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의 비밀/ 오영수 1 독립문 편액을 매국노 이완용이가 썼다고 하면 하지만 독립문을 세운 이유가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조선을 일본이 독립시켜 준 것에 대한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은 1897년에 세워졌고 그리고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이 일본에 대항한 독립이 아니라 따라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독립이라는 것도 그런데 속국이라 할 수도 없는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독립문이 학교에서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운 적이 없으니 그들은 자신들의 친일이 탄로가 날까 두려워 2 만세만 불러도 잡아다 고문하거나 옥살이시키고 총독부는 때려 부수라 명령하지 않았고 1928년에는 3 우리는 서울 한복판에 일본의 승리를 기념하며 서울에 관광 온 일본인들이 독립문이 이렇게 치욕스럽게 만들어졌다는 걸 아는 국정원이 불법선거 운동을 하거나 집권당은 어버이 연합 노인네들을 부추겨 강남 국민들은 그까짓 독립문이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냐며 보시다시피 이 글은 시의 형식을 빌리기는 했어도 역사 왜곡의 사례를 조목조목 소상히 적시하면서 세태를 비판하고 성토한 산문시다. 여기에 기술된 독립문의 비밀 등은 대체로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지만, 그 해석과 평가에 있어서는 이런 저런 논란이 없지 않다. 1961년 5.16 구데타 이후 1963년 대한민국 사적 제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1896년에 이완용, 서재필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조선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에 전 국민을 상대로 모금하여 1897년 세웠다. 1896년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듬해이다. 청일전쟁의 강화 조건에 '청국은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완전 폐기한다'는 조항이 있어 당시 '독립'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일본의 전승을 기념키 위한 의도가 담긴 건축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1897년 독립신문 제144호 논설에는 “하나님이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일본과 청국 사이에 싸움이 생겨 못된 일하던 청인 놈들이 조선서 쫓겨 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에 천만 번이나 다행한 일이다.”라 적고 있다. 독립문의 배후에는 일본이 있었던 것이다.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나라를 팔아먹은 五賊의 우두머리인 이완용이 독립문 편액의 글씨를 썼소. 독립문은 '청국은 가고 일본은 오라'는 말도 안 되는 개선문인 셈이오”라고 했다. 그렇기에 일제강점기 동안 굳건히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1928년에는 경성부 토목과에서 직접 보수공사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1936년에는 독립문을 아예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하기에 이른다.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꾀하는 상징물이었다면 가당키나 하였겠는가. 결국 ‘독립문’, ‘독립협회’, ‘독립신문’에서의 ‘독립’의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제(외세) 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청으로부터 독립하여 일본에 붙자는 속뜻을 담고 있다. 버젓이 국왕이 있고, 국권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독립이란 말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1890년대의 '독립'과 1910년 이후의 '독립'은 그 의미가 엄연히 다른데도 지금껏 독립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이를 한줄기로 이해했다. 더구나 일제하 독립운동 탄압의 현장인 서대문형무소 터에 독립공원이 조성되고, 바로 옆에 독립문과 서재필 동상이 서있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1896년 창간된 ‘독립협회’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역시 우리가 아는 것과는 그 발행동기가 사뭇 다르며, 추진의 중심인물인 서재필도 그가 주장한 '독립'이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 아니라면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리라.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운 대로라면 독립협회는 외세 의존을 반대하는 애국자들이 모여 나라의 자주 독립을 표방하여 결성한 것이라 알고 있다. 하지만 독립협회 구성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간판으로 내세운 이상재, 주시경을 제외하면 이완용, 윤치호 등 거의 친일 인사가 장악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독립협회의 인식은 '조선은 일본의 승리로 독립되었고, 우리는 이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인식의 바탕으로 사설이 나가고 독립신문이 편집되었다. 18세 때 서재필은 일본 군대를 이끌고 7명의 대신을 칼로 살해하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명분은 개화와 독립이었으나 실제는 대일 종속을 가속화 시킨 불장난에 불과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망명한 뒤로는 철저히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 살았다. 자신의 영달과 기회주의적 삶으로 점철된 행적이었고 독립신문에서조차 서재필이란 이름은 찾을 수 없다. 필립은 조선 정부가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한 미국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영어로 말했고, 독립문 기공식 행사에서조차 미국인의 신분으로 영어로 연설했다.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윤치호의 일기에는 '서재필이 쓰거나 말하기 모두에 걸쳐 모국어를 거의 잊어 버렸다는 점에 놀랐다'고 기록되었다. 그가 조선 정부에 의해 추방될 당시 그는 출국을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하여 가는 것'이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독립신문’을 일본인에게 팔아넘기려 했다. 그에게 조선은 '내 나라'가 아니라 '너희 나라'였던 것이다. ‘독립신문’은 조선정부가 마련해준 사옥과 4천4백원의 국고로 창간되었다. 그 중 1천 4백원은 주거비용이었고, 덕분에 필립은 수백평의 저택을 구입해 기거했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처음부터 국가재산이었는데 1898년 정부에서 필립을 추방하려하자 거액의 배상을 요구했다. 자신은 10년 계약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왔는데 아직 7년 10개월이 남았으니 그에 해당하는 월급 2만8천2백원과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 6백원을 요구했던 것이다. 조선정부는 그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이게 망해가는 나라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애국자의 모습인가. 그럼에도 훗날 서재필에 대한 추앙은 실로 대단했다. 해방이후 미국을 배경으로 한 정치세력들이 자기들의 과거경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친미파의 뿌리이며 역사적 근거였던 서재필이 필요했고, 그를 ‘위대한 애국자’로 둔갑시켰다는 게 합리적 추론이다. 1994년 서재필의 유해는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화려하게 귀환했다. 이를 계기로 언론은 개화 독립운동으로 온통 장식되었다. 2005년에는 그의 고향 전남 보성에 130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기념공원까지 조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다시 살펴봐야 할 인물이고 신화는 수정되어야 한다. 왜곡된 역사가 있다면 그 또한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근현대사는 국가주의의 과잉 노출과 민족주의 강요 등의 문제점이 수두룩하다. 서재필도 친미친일의 성향은 너그럽게 감춰진 채 너무나 단편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이 공개되었다. 한국근현대사 해석을 둘러싼 이념논쟁과 상관없이, 오늘날 서재필 같은 인물이 국민의 존경을 받을 애국인사였는지는 반드시 짚고넘어가야할 사안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계를 떠나야 마땅할 김무성 같은 기회주의적인 정치인이 언제 다시 '구국 인사'로 부활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권순진 My Memory - Robin Spielberg |
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