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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묵상글 ( 2024년 12월 23일. - 비록 고달픈 인생이 될지라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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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23 04:29
- 비록 고달픈 인생이 될지라도
오늘 복음은 독서 말라키 예언서의 예언 곧
‘보라, 그가 온다.’라는 예언대로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는 얘기이고,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지어주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 얘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즈카르야는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처신합니다.
곧 아기의 이름을 하느님의 지시대로 지어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식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결과 즈카르야는 막혔던 말문이 열리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생각해보면 즈카르야의 일생은 오늘을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
어찌 보면 즈카르야는 자기 뜻대로 된 것이 없는 일생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낳기 위해 그는 일생 자식 없이 불행하게 살아왔고,
겨우 애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자기 자녀가 아닌 주님의 자녀입니다.
이런 일생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래도 말년에 아들을 낳았으니 해피엔드라 하고,
해피엔드이니 행복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으로 보면 죽 쒀서 개 준 꼴이 됐으니 결코 행복하였다고 할 수 없겠지만
인생이란 본래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 신앙인이라면
즈카르야의 일생은 잘 되고 행복한 일생이었으며 우리도 이것을 본받아야겠지요.
내 자식이 세상에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고,
더 나아가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께서 쓰고자 하시는 대로 되길 바라야 하겠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불과 잿물처럼 쓰고자 하십니다.
남을 단련하고 정련하는 역할입니다.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이런 인생 너무도 고달픈 인생입니다.
나를 단련하고 정련하는 것만도 고달픈데 남까지 단련하고 정련해야 하니.
그렇잖습니까?
불과 잿물을 누가 좋아합니까?
이렇게 싫어하는 사람이 되는 것 또 누가 좋아합니까?
그래도 세례자 요한과 즈카르야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그들을 보면서
좋아서 되고,
좋아서 하는,
그런 사람이 우리가 아니고,
그런 인생이 우리 인생이 아님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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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사 때 강론하면서 또 외부에 나가 강의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말하기가 어렵다.’라는 것입니다. 사제로 25년 이상을 살았으니, 이제는 능숙할 때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여전히 어렵고 준비할 것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어느 신부가 요즘 젊은 신부들의 강론이 형편없다는 식의 말을 합니다. 내용도 부족하고 어디선가 짜깁기 한 것이라고 평가절하합니다.
이 신부의 말을 들으면서 곧바로 든 생각은 ‘자기는 강론을 잘한다고 생각하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신부에 대한 신자들의 강론에 대한 평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냥 평범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기는 제대로 하고 있고, 다른 신부가 강론을 잘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만이 가득합니다. 운전자의 90%는 자기 운전 솜씨가 평균보다 낫다고 믿으며, 대학교수의 94%가 자기 강의 실력이 평균보다 높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의 90%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생각하는 것 역시 스스로 과대 포장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기 부족함을 볼 수 있어야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라는 생각만 있으면, 안 좋은 결과에 남 탓, 환경 탓만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주님의 뜻을 기억한다면 먼저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겸손 안에서만 하느님의 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탄생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일을 믿지 않아서 벙어리가 되고 말지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에서 혀가 풀리고 말을 하기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관습대로 아기 이름을 정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뜻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된 후에도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일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겸손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완성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나만을 높이고, 주님을 오히려 낮추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만사에 너그러움이 따르면 그 복이 저절로 두터워진다(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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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복음의 기쁨] 273항 )
그리고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만이 오로지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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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는 공수표가 없습니다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알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하느님께서 기억하시다’는 의미)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의 신뢰가 형성되어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이름을 쓴 순간 즉시 혀가 풀렸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이 실천되었을 때 입이 열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말에는 공수표가 많지만, 하느님께는 공수표가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말씀에 대한 신앙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베푸신다. 주님께서 너그러우시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몫에 충실했습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카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써 하느님의 역사에 순종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매여 있던 모든 고리를 끊어 버리고 하느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를 옭아매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입이 열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 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는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 세례 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인 동시에 은혜를 전하는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새 이름을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탄생이지만 기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려운 나라의 현실에서 주님의 손길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빛으로 오시는 당신은 제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내어 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려있는가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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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 교구에서 시노드 회의하는 중에 한국에서 카톡이 왔습니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소식입니다. 비상계엄은 국가의 재난, 내란, 전쟁과 같은 말 그대로 비상한 상황에서 선포하는 수단입니다. 비상계엄으로 국가는 정보를 독점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정치인의 활동을 제한 할 수 있습니다. 비상계엄으로 집회의 자유를 제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국민의 정치적인 관심이 적거나, 문맹률이 높아야 합니다. 교통수단이 열악해서 정보의 소통이 어려워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4·19 혁명, 광주 민주화 운동, 6.10 항쟁을 이루어낸 국가입니다. 합법적으로 현직 대통령을 탄핵하여 정권을 평화롭게 교체한 나라입니다. 고도로 발전된 정보와 통신을 소유한 나라입니다. 비상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의석을 가진 야당이 있는 나라입니다. 한마디로 비상계엄은 21세기를 사는 나라에서 19세기의 방법을 사용하려는 시도입니다. AI의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식 방법을 사용하려는 시도입니다. 정부가 그런 시대 상황을 알고도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면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그런 시대 상황을 모르고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면, 비상계엄이 가져올 경제적인 손실을 예측 못했다면 국가를 운영할 자격이 없는 정부입니다.
2000년 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새로운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론을 통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정보를 독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작은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작은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가 찾아갔던 ‘아인카렘’이었습니다. 저도 아인카렘을 다녀왔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아인카렘은 조용한 동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인카렘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요한’입니다. 오늘 독서는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사람들은 그를 세례자 요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강에서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며 죄의 용서를 상징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 세례는 예수님의 공적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와 죄의 용서를 설교하며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렸습니다. 그의 설교는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느님께 향하도록 돕고,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시켰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던 마리아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새벽길을 떠났던 동방의 박사들이 있습니다. 밤새워 양들을 돌보았던 목동들이 있습니다.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며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때를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기도했던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정했던 사제 즈카리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평생 예수님의 앞길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이 태어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새벽을 여는 사람의 자세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 양이 오십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합니다. 내 뒤에 오실 분이 있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도 풀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을 열었던 세례자 요한에게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큽니다.”
세상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우리 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에 눈이 먼 사람,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 권력에 취한 사람은 ‘임마누엘’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께서 강생하실 날이 가까웠으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이 되신 말씀, 저희와 함께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부당한 종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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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즈카르야는 석판에 이름을 썼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즈카르야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름을 썼던 집안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전통에서 벗어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게 이 일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요한은 길을 준비하러 왔습니다. 그것은 곧 오실 주님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즉 모든 사건은 주님의 오심에 방향이 맞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삶 안에도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우리가 계획한 것이고, 또 어떤 것은 계획하지 않은 일입니다. 어떤 것은 우리가 바라는 일이고, 또 어떤 것은 바라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모든 우리 삶의 이야기들이 하늘나라를 향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삶 속 모든 사건 속에 주님의 손길과 그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하늘나라로 초대하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날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늘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하늘로 이끌고 있음을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렇게 하기 전까지….
길은 걷기 전까지
길이 아니다.
노래는 부르기 전까지
노래가 아니다.
미소는 짓기 전까지
미소가 아니다.
사랑은 표현하기 전까지
사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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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탄생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아이들>
“오 임마누엘 우리의 임금이시오,
입법자이시며 만민이 갈망하는 이요 구속자이시니,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하느님!”
오늘은 12월23일 마지막 "오후렴" 역시 장엄하고 감동적입니다. 예나 이제나 구세주 예수님 오심을 갈망하는 인류의 염원은 여전합니다. 특히 요즘의 혼란한 시국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모두가 길을, 빛을 찾습니다. 궁극의 길이자 빛은 우리를 찾아 오시는 구세주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예수님 탄생 하시어 오실 날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4개의 영롱하게 타오르는 대림촛불이 예수님 오심이 임박했음을 알립니다.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도 우리의 감수성을 늘 새로이 할 것을, 늘 대림의 희망과 기쁨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모든 것은 세월이 지나면 때가 타고 닳게 된다. 사람의 마음도 잘못 길을 들이면 헐거워지고 바스라진다.”<다산>
“사람들이 선량한 마음을 놓아버려 마치 도끼로 나무를 베는 것 같으니, 날마다 베어버리면 어찌 아름답겠는가.”<맹자>
선물같은 일상을 소중히 여겨 한결같은 새로움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세월 흘러 몸은 노쇠해가도 신망애(信望愛)만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탄생에 앞서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일화를 보여줍니다. 요즘 계속되는 미사중 독서들이 예수님 탄생에 앞서 하느님의 만반의 준비과정을 보여줍니다. 우연적 탄생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섭리 과정의 참 좋은 선물이 아이의 탄생임을 보여줍니다. 하나하나 그 고유의 사명을 지닌 귀한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한 아이의 탄생은 온 마을의 축제요 기쁨이 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예전 어렸을 적 아이를 낳은 집 대문앞에 숯과 고추가 달린 금줄을 달아 놓았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20대 젊은 시절 존경했던 개신교 저명한 신학자 “안병무” 박사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당신이 어머니가 되어 한 번 아기를 갖고 낳는 체험을 하고 싶다는 고백이며 임신한 분의 특별 허락을 얻어 불룩한 배를 만져보며 생명의 신비에 감동했다는 고백의 내용이 50여년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지난 47차 코르시카 해외 사목 여정후 귀국시 기내에서 대동한 67명 언론인들과 짧은 인터뷰 대목의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너희들은 여기서 많은 아이들을 보았느냐? 이곳은 아이들을 가진 땅이다. 앞서의 방문지인 동티모르 와 여기서, 나는 아이들을 가진 이들을 보는 것이 참 행복했다. 이것이 미래다(This is the the future)!”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과 함께 걷는 모습에 감동했음이 분명합니다. 요즘은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걷는 모습을 보기가 참 힘든 세상입니다.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두 분은 우리의 영원한 현재이자 미래임을 깨닫습니다. 칼린 지브란의 ‘아이들에 대하여’란 글중 한대목이 생각납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 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들인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을 소중히 키워야 함을 배웁니다. 교황님이 늘 사랑하며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아이들입니다. 더불어 어린시절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를 참으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함을 깨닫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듯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이미 아득한 옛날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예고 되어 있고,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가 엘리야의 재림임을 믿었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보라, 내가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구약성서 맨마지막 말라기서의 맨끝부분에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사명이 예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니 예사로울 수가 없습니다. 작명과정에서 하느님의 개입이 드러납니다. 아기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자 즉각적인 아기 어머니 엘리사벳의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반발하자, 이웃과 친척들은 잠시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의 반응을 묻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판에 씁니다. 참고로 요한은 "주님은 자비로우시다"를 뜻합니다.
그러자 즈카르야는 즉시 혀가 풀려 말을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 유명한 즈카르야 찬미가는 내일 복음에 소개될 것입니다. 온마을의 기쁨이자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기쁨이 된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마지막 유다의 온 산악지방 주민들의 심정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는 다음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은 손길은 요한뿐 아니라 여전히 우리도 돌보고 계십니다. 요한 대신 나를 넣어, “대체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물으며 화두로 지니고 살아야 할 말마디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나와 더불어 이웃 형제자매를 귀히 아끼고 돌보고 살피며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시편25,4-5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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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따름>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루카 1,63)
하느님과 사람
그 사이에서
사람 따름이 때로
하느님 밀침일지언정
하느님과 사람
그 사이에서
하느님 따름은 늘
사람 품음이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늘 믿고
늘 바라며
늘 사랑하시지만
사람은 하느님을
때로 의심하고
때로 없이하며
때로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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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
오, 지극히 복된 요한, 범상치 않은 생활양식으로 지상에서 산 전사들처럼, 어떤 인간보다 훌륭했던 이,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기립니다. 오, 예언자여! 같은 본질, 세 위격, 한 분 하느님의 신비가 그대에게 계시된 바, 당신은 아버지의 목소리와 성령의 내려오심을 통하여, 당신에게 세례 받으시는 분이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 말씀이심을 알았습니다.
오, 지극히 존경하올 요한, 아이 못 낳는 어머니의 아들이여, 그대는 처녀에게서 떠오르는 태양을 알리는 영적 새벽이었고, 인류를 사랑하시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을 널리 선포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 찬미가-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액카르트는 하느님 안에 있는 것과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것의 의미를 드러낸다. 여기서 하느님의 터는 나의 터가 되고 나의 터는 하느님의 터가 된다. 이것은 하나의 터를 하느님과 더불어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특히 우리가 우리의 원초적인 자유를 다시 한 번 경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의지가 잠시라도 자신과 모든 피조물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려고만 한다면 다시 자신의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하느님이 살아 있고 사랑하듯이,우리도 사는 법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초적 근원, 곧 우리에게 존재를 준 창조주의 사랑의 원천으로 되돌아가서 누리게 될 자유의 중요한 요소다. 그렇게 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유가 없어야 하고, 목표가 없어야 하고, 자기를 정당화할 필요가 없어야 하며, 수단을 동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목적의 삶을 살아야지 수단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이유 없이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무로 경험한 것과 관계가 있다.(302)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묵시 15,1-8
마지막 일곱 재앙의 예고
나는 또 크고 놀라운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일곱 천사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하느님의 분노가 끝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상과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를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수금을 들고,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민족들의 임금님 주님의 길은 의롭고 참되십니다.
주님, 주님을 경외하지 않을 자 누구이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자 누구입니까? 정녕 주님 홀로 거룩하십니다. 모든 민족들이 와서 주님 앞에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의로운 처사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내가 또 보니 하늘에 있는 증언의 천막 성전이 열리고,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깨끗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하느님의 분노가 가득 담긴 금 대접을 일곱 천사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성전이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에서 나오는 연기로 가득 차,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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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하느님 은총인 요한의 탄생 /
박윤식 [big-llight] 241222. 19:40 ㅣNo.178682
즈카르야의 말문은 여전히 막힌 상태다. 사실 하느님 일을 어떻게 인간의 말로 설명할 수가? 말은 오해만을 불러일으킬 뿐, 침묵의 언어만이 하느님 일을 대변할 수 있을 게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이루는 표징으로 삼으시려고 즈카르야를 침묵 속에 가두셨고, 그는 침묵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그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살다보면 때로는 말문이 막힐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생길 때가 있단다. 어쩌면 이는 잠시 침묵하라는 뜻도 있으리라. 온 동네방네 자신의 정당함과 억울함을 떠들고 다니면서 주위로부터 위로를 찾지 말라는 거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일수록 침묵 속에서 하느님 뜻을 헤아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그분 안에서 조용히 해석해야만 하리라. 이런 침묵을 하다보면 의당 그분께서 뜻하는 결실이 있다나.
사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할 무렵,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치하였다. 가난한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은 더 없이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고,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다. 빈부의 격차가 날이 갈수록 벌어져,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은 불의한 현실에서 구원과 해방을 안길 메시아를 줄곧 기다렸다. 드디어 때가 되자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구세주 메시아의 길을 닦을 일꾼을 먼저 보냈다.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나이 든 엘리사벳을 통해서.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늙은 여인이 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그녀가 아들을 낳자 말문이 열린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을 ‘요한’이란다. 하느님의 은총, 하느님의 호의라는 뜻이라나.
세례자 요한을 생각하면 광야에서 단식하며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심판을 선고한, 어딘지 모르게 무서운 모습만이 떠오른다. 그 요한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그분보다 먼저 온 이로 맡겨진 사명을 수행했다. 그 첫 사명은 자기 백성을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를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한다. 그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말씀이 아닌, 단지 소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 요한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즈카르야에게 요한의 출생을 알려 준 천사는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라고 전한다. 이렇게 그는 깊이 헤아릴 줄 아는 믿음의 눈을 가진 이들께는 하느님의 은혜였을 것이다. 따라서 많은 이가 그를 통해 주님께 돌아왔다.
인간이 생각하는 세계는 하느님 것과는 다르다. 인간의 세계는 철저하게 힘 있는 자 중심이다. 가진 이는 더욱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한다. 권력이나 재물이 있어야만 더 많이 가질 수 있기에 경쟁과 질시, 불화와 다툼이 심하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인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한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세계는 딴판이다.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세계이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과 같은 아기를 잉태할 능력 없는 여인을 택해 생명을 만드신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주님의 길을 벗어난 이들을 엄히 꾸짖어 눈물로 뉘우치게 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분들을, 우리는 세상을 파멸에서 건져 내기 위한 주님의 선물이라는 점으로 꼭 받아들이면 참 좋겠다. 사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먼저 온 이 요한의 탄생은 선물 중의 아주 큰 선물일 게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성탄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최대의 선물이다. 따라서 예수님 성탄을 바로 목전에 둔 우리는 이 보물과 같은 선물을 담을 나의 그릇은 물론, 나의 마음이 어느 정도 준비되었는지를 분명 살펴보아야만 하리라. 하느님의 무한하신 능력인 신앙의 신비를 늘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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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루카 복음서는 아기의 이름을 ‘요한’으로 짓게 된 일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1,66).
어쩌면 아기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이
하느님께서 그를 보살펴 주고 계신 일로 받아들일 만큼 대단한 일인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 장면을 보면,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1,63)이라고 쓴 것은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1,13)라는 주님의 천사의 말에 온전히 순종한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는 부모의 이 믿음 안에서 자랄 것입니다.
그 아기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부모에게 물려받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법도 그분을 사랑하는 법도 배울 것입니다.
‘거룩한 침묵’과 ‘온전히 하느님의 시선 안에 머무르는 시간’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도 배울 것입니다(12월 19일 ‘오늘의 묵상’ 참고).
실제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거룩한 침묵과 온전히 하느님의 시선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장소인 ‘광야’에서 지냅니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도록 태어난 아기,
세례자 요한을 보살폈던 주님의 손길은 이미 그의 부모 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길’이 자녀를 특별하게 돌볼 수 있게 협력하는 부모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자녀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큰 유산은 없습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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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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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는 나이에 가졌던 아기라
사람들은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출산을 함께 축하하기 위해
할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정합니다.
그러자 즈카르야는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징처럼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따지 않고
천사가 일러 준대로 이름을 정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전통을 따르지 않고
천사가 알려 준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이미 요한의 임신은 전통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고
나이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통상적인 방식에서 벗어난 임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이제
아기의 이름을 정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가문의 전통과는 상관없는
새로운 이름을 아기에게 줍니다.
어떻게 보면 요한의 운명은
잉태의 순간부터
인간의 전통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전통을 거스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요한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요한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초점은
인간의 전통을 거스르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자신이 살아가려고 노력하다보니
인간의 전통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대단한 용기를 지닌 사람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전통을 벗어난다는 것은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부됩니다.
그만큼 그의 삶은 외로웠고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지지를 받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꿋꿋이 그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을 돌아봅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인간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무조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요한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용기도
한 번 가져보려 노력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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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 66)
희망의
연대가
다시 시작
될 것입니다.
절박한
기도의
삶이 되는
탄생이
있습니다.
우리 곁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기억해야 할
탄생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하는
탄생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탄생이 먼저
길을 냅니다.
탄생의 길은
기쁨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우리의 거처에서
일어나고
만들어지는
탄생의 멋진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못하실 것이
없으십니다.
실낱같은
희망도
저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돌아보면
언제나
그 뒤엔
하느님이
계십니다.
애타게
찾아야 할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마음 위에
마음을
얹힙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하느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탄생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창조의 심장
창조의 말씀을
믿습니다.
온 삶을 던져
하느님을
향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탄생의 얼을
다시 만나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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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모두 존재 자체로 하느님 은총의 표지요 도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 아기가 태어나면 어떤 이름을 지어줄까, 부모나 조부모들이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과거에는 작명에 있어서 오랜 전통인 돌림의 룰에 따라 중간이나 마지막 한자만 선택하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가정에서는 아이의 인생이 더 잘 풀리고, 큰 인물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안고 작명소를 찾았습니다.
어린 시절 저도 어르신들을 따라 작명소를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꼬질꼬질한 하얀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길게 기른 어르신께서 큰 방석 위에 앉아 계셨습니다.
한자로 가득한 두꺼운 책을 뒤적이고, 고민을 거듭하더니, 멋진 붓글씨로 이름을 적어주셨는데,
사례비가 만만치 않아, 저도 나중에 크면 작명소나 차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노인 중의 노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사이에 아기가 생겼다는 소문은 당시 아인카림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다들 두 사람을 두고 수군거렸습니다.
“세상에, 정말이지 기가 찰 일일세. 그 연세에 어떻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 비결이 대체 뭐지?”
특히 엘리사벳은 이웃 사람들의 눈총과 수군거림이 너무나 싫고 부끄러워 다섯 달 동안이나 숨어지냈습니다.
그러나 큰 부끄러움과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총과 자비에 감사하며
이렇게 속으로 되내었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5)
이윽고 해산달이 되어 엘리사벳은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아주 건강한 아기를 순산했습니다.
호기심 가득했던 이웃과 친척들이 몰려와서 태어난 아기를 구경하며 축하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했습니다.
여드레가 지난 후 이웃들과 친척들은 아기의 할례식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말을 못하고 있는 아버지 대신해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정하고 명부에 적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크게 외쳤습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은총’ 혹은 ‘은총의 지닌 사람’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름은 요한이 후에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리고 이 세상에 결정적인 은총을 가져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아직도 의구심으로 가득했던 이웃과 친척들이 재차 즈카르야에게 아기에게 어떤 이름을 주고 싶다고 물었습니다.
그는 서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즈카르야가 서판에 요한이라는 단어를 쓰자마자, 즉시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인한 주님의 은총이
즈카르야에게 내렸습니다.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첫 마디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요한은 태어나면서부터 주님의 은총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시작했습니다.
오랜 광야 생활을 거쳐 위대한 예언자로 거듭난 요한은 세례 갱신 운동을 통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전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 역시 존재 자체로 하느님 은총의 표지요 도구입니다.
수많은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아온 우리들입니다.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내 안에 담고만 있지 말고, 은총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기꺼이 나눠주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늙은 엘리사벳은 마지막 예언자를 낳았고, 젊은 처녀 마리아는 천사들의 주님을 낳았습니다.
아론의 자손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낳았고, 다윗의 자손은 땅의 힘센 하느님을 낳았습니다.
아이 못 낳는 여자는 죄를 탕감하는 사람을 낳았지만, 동정녀는 죄를 없애시는 분을
낳았습니다.”(시리아인 에프렘, 타티아누스의 네 복음서 발췌 합본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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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래야 육체의 지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습을 이길 수 있다. 정신이 육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 탄생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 앞에 우리가 내어놓아야 할 예물은 어떤 것으로 준비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 자체가 우리 인간의 구원 시작이며, 그분의 탄생은 이미 십자가를 품고 있는 탄생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듯이, 우리 자신 역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길을 만드는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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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것’ 아닌 은총의 다른 통로는 없다
어느 날 파우스티나 성녀는 어떤 영혼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즉시 주님께 9일 기도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미사 시간에 양쪽 다리에 고행용 쇠사슬을 착용하고 기도와 함께 고행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3일이 지나고 고해성사 때가 되어 영적 지도자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보러 갔습니다.
영적 지도자에게는 숨기는 것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고행을 말하려고 했고 영적 지도자도 그것을 당연히 허락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 신부님은 허락도 없이 그런 고행을 하는 것에 매우 놀라고 건강 때문이라도
그런 고행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행하는 대신 예수님께서 왜 당신을 낮추셔서 세례를 받으셨는지 묵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녀에게는 하느님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은 고행이 아니라 즐거움이었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자기 생각을 바꾸고 고해신부님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희생 같지도 않은 것으로 한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수녀님은 고해신부의 말에 순종하여 고행용 쇠사슬을 풀고 묵상하기 위해 성당에
앉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은총을 주라고 청한 그 영혼에 그 은총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네가 스스로 선택한 고행 때문에 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네가 나의 대리자에게 완전히 순명했기 때문에, 네가 전구하고 자비를 청한 그 영혼에 은총을 주었다.
네가 너 자신의 의지를 접을 때에 나의 은총이 네 안에서 군림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두어라.”
예수님은 파우스티나에게 노트 한쪽 페이지에 엑스 표를 하고 그 위에 “오늘부터 나 자신의 뜻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쓰게 하시고, 그 뒷면에는
“오늘부터,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고 모든 것에 있어 나는 하느님의 의지를 행한다.” 라고 쓰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더 많이 포기하는 이에게 더 주십니다. 자녀가 스스로 나가서 돈을 벌어오겠다고
나간다면 부모가 주는 것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부모에게만 의지할 수 있는 자녀가 된다면 부모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그랬더니 입이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은총은 순종을 통해서만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제는 즈카르야도 파우스티나 성녀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감수해야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자신의 뜻을 접는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인데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저는 논문을 쓰면서 이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학생의 생각이 교수님의 생각과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논문은 교수님이 통과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 교수님이 바꾸라고 하는 것은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공부를 하여 머리가 커질 대로 커진 저로서는 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박사 논문 첫째 장을 제출하고는 교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걱정하여 음식을 먹고
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꾸라면 다 바꾸어주겠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는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포기하는 만큼 은총이 찾아왔습니다.
신학생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수 신부님이 가르치는 것은 거의 이단 교리에 가까웠습니다.
동기와 저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정통 교리를 써야 할 것인지, 교수가 가르친 것을 써야 하는지.
그 친구는 자신의 소신대로 썼고 아주 낮은 점수를 받았고 저는 교수가 가르친 것을 잘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저에겐 후한 점수를 주셨습니다.
물론 그 친구의 용기가 대단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수를 받으려고 하면서 그 점수를 주는 대상을 무시해서는 안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르투르다 성녀는 예수님께서 자신 기도를 너무 잘 들어주셔서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했다.”
내 뜻을 많이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십니다.
그 은총을 받기 위해 그분의 뜻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분과 그분이 파견한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려는 의지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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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진짜 주인공은 ‘예수님’, 그리고 ‘우리’입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57-66).”
1) 우리 입장에서는,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예수님’, 그리고 ‘우리’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메시아 강생’이 임박했다는 표지이고, 예수님 탄생의 예고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한 일은, 사실상 ‘메시아 강생’을 예고한 일입니다.
<즈카르야는 천사가 하는 말을 믿지 못했는데,
자신과 아내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점 때문에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말을 믿지 못한 것도 있지만, ‘메시아 강생’을 믿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말을 못 믿은 것은 그렇다 치고, 메시아 강생을 못 믿은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믿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앞의 18절의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라는 즈카르야의 말을, “제가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어떤 표징을 주십시오.”로 해석하는데, 이 말은 아마도 ‘메시아 강생’에 대한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청일 것입니다.>
2)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생각만 했는데, 만일에 그들이 ‘메시아 강생’ 소식을 알았다면,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만 자비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즉 자기들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음을 알았을 것이고, 바로 그것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아기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주장한 것은,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한 말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즈카르야는 말도 못하게 되고 듣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글은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글을 써서 엘리사벳에게 천사의 말을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아기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주장한 것은, 천사의 말을 믿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입이 열리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믿음은 확신으로 바뀌게 됩니다.
<말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이 표징인데, 표징 때문에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먼저 믿었고, 그 다음에 믿음을 확증해 주는 표징이 주어졌습니다.>
3) 즈카르야의 하느님 찬미는 ‘즈카르야의 노래’일 것입니다.
그 노래를 보면, 68절-75절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대한 찬미이고, 76절-77절은 요한이 하게 될 일에 대한 찬미이고, 78절-79절은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찬미입니다.
<늙은 나이에 아들을 얻은 것에 대한 감사와 찬양은 없고, ‘메시아 강생’에 대한 감사와 찬양만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메시아 강생’의 예고편일 뿐이고, ‘메시아 강생’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66절의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라는 말은, ‘소문을 들은 이들’의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말하면, “정녕 주님의 손길이
모든 사람을(우리를) 보살피고 계신다.”입니다.
4)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세례자 요한만 바라보고 그가 가리키는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바라본다.” 라는 옛날의 속담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6-8).”
세례자 요한이 빛을 증언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빛’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실 요한은 예수님의 구원 사업의 ‘필수 요소’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그를 먼저 보내셔서 일하게 하신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짜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이야기의(구원 사업의) 주인공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서 손님이나 구경꾼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손님이나 구경꾼이 하는 생활이 아니라, 주인공이 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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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57-66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이름은 어떤 사람 자체를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단지 그 사람을 다른 이와 구분하여 부르기 위한 ‘호칭’용이 아니라, 그가 일생 동안 마음에 품고 지켜야 할 중요한 사명을 가리키는 일종의 ‘예언’적 성격을 지녔던 겁니다. 그렇기에 아기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명명식’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명명식은 보통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면서 함께 이루어졌는데, 오늘 복음에서도 즈카르야 아기의 명명식 자리에 그 부모와 친척은 물론이고 가까운 이웃들도 참석하여 하느님께서 즈카르야 부부에게 큰 자비를 베푸시어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얻게 해주셨음을 함께 기뻐해 주었지요.
그 자리에서 즈카르야 집안 사람들은 아기에게 사제가문의 이름인 ‘즈카르야’를 물려주려고 합니다. ‘즈카르야’는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기억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해 드리는 자기들의 수고와 정성을 기억해 주시어, 사제 가문으로써 누리는 영광과 기득권을 계속해서 누리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즈카르야’라는 이름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러나 아기의 부모인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그 이름 대신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요한’은 즈카르야가 성소에서 봉사할 때 천사를 통해 전해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요한’은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즈카르야 부부의 아기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신 것은 아기의 부모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크고 놀라운 은총을 베푸시어 아기를 잉태할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갖게 되었음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같은 가문 사람들처럼 자기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 자체에만 집착하느라 정작 그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그런 은총을 베풀어주신 이유와 뜻이 무엇인지, 자기들이 그 뜻을 이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요한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 덕분에 생명을 얻어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기억하며,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지를, 그분께서 베푸신 자비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요한에게 맡기신 예언자이자 선구자로서의 소명이지요.
즈카르야는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자신을 옭아매던 의심과 불신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계획하신 뜻과 섭리를 알아보고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옭아매는 인간적인 제약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의심과 불신, 이성과 논리, 쉽고 편한 것만 찾는 나태함과 안일함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큰 은총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비로소 깨닫고 그분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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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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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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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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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2024년 12월 23일.
여호와를 전심으로 찬양하는 삶
<2024.12.23>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11:1~10절)
❝여호와를 전심으로 찬양하는 삶❞
❚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과 인자하심이 완전하며 놀랍기 때문에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 어떠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 은혜와 자비로써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1~4절).
시인은 ‘할렐루야’를 외치며 회중에게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1절). ‘감사’는 일회적인 감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감사의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이 위대한 것이기에 생각할수록 즐거워한다고 고백(2절)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섬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은 클 뿐만 아니라 존귀하고 엄위하며 의롭습니다(3절). 사람들은 주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기억하겠지만,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4절). 거듭되는 백성들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때를 따라 필요를 채워 주시던 하나님의 자비가 예배를 통해 새로워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언약 백성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구원하시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먼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이 매우 크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모든 행동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지금도 우리의 삶의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주변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행사가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사람의 것과 같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것이므로 오늘 우리가 충분히 신뢰할 만한 것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놀라우신 행사를 깨달은 사람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은혜와 자비로써 행하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진실과 정의로써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5~9절).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역사적 사건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그분의 백성에게 양식을 공급하신 일입니다. 또한 반역하는 이스라엘과 시내 산에서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사건입니다(5절).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6절). ‘진실과 정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신실하셨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을 멸하시고, 그들에게 학대받는 어려운 자들을 구원하시고 돌보심으로써 왕 적인 정의를 실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실과 정의는 모두 ‘확실합니다’. 즉 신뢰할 만하다는 것입니다(7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들은 영원토록 흔들리지 않으며, 신실함과 올바름 가운데서 행해지고 있기 때문(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습니다. ‘속량’은 출애굽부터 바벨론 귀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 보호, 구출을 포괄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심을 드러냅니다(9절).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기억하게 하셔서 그분을 찬양하도록 하셨습니다. 크신 권능과 기사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아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로 하여금 그것을 기억하여 찬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우리는 죄악의 늪에서 구출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진실과 정의로써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영의 눈을 갖는 것인데,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기억하고 생각함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긍휼과 사랑으로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10절).
시인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고백합니다. 진실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는 그분의 진실과 정의와 은혜와 자비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여호와와를 진실로 경외하는 자는 그분을 찬양합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 대한 찬양으로 시작한 시는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지속될 것을 전망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경외’라는 말은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무한한 존재 앞에서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갖는 두려움 그리고 거룩한 자 앞에서 죄 있는 자가 갖는 두려움은 참 지혜를 얻는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며(잠 8:13), 생명의 근원이 되며(잠 14:27), 장수에 이르게 합니다(잠 10:27).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지혜는 지혜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명령하신 약속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영원히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그리고 긍휼과 사랑으로 행하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믿음의 눈으로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며 위대하시고 놀라우신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언제나 변함없이 은혜와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깨닫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시 111:1~1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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