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6월,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난 알아요"로 난리가 나던 난 시절에 수도통합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나는 키 186cm. 몸무게 78Kg 다부진 몸매에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대한민국 육군이었고, 환상의 17사단, 꿈의 102연대, 파라다이스 2대대, 천당 7중대 완벽한 자대에ㅡ배치받아서 모두가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에겍 치명적인 신체의 결함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우리 집안의 내력인 치질이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12월에 입대해 추은 겨울에 훈련을 받으면서 시련은 시작되었다. 차가운 버덖에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고, 보병훈련의 꽃인 행군을 하면서 마침내 탈이 나고 말았다. 사정을 교관들에게 말해 보았지만, 훈련소 퇴소를 앞둔 시점이라 뾰족한 수가 없었다. 곧 자대를 배치받기에 나 혼자 몰래 고통을 삭여야 했다.
나는 그렇게 아픔을 안고 짧은 대기병 기간을 거쳐 해안경계부대에 배치 받았다. 중대 전입신고를 마치니 중대장님께서 훈시하셨다. "신병들, 우리 중대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각자 소대에 배치받아 훌륭히 임무를 수해아고 내륙에 복귀할 때까지 몸 건겅히 사고 없이 최선을 다할수 있도록 이상! 그리고 몸에 이상이 있거나 아픈 곳이 있다면 지그금 보고해라! " 나 포함 동기 세 명은 '없습니다!"를 복창했다. 아, 그때라도 보고를 했더라면 중대본부 상황실이나 행정병으로 있었을 것을, 돌아보면 아쉬운 순간이었다. 해안경계근무는 끝없는 철책선 따라 걷고 순찰하는 것이 임무였다. 근무가 꼬이는 날이면 하루 40Km이상 걷기도 했다. 나위 고통을 선임병이 알게 되고 소대장님이 알게 되어 때로는 상황근무도 세워주고, 몇 번 열외도 해주셨다. 하지만 한 명이 빠지면 2인 1조인 근무조가 어렵기 때뭉에 마냥 쉴 수도 없고 참고 근무를 해야만 했다.
군인들 치질의 특효약인 좌약으로 버티기 어려울 만큼 점점 증상이 심해져 내륙으로 복귀해서 수도통합병원에[서 검진을 받게 되었다. 웬만한 병은 사단 의무대에서 진료가 해결되지만, 중증 수술을 요하거나 외상환자, 응금환자가 있는 경우에 수도통합병원을 이용하였는데, 우리들은 그 병원을 "수통"이라 불렀다. 그곳에 가니, 군의관이 있었는데 그분은 소령 곅습장을 달고 있었다. "무엇 대문에 왔는가?" 이상한 자세로 상처 부위를 보여 주었다. "음.. 고약하네. 터졌다. 아물었다 반복하게 되면 보병한테는 아주 치명적이니까 우선 치루부터 수술하자고. 자대 가서 보고하면 진단서 작성해 줄거니깐. 당장 내일이라도 다시 올 수 있도록! 알겠나!"
하지만 군대였기에 내 마음대로 입원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이등병이었기에 선임들의 눈치를 보느라 더더욱 힘들었다.여기에 더 걱정되는 것은 수통에서 치료하고 돌아온 3소대 김 병장이 자대에서 후임들에게 대접도 못받고 선임들이나 동기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김 병장은 제대를 몇 달 남기고 이렇게 말했다. "난 지독한 디스크 환자였는데 이등병 때 수통에 입원해서 병장 달고 돌아오니, 이건 자대가 아니고 지옥이더라, 힘들게 입대해서 병원 갔다가 오니 나를 무슨 유령 취급하더라고, 차라리 의병제대나 할걸" 하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나는 힘든 이등병 생활을 마치고 일병을 달고 6월이 되자 입원하였다. 꿈같은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병원에서는 자대의 계급이 소용없었다. 오로지 약밥만 있을 뿐이었다. 17사단에서는 3명이 같이 수통에 입원했는데 한 명은 상병, 난 일병, 다른 한 명도 일병이었는데 우리 셋은 동기가 되었다. 동기도 있고 누워서 쉬고, 입원하면 편안한 군 생활일 줄 알았는데, 첫날부터 나위 상상은 무참히 깨어져 버렸다. 일반외과 병실인데 칸막이도 없는 넓은 병실에 침대가 가지런히 잇었고, 족히 100명도 넘는 환자들이 같은 병실을 쓰고 있었다. 병실 입구에 간호사실이 있었고, 앞에 있는 침대는 중환자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두편의 침대들은 병의 위중에 따라 배열되어 있었다. 나의 질병은 말 그대로 병 취급도 못 받았다. 경환자로 분류되어 주로 맹장, 치질, 치루, 치열, 항문 질환자는 간호실 기준으로 중간쯤에서 뒤쪽에 있는 침대로 배정받았다.
그때 수통은 건물 안이 거의 야전병원 개념이었다. 병실도 군대인지라 침대는 항상 일렬로 정렬되어 있고. 침구세트은 항상 각이 잡혀 있엇다. 자대에서도 내무반장이 있듯 병원에서도 내무반장이 존재했는데, 그는 특전사 병장 출신의 고 병장이었다. 그 밑에 "공급장"이라고 불리는 보급계가 잇었고, 간호사실에 도움을 주는 일반병들이 병원 내에서는 약밥 선임 실세들이었다. 그리고 통합병원인지라 특전사 출신, 수방사 출신, 의장대, 헌병, 수도군단 하사관, 장교, 중환자, 경환자, 그리고 각 군의 응급환자는 다 모여 있었는데, 여기도 어김없이 신임환자 신고식이 있었다. 아픈 환자가 점호시간에 병실이 따나가도록 목소리를 높혀 전입신고를 했다. 밤에 편안히 잘 줄 알았는데 점호 다 하고, 10시 취침해서 기상은 칼같이 오전 6시. 일반 부대와 같앗고 경환자들은 불침번 근무도 잇었다. 물론 환자복에 손전등을 들고 근무를 서지만 주 임무는 인원 현황 파악 그리고 중환자 수액 점검, 간단한 대소변 받기 등 간병인 역할도 했다.
며칠 동안 병원 분위기도 익히고 약밥이 익숙해질 무렵, 수술 날이 정해졌다. 수술하는 날 나 혼자 불려가서 베드에 누웠다. 중요한 부위만 솜으로 가리고 환자복도 벗었다. 수술실 간호 장교들이 날 기다렸다. 대위 계급장이 눈에 들어온다. 난 더욱 위축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핮니 나에게 농담을 던졌다. "구 일병, 등짝이 굉장히 넓네. 이야, 화투치면 좋겠다. "긴장을 풀려고 던진 농담이었지만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반신을 마취했다. 수술 자세는 엎드린 개구리 자세였다. 하반신이 찌릿찌릿하였고, 수술 소리는 나위 귈르 자극했다. 수술이 끝나고 며칠 동안 누워지냈다. 불침번과 청소를 면제받앗다. 점호까지도. 수통에는 고위 장성들이 자주 오갔다. 예하 부대에서 사고가 나서 입실하면 위문하러 들렀다. 별들이 지나가도 누워 있어 좋았다. 하지만 좋은 것도 여기까지였다.
수도통합병원에는 간호사관하교 생도들이 방학을 이용해서 실습한다. 수술이 끝나고 상처 부위가 아물 무렵 오전에 군의관 회진이 있었다. 간호장교들과 군의관, 일반외과 과장 그리고 여생도들리 같이 회진을 돈다. 여생도들과는 나이가 비슷한 또래였기에, 농담도 잘하고, 서로 존댓말을 하면서 지내고, 때론 맛있는 과자를 건네기도 하며 지냈다. 하지만 서로 민망한 일이 터지고 알았다. 군의관이 앞에 지나가면서 내 침대를 건드리면 관등성명과 병명을 말해야 하는데 "일병 구본구! "피스톨라입니다!(치질의의학 명칭)" 하면, "그래, 한 번 보자" 그럼 자동으로 얼굴을 침대에 박고, 하늘로 엉덩이를 치켜들어 수술 부위를 보여야 했다.
"경과 괜찮은데...," 나는 보았다. 다리 사이로 머리를 박고, 눈은 감고 있었지만, 모두 나의 중요한 부위를, 누구도 볼 수 없은 그곳을 보고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칸막이도 없고 모두 나를 보고 있고, 간호 장교들과 여생도들도, 그 순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고 시간이 멈추었다. 생각만 해도 우습고 기묘한 장면이라. 괜히 부끄러워 난 그때 이후로 생도들을 피해 다녔고 그들도 나를 피해 다녔다. 이렇게 회진할 때마다 이 상황은 몇 번 반복됐고, 여생도들은 더 이상 내 앞에 오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마웠다. 거기서 여름을 다 보내고, 초가을에 전출을 명받았다. 수도통합병원에서 17사단 102연대로 7중대로 전입신고를 했다. 자대에 가니 나의 후임병이 4명이나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처음엔 나를 못 알아봤는지 그들이 나를 무시했다. 선임병들이 나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주었다.
"너희는 죽었어! 우리 막내가 수통 갔다 이제 오는대 주먹은 무지막지하고 키도 크고 얼굴도 크다. 그가 돌아온단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씩 웃으며 막사 뒤로 돌아갔다. "조용히 내 밑으로 집합! 동작이 굼뜨다! 느릿느릿하지?" 내가 한 인상 하는지라, 인상을 쓰고 "어쭈? 집합! " 하니 이등병들이 뛰어온다. 인상 덕분에 병원 다녀오고 선임 노릇 잘했다. 꿈같은 군 시절, 아무리 생각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 시절, 색다른 경험을 남ㅎ이 하고 제대했다. 그런데 이제 큰 아들이 군대에 간다고 한다. 아들이 벌써 군대 간다니, 그저 잘 다녀오길 빈다.
구본구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첫댓글 나하고 11년차이나는 군대후배이군요 나도 17사단 102연대 2대대 7중대근무했네요 처음에는 2소대에서
우리동기 3명 1소대에는 2명 3소대에는1명 6명이동기였답니다 19개월말년에 분대장교육받고 1소대로가서
군생활했네요 내가근무할당시에는 2주에한번식 신병들이교육받았는데 거의다 전라도병역이들어오더군요
1년에한번정도만 각지역병들이 들어오고요 그래서인지 전라도병역한테 많이맞았네요
이 내용은 시골땅님 만 제일 좋아하는 내용같습니다.^^^ 시골땅님이 17사단에서 근무했으니까요

안전사고의 위험이 곳곳에 존재하니까요.
군 복무 중이라도 원치않는 관계로 입실을 하는경우도 생기지요.
물론 질병도 발생할 것이고 각
저도 태권도 대련중 허허벅지를 차여 찰고상을 입엇는데,
상태가 허벅지 속에서 살이 썩어 나오는 상태까지 이르렀죠.
사단의무대에서 수술 받았는데,
수술받기 전 마취주사 후 부작용이 생겨 그만 수술실 세멘트 바닥에 고꾸라져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부대에는 약이 없어 시내 나가 "가나마이신"이라는 역을 구입해
의무대에서 주기적으로 맞으며
보름간 입원했었답니다. 죽는줄 알았죠
17사분들이시군요~~~
저는 100연대출신 입니다
87년 전역이구요
반갑습니다~~~
hhgun64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청춘방 처음 방문하시는듯 하는데요. 잘 오셨습니다,
위 시골땅님이 흔히 말하는 오리지널 17사단 에서 근무하셨답니다.
저는 가평 수기사에서 근무했구요.
좋은 추억과 재미있었던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약간 습기가 있는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승리하는 좋은 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맹호
100년대에는 군기가 좀심햇던것같았는데 지금은 많이좋아져겠지요
내가군생할하던시절 사고치면 분대장교육많이받았다고했는데 내가
102연대에는 그냥 상병달면분대장교육받고요 그러다보니 나도 19개월차에
분대장교육받았네요 나보다한달보름쫄다구는 화기소대라서 상병달고바로 분대장교육받고요
그래서나보다 고참하사가되었지요 우리동기한명도 15개월에달고요 나는분대장교육받을때
중대에서 고등학교나온놈이없다해서 2주선배2명 우리동기2명 4명이분대장교육받았네요
그것도 한겨울에12월에받았네요 좋은 주말보내세요
누구나 자기가 처한 상황이 제일 힘들었다 말하지요
저는 73년 11월에 논산 훈련소에가서 하사관학교로 차출되어
여산 제2하사관학교로 가서
보병교육 12주 광주 포병학교에가서 포병교육 26주 이렇게 받고 6월말에 위로휴가 일주일 하고
전방 9사단에 배치 받았네요
꿈만같던 시절 이지요
@구슬샘 안녕하세요. 구슬생님! 맹호
새해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기대합니다.
저보다 몇개월 빨리 입대하셨군요.
수용연대에서 20일 머물다 구보로 여산2하교에 입교했습니다.
같은 절차로 대전 병참(현재 군수학교)학교로 전출. 교육받고 306보충대 경유 수기사로 왔답니다.자주 만나요. 맹호
ㅎㅎ 병 하나 잘 고치고 나오셨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