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무궁화
2001-06-20
전남매일 <한송주가 만난 사람> 이금주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장
일본은 역사 앞에 무릎꿇고 죄값을 치러야 해요
한 세기가 다 가도록 자기네가 저지른 역사의 죄를 씻지 않는 뻔뻔하고 한심한 나라가 있다. 그런데 피해국이면서도 그 오랜 세월 동안 가해국을 단죄의 심판대에 세우지 못하고 있는 무능하고 한심한 나라가 또 있다. 나란히 이웃한 한심한 두 나라. 일본과 한국.
나라 꼴들이 이래 놓으니 피해 당사자인 국민들이 직접 나서서 국가간의 역사적 업보를 청산하려 애쓰고 있다. 한국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가 그런 국민들의 모임이다.
태평양전쟁 때 강제 징용으로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를 키우며 60년 동안 홀로 살아온 이금주 여사(李金珠 82)도 평생 동안 가슴에 품어 온 한을 풀 길이 없어 직접 나선 역사의 대표적인 피해자다.
이 여사는 그 유족자 모임 전국 이사와 광주 모임 회장을 맡고 있다. 이 이의 단 하나 소원은 "살아 생전에 일본으로부터 역사적 만행에 대한 공식 사죄를 받아 내는 것"이다.
"일본은 두 번 죄를 짓고 있습니다. 백만명이 넘는 무고한 한국인을 잔학하게 희생시켜 놓고도 어떻게 60년이 넘도록 공식적인 사과 한 마디 없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일본을 그저 가만히 두고만 보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입니까."
"지금도 눈을 못 감고 구천을 떠돌 희생자들의 원혼과, 죽음보다도 비참한 삶을 이어온 생존자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에 못을 박으며 살아온 유족들의 한은 누가 풀어줍니까. 그 세월의 보상은 어디에서 받아야 합니까. 그보다도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 민족적인 굴욕은 어떻게 설욕해야 합니까.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지만 정부고, 국회고, 법조고, 학계고, 단체고 간에 이 문제 해결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힘은 없지만 당사자인 우리가 직접 나서기로 한 것이지요."
일본인들 도움으로 활동하는 '수치'
월산 신협을 창립하는 등 사회 활동을 해 오던 이금주 여사는 1972년에 전국의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 대표들과 뜻을 모아 일본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독재 정권의 반민족적 탄압에 눌려 밖으로 널리 드러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민주화가 조금 이루어진 1988년에 정식 단체(사단법인 한국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로 발족하게 되고 이 여사가 이사와 광주 유족회 회장을 맡았다.
동 유족회는 1990년 3월 서울에서 4백명의 회원이 모인 가운데 전국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내외에 그 존재를 알렸다. 이 총회에는 일본에서 4명의 민간인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는데 이들은 일본내의 민간 단체인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공식 사죄와 배상을 청구하는 재판을 촉진하는 모임( 이하 촉진회)'의 회원들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진즉부터 민간인들이 한국인을 위한 모임을 만들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해 당사자인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팔짱을 끼고 있는데 가해국 국민들이 되레 이런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혼란과 충격을 느꼈어요. 그리고 그들의 진심어린 열성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와 우리 회원들은 이에 용기를 얻어 정부나 의회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고 우리 힘으로 끝까지 싸워나가리라 굳게 결의를 다졌지요."
그때부터 유족회는 '촉진회'의 초청으로 일본에 여러 차례 건너가 일본 내의 희생자 유적지를 둘러보고 구체적인 투쟁 방법 등을 모색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펼쳐 나갔다. 현실적인 방안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제소가 유력했는데 일본의 '촉진회'는 모임 안에 수십 명의 지원 변호인단까지 갖추고 세세한 재판 절차까지 준비를 해 둔 상태였다. 그래서 곧 바로 제소가 가능했다.
1992년 2월 17일, 일본의 도쿄 지방법원(東京地裁)에는 일본 사법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집단 소송이 제기됐다. 한국의 한 도시 광주에서 민간인 1천2백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사죄와 배상 청구 소송이었다. 이 '천인소(千人訴)'는 그 성격과 규모로 인해 커다란 화제를 모았으며 연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본인들의 한국인 태평양전쟁 희생자 문제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거사'는 이금주 여사와 광주 유족회 회원들이 1991년 5월부터 8개월 동안 광주 전남 일원을 돌며 희생자와 유족 증인들을 일일이 면담, 사연을 기록하고 소장을 작성한 그야말로 각고의 산물이었다. 피해자에는 당시 강제로 끌려간 군인, 군속, 노무자, 정신대(종군 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포로 감시원이 망라되어 있었다.
"우리 회원들은 한 사람의 희생자라도 빠뜨리지 않고 조사한다는 각오로 밤잠을 설치며 성심껏 일했습니다. 우리는 증언을 듣고 소장을 작성하면서 당시의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비참한 정황에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치를 떨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이런 전무후무한 역사의 죄악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드러내서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거듭 다짐했지요. 유족회 회원들의 헌신과 노고, 그리고 일본 '촉진회'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천이백인의 소장을 완성해 일본 법정에 내니 다들 깜짝 놀라더군요.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일본이나 한국에서 이 문제에 대한 전에 없던 반향이 있어 일단 보람을 느꼈어요."
10년 동안 일본 60여 번 다녀와
광주 유족회는 '천인소'를 시작으로 *우키시마마루(부도환 浮島丸) 폭침 한국인 몰살 만행에 대한 사죄와 배상 청구 소송(1992년 8월, 교토 지방법원) *정신대(종군 위안부) 만행에 대한 소송(1993년 시모노세키) *여자 근로정신대 소송(1994년 시모노세키) *포로감시원 소송(1995년 도쿄) *여자 근로정신대 소송(1999년 나고야) 등 7년 사이에 모두 6건의 재판을 성사시켰다.
이를 위해 이금주 여사는 일본을 60여 차례나 다녀왔으며 소송을 대리한 일본의 '촉진회' 관계자들도 여러 번 광주 전남을 방문해 조사를 했다. 일이 본때 있게 진척되자 한국의 언론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유족회를 찾아와 증언을 해 주었다.
실제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일본 언론들이 연일 크게 보도해 주의를 모았고 재판정에는 일본의 시민과 단체가 참관, 한국인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경청하며 각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일본 내 일부 여론과는 상관없이 현실은 냉혹해서 재판은 번번이 기각 각하되어 지금까지 단 한건도 승소하지 못했다. 1965년 일본의 오히라와 한국의 김종필 사이에서 협약된 한일 협정으로 국가간 배상은 끝났으며 수차례의 일본 수상 진사로 더 이상 국가적 책임은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리고 개인별 배상은 시효나 제척 기간이 도과했다는 이유였다. 소송 중 일부는 최고재까지 올라가 각하됐고 일부는 항소나 상고되어 계류 중에 있으나 승소할 전망은 거의 없는 상태다. 그러나 이금주 여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국제 재판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싸워 갈 각오다.
지난 5월 광주유족회에서 대한민국 국회에 보낸 탄원서에서 이회장은 이렇게 절규했다.
"일본인 가해자들을 우리나라 법정에 세워 심판해야 할텐데 우리 피해자들이 가해국 법정에 서서 증언해야 하다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더욱이 한국 정부는 '과거사는 잊어버리자. 국제법상 배상 청구는 어렵다'며 가해자 편을 들고 있으니 우리는 어느 나라 국민입니까. 부디 민족적 역사적 차원에서 깊은 관심과 지원을 부탁하는 바입니다."
한송주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