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종교는
자살을 가장 무거운
죄의 하나로 봅니다.
그러나 자살도
상황과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가슴아픈
리딩 사례가 있습니다.
아이와
자신의 거취문제로
상담하러 온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리딩에 들어가자
고요한
밤바다가 보이는데,
바닷가에 소리 없는
북적임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1970년대초
베트남이었습니다.
당시 베트남은 전쟁으로
온 나라가 폐허가 되었고,
새로운 체제를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어 탈출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배를 타고
무작정 탈출했던 사람들을
'보트피플'
이라고 불렀습니다.
내담자인 어머니도 당시
보트피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바닷가에
많은 사람이
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윽고
작은 배 두 척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올라탔습니다.
어머니도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배가 깊은 바다를 향해
나간 지 한참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워낙 작은 배에
많은 사람을 싣고 가다 보니
먼 바다에서
배 하나가 뒤집혀
사람들이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집힌 배 안에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은 살기 위해
육지 쪽으로 헤엄쳐
가거나
다른 배로 몰려갔습니다.
리딩으로 그 장면을
보던 저 역시
물에 빠진 사람들의
공포가 생생하게 느껴져
두려움을 숨기려고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습니다.
어릴 때
물가에서 자란 어머니는
헤엄을 잘 쳤지만
순간 두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저쪽 배로 가서
아이만이라도 살려야겠다.' '
'아니야, 아이만 살고
내가 죽으면
아이는 혼자
어떻게 살아가겠어?
그냥 지금 이 바다에서
같이 죽는 게 나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간 다른 배의
상황도 좋지 않았고,
이 위기를 빠져나가도
살아갈 길이 막막했던
어머니는 결국 아이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물속에 잠겨 죽었습니다.
'그래, 아이와
함께 다시 태어나자.'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두렵지만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이는
가까운 생에 빨리 환생해
어머니와 자식의 연으로
다시 오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어쩔 수
없었던 사고사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선택한 자살일까요?
살기 위해 아이를 안고
최선을 다했어야 했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지 애매했습니다.
문제는 내담자의 현재 상황도
그다지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홀로 아이를
키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생과 연결시켜 본다면
현생에서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난관을 헤쳐 나가려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리딩을 듣고 난 뒤 내담자는
지금도 절망 속에 빠질 때는
죽음의 공포를
강하게 느낀다고 했습니다.
전생에서는
죽음으로 고통을 끝냈지만,
다시 기회를 얻어
태어난 이번 생에서도
내담자는 여전히
고통 속에 있었던 것이지요.
현생의 어려움은
자살로 인한 카르마일까요?
그리고
당시에 열심히 살아남으려
시도했다면 희망이 있었을까요?
제 마음도 답답해졌습니다.
자살과 업의 경계에서
이 어머니의 사례는
참으로
난해한 의문을 던집니다.
분명한 것은 이 사례에서
아무리 상황이
어려웠다 하더라도
그 여성에게 자살은 결코
궁극적인
해답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자살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더 큰 숙제가 주어지는
이번 생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처럼 현생에서
자살을 선택했다면
다음 생에 더 무거운
숙제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카페 게시글
맑은 자유게시판
보트피플 모자 이야기----박진여
고구마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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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9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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