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古文)을 음식에 비유하면 육경과 《좌전》, 《사기》는 좋은 양식이고, 이단의 여러 유파(流派)는 술이며, 〈이소〉, 《문선》의 각 체(體)는 입술을 적시는 맛있는 음식이고, 당송(唐宋)의 여러 문인(文人)들은 제기(祭器)에 올리는 진미(珍味)이니, 이 점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지을 적에는 이치에 근거하여 말을 지어내야 오래 전할 수 있다. 허구(虛構)에 의지하여 재주를 부리면 끝내 농담이 된다. 뜻을 담음은 깊지 않으면 안 되고, 논의를 세움은 바르지 않으면 안 되며, 전고(傳稿)를 인용함은 적절하지 않으면 안 되고, 글자를 놓음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결되는 부분은 흔적이 없어야 하며, 시작하고 맺는 부분은 관건(關鍵)을 얻어야 하니, 이것이 옛 사람의 글 짓는 법이다. 한유와 유종원 이상은 말할 것도 없고, 여릉(廬陵.구양수)이 요체를 얻고 미산(眉山.소동파)이 신묘하게 깨달은 것도 이 여섯 가지를 벗어나지 않으니, 요컨대 화경(化境.자연스럽고 정묘한 최고의 경지)이 존재한다.
명나라의 여러 군자들 또한 훌륭하지 않은가. 북지(北地.이몽양)는 예스럽고, 신양(信陽.하경명)은 아정하며, 설루(雪樓.이반룡)는 고원하고, 함중(函中.왕도곤)은 심오하며, 엄원(弇園.왕세정)은 거대하다. 그들의 뜻은 모두 당송을 뛰어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오로지 고문의 말을 사용하여 지금의 일을 전하고자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하나의 체격(體格)이다. 언뜻 보면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지만, 천천히 궁구하면 도리어 익숙한 음식을 늘어놓은 듯하여 물리기 쉽다. 다섯 사람의 글을 당송 제가(諸家)의 글과 함께 읽는다면 안목을 갖춘 자는 필시 분변(分辨)할 수 있을 것이다.
초학자가 옛사람의 글을 보다가 간혹 기이하고 오묘하거나 호방(豪放)하고 방종한 부분이 있으면 번번이 경도되어 모방하고는 겨우 한 군데 비슷한 부분을 얻으면 곧 만족하니, 우습고 비루하다. 본말을 살피고 경중을 헤아리되 속히 닮으려 하지도 말고 등급을 뛰어넘으려 하지도 말아야 한다. 고문을 보면서 자구(字句)에 얽매이지 말고, 서사(敍事)와 논사(論事)가 완만하고 촉급하며 상세하고 간략한 곳, 정신과 기맥이 동탕치고 흩어지는 곳을 탐구하여 살갗을 버리고 정수(精粹)를 취하며 근원을 모았다가 지류로 흘려보내야 그 울타리에 들어가 마루와 방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역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註: 汝萬은 신익성의 동생 신익전의 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