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광기
원제 : American Madness
1932년 미국영화
감독 : 프랭크 카프라
각본 : 로버트 리스킨
출연 : 월터 휴스턴, 팻 오브라이언, 케이 존슨
콘스탄스 커밍스, 개빈 고든, 아서 호이트
로버트 에멧 오코너, 에디 챈들러
우리나라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라는 말도 있고, '지성이면 감천' 이라는 말도 있지요. '엎친데 덮친격'도 있군요. '갈수록 태산'도 그렇고. 아,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도 있군요.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미국의 광기'는 딱 이런 속담이 연상되는 내용입니다.
아메리칸 드림 이라는 말도 있듯이 미국은 정말 크고 위대한 나라지만 그런 미국도 1930년대 극심한 경제공황에 시달렸습니다. 파산하는 사람들, 자살, 증시추락 등 거의 10여년을 털어먹은 이 경제공황은 2차 세계대전이 아니었다면 과연 회복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큰 위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를 통해서 미국은 대리만족과 판타지를 실현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 역시 '자본주의 판타지'입니다.
1930년대 할리우드 영화는 크게 '갱스터 무비'와 '스크루볼 코미디'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갱스터 무비는 금주법 시대인 1920년대를 배경으로 다룬 범죄영화로 실제 그 당시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부분입니다. 스크루볼 코미디는 남성 의존주의에서 벗어나서 여성이 독자적으로 주도하는 내용으로 속사포같은 빠른 대사가 특징입니다. 프랭크 카프라의 '미국의 광기'는 영화의 90%가 '은행'이라는 특정 장소에서 벌어지는 내용인데 교묘하게도 '갱스터 무비'와 '스크루볼 코미디'의 형태를 슬쩍 갖추고 있습니다. 1시간 15분밖에 안되는 짧은 러닝타임은 기관총을 쏘듯 빠르게 내지르는 속사포 대사로 인하여 30분은 시간이 단축된 느낌이고, 좀 과장스럽다 싶을 정도로 진행도 빠릅니다. 일주일 정도에 벌어질 일을 하루에 압축한 느낌인데 내용과 메시지 전달은 충분히 전달되었으니 이정도 과장은 뭐 무난히 용납됩니다. 그리고 갱스터 무비 장르는 아니지만 이날의 사건이 갱단과 엮인 어리석은 남자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니 연관이 있는 셈이죠.
영화가 무척 재미납니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더 재미납니다. 결말도 저에겐 만족스럽습니다. 비현실적인 결말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애초에 벌어진 사건 자체가 비현실적인 산너머 산이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딕슨(월터 휴스턴)이 은행장으로 있는 은행이 무대입니다. 딕슨은 한마디로 말하면 '굿맨' 입니다. 25년간 성실하게 은행을 운영했고, 악덕 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간적인 사업가입니다. 고객을 중요시하고 직원을 믿고 신뢰합니다. 성실한 사업가나 처지가 딱한 사람들에게는 신용대출도 기꺼이 해주지요. 이런 딕슨을 주주들은 마땅찮게 봅니다. 특히 '신용대출' 부분을. 그러나 딕슨은 주주들에게는 전혀 굽신거리지 않고 소신껏 경영을 하는 인물입니다. 우리나라 재벌중 딕슨 반만 따라가는 경영자가 있다면 아마도 훨씬 따뜻한 자본주의가 만들어졌을 겁니다. 우리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사장' 의 모습입니다.
맷(팻 오브라이언) 이라는 성실한 직원이 있네요. 무슨 실수를 해서인지 전과가 있지만 사장인 딕슨은 그를 고용하고 신뢰했습니다. 금고관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은행장 비서인 헬렌(콘스탄스 커밍스)과는 연인관계지요. 그는 자신을 믿고 고용해준 딕슨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더 열심히 일을 시작합니다.
네, 딕슨과 맷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위 인용한 속담처럼 엄청난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바로 그 두 인물인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는 불굴의 경영인 딕슨조차 고개를 떨굴만한 사건이 벌어지고, 맷도 사면초가에 몰리게 되는데 그 과정과 해결이 정말 재미나지요.
사건의 원인은 갱단에게 돈을 빌려서 도박을 했다 말아먹은 클루엣 이라는 인물 때문입니다. 그는 갱단의 협박에 못 이겨 그들에게 은행 금고를 털 상황을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본인의 알리바이를 위해서 사장인 딕슨의 아내 필리스(페이 존슨)를 이용합니다. 클루엣의 계획은 성공하는 듯 했지만 갱단에 의해서 경비원이 살해되고 맷이 범인으로 몰립니다. 맷은 쉽게 알리바이를 댈 수 있었지만 알리바이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합니다. 왜냐하면 맷은 클루엣과 필리스가 함께 있었던 장소에 본인도 있었고, 딕슨과의 의리를 위해서 필리스의 바람(맷은 클루엣과 필리스가 내연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으니까요. 존경하는 딕슨 부부에게 불화가 일어나는 건 원치 않았죠. 이로 인하여 살인과 절도 누명까지 쓸 위기입니다. 그리고 고작 10만달러 털린 것인데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은행이 파산위기라고 소문이 확대되자 예금주들이 몰려들어서 모두 돈을 인출하려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현금이 바닥나고 딕슨은 위기에 몰리죠.
주주들과의 갈등, 아내의 불륜에 대한 의심, 믿었던 부하직원의 살인누명, 거기다 예금을 찾아가려는 인파들의 아우성으로 정말 파산위기에 몰린 은행, 도움을 청해보지만 모두가 거절하고....사면초가에 올린 위기에 빠진 딕슨, 정말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은 없다' 입니다. 고개숙인 딕슨이 책상 서랍을 여는데 서랍안에 있는 권총이 카메라에 잡힐때는 정말 관객을 숨죽이게 만듭니다.
1시간 15분이라는 짧은 영화지만 사건이 발생하고 부터는 정말 파도타기를 하듯 출렁입니다. 대사도 더 빨라지고 제목처럼 광기어린 인파들이 몰려들고, 경찰, 예금주, 주주들 모두 몰려와서 딕슨을 다그치니....여기서 미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지요.
30년대 경제 대공황의 혼란, 프랭크 카프라 감독은 이런 미국의 경제위기 상황을 빗대서 은행 이라는 공간에서 '작은 미국'을 만들어냈습니다. 빛 문제, 가정문제, 가짜뉴스, 자본주의의 위기, 경영문제 등 여러 문제를 이 은행 이라는 한곳의 공간에 몰아넣고 사정없이 쏘아댑니다. 그리고 이런 위기속에서도 '의리' '정도' '의지'를 버리지 않고 정신바짝 차리고 극복하면 결국 기적처럼 살아나갈 수 있다 라는 희망을 쏘아올립니다. 여기서 '사필귀정'이라는 사자성어도 생각나네요. 위에 속담을 나열했지만 '산너머산' '첩첩산중' '사면초가' '사필귀정' '결자해지' 등 여러 사자성어도 따라옵니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몰아닥쳤던 1930년대 경제 대공황, 은행을 무대로 위기를 극복하고 더 탄탄해지는 결말을 보여줍니다. '비온뒤 땅이 굳는다'라는 말도 또 생각나는군요. 영화는 판타지 입니다. 현실의 비정함을 영화에서는 사필귀정으로 따뜻한 해피엔딩으로 판타지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화를 통해서 위로받다 보면 세상은 어느순간 진짜 판타지가 이루어질 수도 있는거죠. 위기가 물러가고 따뜻함이 찾아오게 되고 그렇게 살아가게 되지요. 다 지나가리다, 이겨내리라, 잘 되리라.... 이렇게 말이죠.
역시 프랭크 카프라 입니다. 그는 늘 따뜻했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행복을 찾는 이야기로 찾아왔습니다. '어느날 밤에 생긴 일'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멋진 인생' '포켓에 가득한 행복' '존 도우를 찾아서' 이런 영화들에서 주인공이 겪은 최악의 위기, 그런데 결말은 다 멋지게 해결되고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네 '전화위복'도 있군요. 이 영화 한편으로 갖다 붙일 수 있는 속담과 사자성어가 왜 이리 많을까요? 물론 '어느날 밤에 생긴일' 부터 '오페라 핫드(디즈씨 도시에 가다)' '잃어버린 지평선' '우리집의 낙원' '군중(존 도우를 찾아서)' 등 프랭크 카프라와 찰떡 콤비를 이루었던 명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리스킨의 훌륭한 각본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이런 수작이 나올 수 있었던거죠.
재미난 영화이고 드라마틱한 영화이고 판타지이고, 따뜻한 영화입니다. '의리'를 지켜서 보상받는 영화이기도 하고. 딕슨과 맷, 이 영화속 두 남자는 정말 사랑스런 캐릭터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올바르고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는 정말 필요합니다. 즐거운 직장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요. 딕슨과 맷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평점 : ★★★☆(4개 만점)
ps1 : 정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감독이 프랭크 카프라 입니다.
ps2 : 자본주의 왕국 미국답게 정말 1930년대 초반의 은행이 꽤 체계적인 느낌입니다. 금고는 정말 몇겹의 안전망으로 구축된, 대포를 쏴도 안전할 듯한 느낌입니다.
ps3 : 월터 휴스턴은 윌리암 와일러의 '공작부인'에서도 은퇴한 사업가로 등장했는데 두 영화에서 이미지가 많이 비슷합니다. 무성영화 시대에 활동하던 배우가 정말 놀라운 대사 소화력을 지녔습니다.
ps4 : 맷을 연기한 팻 오브라이언은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에서 범죄자가 되는 어릴때 절친 제임스 캐그니와의 따뜻한 우정을 보이는 역할이 인상적이었는데 여기서도 사장인 딕슨과의 의리를 굳게 지키는 인물입니다. 외모 자체가 따뜻한 느낌입니다.
[출처] 미국의 광기(American Madness, 32년) 은행을 배경으로 한 수작 드라마|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