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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
실제 사건인 “1923년,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의 인물을 모티브로 그려낸 작품으로 일제 강점기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이 일제의 주요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와 펼친 활약상을 그린 영화
감독 :
김지운(金知雲), 1964년 7월 6일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 중퇴
1998년 <조용한 가족 >으로 데뷔/ 2000년 <반칙왕>/ 2003년 <장화 홍련>/ 2005년 <달콤한 인생>/ 2008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010년 <악마를 보았다>/ 2013년 <라스트 스탠드>
중요배우 :
김우진(공유), 연계순(한지민), 조회령(신성록), 정채선(이병헌), 이정출(송강호), 오남원(이설구),
하시모토(엄태구), 하일수(허성태)
주요 인물모티브 :
김우진-김시현, 이정출-황옥, 정채선-김원봉, 연계순-현계옥
영화 내용 :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일본경찰 이정출은 무장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의 뒤를 추적할 목적으로 의열단의 리더 김우진에게 접근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정체와 의도를 알면서도 속내를 감춘 채 가까워진다. 누가 밀정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서로를 이용하려는 암투 속에서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할 의열단폭탄은 국경을 넘지만 정보가 새어나가 의열단 동지들은 희생이 되고 이정출과 김우진은 체포되어 수감된다. 이정출은 재판과정에서 일본의 밀정이라는 사실이 인정되어 풀려나지만, 숨겨두었던 폭탄을 경성 경찰부 파티석상에 터뜨리는 140여분의 첩보영화다.
황옥경부폭탄사건(黃鈺警部事件) :
1923년 1월 12일 밤 의열단원 김상옥이 서울로 잠입하여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그날 밤부터 삼판동(三坂洞 지금의 후암동) 매부의 집에 은신하며 제국의회에 참여하기 위해 떠나는 조선총독을 사살하기 위해 서울역 주위를 배회하다가 일본 경찰에 포위되어 총격전을 전개한다. 형사부장 마에무라(前村), 우메다(梅田) 경부 등을 저격한 뒤 서울 종로구 효제동 이혜수 동지의 자택에 은신한다. 그러나 1월 22일 은신처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3시간 동안 일본경찰 400여 명(1,000여 명이라는 설도 있음)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다가 마지막 남은 총탄으로 자결, 순국하였다(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이후 의열단은 3,1혁명 4주년을 맞이하여 침체된 대일항전 의욕을 되살리고자 조선 총독부를 비롯한 일제의 거점 시설을 파괴할 2차 거사를 계획한다. 대 암살 파괴계획에 의해 대량의 폭탄 수급이 필요했지만 국내에서는 파괴력이 뛰어난 폭탄을 제조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비밀 아지트를 설치하고 헝가리인 ‘마이잘 라브렌다’를 기술자로 초빙하여 암살용, 파괴용, 방화용, 폭탄 등을 제조했다.
제조한 고성능 폭탄,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 및 조선총독부 소속 각 관공서에 보내는 경고장 3천매 등이 3월 초 청진에 운반되어 김원봉에게 전해졌다. 청진에서 김원봉으로부터 폭탄과 유인물을 전달받은 김시현과 황옥은 국내 반입을 시도한다. 이때 황옥은 김상옥사건 등 때문에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가 의열단 정체를 밝히기 위해 중국으로 파견한 밀정이다.
3월 12일 김시현, 황옥, 김재진(金在震), 권동산(權東山) 등 4명이 폭탄과 유인물 일부를 가지고 텐진에서 서울로 출발하고, 그 외는 김시현이 고려공산당 소속으로 황옥이 추천하여 안동현 조선일보 지국장에 오른 홍종우(洪鍾祐)에게 맡겼다. 일행들은 홍정우 집에서 위장파티를 한 후 폭탄과 문서를 기생들이 타고 왔던 인력거 속에 숨겨 검문을 피하여 신의주에 무사히 도착하여 조동근(趙東根)의 집으로 옮겼다.
그러나 김재진이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과 김덕기(金悳基)에게 매수되어 일본경찰에게 밀고함으로써 홍종우, 백영무(白英武), 조동근(趙東根), 조영천(趙英千) 등 4명이 체포되고 폭탄과 유인물은 압수되었다. 서울에서는 조황(趙晃), 김사용(金思容)의 집으로 폭탄이 옮겨지고, 조황이 친구였던 김두형에게 무기를 보관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경기도 경찰부에 밀고하여 관련자들이 줄줄이 체포되었다. 김두형은 처음에는 독립운동가 이었지만 일제에 포섭된 밀정이었다. 이 때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대 소형 폭탄 36개와 권총 5정, 실탄 150발 기폭장치 6개가 압수당했다.(※1923년 4월 12일 동아일보 기사에 미 체포된 김원봉을 포함 관련자가 19명)
김시현은 황옥 등이 체포 된지 모르고 있다가 계획이 실패한 것을 알아차리고 오종섭(吳宗燮) 집에 숨었다가 오종섭의 밀고로 체포되었다(오종섭, 김두형은 후에 반민특위에 잡힌다). 김시현과 황옥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의열단의 2차 암살파괴 작전은 실패했지만 당시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폭탄 밀반입 혐의로 황옥을 체포한 일본은 그가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라는 사실에 혼란에 빠졌다.
※김두형은 권상호(權相鎬)가 본명으로 3.1만세사건 이후 일제에 아부협력하며 30여 년 간 밀정을 했던 자이다. 해방 후 변명(變名)을 권한, 김두형 등 7개를 사용하여 정체를 감추고 애국자로 돌변하여 민족정기단 충남부단장직에 취임하는 동시에 유성에서 영천여관을 경영하였다.
유석현(劉錫鉉)은 1982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에서 당시 사건 결과에 대해 “실패했지요. 그러나 큰 성공이었습니다. 황옥이 경부라는 가면을 쓰고 의열단에 가담을 해서 동포들의 사기를 크게 올린 것도 그렇고, 우리가 일본 총독을 죽이려한다는 것을 만방에 알림으로써 일본의 조선 지배가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도 의미가 컸습니다.” 라고 회고했다 한다.
황옥은 ‘의열단의 2차 거사를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심은 밀정이었다.’는 설과, ‘일본 경찰을 가장한 의열단원이었다.’는 설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실제 정체와 의도가 밝혀지지 않은 채 역사 속 의문으로 남아 있는 인물이다.
의열단(義烈團) :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고 한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지린(吉林省)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이 중심이 되어 김대지(金大池), 황상규(黃尙圭)를 고문으로 단장인 김원봉(金元鳳)을 포함 윤세주(尹世胄), 이성우(李成宇), 곽경(郭敬),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鐘岩),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신철휴(申喆休),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 권준(權俊) 13명이 일본고관 암살, 관공서 폭파 활동을 위해 조직한 항일비밀결사(抗日秘密結社) 무력독립운동 단체다. 후일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김창숙(金昌淑), 신채호 등이 실질상의 고문 역할을 했다.
‘공약 10조’, ‘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여 항상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오늘을 마지막으로 살았다. 1920년대에 활발한 활동하다 1925년 사실상 종결되었다. 2010년 기밀 해제된 영국비밀문서에 의하면, 단원의 수가 2,000여명에 달했고 최초 13명은 단 한명도 변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약 10조는 ①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의열단의 의거활동으로는 1921년 김익상 의사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고 상해로 귀환한 사건/ 1922년 상해에서 영, 미, 중국인 사상자를 내고 실패한 일본 육군대장 타나카기이치 암살시도 사건/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밀양·진영폭탄반입사건/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동, 효제동 의거 및 제2차 암살파괴계획/ 도쿄(東京) 니주바시(二重橋) 폭탄투척 사건/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이다.
김시현(金始顯 1883~1966) 안동 출생,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화(九和),
안동에 있는 학가산 오른쪽에서 태어나 호를 학우(鶴右)라고 했는데, 후에 하구(何求)로 바뀌었다. 독립운동을 하며 감옥을 밥 먹듯이 드나드니 담당검사가 얼굴을 익히게 되었는데, 검사가 “김시현 당신은 그 정도 했으면 됐지, 도대체 무엇을 구하려는가, 차라리 학우가 아니라 하구가 좋겠다.” 라고 빈정대어, “그래. 그럼 오늘부터 내 이름은 하구다!” 라고 하며 호를 바꿨다고 한다.
독립운동으로 해방 전에 16년, 해방 후에 8년, 무려 24년 간 수감생활을 했고 심지어 해방된 조국에서도 독립운동가가 감옥에 갔다.
첫째 부인 김오월 여사는 남편이 독립 운동하러 떠난 후 고향 안동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며 딸을 낳았으나 일찍 죽어 혼자 살다 해방 전에 사망했다. 둘째 부인 권애라 여사는 이화학당 출신으로 이국 땅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중 1921년 모스크바에서 김시현을 만나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고, 아들과 함께 국내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권여사도 본부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 한학을 공부했고, 1898년(16세)에 서울 종교의숙에 입학, 1902년에 졸업하고 경기도 화성 근처에 숙부 소유의 농장을 관리하며 개인 장사를 하였다, 이때 독립운동 하던 인물들과 깊은 교류를 하였다.
※ 종교의숙(중교의숙) : 1896년 민영기(閔泳綺)가 외국어, 특히 일본어·영어 및 한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서울에 설립한 근대교육기관(1906년 폐교)
1911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했다. 1918년(35세)에 조선으로 돌아와 예천에서 인쇄업을 하기도 했고 안동김씨 종중재산을 처분해서 사업에 투자하기도 했는데, 이 때 대부분의 돈은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항일 투쟁에 몸을 담기 시작한 계기는 1919년 3.1운동이었다. 고향 안동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상주 헌병대에 감금되었고, 이후 평생 조국독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되었다.
1919년 7월 만주 길림으로 망명하여 김좌진(金佐鎭), 황상규(黃尙奎),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김좌진의 대한독립군정서에서 간부 활동을 하며 김원봉의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2월 첫 임무는 길림에서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동지규합을 하는 것이었다. 1920년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배후로 그 해 9월 대구에서 체포되어 1년 간 대구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출소 후 상해로 건너갔다.
이 때 상해 임시정부는 모스크바 대표단 파견과 레닌 자금사용문제로 이동휘(李東輝),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그룹과 안병찬(安秉瓚), 조완구(趙琬九), 신채호(申采浩), 김두봉(金枓奉), 등의 이르크추크파 고려공산당이 갈등을 빚어 대립을 하고 있었다. 안병찬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한 후 김지섭(金祉燮)과 함께 행동했다. 1922년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등과 같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혁명단체대표대회(1922년 1월 21일~2월 2일)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하지만 일본재판관이 김시현에게 공산주의자냐고 물었을 때 “미친 놈아!” 라고 했다고 한 기록을 보면 공산주의와는 관련이 없던 것 같다. 이 때 여비 50원은 황옥이 마련해 주었다. 훗날 김시현, 황옥재판에서 황옥은 이 돈에 대해 “나의 상사 시라카미 경찰부장에게 내가 직접 김시현에게 여비주자고 건의했고 이것은 김시현을 이용하여 고려공산당의 내정과 극동인민대표회의 내용을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고 진술했다. 이 증언만 보면 황옥은 밀정이다.
1923년 의열단의 밀령으로 황옥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일제 식민통치기관의 파괴, 일제요인의 암살 등을 계획하고 거사하려다가 붙잡혀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을 하고 1923년 12월 10일부터 단식을 시도했으나, “네가 여전히 절식할 것 같으면 나는 오늘밤 집에 가서 가슴에 칼을 뽑고 죽겠다.” 는 부친의 말을 듣고 단식을 포기했다. 1929년 5년 8개월 만에 출감한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길림에서 독립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10월 만주사변이 일어나 더 이상 만주활동이 어렵게 되었고 천진(天津)에서 김규식을 만나 김원봉이 군사간부학교를 연다는 것을 알게 되어 김원봉과 재결합하였다. 1932년 남경에서 의열단을 주축으로 하는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여 생도모집에 앞장서 군사학교로 끌어들인 1기생이 고향 후배인 시인 이육사(李陸史)이다.
의열단 북경책임자로 비밀지하활동을 통해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국민당 정부와 연계하여 활동하다 1934년 같은 군사간부학교 동기이자 의열단 중앙집행위원 중 하나였던 ‘한사평’이 밀정인 것을 눈치를 채고 처단했다. 이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고 1935년 2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5년형 선고받고 나가사키(長崎)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한사평’은 나중에 일본 비밀문서에 밀정이라고 적혀있었다.
당시 일제 판사의 심문과정에서 판사가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면서 친일적으로 협조를 강요했는데 김시현은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우리조선동포는 극히 소수인 친일 주구배를 제외하고는 일본국가에 반감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물론 오늘이라도 석방되었으면 싶다. 그러나 그것은 나가서 옳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욕망은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든 완전 독립의 달성이냐 그렇지 않고 그 달성을 위한 투쟁이냐 하는 것뿐이다. 그 밖엔 누구와의 타협도 반가워하지 않고 중형이나 그이상의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라고 말했다.
이 때 검사가 너무 강하게 심문해서 대답하지 않으려고 혀를 깨물어 혀가 한 움큼 날아가 해방 후 국회의원 할 때 연설시 발음이 잘 안되어 많은 사람들이 말을 잘 못 알아들었다 한다.
1939년 9월 8일 나가사키 형무소 출옥 후 또 다시 북경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42년 북경의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잡혀 투옥되었다. 1944년까지 동북 만주지방에서 활약하는 독립운동 단체들을 위해서 군자금 모금, 동지규합 등에 전력하다, 1945년 봄 북경에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이 되어 석방이 되었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고려동지회 회장, 전보통신사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여 고문으로 있다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유지태를 시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이승만 살인교사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1960년 4·19혁명으로 석방되었다. 같은 해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5·16 군사정변 뒤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황옥(黃鈺, 黃晩東 고종 24년,1887 ~ ?) 경북 문경 출생
경기도 경찰부에서 경부로 근무하던 중 의열단의 단원인 김시현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의한 뒤, 1920년부터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3년 ‘황옥경부사건’으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4년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5년 7개월로 감형된 뒤에 2년 복역 중 장결핵(腸結核)과 폐렴으로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25년 12월 가출옥하였다. 3년이 지나 집행 정지가 취소되어 1928년 5월 재수감되었다가 1929년 2월 다시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에 황옥은 독립 운동가들과 만나 교류했고, 반민특위 김태석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해서 황옥의 직속상관이었던 김태석의 악질 친일행동을 진술했다. 김태석이 살려면 황옥도 ‘밀정이었다.’고 했을 텐데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이후 황옥은 1950년 제 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국민당소속으로 파주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으며, 6,25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는 알 수 없다.
황옥은 2남 2녀를 슬하에 두었는데 큰아들 황이령은 황정하를 낳았다. 황정하는 전두환 군부시절 1983년 11월 16일 서울대 도시공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민주화투쟁을 하다가 도서관 5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원래는 서울대 치대에 합격했는데 색약으로 합격이 취소되어 공대로 다시 입학했다. 현재 중앙도서관 앞에 추모비가 있다.
황옥이 처음 김시현을 만났을 때 김시현이 “일제 치하에서 경찰할 게 아니라 독립운동을 해야 할 거 아니야?” 하고 포섭했다고 한다. 황옥의 도움으로 독립 운동가들이 여러 번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김시현이 1922년 12월 김지섭, 윤병구(尹炳球), 유석현과 함께 조선총독부 폭파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등을 계획하고 그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총독부 판사이며 부호인 ‘백윤화(白允和),’에게 독립자금을 요구하다가 실패하고 경찰에 추격을 받다 중국으로 건너가는데 김시현의 탈출을 도운 사람이 황옥이다. 백윤화는 의열단이 “경고문을 보여주며 5만원을 내놔라.” 고 요구했는데, “120원밖에 없으니 며칠 뒤에 오면 2천원 주겠다.” 고 약속했다고 한다. 며칠 뒤 윤병구, 유석현이 다시 백윤화 집에 찾아갔다가 잠복한 경찰에 의해 윤병구는 체포되고, 유석현은 탈출해 황옥 집에 몸을 숨겼다가 중국으로 건너가는데 이 때도 황옥이 대피시켜줬다고 한다.
황옥은 상해에서 열리고 있던 국민대표회의를 탐문하고 종로경찰서 김상옥 폭파사건 정보를 수집한다는 핑계로 중국에 갔다. 이 때 황옥이 “독립운동가 밀정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고 하며 유석현을 중국에 데리고 갔다. 중국으로 건너간 황옥은 김시현의 소개로 김원봉을 프랑스 쪽 중국 여관에서 만났는데, 김원봉이 황옥과 몇 마디 나눠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의열단 가입 서명을 받았다.
황옥은 ‘황옥경부폭탄사건’ 당시 재판정 최후진술에서 유석현이 황옥을 독립운동가라고 증언했지만, 자신이 밀정이라고 고백했다.
“천진에 출장 갔다가 경찰부로 돌아와 과장들에게 책망을 당하고 아무도 나의 심사를 알아주지 못함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까지 하려고 했소. 그러나 이번사건을 교묘히 운영하여 대대적으로 검거를 행하는 동시에 나의 수완을 보이면 책망하는 과장, 부장, 또는 경무국장까지도 나를 칭찬하고 경시까지 승급시켜 주리라 믿었소, 나는 굳은 결심으로 사실을 말하지 않고 안동현에 있는 폭탄이 경성까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소. 그런데 결국은 경찰부에서 모든 것을 탐지하고 안동현에 있는 폭탄까지 압수해서 오늘과 같이 의열단을 이용하려던 내가 공범자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오.”
재판 전 조사 때 검사가 의열단과 김원봉에 대해서 물었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진술했다 한다. 김원봉 만나서 입당원서까지 쓴 사람이 재판에 가서는 밀정이다 했다,
당시 재판정에서 재판관과 황옥의 문답 내용이다.
‘상관이 물어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일이 위험한 상황이면 말했겠지만 경성에 온 폭탄은 모두 내 손으로 들어왔으므로 상해에서 실행단원이 오면 그때 모두 잡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오”
‘이번일로 피고의 신변이 의심스럽게 된 것은 언제인가?’
“13일이오.”
‘13일부터 그랬으면 그때부터 검거를 해서 의심을 푸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일부 검거로는 의심을 풀 수 없었기 때문에 전부 검거해서 공을 세우려고 했소.”
‘피고가 잡히기 전에 왜 미리 전말을 알리지 않았는가?’
“마지막까지 성공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이렇게 계속 본인이 밀정이라고 이야기했다.
본인이 밀정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김시현과 같이 10년을 선고 받은 이유
1. 황옥은 포탄운반에 적극 협조했다.
2. 그들과 행동을 함께하면서 서울에 도착한 후 경찰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3. 이경위에게 ‘조선총독부소속각관공사에게’라는 살포용 문서를 직접 전달해서 시행하게 했다.
4. 이번 사건으로 경찰부에 자기가 검거될 듯 하니 중요 범죄인을 도주하게 하려 했다.
이 사건으로 함께 체포된 의열단원 유지태는 본인의 최후진술에서 황옥에 대해 “그동안 나는 황옥을 진정한 동지로 알고 경찰서에서 수없는 고초를 당하면서도 황옥을 보호하고 두둔했으나 사실을 알고 보니 분하기 짝이 없소. 나는 강도가 아니요, 오로지 조선을 위하여 일편단심으로 일했을 뿐이요.”라고 진술했다.
김시현은 “ 나는 황옥 덕택으로 체포를 면할 수 있었고 또 동지들도 그로 말미암아 크게 도움을 받았음으로 황옥이 동지가운데 한사람임은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다”라고 증언했다.
의열단은 사건이 터지고 이번거사는 황옥의 간계로 발각된 것이므로 만일 그가 방면되어 나올지라도 엄중히 처벌할 것을 주장 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황옥은 경기도 고등과 경부이나 과거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 불행이 관원에 체포된 애련한 자이다.” 라고 진술 했다.
황옥은 마지막 재판에서 “나는 경찰관리로서 임무 완료하기 위해 노력했고 성공하면 경시까지 시켜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라고 진술했다는 데, 조선인으로서 당시 경시까지 올라간 사람은 10명도 안됐다고 한다.
황옥의 아내는 황옥이 체포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사흘에 걸쳐 야밤에 알 수 없는 종이뭉치를 태웠다고 한다. 그 서류는 독립운동에 관련된 서류 아닐까? 밀정이었으면 굳이 뭔가를 태울 필요가 없기에 독립운동 관련된 문서일 확률이 높다고 추측된다.
김원봉(金元鳳 1898 ~ 1958) 경남 밀양 출생, 호는 약산(若山)
경성 중앙중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난징(南京)의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하였고, 그 뒤 만주로 건너가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나 자퇴하였다. 1919년 12월 의열단을 결성한 주도적 인물이며 단장이었다. 국내의 일제 수탈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무장투쟁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 현상금 100만원(현재 금액으로 200억 이상)이 걸린 일본 경찰의 공포의 대상이면서 최고의 목표물이었지만, 독립군에게는 해방의 상징이자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1925년 중국 국민당 정부가 설립한 광저우 황포군관학교를 4기로 졸업하고, 국부군 장교로 임관, 그가 이끌던 의열단원들도 중국 국민혁명에도 가담하였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중국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냈다. 해방되는 시점까지 일본경찰에 잡히지 않고 8·15 광복 후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엄청난 수모를 겪고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 국가검열상, 1952년 5월 노동상, 1956년 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김일성 비판을 제기한 연안파 제거작업 때 장졔스의 스파이 혐의를 받아 숙청된 비운의 회색분자 독립 운동가이다. 1979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당시까지의 한국학 연구를 집대성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독립운동가, 정치가’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현계옥(玄桂玉 1897 ~ ?)
대구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17세에 기생이 되었다. 풍류가무와 한문에 조예가 깊었고 대구에서 <운수 좋은 날>을 쓴 현진건의 사촌 형이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현정건(玄鼎建)의 연인으로 유명하다. 19세에 그를 따라 경성의 한남권번으로 옮겨왔다. 21세가 되던 1919년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떠난 현정건을 찾아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한다. 현정건으로부터 영어를 배우고 김원봉으로부터 폭탄제조법과 사격술을 배워 만주와 상하이를 오가며 비밀공작활동을 한다. 30세 때 현정건이 상하이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3년 형을 받고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병사하자 시베리아로 망명한 이후 소식이 끊겼다.
일제강점기와 군사통치시절 그리고 현 시대에도 이 시대의 지배세력에 합류하고 권력을 향해 충성하며 여기에서 얻어지는 부가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이들을 부러워하고 이들의 행동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이렇게 말한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이것은 자기 합리화이며 변명이며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함이다.
이들은 자기 기준으로 그냥 살아가는 것과 잘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고,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보여주며 향유하고 영락(榮樂)을 추구한은 것이 최대의 목표이었기 때문이다. 가라앉는 쪽, 미래가 없는 쪽, 힘들고 고통 받는 쪽은 선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치, 사회, 이념을 떠나 언제 어디서나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구별하여 행하여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 도리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이 말 한마디를 자신들의 면죄부로 상쇄하려해서도 안 되며 내가 동조하는 측은지심을 일으킨다면 나는 이들과 똑 같은 사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