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카페 회원님 여러분, 모두들 잘 계시죠?
제가 얼마전 중견 가수 문주란씨를 만났어요.
그 상황을 글로 옮겨 봤습니다.
타 인터넷 상에는 글이 올라와 있는테
이곳에는 없고 회원님들도 알고 계시면 좋을 것 같아
제 글을 갈무리해 옮겨 봅니다.
시간이 되면 카페를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토요 초대석 차 한잔] 김호일 선임기자가 만난 문주란 가수 (2010년 2월 20일 부산일보)
"요즘으로 치면 제가 '보아`, 남진씨가 '비`라고나 할까"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모태범에 이어 이상화 선수가 금메달을 따던 지난 17일 오후. 사람들이 TV 중계방송에 푹 빠져 있는 탓일까. 서울에서 한 시간 반을 달려 당도한 경기도 가평 북한강가의 `문주란의 뮤즈카페' 주변은 오가는 차도, 사람도 거의 없이 한산해 보였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는 기자의 가슴은 다소 설레었고 벅찼다. 2000년 1월 이곳 주인장 문주란(60)을 만난 지 꼭 10년 만에 재회이기 때문일 게다.
`좀 쉴 만한 별장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을 문주란만의 음악공간으로 이끌어 온 지 어느 덧 10년. 강산이 한 번 바뀐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녀 역시 환갑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매력적이고 고혹적이다. 세월을 이길 수 없어 눈가와 얼굴엔 주름이 좀 보였지만 특유의 낮고 허스키하고 카라카랑한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변함이 없었다. 소위 `S라인' 몸매는 여대생 빰칠 정도다.
· 멋모르고 뛰어든 연예계
옛날 이야기부터 듣고 싶었다. 그녀의 고향은 부산 서면. 택시회사 사장집 딸인 문주란은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했다. 방송국 노래자랑에 나가 상도 받았다. "정말 열 여섯 살에 멋모르고 연예계에 뛰어 들었고 데뷔곡 '동숙의 노래`가 요즘 말로 대박이 터지면서 단숨에 스타가 됐어요."
늘 화려함만 있었던 건 아니다. 1남5녀의 막내딸.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재혼으로 새엄마가 들어왔지만 정을 붙일 수 없었다. 사업을 하던 부친은 가수를 `딴따라'라고 치부하며 딸을 차갑게 외면했다. 도무지 탈출구가 없었던 그녀는 1969년 꽃다운 열아홉 살에 음독자살을 기도했다. 데뷔 3년 만의 일이었다. "그때 꿈 속에서 동굴에 떨어졌는데 방이 무척 많더라구요. 근데 문마다 열어봤는데 사람이 꽉 차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보름 만에 깨보니 병원이더라구요. 다시 살아난 건 죽은 엄마 때문인 것 같아요."
문주란의 노래는 슬프다. 유난히 사랑에 상처받고 이별을 울부짖는 애절한 사연이 듣는 이의 가슴을 콕콕 짓누른다.
데뷔곡 `동숙의 노래'만 해도 한 남자를 두고 벌어진 치정 살인사건이 배경에 깔려 있지 않은가. "소문처럼 그 노래의 사연이 실화라는 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금세 손을 가로 젓는다. "사실 임원직 감독에 남궁원, 이대엽, 태현실이 주연을 맡은 영화 '최후 전선 백팔십리`의 주제가였어요. 그런데 당시 어떤 학원 선생님을 짝사랑하던 여자가 결혼한 선생님 집을 찾아가 부인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소문이 그렇게 난 거죠."
카페의 스피커가 이내 크게 떤다. `동숙의 노래'다. `너무나도 그님을 사랑 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모친 미움/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뉘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 `달러 박스' 움켜쥐었던 당대 최고 가수
그녀의 카페는 젊은 시절 한껏 멋을 부린 사진들로 장식돼 있다. 뒤쪽에 유일한 `단체사진'이 눈에 띄였다. 작곡가 박춘석씨 바로 옆에 문주란이 있고 주변엔 남진 이미자 하춘화가 밝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저 사진은 한참 잘나가던 스물세 살 때쯤 찍었을 거예요. 당시 최고 작곡가인 박 선생님이 저를 무척 좋아했어요." `왜요'라고 물었다? "빼빼 마른 게 노래 잘하지 예쁘지…."(웃음)
그렇다. 돌이켜 보면 그녀의 전성기는 1960~70년대, 남부러울 것 없는 인기를 한몸에 누렸다. 남진, 이미자, 패티김과 함께 당대 최고인 `박춘석 사단'의 핵심 멤버였던 것. "요즘으로 치면 제가 가수 '보아` 정도이고 남진은 '비`라고나 할까. 그때 레코드 판을 내는 족족 불티나게 팔렸어요. 돈을 주워 모았을 정도로 '달러박스`였어요."
1973년엔 정말 노래 부르기가 싫었다. 아예 해외로 떠날 결심을 했다. "아는 사람 없는 데로 무작정 이민을 떠나려 했죠. 그런데 박춘석 선생님이 딴 생각하지 말라며 '공항의 이별`이란 노래를 줬는데 그게 또 터졌잖아요."
1966년에 데뷔했으니 올해로 45년째 노래 인생을 살고 있다. 숱하게 부른 노래 중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건 무얼까. "'동숙의 노래`는 데뷔곡이니 잊을 수 없죠. 제일 좋아하는 건 '백치아다다`예요." 다소 의외다. "어찌 보면 가사가 제 인생을 닮은 것 같아요." 문주란의 삶과 닮았다고? 그러면서 그 노래를 흥얼거린다.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 볼에 스~칠 때/ 검은 머리 큰 비녀에/ 다홍치마 어여뻐라/ 꽃~가마에 미소짓는/ 말~ 못하는 아다다야/ 차라리 모든 것을/ 젊은 날의 그~ 행복/ 가슴에 못 박고서/ 떠나버린 님 그리워/ 별 아래/ 울~며 새는/ 검은 눈의/ 아~아다다야.'
· 사업하다 크게 손해보기도
중견 가수들의 무대가 좁아지던 1990년 초반. 그녀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경기도 부천 근처에 땅을 매입해 음식물 처리기 공장을 지으며 사업가로 변신했다. 사업 아이템은 좋았으나 너무 앞서간 탓일까. 공장 설립 2년 만에 그녀는 쫄딱 망했다. "모든 재산을 털어 시작한 사업이었는데… 그 바람에 서초동 대궐 같은 집에서 원룸으로 쫓겨가 살았어요. 당시 빌린 돈은 공인인 탓에 떼먹을 수가 없잖아요. 이를 악물고 2년 만에 다 갚았어요."
`환갑'의 나이에도 문주란의 몸매는 20대를 빰친다. 어쩜 그렇게 `몸 관리'를 잘한 걸까. "물론 골프도, 볼링도, 승마 같은 운동도 했죠. 요즘도 늘 하는 건 스트레칭이고요. 그러면서 줄곧 42~43kg을 유지해요. 제가 여자로서 아이도 안 낳았고 아마도 체질인가 봐요. 몸무게가 불면 노래할 때 호흡이 가쁘고 숨차서 안돼요."
문주란은 스스로 "부산 가시나답다"고 했다. 성격이 무지 시원시원하다. 무슨 질문을 하든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답변엔 막힘이 없다. 그래서일까. 남에게 부탁하는 성격이 못된다. "제가 그토록 노래를 많이 불렀고 방송 출연도 숱하게 했지만 '10대 가수` 한 번 못했어요. 방송사 PD나 간부들에게 밥 사고 술 사면 될 것 같았지만 성격상 그런 걸 못해요."
그래서 아직도 `미혼'일까.
"저요. 사랑도 해봤고 남자도 만났지요. 연예인과 스캔들도 났지요. 근데 결혼만 하려면 남자들이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지는 거예요. 팔자에 남자 복이 없나 봐요." 자신의 인생은 미완성 작품이라고 했다. 결혼을 못한 걸 아쉬워하는 듯 했다. "아마 결혼했으면 노래는 그만 두었을 거예요."
그 즈음 카페 안에서 그녀의 가장 최근 히트곡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가 흘러나온다. `처음에 사랑할때/ 그이는 씩씩한 남자였죠/ 밤 하늘의 별도 달도 따주마…남자는 여자를/ 정말로 귀찮게 하네.'
· 미움이 서릴 때면 몸부림을 치면서
부산에 대한 기억은 좀 고약했다. "부산이 저에게 별로 해준 게 없잖아요. 좀 섭섭해요." 그래도 `부산일보' 필자에 대한 애정은 마치 친정동생처럼 각별했다. "수구초심이라고 했잖아요. 미워해도 어쩔 수 없잖아요. 고향은 고향이니까."
또 바다는 싫어하고 물은 무섭다고 했다. "여섯 살 때 해운대에서 수영하다가 수영 쪽까지 파도에 떠밀려 갔어요. 물속에서 죽는 줄 알았는데 간신히 바위를 잡고 나왔죠. 그때도 죽은 엄마가 살려준 것 같아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20대부터 독실한 불교신자가 된 그녀는 `사후세계'가 있다고 몇 번을 얘기했다.
약 4시간의 인터뷰 동안 문주란이 가장 많이 입에 올렸던 단어는 `고독'이었다. 힘들어 보이기도 했다. 본인 스스로도 강해 보이지만 여자이기에 약하다고 했다. 미혼 때문일까. 무대의 화려함 뒤에 찾아온 외로움 때문일까. "한 3년 전부터 우울증 약을 먹고 있어요. 요즘엔 많이 나아졌어요."
그러면서 "우리 나이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잖아요. 욕먹지 않고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5월쯤, '삼순이`를 타이틀 곡으로 새 앨범을 낼 예정이에요. 또 다른 바람이라면 세종문화회관에서 남의 도움 받지 않고 큰 쇼를 했으면 좋겠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디너쇼도 했으면 하네요."
긴 인터뷰를 끝내고 카페 문을 나서자 흉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래 쪽엔 `동숙의 노래'를 새겼고 그 위엔 문주란 얼굴을 조각해 놓았다. 10년 전엔 없었지만 그 사이 `문사모'(문주란을 사랑하는 모임)가 만들어준 것. "예쁘고 멋지다"고 했더니 그저 빙긋 웃는다. 문틈 사이로 `돌지 않는 풍차'가 흘러 나온다. 작별 인사를 했다. `사랑도 했다 미워도 했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 소낙비 사랑에는 마음껏 웃고/ 미움이 서릴 때면 몸부림을 치면서~.' 김호일 선임기자 tokm@busan.com
사진=박희만 기자 phman@
·문주란은 누구
△1950년 부산 서면 출생. 1남 5녀 중 막내딸(일부에선 박태준, 박순천 여사와 함께 `기장 3대 명사'라고 하지만 서면에서 태어났으며 기장은 부친의 고향이라고 함).
△데뷔=1966년 `동숙의 노래'(앨범이 나온 시기를 말하며 이 곡을 부른 것은 한해 앞선 1965년)
△가장 좋아하는 노래=`백치아다다'(원래 나애심이 1956년 부른 왈츠풍의 영화주제곡을 문주란이 슬로우록으로 편곡해 리바이벌한 노래임)
△부른 노래수=약 1천800여곡(정확한 수치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음)
△대표곡=`동숙의 노래' `돌지 않는 풍차' `백치아다다' `공항의 이별'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 등
△근황=문주란의 뮤즈카페(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031-585-6688)를 운영하며 매주 토요일(오후 7시) 무대에서 직접 열창
첫댓글 물개 대장님 안녕 하시죠? 반갑습니다. 문주란씨는 저와 비슷한 동년배로 본명이 문 필연...학창시절 서면 전포동일대서 꽤나 유명했던..같은 또래의 역시 부산의 정훈희씨와 동시대에 유명한 가수 였지요.
문필연 맞습니다. 옛날 송파구 문정동에서 부동산 할때 문필연의 집을 팔아준 적이 있었죠.
포청천님 건강하시죠...네..문주란씨 본명은 다소 촌스럽습니다. 그래 당시 동숙의 노래 작곡가 선생님이 '문주란'이 좋겠다고 해 예명을 쓰게 됐다고 합니다. 정확하네요..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3월 1일 하절기 부터는 매주 토요일 오후 8시(동절기엔 오후 7시) 직접 공연을 한답니다. 커피값이 조금 비싼데...미사리보단 사고요..ㅋㅋ
며칠전 부산일보에서 정독했습니다^^
메트로님...감사...구벅...
잘지내시죠?~백치 아다다~기억속에~
넵...장사 잘되시죠..꽁지님..
바쁘게 지내시는게 보이네여...별일 없으시죠?
마말님,,,함 뵈어야 하는데..도통 시간이 안나네요...
꽃인줄 알았더니...ㅋ 기사 잘 읽었습니다^^복많이 받으세요
문주란이란 꽃도 있어요...사람도 여렷있고요...감사...구벅..
백치 아다다 참 서정적이고 고운 음악 이지요.
이제서야 글을 보았네요^^항상 건강하세요^^
물개대장님 저도 같이 만나면 안되나, 보고싶은데 옛날 팬인데 <봉이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