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고향은 동진강을 끼고 하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 어릴때 추억이 남달리 많은 곳이구요.
지금쯤 동진강에는 실뱀장어 잡이가 한창이라 생각됩니다.
여기 사람들은 시라시라고 합니다.
강이라 하면 상류에서 물이 하류로 흐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곳은 다릅니다.
서해안 이라 조수 간만의 차이가 많아서 강물이 들고 빠지곤 합니다.
하루에 밀물과 썰물이 두번 이어지는데 조금때는 밀물이 하류에서 상류로 조금올라오고 갈수록 강물의 양이 많아집니다.
그러다가 사리가 되는데 최고조에 달했을 땐 강 양쪽에
바닷물이 가득차곤 합니다.옛날에는 물고기가 지천으로 있어서 투망치면
물고기를 양동이로 잡을 정도 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림을 본듯한 옛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동진강에 밀물이 들면 수평선에서 돚단배가 달려오는 모습을요..
집에서 강가까진 걸어서 500M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때쯤 되면 강위엔 실뱀장어 배들이 진을 치고 하루에 두번 그물을 내립니다.
실뱀장어 체포하여 전량을 일본으로 수출하였는데 그때는 뱀장어 양식 기술이 없어서 일본으로 수출 하였답니다.
밀물때 실뱀장어 잡아서 죽지 않게 잘 보관해야만 업자에게 넘길수 있는데
상처가 조금만 나면 살수가 없어서 하루밤 자고 나면 죽을것을 많이 골라낸답니다.
내 생각으로는 실뱀장어 한마리 값이 뽀빠이 하나 사고도 남았다 생각합니다.
실뱀장어 7마리가 1g 이었으니까 1Kg은 아마 금덩어리 보다 비싸다고 보아도 됩니다.
우리는 용돈이 없던차에 뜰망을 만들어서 실뱀장어 떠서 용돈으로 보태 쓰곤 하였지요
들판 배수물이 바다로 빠지게 수문이 있는데 실뱀장어가 올라 온답니다.우리는 실뱀장어를 낱마리로 잡았지요.
들판에는 보리가 푸르러지고 농부는 논을 갈기 시작할때 입니다.
본격적인 영농철이 시작되지요.
일제시대 개간하여 만든 농경지가 농사 짓기 좋도록 바둑판으로 정리가 잘되었지요.
그땐 기계가 없으니 논 양쪽에 물을 가둘수 있는 용수가 있고 논물을 뺄수 있는
배수가 있지요.
물은 농지개량조합에서 물을 내려보내고 있는데 가을걷이가 끝나면 물값으로
수세를 낸답니다.그러니 가물어도 물걱정을 별로 않는답니다.
가뭄이 오래되면 아래쪽 농부들을 물때문에 민심이 흉융하기까지 한답니다.
봄이 되면 제일 생각 나는 것은 보리밭에 많은 독새기란 풀이 있습니다.
어린풀잎을 뜯어다 된장국 끓여먹던 일이 생각나구요.강가에 나가 게를 잡던일 생각나네요
게는 3종류인데 칠게 농발게 갈게 인데 구멍 뚫린 모양만 보면 알수 있지요.
게 중에서 가장 맛있는게가 갈게라고 하는데 구멍모양이 예쁩니다.
옆으로 비스듬히 뚫려서 좌우로 빙글 거리다가 마지막에는 반듯하게 뚫려 있구요.
농발게는 처음부터 수직으로 뚫려 있어서 잡기가 쉽습니다.
칠게는 갯뻘에 많은데 구멍이 모양이 좋지않고 투박하지만 옆으로 뚤려있고 깊이가
길지 않아서 손만 집어넣으면 잡기가 쉽지요.
갈게는 게장을 담아먹으면 맛이 일품입니다. 간장에 넣었다가 나중에 꺼내 먹으면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봄에 잡아서 젖을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풀냄새도 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게를 잡을땐 삽으로 구멍을 따라 파다가 수직으로 구멍이 보이면 살대로 끄집어 내지요
잡는 기술이 필요 하답니다.잘못하면 다 찢어지기도 하고 발이 남아있지 않아서지요.
빨리 끄집어 내야 많이 잡을수 있지요..잡아서 구워먹기도 하고 된장국 끓여 먹기도 하고
들판에는 농부가 한참 소로 논을 갈고 논바닥은 하나 둘 고랑을 타고 갑니다.
아낙은 세참이 되면 막걸리와 세밥을 광주리에 이고 들로 나가는 모습을 볼수 있었구요
개울가에 물뱀이 짝짓기 하고 있는것이 많이 보였습니다.지금은 멸종되었나 물뱀을
볼수가 없으니 아마 영영 사라진듯 합니다.
짝짖기 하는 물뱀을 잡아서 여자 오면 늘어놓는 장난 많이 했지요.
어머니는 밭에 상추씨, 아욱씨를 뿌리고 시금치 등 채소를 키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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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아자랑이 아른거리면 논에 두엄을 내고 소로 논갈고 못자리 설치합니다.
그전에는 경운기가 귀한 때라 못자리 둑을 만들고 물을 가둬서 괭이 소시랑으로
모판을 다듬에 밀대로 판판하게 해서 물 가두어 그위에 볍씨를 뿌린답니다.
지금은 기계화 되어서 일이 쉽지만 예전에는 사람 손으로 일일이 해야했기 때문에
그 많은 농토를 뼈빠지게 일해야만 했지요..
억척스레 일해야만 자식 굶기지 않고 교육 시켜야 했지요.
우리 마을에 가끔 고깃배가 생선을 싫고 들어 왔습니다.
어렸을때인지 모르지만 꽃게가 어마 어마하게 큰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렇게 큰 꽃게는 본적이 없습니다.
바다에서 나는 온갖 생선을 가지고 왔지요..배는 무동력선에데 돛을 달았지요..
겨울에는 우리 놀이터가 들판이었지요.마을 어퀴 텃논은 우리가 항상 노는 장소 였기 때문에 논바닥이 반질 반질 했습니다. 논이 직사각형이기 때문에 축구장으로는
안성맞춤이었지요. 축구공이라야 고작 고무공이나 새끼줄 감아서 만들어 공을 찼구요.
봄에 논갈아 버리면 놀공간이 없어지면 강가로 나가지요.
조금이 되면 강바닥이 단단 해져 놀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갯뻘위에는 짠물이 말라서 소금기가 있어 하얗답니다.
논구석 구석에서 허수아비가 못자리를 지킵니다.
제가 알기로는 도요새인데 상당히 몸집이 큽니다..이새를 뙤깽이라 합니다.
뙤깽이 가 한번 단체로 지나가면 못자리는 망치니까요..
보리가 하루 다르듯이 점점 자라고 논은 소로 두번을 간다고 생각합니다.
초벌 갈아놓고 다시 갈지 않은곳을 한번 갈아서 모내기 준비를 하지요.
못자리 모도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 지고 모내기 준비가 바빠집니다.
논에 물 가두면 밤은 개구리 합창으로 들판은 떠나갑니다..
개구리 지칠줄 모르고 밤새 떠들고 난리 치다가 아침햇살이 풀잎에 이슬 젖으면 그때 야 잠에 떨어지고 보리밭에서는 꿩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립니다.
보리가 누렇게 누렇게 익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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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가 익어가면 깜부기가 생각납니다.
보리 이삭이 영글지 않고 까맣게 된답니다..우리는 깜부기를 뽑아서 친구 얼굴에
바르고 장난도 많이 쳤지요..밤에는 동무들끼로 모여서 길바닥에 응가 도 해놓구요.
보리가 누릇누릇 익으면 밀대가 생각납니다..이때쯤이면 개떡이 참 맛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다 보니 맛도 잊어 버렸네요.
모내기를 할려면 갈아 놓은 논에 물을 가두어야 합니다..마른 논에 물대기를 할려면
물이 많이 들어가는데 마른갈이 물대기란 말도 있지요.
예전에는 논 갈아서 바로 물을 대곤 했지요..물갈이라고 하지요..
물대기 어려운 논에는 물을 미리 논에 가두어 논갈아 모내기를 했답니다
논에 물을 가두고 괭이로 두꺼운 흙을 잘게 부스고 흙을 평평하게 하고 나중에서
소로 써래질 하여 모심기 좋게 논바닥을 정돈합니다
모가 자라서 모내기 시작되면 집안에 부지갱이도 아쉽다 했던가,모든 일손이 필요 할때입니다.
남자들은 못자리에서 모를 찌고 여자들은 단을 짜서 모를 심고,허리 한번 필 여유도 별로 없습니다. 하루에 주어진 모내기를 마쳐야 하니까요.
단은 품앗이 일종입니다.. 여럿이 순서를 정해서돌아가면서 자기 논 모내기 일자 맞춰가지고 모를 심습니다.
우리들은 모내기가 오면 제일 좋은것에 세참에 나오는 찐빵 입니다..
얼마전에 유행하던 안흥찐방 아시죠..그런 찐빵입니다..엄마한테 빵 얻어먹는 재미
가 유일한 간식입니다.. 그전에는 논에 거머리가 많았는데 거머리 하면 징글징글 하지요
거머리 뜯기지 않을려고 타이스 같은것을 잘라서 꼈는데도 어디로 파고 드는지..
거머리가 좋은 모양입니다 .
제 할머니는 가끔 거머리를 입술에 달고 다니는것을 보았지요.
옛분들은 민간요법이 있었던것 같습니다..이유를 물어보지 못했지만요...
논에 모내기 하면 줄잡이 하는 역할이 큽니다..
쉽게 말하면 모심기를 이끌어 가지요..박자를 잘 맞춰야 일이 빠르고 때로는 노래를
불러서 모심는 아줌마들 즐겁게도 해 주어야지요.
모쟁이는 못자리에서 모를 쪄서 논에 골고루 뿌려야 되는데 잘못 뿌리면 뒷모쟁이가
고생을 많이 한답니다.그래서 모쟁이 역할도 크다 할수 있습니다.
모심는 뒤에는 뒷모쟁이가 모가 떨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모자라는 데는 못단을 던져주기도 하고
많으면 다른곳 으로 빼기도 하고,그런 역할을 어린 우리들이 도맡아 하곤 하지요.
지금도 모내기 하는 모습이 정감나는지라 어렴풋이 흥을 돋구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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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모내기 철에 고생한적이 있지요.
그때는 몹시 가뭄이 심하여 논에는 먼지만 일었지요.
하늘에서는 비가 오지 않아서 못자리가 타 들어가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그러다가 비가 흡족이 내려 모를쪄서 모내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별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지요..가뭄에 매말랐던 못자리는 모 찌기가 쉽지가 않은데 모가 잘 뽑혔답니다.
모찌는 사람마다 모가 잘 쪄진다고 한마디씩 했지요.
모내기 끝나고 이상한 일이 발생하였지요.
벼가 자꾸 땅속으로 타 들어 가는 겁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께서 농약 준다고 못자리에 제초재를 뿌렸던 겁니다.
그것두 한두 필지도 아니고(한 필지는 6 마지기 한마지기는 200 평임)
개울은 개울마다 논마다 돌아 다니면서 버려진 모 주워다가 모 때우던 일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옵니다.
모내기가 중간쯤 진행 되었을 때 보리가 익어 보리를 낫으로 베어야 합니다.
해는 길고 날씨는 뜨거워지고 독새기풀 때문에 보리 베기가 여간 힘듭니다.
보리를 낫으로 베어 논 바닥에 깔아 놓았다가 보리가 마르면 탈곡을 해야 합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보리를 다시 말려서 탈곡을 하고 모내기를 할려면
보통 힘드는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전에는 발동기가 있었는데 그 기계 가지고 있는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코메디언 백남봉 선생이 원맨쇼에서 그 흉내를 많이 냈습니다.
발동기로 탈곡을 할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만 날을 잡을수 있습니다.
보리 탈곡하고 논갈아서 바로 모내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보리 탈곡이 시작 되면 날을 새워서라도 마무리를 해야만 했지요.
비라도 오면 엉망이 되어 버리니까.밤을 새우면 다음날 얼굴이며 온통 몸에는 먼지로 뒤집어 쓰지요.
보리 농사는 이렇게 마무리 하고 보리 공판하고 들판은 파랗게 물감들이고
농부도 한시름 놓고 물관리 농약.비료주고 관리만 잘하면 농사는 다 지은거나 다름 없지요.
농부는 하늘의 뜻에 많이 좌우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농부의 정서에 메여있구요..부지런한 농부는 논에 피가 하나도 없습니다.
잡풀도 물론 없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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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은 그럭 저럭 한가해집니다.
더위가 아무리 심해도 별로 더위를 모르고 산것 같습니다.
시골집에는 대청이 있는데 거기 낮잠 자면 오히려 춥지요..
여름에는 대부분 고기잡이나 낚시를 즐기기도 하고 동진강 갯벌에 나가 종일토록
물에서 물장난 치기도 하지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똑딱배(큰 배에 딸린 새끼배)를 타고 강아래로 내려가
그물을 끌기도 합니다..재미 있는것은 그물을 펼쳐서 썰물따리 내려가다가 어느 선에서 물고기를 포위하여 갯벌위로 그물을 끌어 올리는데 고기가 많으면 그물 안에는 물고기 튀는 장면이
너무나 재미가 있구요...계화 앞바다 까지 내려가면 넓은 갯벌이 펼져져 있는데
그 갯벌에서 생활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분들이 많았답니다.
텔레비젼 에서도 자주 나오는 장면입니다.
금만경 간척 사업 현장이기도 합니다.
조개 종류로 엄청납니다.
반지락 같은 경우에서 조개가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퍼 담으면 됩니다.그주변 사람들은 겨울 농한기에 조개를 까서 톡톡한 재미를 본답니다. 젓을 담아먹으면 맛이 기가 막히지요
주로 백합을 많이 잡지요..고향가면 심포에 가서 백합을 사다가 소주한잔에 시름을 달래보곤 합니다. 조개 삶아서 조개 국물 ....침이 저절로 넘어갑니다.
동진강은 짠물과 민물이 교차되는 지점이라 망둥어 하면 알아줍니다.
옛날에는 망둥어잡이로 한여름이면 사람들이 북적거렸지요.
망둥어가 발에 밟힐정도 였지요.
망둥어는 1년 살다가 죽는데 가을철에 최고로 자랍니다.
망둥이가 얼마나 멍청하냐면 한번 떨구면 그자리에서 다시 까닥 거리면 또 물지요.
망둥어 말려서 구워먹기도 하고 쪄 먹기도 하고 국 끓여먹기도 하고
전 만들어 먹기도하고 그곳 사람은 망둥어와 같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 합니다.
서해안 쪽에 사시는 분은 낚시 방법 알것입니다.
요즘은 낚시할때 닐로 많이 낚더라고요..전에는 대나무에다 낚시 걸어서 잡았지요..
들판에는 땡개비(메뚜기)가 난리 쳤지요..온통 떠들어 대니...
잡아서 강아지 풀에 꿰어서 불속에 넣어 구워 먹었지요...
많이 잡으면 엄마는 볶아서 말렸답니다...
논에도 물을 빼버리니 배수 물도 거의 다 빼버립니다.
그러면 개울에 나가 적당이 둑을 쌓고 발을 설치해서 대야나 양동이로 물을 펍니다.
물이 거의 빠지면 붕어 메기 피래미 등등 물고기가 하얗게 배를 내놓지요.
양동이로 잡았습니다...
한번은 경운기로 물고기 잡다가 친구가 밸트에 휘말려 손가락 하나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지요..
밤에 모기가 많아 집집마다 쌀겨(벼 껍질)여기서는 맵재라고 합니다.
불을 붙여놓으면 연기가 모락모락 납니다.
그 주변에 모여 앉아 세상 이야기를 나누던 어른들이 생각납니다
평야지대라 과일 서리는 별로 못해보고 도마토서리는 몇번 한 기억이 있습니다.
벼 이삭이 올라오고 먼 들판에서는 새쫓는 소리가 들립니다..
벼가 황금 물결로 출렁이는 가을이 다가 옵니다..
들판이 황금물결에 출렁거리면 태양의 길이도 짧아지고 서서히 들판으로 시워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온들판에 벼가 영글어 노랗게 되었을때 농부 마음은 그저 흡족하기만 합니다.
농부는 벼베기 위해서 창고에서 낫을 챙겨 숫돌에 낫을 갈아 놓습니다.
지금이야 콤바인으로 한번 훍코 지나가면 일사천리를 진행되지만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해야되니 여간 힘들지 않아서 나도 빨리 이들판을 떠나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았습니다.
난 어른이 되면 자녀들많큼을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답니다..
일요일만 되면 들로 나가서 부모님 일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 었지요.
그땐 부모가 교회다니는 친구들만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요.
어떤때는 열받으면 친구집으로 내뺀답니다..금강산도 식후경인데...나중에 혼나지만
일요일이면 교회나가니 들판일을 안하니까요..
그리고 시골학교는 농번기 방학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창 바쁠때 농사일 거들어라고 해마다 전통 으로 이어져 내려 왔는데 지금이 어떻게 변했나 궁금 합니다.
농촌일중에서 저는 벼베기가 가장 힘들었답니다.
벼를 베면 처음에는 손바닥이 물집이 생깁니다..나중에 굳은 살이 되면 괜찬지만 물집된 손으로 벼를 베기란.....
힘이 있어서 별어려움이 없는데 왼손잡이라 보니 팔힘이 빨리 빠지니 도저히 앞을
따를수 없어 순서가 차츰 차츰 뒤로 밀려가지요..어른들 따라가지 못하고..
벼줄을 4개 또는 5 개 잡고 베어 가는데 보통 4 줄을 잡고 갑니다.
모포기는 4포기를 모아서 한번에 낫으로 잘라야지요..
여섯바퀴를 돌아야 낫을 갈기때문에 그때 조금 쉰답니다.
벼베는 낫이 잘들어야 힘이 덜 들지요..낫도 아무나 잘 갈지 못합니다.기술이죠!
옆드려 낫질 몇번 하면 허리도 아프고 ...한줄 베고 걸어가는 시간 이 쉬는 시간입니다.
마지막 줄에서는 여럿이 마무리를 짓습니다...
벼는 베어서 논바닥에 한줄로 깔아놓습니다..
가을 바람에 채여서 볏집이 말라야 몇일 있다가 볏단을 묶습니다.
벼를 베면 땀이 뒤범벅됩니다.벼 베기가 끝날때쯤 해는 서산에 붉은 노을을 그림자 지우고 샛빨간 고추 잠자리도 쓰러진 볏집위에 나래를 접고 농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을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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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넓은 들판의 벼들이 논바닥으로 쓰러지고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집니다.
바람이 살랑 살랑 불어야 벼가 빨리 말라 볏단을 묶어야 합니다.
우리는 볏단을 잘 묶어서 볏단 묶기 좋게 벼를 모아둡니다.
그러면 뒤에서는 벼줄기로 끈은 만들어 한아름 묶어놓습니다.
앞에서는 볏단을 모으고 뒤에서는 묶어오고 그렇게 해서 벼묶기가 진행됩니다.
날씨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니 먼저 볏단 묶고 나중에 볏가리를 놓습니다.
비가 오는날이면 볏집이 비에 젖어 벼가 싹이 나올수도 있고 썩을 수도 있어서
볏집을 뒤집어 주어야 합니다.그러면 일이 두배로 힘들어지기 때문에
빨리 빨리 벼를 묶어야 합니다.
날씨가 안따라 줄때면 벼를 뒤집는 일이 많았습니다.뒤집어 마를만 하면 비오고
하늘이 원망스러울때도 여러번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들판에서 그런 풍경을 볼수가 없을것입니다.
볏가리 놓는 방법은 볏단을 세워서 줄로 놓은 방법과 볏단을 열십자로 해서 쌓아올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들판에 볏단이 하나 하나 쌓여지고 그상태에서 또 몇일이 지납니다.
논 전체 볏가리가 끝나면 바람에 채이고 해서 볏단이 또 말라갑니다.
지금은 콤바인으로 벼를 훓어서 바로 저장고로 이동하여 인공 건조기로 가면 끝나는데 옛날은 하나 하나 과정을 끝내야 했습니다.
제가 강원도에 살고 있지만 호남벌판 농사하고는 차이가 많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이하고 어른하고 농사짓는격이라 할까요
금만경 들판하고 판이하게 다를수 밖에요.땅의 넓고 좁음을..
볏가리에서 벼가 완전히 마르면 탈곡하는 작업을 하지요
농사가 적으면 들에서 탈곡 작업을 합니다..
예전에는 대부분 홀태로 벼를 터는데 연세 많은분을 알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삼치창같이 빗살모양으로 해서 하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사이에 벼이삭을 넣어서 훌트는 것이랍니다.
한명은 갈퀴로 검불을 긁어내면 그 앞에는 낱알들이 모입니다.
이렇게 해서 벼를 탈곡합니다..이런 작업도 거의 품앗이 형태로 이뤄집니다.
그러니 호남평야 농부의 아내가 억세지 않을수 밖에요..
농사를 많이 짓는 집에서는 볏단을 집 가까이 텃논으로 이동을 시킵니다.
소 달구지로 볏단을 실어서 볏벼늘을 쌓습니다..
쉽게 말하면 거대한 볏집 건물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을것 같아서 한 예를 비교하면 이해가리라 생각합니다.
진안에 있는 마이산에 돌로 쌓은 탑이 생각 날것입니다...그러한 모습입니다..
높게 쌓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거기가 우리들 숨바꼭질 하던 장소였으니까요..
농사 많은집에는 일꾼이 있어서 차근 차근 집옆에서 벼를 쌓아놓고
천천히 탈곡을 시작합니다.
제집에서는 호롱기라는 탈곡기가 있습니다.
발로 호롱통을 돌려서 벼알을 털어내는 작업입니다.
김제에 오실기회가 있으시면 벽골지라 곳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리시설이라고 합니다.
그곳이 관광지로 잘 꾸며져 있어 옛날 농기계를 모아서 전시하고 있습니다..참고 하시길...
가을철에는 일도 힘들지만 샛밥먹는 재미가 있습니다.
수확하는 풍요로움에 밥상은 진수성찬입니다..잘먹어야 힘도 나고
해가 짧다보니 밥먹고 일하다 보면 해가 빨리집니다..
모든일든은 하루에 일할 량이 있습니다.
채우지 못하면 밤 늦게라도 마무리 해야되니 꾀를 부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마을이 단합이 잘된듯 싶습니다
벼를 탈곡해서 낱알을 곳간에 저장하고 탈곡한 볏집은 집벼늘 쌓고..
이렇게 해서 추수는 거의 끝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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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가 끝날때쯤 논 일부에 보리밭을 갈아서 보리 씨앗을 뿌립니다.
기억이 어스름히 생각나는것은 추수 끝나고 일꾼은 볏집으로 이엉을 엮습니다.
울타리며 초가지붕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일이 끝나면 일꾼은 세경을 밭아 떠나고 또 인연이 되면 다음 봄에 또 만납니다.
일꾼이 갈데가 없으면 아예 눌러살기도 하지요..집에 잡다한 일을 하면서
한 겨울을 지냅니다.
속 못차린 일꾼은 한겨울에 뼈빠지게 일한 세경을 술집이나 도박판에 날려 버리는
경우를 몇번 본 경험이 생각납니다.
대부분 순박한 사람들이라 읍내에 나가서 한번 빠지면 전부 탈리고 들어오는 경우가
비일 비재 하였지요..
찬바람 부는 들판에 매섭게 북서풍이 불어오고 눈보라 치는 학교길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되었답니다.
저녁노을이 물들면 들판위에는 기러기 때가 굴뚝 연기처럼 꼬리를 물고 남쪽 하늘을
날아서 어디론가 가는모습이 어린 내 마음에는 동경으로 남았지요..자유로운 철새처럼 꿈속을 날았지요..
아침 세수할려면 남쪽으로 내려간 기러기 때가 다시 북쪽 하늘로 날아갑니다..
오랫동안 객지 생활에도 이시간 되면 그 풍경이 보고 싶어 눈을 감고 추억에 잠겨
봅니다.
겨울 방학이 시작 되면 우리들의 놀이가 하나 있지요.
못치기 랍니다. 못을 뽀쪽이 갈아서 땅바닥에 못을 뿌려서 박아 넘어뜨리든지
다른 못넘어진것을 맞추면 그 못을 따먹는 게임입니다.
집벽에 있는 못은 모조리 빼서 망치로 두드려서 못을 주머니에 한줌씩 가지고 놀던때
생각납니다.그래서 제일 큰못을 구할려고 노력 많이 했지요.
못이 커야 다른 못을 힘으로 이길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슬치기..제일 많이 했던것이 짤짤이(쌈치기)입니다.
짤짤이는 두뇌 싸움입니다.보통 세명이 하는 게임인데
동전을 손에 몇개 쥐고 알아 맞히는 게임입니다.
한개.두개.세개 단위입니다..하나면 아찌 둘이면 니 셋이면 쌈입니다.
두명이 아찌 니 를 찍으면 돈을 쥐고 있는사람이 세개를 쥐고 있으면 돈을 따먹습니다.
밤늦게 짤짤이 하다가 어른들께 들켜서 혼나기도 했구요.
하늘에 연을 띄우고 들판을 내려다 보는 환상에 실을 길게 길게 늘여 뜨리고
놀았던 생각에 젖어봅니다.
나이가 들면서 놀이도 커집니다.
이쁘게 말하면 닭서리 입니다.
처음에는 친구들 끼리 자기 닭잡아 먹지요.
들켜도 별문제가 없으니까요.
그러다가 통이 커져 남의 닭서리를 강도처럼 한적도 있지요..
작대기 들고 가서 문앞에서 꽝꽝거리면 주인은 나오지도 못하고 .....이런적도 있었답니다.. 지금은 꿈에도 해보지 못할 일이지만 그때는 장난으로 했어요.
나는 도박이라는것은 짤짤이 밖에 못했는데 나중에 화투에 짓고 땡이라는 도박이
있습니다.. 지금은 고스톱 많이 치지만 짓고땡 하다가 수업료 두번 까먹은 일이 있지요.
도박해서 돈벌었다는 사람 본적이 없습니다..고리 뜯어서 돈벌었다는 사람 들은적은 있어도...
눈이 많이 내리면 들판에 물이 고여 썰매를 타기도 하고 발설매 만들어서
고무줄 징징 감고 얼음 지치던 꿈만은 소년의 꿈이 세월을 하얗게 만들었습니다.
가끔 힘들땐 고향 들판이 생각납니다.
매서운 북서풍은 부는데 황량한 들판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을 받을때 입니다..
고향이 있어 항상 이런 꿈을 꾸어봅니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을 담고....
첫댓글 와아................................................................
소시적에 힘겹게 살아온 나의 체험기 같아서 같은 마음으로 젖어보았습니다 소상히도 기억하신 님의 기록이 어쯤 하나같이 거울속의 모습같이 보이네요 시간나면 나도 한번 쓰보고싶은 글입니다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어릴적 고향 들판의 풀 한포기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아름다운곳이란 생각, 또 가슴 따뜻한 곳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도님! 실명을 알고 싶군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그 곳 농촌 출신이어서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한 착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리도 소상이 묘사했는 지 감탄했습니다.
아~
고향 생각나서 써보았는데 관심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크라네보미님? 고향이 어디신지요..제 고향은 전북 김제시 죽산면입니다!
파도님의 고향이 바로 제 고향입니다. 저는 내촌에서 20년간 산 정원탁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아 그러습니까? 여기서 고향분을 만나뵙게 되여 영광입니다~죽산 초등학교43회 입니다..제 이름은 박 남수 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박남수 동문님, 정말 반갑습니다. 자주 좋은글을 올려주세요. 저는 27회이니까 선배로서 조심해야겠군요.
대 선배님을 만났군요..저는 강릉에서 살고 있습니다..정말로 반갑네요! 자주 뵈었으면 하네요.^^*
반갑습니다. 자주 연락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