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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1
교토 여행18 - 백제계 히라노 신사에서 금빛 번쩍이는 기타노텐만구에 가다!
2024년 11월 21일 다이도쿠지 (大徳寺) 의 료겐인 과 고토인에 고호안을 보고 다카미네 겐코안( 源光庵)
을 찾아 단풍을 구경하는데, 둥근 '깨달음의 창' 은 어떤 일에도 얽매이지 않는 “선과 원통” 의 마음을
네모난 '망설이는 창' 은 병, 죽음등 매일 매일의 다양한 고통스러운 “인간의 생애” 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히라노 진자 (平野神社) 에 도착하는데..... 백제계 조상신을 모시니, 4번째 다카노노 니아카사
(高野新笠) 는 백제 무령왕의 장남인 순타태자의 8대손 화을계의 딸 화신립 和新笠 으로,
황후가 되어 낳은 아들이 간무왕(천황) 이라고 2001년에 아키히토 일왕(천황) 이 고백한 바 있습니다.
헤이안시대의 '후쿠로조시 (袋草紙), 1156-1159)' 노래집에는 “고닌왕의 황태자인 간무왕
의 생모 고야신립의 조부는 히라노신의 증손이다. (白壁王の皇子の御母の祖父は
平野神の曾孫である)” 히라노 신사가 백제 고야신립과 관계가 깊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5분쯤 걸어서 기타노 텐만구 진자 ( 北野の天満宮 神社 ) 에 도착하는데 이 신사는
가을 단풍이 좋으니 모미지엔 (史跡御土居のもみじ苑) 이 유명
하다고 하며 교토역에서 50, 101번이 오며 그외 10, 55, 102, 203번도 이곳을 지납니다.
기타노 텐만 구( 北野の天満宮 ) 는 국보 본전과 350그루 단풍이 볼만하다지만 금년은 늦더위로 늦게
드니 아쉬운데...., 여기 신사는는 텐 진(天満 첨난) 신앙의 발상지이며, 일본에 12,000
사가 있다고 하는 전국 텐만구· 텐신사 총 본사라고 하며 삼광문 (三光門) 이 무척이나 화려합니다.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기타노텐만구텐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인데, 학문의 신이자 뇌신
(雷神) 으로 추앙받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시는 덴만구는 일본 전역에
있지만, 기타노텐만구는 후쿠오카현에 있는 다자이후텐만구와 함께 양대 신사라고 합니다.
東風こち吹ふかば 匂においおこせよ 梅うめの花はな 主あるじなしとて 春はるを忘わするな
(코치후카바 니오이오코세요 우메노하나 아루지나시토테 하루오와스루나)
동풍 불거든 꽃향기 보내다오 매화꽃이여 주인이 없다 해서 봄을 잊지 말지니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菅原 道真) 는 헤이안(교토) 시대 문인, 관료로 일본 조정이 중국 당나라
에 파견하던 견당사를 폐지시켜 일본 특유의 고쿠후 문화 (国風文化, 국풍 문화) 를
개창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죽은 이후에는 신격화되어 학문을 관장하는 덴진
(天神, 천신) 으로 오늘날까지 숭배받으며 그를 모시는 신사를 덴만구(天満宮, 천만궁) 라 합니다.
헤이안시대 제일가는 천재로 학자가문 스가와라 가에서 태어나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재상급인 우대신
(右大臣 까지 올랐는데, 실각한 뒤 700년이 지나서야 겨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겐페이토키츠 4성
씨족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대신 자리에 올랐습니다. (700년간 일반인 신분이 대신이 된 적이 없다는?)
헤이안시대는 후지와라씨가 황실 외척 지위를 차지하고 권세를 휘두르던 때라 격이 낮은 귀족으로 우대신이
된 그는 후지와라 일족의 음해를 받았으며, 일본의 정치체제의 근간이었던 율령제를 유지하기 위해
개혁을 시도했는데 기득권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라 반발에 부딪혔고 쇼타이 변(昌泰の変) 으로 좌천 됩니다.
처음에 그를 발탁한 인물은 우다 덴노 (宇多天皇) 였는데.... 아들에게 양위해 태상황이 되고
나서도 미치자네의 배경이 되어주었지만.... 아들 다이고 덴노 (醍醐天皇) 는
미치자네를 시기하던 후지와라노 토키히라 (藤原時平) 를 신임해 미치자네를 멀리 했습니다.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토키히라가 참소해 다자이노곤노소치 (大宰権帥) 직으로 내쳐져
중앙정치에서 추방당해 유배당하다시피 한 그는 수도에서 먼 규슈로 좌천된후
한을 품고 903년에 죽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사서를 짓고 금욕하며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견당사 (遣唐使) 를 폐지시킨 인물인데.... 일본 조정은 수십차례 보냈던 관례대로 894년에
견당사를 보내려고 미치자네를 견당사로 선정하니, 당시 당의 국세가 쇠락하는 것을
보고 미치자네는 "이번에는 가지 맙시다." 라며 계획을 취소시켰고, 사실상 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못가 907년 당이 멸망하자 이를 계기로 그때까지 일본에서 만연하던
당풍(唐風 : 중국풍) 문화가 국풍 (國風 : 일본풍) 문화로 교체되어
일본 고유의 독자적인 문화를 꽃 피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일본 육국사 중에 일본삼대실록 (日本三代實錄) 을 편찬하는데 관여했는데, 미치자네가 지은
류취국사(類聚國史) 는 일본사뿐 아니라 한국사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니.... 발해를
언급하면서 " 주민은 말갈이 많고 토인(土人 고구려인) 이 적다." 라고 한 기록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수의 말갈인을 지배하는 왕조 국가 발해의 모습을 그리게 하는
주요 사료가 되었는데.... 다만 주현과 관역이 없다는 말도 같이 기록해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니 발해는 명백히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기 때문 입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무고한 정치의 희생양 정도로 역사에 남았겠으나 직후 일본에서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으니 지방에서는 대규모 역병과 각종 자연재해가 연달아
발생했는데 중앙 정계에서도 6년후 909년에 권세가인 후지와라노 토키히라가 요절합니다.
4년 뒤인 913년 토키히라와 결탁해 미치자네의 자리를 꿰찬 우대신 미나모토노 히카루가 사냥을 나갔다가
늪에 빠져 익사했으며, 923년에는 토키히라의 생질이자 사위인 황태자 야스아키라 친왕이 20세로 요절
했고 925년 야스아키라 친왕의 아들이자 토키히라의 외손자인 황태자 요시요리 왕이 만 3세로 요절합니다.
게다가 930년에는 헤이안 궁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덴노의 거처인 청량전 (세이료덴) 에 번개가 쳐
많은 신료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는 세이료덴 낙뢰 사건이 발생했으며 더욱 흉흉하게도
미치자네가 좌천된 후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던 후지와라노 키요츠라가 벼락을 맞고 즉사합니다.
공포감이 극에 달한 조정은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규슈로 추방하라고 명령한 칙서를
불태우고 그에게 우대신 관직을 추서하는 조치까지 취했지만.... 이후에도
흉흉한 일이 이어졌고 다이고 덴노는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쇠약해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계속해 일어난 흉사 때문에 이것이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원령이 일으킨 복수라는 공포가 귀족 사회에
밀려들었으니, 헤이안 시대 일본의 상류층에서는 유독 바케모노(요괴와 모노노케)를 두려워해서
음양사들의 점괘에 맞춰 방위가 안 좋으면 집을 옮겨다니기도 할 정도로 미신과 점복학이 유행했습니다.
미치자네가 죽고 괴이쩍은 일들이 벌어지자 궁에 벼락을 떨어트릴수 있는 뇌신 (雷神) 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황족들이 전멸하는 바람에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후손 대신에
동생인 후지와라다다히라가 일족의 주도권을 잡았으며....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살아남은
자손들도 언제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원혼에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미치자네의 분노를 풀어주기 위한 수단으로 미치자네의 손자 스가와라 후미토키(菅原文時) 를
문장박사로 임명했으며, 음양사로 유명한 아베노 세이메이의 스승이자 본인도 고명한
음양사였던 카모노 타다유키의 아들 요시시게 야스타네도 후미토키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사후 100년쯤 지나서는 스가와라 미치자네가 원한을 풀어서 더 이상
재앙을 내리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무렵부터는 원령이 아니라
학문의 신이자 뇌신으로 숭배되어 현재의 천신 (天神) 신앙이 되었다고 합니다.
스가와라 미치자네는 스토쿠 덴노, 타이라노 마사카도와 함께 일본 삼대 원령으로 꼽히지만 이후
학문의 신이 되었기 때문에 원령에서 제외됐는데, 신라의 왕자 천일창의 후손이라는
야사가 전해지니, 야사에 의하면 신라계 도래인의 후손이므로 한국과도 연관이 있는 인물이 됩니다.
일본에서는 그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기 때문에 입시철이 되면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신 신사는
분주해지니 마치 한국에서 대구 북쪽에 갓바위를 떠올리면 되는데.....
미치자네를 모신 신사의 주 수입원은 입시철에 팔리는 오마모리와 에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치자네를 모시는 신사 중 특히 후쿠오카에 있는 다자이후텐만구 (太宰府天滿宮)
와 교토에기타노텐만구(北野天満宮) 그리고 야마구치현
호후시에 있는 호후텐만구 (防府天満宮) 까지 합쳐서 3대 덴만구로 꼽힙니다.
다자이후 덴만구에는 매화나무가 매우 많은데 교토에서 좌천될 때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덕과 학문
을 흠모한 매화들이 날아온 것이라 토비우메 (飛梅) 라 부른다는데.... 스가와라 미치자네
가 죽었을때 그 원한과 억울함이 깊어서 운구하던 "소" 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신 다자이후 텐만구를 비롯해 그 외에 신사에 가보면 소 동상이 많은데
아픈 사람은 자신의 아픈 곳과 같은 소의 부위를 만지면 병이 낫고 머리나 뿔을 만지면 지혜롭게
된다고 하며... 또 센고쿠(戰國) 시대의 무장 간 미치나가의 간 가문은 미치자네의 후손을 자칭했습니다.
헤이안 시대의 무녀 타지히 아야코 (多治比文子) 는 스가와라 미치자네가 죽은지 39년 후인
942년에 스가와라의 영으로 부터 도성 오른쪽의 기타노에 신사를 조성
하라는 계시를 받았으나, 신사를 지을 힘이 없어 자기 거처에서 제를 올릴 뿐이었다고 합니다.
아야코는 947년 기타노로 옮겨갈수 있었고 아사히지(朝日寺) 승려인 사이산(最鎮) 이 조영에
나서 신사의 구색을 갖춘후 후지와라 가문의 도움을 받아 세를 확장했고 987년에는
이치조왕(천황) 이 칙사를 파견하여 국가의 안녕을 빌었으니..... 이때 부터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에게 '기타노텐만구텐진 (北野天満宮天神)' 이라는 칭호가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이윽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시는 덴만구는 1만 2천여 곳까지 늘어나 텐만구텐진은
일본인에게 매우 친숙한 신이 되었는데..... 에도 시대 이후
전국에 세워진 초급 교육 기관에서도 텐진을 기리는 것이 보편화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스가와라가 좋아하던 매화나무가 자라는데 매년 2월 25일에는 매화제를 열며 이밖에도
계절마다 다양한 제례 행사가 열리는데.... 기타노덴만구는 교토로
수학여행 온 학생들도 많이 찾는데, 역시 학문의 신을 모시는 중요한 신사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석조물들은 민간에서 덴만구에 기부한 것이며 석조물 사이 사이에 빨간 천을 두른 소 모양
조각이 있는 것도 볼수 있는데, 학업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물건들이며 경내
에도 소원을 적은 나무조각들이 다른 신사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빽빽히 매달려 있습니다.
1928년 (쇼와 3년) 덴만구 내의 다른 건물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들을 한 곳에 모으자는
뜻으로 건립된 보물전 (宝物殿) 에는 역대 일왕(천황) 과 유력자들이
봉납한 귀중한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으니 입구에서 입장료 3백엔을 별도로 받습니다.
보물전에 대표적인 유물은 한국의 삼국사기가 1145년에 편찬된데 비해 425년이나 더 빠른 720년
에 편찬된 역사서 “일본서기” 이고, 또 국보 “기타노텐진엔기 (北野天神縁起)”
원본 외에도 다수의 희귀한 고문서와 미술품, 공예품 및 도검을 전시하니.....
가토 기요마사가 봉납한, 뒷면에 일본 지도가 새겨진 거울 “일본지도경 (日本地図鏡)” 도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낙중 (洛中) 낙외 (洛外)의 경계, 수방을 위한 토루 '고토이' 를 구축했다
고 하는데, 일본은 수도 교토를 동서로 반분해 중국의 고도인 낙양(洛陽)과 장안(長安)
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그 '고토이' 의 일부가 남아있는 경내의 서쪽 일대는 사적
(史籍) 으로 지정되어 현재 약 350그루의 단풍을 가진 명소이니..... “모미지엔” 이 되어 있습니다.
또 전망소에서 바라보는 국보 본전과 단풍의 풍경은 절경이라는데.... 모미지엔은
2022년의 경우 10월29일(토) ~12월4일(일) 까지 공개됐으며 또한,
11월26일(토)에는 오차단 봉헌 봉고제가, 12월1일(목) 에는 헌차 축제가 열립니다.
또 11월 12일~12월 4일에는 야간 조명을 비추어 낮과는 다른 단풍을 만끽할 수 있으니350
그루의 단풍나무가 강에 걸친 주홍색의 가교와 어울어져, 사람들을 가을의 세계에
초대한답니다. 추천 뷰포인트로는 응교(鶯橋) 다리와 본전 전망소, 대무대, 정원 이니
신사에는 노랑색 은행나무가 많고 모미지원에 들어가면 빨강 단풍을 볼수 있다고 합니다.
해서 저 유명하다는 모미지엔에 들어가려고 하니 울 마눌이 그냥 가자고 결사적으로 말리는
데.... 독실한 크리스찬인 마눌은 일본의 신사를 우상숭배하는 곳으로 보는지라
마지못해 들어오긴 했지만 빨리 벗어나고 싶은 데다가 관람료도 1인당 천엔이니 비싸다는?
매화주 전국대회도 열린다는 모미지엔 정원을 보지 않으면 찐빵을 먹으면서 앙꼬인 팥을 먹지 않는 것이니
말이 안되는 것이지만, 마눌의 심기를 상하게 하면 남은 여행 일정 내내 불편할 것이라 꾹 참고 나옵니다.
교토는 특히나 서양인 관광객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니조성과 금각사에 료안지등이 선두를
다투니 여기 기타노텐만구는 저 3곳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서양인들이
보이는데.... 교토에 대한 서양인들의 애정을 알게해 주는 일화가 바로 태평양전쟁 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교토는 외곽에 군수공장이 많았던지라 원자폭탄 투하지 제 1순위였다고
하는데.... 정말 기적적으로 비켜갔으니 교토에 옛 건축물들이 살아남았습니다.
1945년 8월 6일 사이판 티니안에서 0시 30분에 원자폭탄을 실은 에놀라 게이호가 이륙합니다.
먼저 출발한 정찰기들로 부터 기상 정보를 수집한느데... 원자폭탄을 실은 비행기보다 먼저 출발해
7시간을 비행하여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모지코) 로 향한 3대의 비행기로 부터
해당 도시의 당일 아침의 기상상태를 보고받은 결과 날씨가 가장 좋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합니다.
혹시 일본이 원자폭탄 공격을 받은게 한국인 하고 무슨 관게가 있느냐고 새각할수도 있겠지만
이때 이후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사람 20만명 가까이 죽었는데, 그중에 3만명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원폭 투하는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남의 일이 아닌 것 이지요?
그 사흘 후에 고쿠라를 향해 출격한 B29 폭격기는 기상 상태와 연료 문제로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 되었으므로 고쿠라(모지코) 는 기상이 안좋았던
탓에 무사했는데.... 다음 후보지는 교토와 니가타, 요코하마니 이들도 운이 좋았나요?
도쿄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일왕(천황) 이 죽으면 이후 일본인들이 결사항전할 것이
염려되어 원폭 투하지에서 먼저 제외했는데..... 군수산업의 요충지이자
일본인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제 1 순위였던 교토가 제외된 것은 무슨 이유 일까요?
미국 전쟁부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이 교토 투하를 반대했기 때문이었으니..... "일본의 정신적 수도를
파괴하면 전후 민심 수습에 어려움을 겪을 것" 이라는 주장이었는데, 2차 대전후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예상되던 차에, 교토가 피격되면 일본인들이 소련편에 붙을까 염려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스팀슨 장관은 개인적으로는 1920년대 필리핀 총독 시절에 수차례 교토를 방문
했으니 "역사와 문화의 도시 교토의 향기" 에 취했다고 하며......
또 다른 참모부 장성은 과거 신혼 여행을 교토로 왔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토시에 대한 재래식 공습에는 별다른 제약이 없었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소이탄
폭격은 수시로 허가했으니..... 재래식 공습으로 오랜 역사 문화유산을
제외한 교토 일반 시가지와 공장, 이화학연구소 등의 여러 제반시설은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역사 도시이자 고도인 교토는 다른 대도시에 비해 일본의 정신적 수도인지라...
폭격 강도가 디른 도시들 보다는 실제로 약했던 것은 사실이고, 이러한 이유로 전후
새롭게 태어난 다른 도시들과 다르게 교토는 전근대 시기의 풍경을 참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