군사는 평양성 30리 앞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고구려의 반격이 시작됐다. 후퇴하는 수나라 군의 배후를 치기 시작했다. 쫓기던 30만 별동대는 살수 지금의 청천강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살수 대첩이 벌어진다. 단재 신채호는 고구려 군이 미리 막아둔 상류의 둑을 터놓아 수군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과연 그 당시 청천강에 둑을 쌓는 것이 가능한 일 일까. 매번 봄 청천강에서는 나무로 간단히 쌓은 둑을 터놓는다. 상류지역에서 벌목한 나무를 물살의 힘을 이용해 하류로 수송하기 위해서다. 목재는 물길을 따라 서해까지 내려가 중국으로 수출된다. 을지문덕도 이런 방법으로 둑을 쌓아 수공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과연 전쟁 기간에 엄청난 량의 물이 채워질 둑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살수를 건너던 30만 수나라 별동대 병력의 10분의 1정도의 인원이 참가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대열은 삽시간에 수킬로미터로 늘어졌다. 만약 30만이 달리기 시작하면 그 길이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살수를 수나라 군 30만이 동시에 건너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사서엔 수공에 관한 기록이 없다. 강을 건너는 수군의 후방을 공격했다는 기록만이 있다. 고구려 군의 공격에 수나라 군의 진영이 깨졌다.
별동대 일부는 강 건너에 일부는 강 가운데 후진은 강을 건너지 못한 상황. 병력이 분리된 수나라 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고구려 군의 기습은 수나라 군을 공황상태에 빠뜨려 붕괴시켰을 것이다.
을지문덕의 고구려 군은 진이 깨진 상태로 패주하는 수나라 군을 추격하며 전멸시켰다. 백만 대군으로 북경을 출발할 때 수양제는 이런 비참한 결과를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 7세기 세계 최대의 전쟁의 결과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한가운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있었다.
고구려는 요동성, 평양성, 살수 이렇게 전쟁의 운명을 가른 세 곳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의 전략에 말려서 제대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치욕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과연 무엇이 고구려를 승리를 이끌었던 걸까요.
고구려 군의 청야전술과 수성전이 승리의 한 요인으로 꼽힐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을지문덕의 공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힘과 전략을 믿은 고구려 군의 필사 항전의 의지가 아니었을까요.
첫댓글 을지문덕,,,소신.고집이 강한 이름, 선도수련, 깨달음을 얻은, 신출귀몰한 전략전술, 만고의 위인
612,,,임신년, 하늘은 바람이 강하고 지상은 건조하고 빛이 많은 해, 전진하는 기운이 충만한 해
고구려의 국시,,,다물
조의선인,,,선도수련
삼국사기,,,모화사대주의 자인 김부식이 저술, 유학자와 지나인을 위한 한국사,유교의 중화사상
삼국유사,,,일연, 지나친 불교사상 일색, 불교도들을 위한 한국사
한단고기,,,우리민족의 진정한 역사책, 민족정기의 함양
한단고기가 위서라 주장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아직도 다물을 찾는사람이 있다니...선도수련이라..무협지를 너무 많이 보신듯..
ㅎㅎ
세상은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보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