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4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루가 1,67-79)
In the tender compassion of our God the dawn from on high shall break upon us, to shine on those who dwell in darkness
and the shadow of death, and to guide our feet into the way of peace.”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성전을 짓겠다고 다짐한 다윗 임금에게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신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은 뒤 성령으로 가득 차서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주님의 계획을 예언하며 그분을 찬미한다.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며, 그분의 길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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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성무일도의 아침 기도 때마다 바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밝아 오는 아침에 이 노래를 기도로 바치며 받는 평화와 위로는 더없이 큽니다. “아기야 너 지존하신 이의 예언자 되리니/ 주의 선구자로 주의 길을 닦아/ 죄 사함의 구원을/ 주의 백성에게 알리리라./ 이는 우리 하느님이 자비를 베푸심이라/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오게 하시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며/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리라.” 즈카르야에게서 봇물처럼 터져 나온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기쁨과 희망은 그의 아기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아기를 바라보고, 받아 안으며 그 아기의 인생길을 직감하면서 그는 약속된 구원이 성취될 것이라는 놀라운 계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대림과 성탄 시기에 ‘아기에 대한 경탄’으로 초대하는 성경 말씀들을 묵상하며 아기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차원이 아이의 탄생이 지닌 의미에 깊이 다가가게 함을 느낍니다. 반대로 출생이라는 인간적 체험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탄의 신비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 아이의 탄생과 존재 안에서 느끼는 종교적 신비감과 인간적 감동의 깊은 연관성을 시집 『성북동 비둘기』로 잘 알려진 김광섭 시인은 자신의 글 ‘시와 인생’에서 영국의 여류 시인 리들러의 시를 인용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는 주의 모태에서 빛났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주를 본받은 것이니, 타는 촛불의 금빛 정열로 자신이 빛날 수 있는 길을 보여야 한다. 어버이의 공포나 꿈이 아기의 새벽빛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 우리의 욕심 때문에 그 빛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하지 않도록 …….” 우리 시대의 중요한 소설 가운데 한 편으로 꼽히는 미국의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읽으면서, 소설이 시적으로 묘사하는 핵전쟁 이후의 비참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공포와 전율만이 아니라 깊이 감동하는 것은, 어린 아들을 위해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꿋꿋이 걸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성탄절이 눈앞입니다. 우리는 아기를 받아 안아야 합니다. 아기와 함께 우리가 걸어갈 여정을 마다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묵상
2014-12-24 대림 제4주간 수요일 한상봉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예언자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예수님에 앞서 태어난 세례자 요한이 예비한 길은 메시아를 맞으려는 길이며, 그 메시아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78-79절)이라고 노래한다. 예수님이 태어난 시대는 ‘예언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세례자는 광야를 가로질러 요르단 강으로 왔고, 예수님은 촌락을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숫가로 오신 분이다. ‘영원히 마르지 않을 갈증’을 채우려는 것이다. 하느님 없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찾아온 것이다. 로마제국의 아수라에서 헤로데의 탐욕스러운 입술까지 모욕당한 것은 하느님이었고, 그분의 나라였다. 요한과 예수님은 공권력에 의한 폭력으로 유지되는 평화란 얼마나 허망한 것이냐, 되묻는 예언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사목헌장」에서는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의 작품’라고 선포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한사코 ‘경제적 불평등’을 문제 삼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야 했을까. 그분이 광야에서 단식하고, 급기야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을 받은 까닭이 여기에 있었을까. 하고 많은 기적 가운데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복음사가들에 의해 으뜸으로 여겨지는 연유가 여기에 있을까. 가톨릭교회가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해 ‘성만찬’을 준비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역설을 이해하려면, 눈물에 젖은 밥을 먹어보아야 한다. 그 밥이 하느님처럼 보이면, 이미 그대는 예언자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느님을 누군가 독점할 수 없듯이, 밥은 나누어져야 한다. 그 밥을 흐뭇하게 먹고 나서야 세상은 평화로울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밥’으로 오셨다. 평화의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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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사제’는 레위 지파에게만 주어진 직분입니다. 신분에서부터의 제약입니다. 그만큼 선택된 이라는 자긍심이 강했습니다. 율법을 보호하는 지도자였으며 종교 생활의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의복부터 달랐습니다. 금실로 짠 화려한 옷을 입었습니다. 일반인과 구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제복을 입지 않고 제사를 드리면 처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즈카르야는 평생을 그러한 사제로 지냈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벙어리가 됩니다. 그것도 성전 안에서 예절을 거행한 뒤였습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그는 듣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벙어리가 되었을까?’ 즈카르야는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창피하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사의 말을 잠시라도 의심한 것이 미안해서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봤을 것입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주님께서 함께하셨음’을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벙어리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찬미가는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은총입니다. 즈카르야의 희생은 아들을 위한 거름이었던 것입니다. 고통은 더 큰 세계를 향해 눈뜨게 합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표현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즈카르야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입니다. 천사가 아들의 잉태를 알릴 때 그는 순간적으로 의심합니다. 그 보속으로 잠시 벙어리가 되지요. 사실 그의 의심은 합리적이었습니다. 그와 아내는 생리적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탄생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의 일을 인간의 지식만으로 판단하려 한 것이 즈카르야의 잘못이었습니다. 요한이 탄생하자 즈카르야의 보속도 풀립니다. 말을 하게 되자 그는 즉시 주님을 찬미하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벙어리였을 때 그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말입니다. 다시 말을 하게 되면 주님을 찬미하며 살리라 다짐도 했을 겁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렇게 아름다운 찬미가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즈카르야의 노래’는 성무일도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성무일도를 바칠 때에는 매일의 기도와 함께 이 찬미가를 외웁니다. 그것은 즈카르야의 마음을 묵상하라는 암시입니다. 우리 역시 숱한 말을 쏟아 내며 살고 있습니다. 그 많은 말 속에 주님을 찬미하는 말이 얼마만큼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인간적 계산만으로 판단한 적은 없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국왕 후푸가 베푸는 연회를 앞두고 요리사들은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그런데 젊은 보조 요리사가 실수로 그릇을 떨어뜨리면서 기름이 그만 숯이 있는 부뚜막에 쏟아진 것입니다. 놀란 그는 얼른 손으로 기름이 묻은 숯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에요. 분명히 기름을 만졌음에도 불구하고 손에 미끈하고 끈적거리는 느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보다 손이 더 깨끗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숯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뒤로 계속해서 기름에 숯을 넣어 사용하게 되었답니다. 이 발견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비누였습니다. 실수 하나가 커다란 발명품을 낳게 된 것입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1885년, 미국 애틀랜타의 약사 J.S 팸버튼은 코카의 잎과 콜라의 열매로 실험을 거듭한 결과 흥분 작용을 하는 건강 음료를 만들었지요. 이것이 미국 최초로 상품화된 코카콜라입니다. 하지만 코카콜라의 저조한 판매량으로 팸버튼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는 두통이 심한 환자가 와서 약을 지어 달라고 했습니다. 점원은 약을 지으면서 그만 실수로 코카콜라에 물 대신 소다수를 넣었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약을 다 마신 환자는 금세 두통이 멈추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사실을 안 팸퍼튼은 원래 자신이 만들었던 음료에 소다수를 넣어서 ‘신경계통의 만병통치약’이라는 광고 문구를 넣어 팔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코카콜라가 세계적인 음료가 되는 시작이었습니다. 코카콜라 역시 직원의 실수로 만들어진 실패작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실수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일이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토록 피하고 싶은 실수가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또 하나의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자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잘 되면 자기 탓, 안 되면 하느님 탓으로 돌리면서 불평과 원망을 던질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하느님은 자비롭고 사랑 가득하신 분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잘못을 벌하시기도 하지만 그 잘못을 용서하시고 은혜까지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즈카르야를 통해서 알 수 있지요. 그는 믿지 않는 실수 탓으로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았지만,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때가 되자 혀가 풀렸고 성령까지 받아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언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특히 즈카르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메시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우리들이 하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서 쓰여야지, 하느님의 뜻을 부정하는데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부정하고 또한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행동과 말로써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나아가지 않았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이제 오늘 밤 주님께서 드디어 우리 곁에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가슴에 새기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도록 합시다.
거짓말쟁이가 받는 가장 큰 벌은 그 사람이 진실을 말했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 믿어 주지 않는 것이다.(탈무드)
세상의 크리스마스
-심종민 신부-
종교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12월 24일만 되면 누구나 조금씩 흥분하고 기대하기 시작합니다. 나도 모를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고, 또 좋은 일을 만들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특별히 연인들이나 아이들은 남들보다 더 큰 기대감에 부풀어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기대감을 한껏 부풀려 놓았을까요? 예수님의 지상탄생? 불행히도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성탄은 이벤트의 날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벤트 속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인 예수님은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옛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구유를 만들어 놓고 울었다고 합니다. 세상의 구원자가 초라한 말구유 속에서 태어난 사실이 너무 슬프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성탄은 분명 기쁜 날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어디까지나 이벤트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자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초라하게 오셨던 그분을 생각하며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주님의 탄생을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즈카르야의 구원체험 -김찬선신부-
오늘 즈카르야는 말문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대단한 구원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는 우선 개인적인 구원을 하였습니다. 말문이 막혔다가 풀리는 구원체험을 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불신이 치유되는 구원체험을 한 것입니다. 자신도 믿을 수 없고 이웃은 더더욱 믿을 수 없고 하느님은 그 존재와 능력을 보지 못했으니 믿기가 어려웠는데 인간의 불가능을 넘으시는 하느님의 그 존재와 능력을 체험하고 믿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구원체험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가문의 구원체험입니다. 자손이 없음은 가문의 가장 큰 수치요 불행인데 아들이 생겼고 그것도 늘그막에 아들을 얻었으니 이 구원체험은 너무도 극적이고 기쁨은 배가됩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사실은 자기 가문만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할 주님을 예비하는 자로서 온 것임을 깨닫습니다. 자기 가문 전체가 하느님 소명 체험을 한 것이고 그래서 이제는 공동체적 소명의식을 갖게 됩니다. 자기 집안이 이스라엘 구원 전체의 도구가 된다니 이 얼마나 큰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그의 찬미 첫 마디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입니다. 자기와 자기의 동포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집단이 아니고 하느님의 굄을 받고 속량될 집단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공동체의 구원 체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셨다.”고 이어서 노래합니다. 이제 즈카르야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확고하게 당신 백성, 곧 주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분의 자비하심이
- 황지원 신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저는 밤의 어둠을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군대에 가서야 ‘칠흑 같은 어둠’이란 표현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야간 근무를 나가면 주변에는 불빛 하나 없는 어둠만이 있었고 그 어둠을 헤치고 가야만 했습니다. 어둠에 눈이 익어가면서 제 발 아래로 그림자를 발견하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무수한 별들과 은은한 달빛과 마주하게 됩니다. 조금은 힘들고 고된 나날이었지만 그것이 마치 칠흑같이 어두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지만 고개를 들어보면 언제나 우리를 비춰주는 빛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 앞길만 바라보며 언제나 불이 밝혀진 세상에서 그 빛의 따스함과 밝음은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참으로 어둡고 힘든 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별빛과 달빛의 따뜻함은 포근함과 안식을 전해 줍니다. 이제 곧 시작될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이보다 더 밝게 빛나고 더 따뜻하게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즈카르야가 성령의 은총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찬송하면서 그분의 자비하심이, 곧 우리에게 다가왔음을 우리의 어둠과 그늘을 환히 밝혀주실 것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자신감 비료
-조명연 신부-
어떤 농부가 황무지를 개간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 땅은 돌멩이가 많은 매우 척박한 땅이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가 포기하라고 말립니다. 하지만 농부는 기어이 그 땅을 일궈냈고 몇 년 후에는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농부를 찾아와 “어떤 비료를 사용했나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것쯤이야’라고 하는 자신감 비료를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가장 필요한 비료는 바로 이 자신감 비료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여러 가지 작은 조건들만을 꼽으면서 정작 중요한 자신감 비료 쓰는 것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인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 역시 이런 자신감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아내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인해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주님의 뜻을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불안과 의심이 해소되는 순간에 비로소 입이 열리고 주님께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입이 열리고 찬양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한 조건이 아니라 ‘이것쯤이야!’라는 자신감 비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찬미는 우리의 기도
-허영엽 신-
어떤 분의 신앙체험이다. “저는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 매일매일이 은총의 나날이었습니다. 어느 날 잘 알고 지내던 한 자매가 찾아와 어려운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돈을 꾸어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사랑으로 그 사람에게 아주 큰돈을 꾸어주었는데 그는 얼마 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교회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일 년 정도 병상에 있게 되었습니다. 근처 성당 신자들이 저를 방문했지만 냉정하게 그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도 연세가 지긋하신 신자 몇 분이 계속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함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기도 중에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를 찾아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편협한 마음과 어리석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 그것을 남의 탓으로만 돌렸던 것입니다. 주님은 신자로부터 받은 상처를 다른 신자들을 통해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암흑과 같은 어려운 시대에도 빛과 희망을 노래했다. 하느님이 절대로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즈카르야는 오랜 기다림의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눈으로 하느님 약속의 시작을 보았다. 즈카르야는 하느님께서 죄와 죽음에서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세상에 구원의 빛을 비추실 것이라고 노래한다. 그는 드디어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사실 즈카르야는 천사 가브리엘이 요한의 잉태소식을 전했을 때 믿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자신의 불신을 넘어서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보여주는 노래를 부른다. 혀와 귀가 풀린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보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메시아를 탄생시킨 다윗의 믿음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한 나라 - 메시아 왕국을 약속하신다. 다윗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사면의 모든 원수들을 다 물리치고 송백으로 지은 궁전에서 편히 살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머무심을 상징하는 약속의 궤는 성막 안에 있었기에 신심 깊은 그는 마음 아파했다. 그는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을 짓고자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의 믿음을 아셨지만,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다윗이 전쟁을 통해 피를 많이 흘려(1역대 22,8) 평화를 상징하는 성전을 건축하기에는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려는 다윗의 신심 깊은 마음을 반대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아직 그 시기가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가상한 마음을 보시고 다윗 왕조에 대하여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후손 이스라엘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도록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 주변국가의 잦은 침략에 시달려 이리저리 쫓겨 다니던 신세에서 벗어나(판관 6,2) 완전히 정착하여 다시는 두려움에 떨지 않는 평화스러운 나라가 되리라. 다윗과 그 후손의 나라를 견고하게 세우시리라.
다윗이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 가운데 후계자로 삼아 영원하고 튼튼한 나라를 세우시리라. 하느님께서 친히 아버지가 되심으로써 비록 다윗 왕국이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사울의 왕국처럼 버리지 않으시고(15절; 1사무 13,8-14; 15,10-21) 징계하시며 인도하시리라(12,7-15)고 약속하신다.
이는 장차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임하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진정한 평화(죄와 죽음에서의 해방)를 예언한 것(루가 2,14; 로마 5,1; 골로 1,20)으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룩될 나라를 상징한다(루가 1,31-33; 사도 2,29-31; 13,22-23).
하느님께서 다윗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어여삐 보셨기 때문이다. 그도 역시 남의 아내를 빼앗고 살인을 주도하는 등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 있었기에 죄에 빠져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나 회개하였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할 줄 아는 신앙인, 겸손하게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는 신앙인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사모하는 그의 마음을 보시고 그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시고, 그의 후손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도록 하셨다.
다윗 한 사람의 깊은 믿음이 그의 후손을 살렸고 왕권을 누리도록 하였다. 다윗의 믿음이 그 후손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부자관계를 맺도록 하였다. 한 사람의 믿음으로 그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탄생하도록 했다. 한 사람의 믿음이 후손 전체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민족과 나라에 영향을 준다. 한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며,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가! 자신의 믿음을 소중하고 고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로는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다.”(로마 1,17) 하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신다.”(로마 3,22) 하고 말한다. 인간은 믿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죄를 지은 죄인일지라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나자.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일지라도 나의 믿음을 통하여 나의 후손과 내 나라가 하느님께 축복받는다는 점을 생각하고, 자신의 믿음을 소중하고 고귀하게 여기자.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됨으로써 후손과 나라에 축복을 주는 삶을 살자...........◆
즈카르야의 찬미 노래를 함께 부르며... -박성태 신부-
"지금 창 밖을 보십시오. 흰눈이 펑 펑 쏟아집니다."라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우리들은 분명히 오늘 하루를 들뜬 기분으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오늘 12월 24일은 온 세상 사람이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12월 24일은 12월 25일의 전날이기 때문입니다. 12월 25일은 성탄절,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은 어릴 때부터 예수님의 성탄을 손꼽아 기다려왔습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때 바로 오늘이 그 기다림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다림"에 대해서 생각할 때의 마음가짐은 크게 설레이는 마음이거나 혹은 두려운 마음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그 중에서 설레이는 마음은 기다림의 대상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요소가 많을 때 생기는 마음입니다. 반면에 두려운 마음은 마치 시험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시험 날이 앞당겨질 때 느끼는 마음이라고나 할까요. 이처럼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준비를 미처 못했다거나 기다림의 대상 그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성탄을 하루 앞둔 지금 설레이는 마음입니까? 두려운 마음입니까? 앞에서 들은 복음 말씀은 이 세상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두고 그의 아버지 즈가리아가 성령을 가득히 받아 예언의 노래를 한 부분으로 흔히 "즈가리아의 노래"라고도 불리우는 대목입니다.
그 당시의 경건한 유다인들은 대망하기를,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이가 왕이 되어 자기들에게 나타나기를 한결같이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러한 역할을 할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그분의 오심을 선포하며 그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가 올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엘리야가 다시 와서 그 일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즈가리야는 바로 자신의 아들이 그 길을 준비하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기뻐서 노래합니다. 이 노래에서 즈가리아는 아들인 요한이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예언합니다. 요한의 역할은 한마디로 구세주 오심을 철저히 준비시키는 삶입니다. 요한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성서적 의미로 광야는 자신을 정화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다지는 영신 수련의 장소로 파악됩니다. 광야란 낮에는 더위가 밤에는 추위와 맹수가 시련을 가져다 주는 곳입니다. 요한은 광야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일생을 구세주를 기다리며 또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삶을 살았습니다.
즈가리아의 예언대로 세례자 요한은 "주님 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닦으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주의 백성에게 알리게 되는" 구체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구세주를 맞이한다는 것.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참 생명을 주시는 분을 맞이하는 것이며, 참 생명을 맞이한다는 것은 우리가 참 생명을 얻고 그 삶에 동참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즈가리야는 계속해서 노래합니다.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의 덕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구세주를 준비하는 그 자체가 영원한 우리의 삶이며 그 삶은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즈가리야의 찬미처럼 혼탁하고 방황하는 세상에서 구원과 평화를 주시고자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확실한 믿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구세주를 간절히 기다리며 지내온 청취자 여러분 모두의 걸음 걸음마다 평화의 향기가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노래하는 즈카르야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강영구 신부-
대림(待臨)시기가 끝나고 성탄 대축일이 다가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와 함께 하느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심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만 성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을 고집하던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어 침묵하는 동안 생생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침묵 가운데 비로소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입이 풀리자 하느님의 대자대비하심을 노래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큰 사랑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침묵 가운데 들려오듯이 그분의 자비와 권능은 언제나 작고 가난하고 힘없는 것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성령(聖靈)으로 충만한 사람이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하고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귀의(歸依)하여 그분께 의지하는 사람 안에 성령은 충만하고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사람을 비추어줍니다.
아기 예수님이 당신의 가슴에도 태어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김정용 신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희망이 족할까/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곰곰이 생각하니/세상만사가 춘몽 중에/또다시 꿈같도다….”(작사·작곡 미상, ‘희망가’ 중에서) 일본 강점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막걸리 한잔에 휘청거리듯 그렇게 시대를 살며 세상살이의 절망스러움을 뱉어낸 노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혹자들은 퇴폐적이라고 말하지만 희망을 품고 살기에도 버거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어떤 희망가보다 더 절절합니다. 사람들은 시대마다 그 시대의 그늘을 노래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시대의 그늘을 어떻게 노래하고 있을까요? “돈 벌어 돈, 내 사랑 안 뺏기려면은/돈 벌어 돈, 큰소리치고 싶으면은/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해도/돈 없고 빽 없으면 찬밥 신세! 돈!”(The Solist, ‘돈 벌어 돈!’ 중에서) ‘돈 벌어 돈!’이라는 노래입니다. 사랑도 사람도 돈보다 못한 시대라고 말합니다. 인정하든 안 하든 시대의 물결은 이미 그리로 넘어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즈카르야의 노래는 과연 우리 시대의 대안적 희망가가 될 수 있을까요? 어느 시대든지 굴절된 시대의 뒷자리엔 늘 고약한 배설물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입니다.(루카 1,77과 79 참조) 그리고 죄와 죽음의 차가움은 세상을 다스리는 그 무엇도, 그 어떤 힘에 의해서도 풀리지 않는다는 것 또한 시대의 엄연한 진리입니다. 죄와 죽음의 그늘 밑 어둠을 벗어나려는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그 앞에서 헛되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즈카르야는 하느님께서 스스로 죄와 죽음의 깊은 곳에 찾아와 세상의 어둠을 녹여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세상에 구원의 빛을 비추실 것이라고 노래합니다.(루카 1,68.78-79 참조) 즈카르야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듯 얼음장 같은 세상의 밤이 풀리리라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하느님, 영원한 희망이신 그분께서 우리의 깊은 절망 속에서 몸소 노래하시니 그런 희망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최재현 신부-
오늘 밤은 구세주의 탄생으로 세상이 기뻐할 것이고, 그를 믿는 자에게는 하느님의 큰 축복이 내려오는 평화의 밤이 될 것입니다.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하며 동정 마리아에서 탄생하셨도다. 원조들이 범죄한 후 성조에게 허락하신 메시아를 보내소서. 어지러운 세상에 방황하는 우리들의 간구함을 들으사 보내주옵소서.
대림시기에 주님께서 오시어 우리를 구해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마음으로 불렀던 성가입니다. 첫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고 모든 사람이 또한 죄를 범함으로써 악의 세력에 물든 세상은 오직 하느님만이 처음 상태로 되돌릴 수 있으십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라는 로마서 5장 17절의 말씀처럼 오늘 오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은 새롭게 변할 것이며,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임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아들을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한 사제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되었다가 요한이 태어나고 난 후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이 찬가는 ‘즈카르야의 노래’ 또는 라틴어 첫 글자를 따서 ‘베네딕투스(Benedictus)’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노래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부분은 구원의 시작을 알리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께 감사의 노래를 드리는 내용이고, 둘째부분은 예언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하느님의 약속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아주 중요한 주제였는데, 즈카르야의 노래는 그분의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맞게 응답하도록 그들을 초대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처음과 끝은 ‘에피스켑세타이('επισκ'εψεται)’라는 히랍어 말로 연결되는데, 이는 ‘찾아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향해 또 인간을 위해 내려오셨고 찾아와 주십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느님 편에서 이루어지고, 당신 백성이 죄에서 해방되어 두려움 없이 당신을 섬기고, 거룩하고 의롭게 되도록 하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즈카르야의 노래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홀로 일하는 분이 아니시기에 당신의 구원 계획이 한 아이를 통해 준비되기를 바라십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즈카르야 노래 후반부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즈카르야의 노래가 설명하려는 것이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메시지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역할을 분명히 밝히는 데 있습니다. 이 노래는 79절에 ‘평화’라는 말로 끝맺음을 함으로써, 하느님은 예수 안에서 평화의 궁극적인 의미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처럼 즈카르야의 노래는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확고한 구원 의지를 증언하고 있으며, 이 증언은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중심 주제인 구원의 보편주의와도 직결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아 구원되기를 바라시고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 아들을 보내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구세주 오심을 믿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큰 축복과 평화가 내려오는 오늘,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을 경배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날이길 기원합니다.
대림시기의 마감
-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사화를 마무리 짓는 즈가리야의 노래를 들려준다. 아홉 달 동안 잠겼던 혀가 풀리면서 성령을 가득히 받아 외치는 즈가리야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 탄생사건의 결론이다. 즈가리야의 노래도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칭송(1,42-45)과 마리아의 노래(1,46-55)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그의 입에 담아주신 말씀이다. 엘리사벳도 즈가리야도 “성령을 가득히 받아”(41절; 67절) 하느님께 칭송을 외쳤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 마리아의 경우는 지극히 높으신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1,35) 예수를 잉태하였으니 이미 주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계심을(1,28) 알아야 한다.
성서학자들은 즈가리야의 노래도 마리아의 노래처럼 루가복음서 집필시기 이전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감사가, 또는 찬미가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유대교로부터 소외당하고 버림받았던 가난한 자들이 원수들과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박해를 받아 죽음의 암흑과 그 그늘 아래 앉아있던 사람들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 가난한 사람들이 메시아 예수의 구원을 체험하고, 또 실제로 구원의 은혜를 받아 이제는 두려움 없이 거룩하고 올바르게 하느님을 섬기며, 평화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루가는 이러한 메시아 예수의 구원사적 업적을 세례자 요한의 탄생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아가야’(76절) 하고 시작하는 노래의 후반부는 선구자 요한에 대한 내용이다. 이것은 “이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1,66)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루가의 답변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즈가리야의 노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부분(68-75절)은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의 부분이다. 하느님께서는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가난한 사람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구원해 주셨고, 앞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그분의 구원을 입을 것이다. 구원의 목적은 백성들이 거룩함과 올바름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둘째 부분(76-79절)은 직접적으로 구원을 준비하는 선구자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특사요 예언자”(말라 3,1)로 먼저 와서 메시아 주님의 길을 닦는다. 그는 죄를 용서받는 세례를 외칠 것이며, 백성들을 준비시켜 구원받는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심’ 덕분이다. 이로써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는 뜻을 가진 요한의 이름이 다시금 강조된다. 이는 즉, 하느님의 구원이 요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하늘의 태양처럼 죽음의 그늘 어둠 속에 있는 백성을 비추시어 빛이 되시는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 빛이 백성의 앞을 비추어 그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오늘 즈가리야의 노래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미 오심’과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4주간의 대림시기를 마감한다. 세상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묵상하는 ‘다시 오심’의 분위기로 시작된 대림시기는 지난 12월 17일부터 ‘이미 오심’에 대한 준비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우리는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의 전사(前史)를 통하여 이 준비가 놀라움과 기쁨으로 충만하였음을 보았다. 인류의 성조(聖祖)들로부터 즈가리야와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을 통하여 펼치시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인류구원계획은 이렇게 준비되었던 것이다. 그 계획은 바로 하느님 스스로의 ‘사람이 되심’이다. 이제 그 성취가 우리의 눈앞에 놓여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성취를 우리의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성취가 인간의 눈에는 만연(漫然) 불가능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오직 성령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자만이 그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찬미 받으소서(루가1,67-79)
-유 광수신부-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탄 하루 전 날을 맞이하였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는날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하는 것인지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 즈가리야는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즈가리야의 노래를 들으면서 "아, 그래 맞아 !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내 마음을 잘 표현하였네"라고 공감하게 될 것이고 또 "아,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이런 큰 축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구나!"하고 새롭게 깨닫게 되기도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을 그런 입장에서 다시 한번 잘 음미해주기를 바란다. 68-75절까지의 내용을 잘 음미해보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하느님의 축복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주실 축복에 대해서 찬미를 드리고 있다.
즈가리야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라고 우선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찬미를 드린다는 것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찬미를 드려야 할 구체적인 내용들이 있는 법이다. 즈가리야는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비푸신 큰 은혜를 생각하면서 찬미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찬미는 즈가리야가 개인적인 일로 찬미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모든 인류에게 베풀어 주셨던 커다란 은혜에 대해 찬미를 드리는 것이다.
즈가리야가 하느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느님이 잊지 않으시고 그 동안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주 섬세하게 준비해 오셨고 당신의 계획대로 모든 일을 진행시켜 오신 것을 시므온이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가2,29-30)라고 말한 것처럼 즈가리야도 구원을 자기 눈으로 구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찬미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찬미드리는 마음이 곧 성탄을 맞이하는 마음이다. 찬미드리는 그런 마음이 되려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모르면 찬미드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성탄을 맞으면서고 무관신한 것은 구체적으로 아기 예수님이 왜 오셔야 했는지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실 분이신 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나를 위해서 놀라운 일을 하신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찬미드리는 사람이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세계 즉 하느님이 역사하고 계신 또 다른 세계를 보고 따라 가는 사람이다. 하루하루 그냥 흘러가는 시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임을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한 선물임을 알고 감사드리며 찬미드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 동안 하느님이 어떻게 역사해 오셨는지를 되돌아 보면서 우리도 찬미드리는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도록 하자.
그 동안 하느님이 무엇을 준비해오셨는가? 한 아기가 금방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기가 태어나려면 잉태하고 완전한 인간으로 완성되기 위해서 임산모의 뱃속에서 10개월 기간동안 자라야 하듯이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하루 아침에 아무런 준비없이 태어나시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가 탄생하기 위해서 하느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해오셨고 이제 때가 되어 탄생하시게 된 것이다.
68-75절까지는 그 동안 하느님이 해 오셨던 일을 열거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 그 일이란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76-77절까지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선구자로 요한 세례자가 해야할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요한이 장차 할 일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는 것"이다. 78-79절까지는 장차 오실 메시아 즉 아기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즉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어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은 모든 일을 이미 계획하셨고 그 계획대로 이루어 가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아무 때나 어떤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지도 않으시고 즉흥적으로 아무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일을 다 영원으로부터 계획하셨고 그 계획에 의해 일을 진행시키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길은 이미 다 짜여져 있고 그 길을 한 발짝 한 발짝 걸으시고 실행시켜 나가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등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이미 당신이 친히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그 말씀하신 대로 이루고 계신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과거 동사가 있고 미래 동사가 혼합되어 있다. 즉 이미 이루신 일이 있고 앞으로 이루실 일들이 예언되어 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 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미래형이다. 그러나 지금은 2000년 전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미 이 예언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이다. 즉 우리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대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기 예수님은 오셨고 우리는 이미 메시아가 오시면 이루시겠다고 한 약속이 실현되고 있는 은혜로운 시기에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성탄을 맞는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셔야 할 구유를 준비해왔고 그리고 드디어 내 안에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찬미드리는 날이어야 한다. 성탄을 축하드리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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