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와 악마
원제 : Flesh and the Devil
1926년 미국영화
원작 : 헤르만 주더만
감독 : 클래런스 브라운
출연 : 존 길버트, 그레타 가르보, 라스 한손
바바라 켄트
'육체와 악마'는 독일의 소설가 겸 극작가 헤르만 주더만 원작의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입니다. 헤르만 주더만은 독일권 작가중 헤르만 헤세나 괴테 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작품을 남긴 작가입니다. 무성영화 후기의 걸작 '선라이즈'의 원작자이기도 했으니까요. 무성영화 시대에 그의 작품은 상당수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그중 한 편이 '육체와 악마'인데 이 작품은 전설급 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출연한 작품이라서 많이 알려졌습니다. 국내 출시된 DVD만 해도 꽤 깨끗한 화질이거든요.
이 영화에서 그레타 가르보는 존 길버트와 공연하는데 1933년에 출연한 '크리스티나 여왕'때와는 많이 다른 상황입니다. '크리스티나 여왕'의 경우는 그레타 가르보가 원톱 주연이고 이 여배우를 중심으로 다른 출연진이 구성된 영화입니다. 하지만 '육체와 악마' 출연 당시만 해도 그레타 가르보는 스웨덴에서 막 할리우드에 건너온 무명의 신예였고, 존 길버트는 무성영화 시대의 대단한 스타였습니다. 전설의 미남으로 알려진 루돌프 발렌티노의 라이벌급이라고 했었고, 출연료도 상당히 높았으니까요. 영화의 오프닝만 봐도 제목과 존 길버트의 이름이 메인 중심에 박혀 있고, 그레타 가르보를 비롯한 나머지 출연진이 하단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나 여왕' 에서의 그레타 가르보의 위상이 당시에는 존 길버트가 차지하고 있었던거죠.
어릴때부터 단짝이던 레오(존 길버트)와
울리히(라스 한손)
여동생 앞에서 피의 맹세로 영원한 우정을
다짐하는 레오와 울리히
우리가 영화로 볼 수 있는 가장 젊은 그레타 가르보
자신을 좋아하는 친구의 여동생과 춤을 추다
펠리치타스(그레타 가르보)를 발견하고
넋을 잃는 레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 된다.
내용은 지금 보면 진부할 수 있는 삼각관계 영화입니다. 매혹적인 한 여성 때문에 '흔들린 우정'이 발생하는 이야기입니다. 레오(존 길버트)와 울리히(라스 한손)는 어린시절에 '우정의 섬' 이란 곳에서 피를 나눈 절친입니다. 둘은 어른이 되어서 같은 부대에서 복무하면서도 뗄 수 없는 우정관계를 유지합니다. 평생 우정이 변치 말자는 어릴때 한 약속을 지키며 훈훈한 관계로 지내고 있지요. 어느날 무도회에 춤을 추러 간 레오는 매혹적인 여인 펠리치타스(그레타 가르보)를 만나서 한눈에 반하게 됩니다. 펠리치타스의 매력에 이끌려 그녀의 집에까지 가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던 레오, 그런데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납니다. 펠리치타스는 유부녀 였던 것이죠. 그녀의 남편인 백작과 레오는 남자대 남자로 결투를 벌이게 됩니다. 옛날시대 영화에서 많이 보던 방식 있죠? 등을 지고 서서 몇 발자국 걸어간 다음 돌아서서 권총대결을 벌이는 결투, 그 결투로 백작은 사망하고 펠리치타스는 미망인이 되지요. 이 사건으로 레오는 징계를 받아서 아프리카로 5년간 복무를 떠나게 됩니다. 레오와 펠리치타스는 눈물의 이별을 하고 5년뒤에 다시 만날 것을 굳게 다짐하지요. 혼자가 된 펠리치타스가 걱정이 되어 레오는 절친인 울리히에게 그녀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합니다.
혼자가 된 매혹적인 여인을 5년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것은 아무리 깊은 우정관계라고 하더라도 젊은 남자의 욕구를 감안하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죠. 더구나 펠리치타스는 음탕하고 매혹적인 여자였고, 울리히는 부유한 집 아들이었습니다. 두 사람간에 뭔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는 건 어려운게 아니지요.
3년이 지난후 레오는 특별사면을 받고 집에 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워했던 펠리치타스는 이미 울리히의 아내가 되어 있었죠. 그리고 자기 집에는 자신을 사랑하는 헤르다(바바라 켄트)가 어머니를 돌보고 살고 있는데 헤르다는 울리히의 여동생이고, 어릴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이입니다. 억장이 무너질 일이죠. 다시 만날 그날만을 기다리며 3년을 그리워했던 여자는 친구의 아내가 되어 있고, 그 친구의 여동생이 자신과 결혼할것을 잔뜩 기대하며 집에 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니....
육체의 향연에 젖은 레오와 펠리치타스
유부녀였던 펠리치타스는 남편에게 들키게 되고...
레오는 결투로 펠리치타스의 남편을 죽이고
아프리카로 5년간 근복무를 하게 된다.
펠리치타스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레오와 헤어지는 것을 슬퍼한다.
레오가 아프리카로 떠난 사이에 레오의 부탁으로
혼자 남은 펠리치타스를 보살피러 온 울리히
하지만 그는 펠리치타스의 매력에 푹 빠진다.
이후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요? 뭐 일상적인 통속적 흐름으로 흘러갑니다. 친구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그랬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쿨하게 다시 우정을 이어가려고 하고, 하지만 결국 옛 연인들은 참지 못하고 불장난을 벌이고, 그러다 들키고 파국을 맞이하죠. 그런데 결말은 음탕한 여인은 벌을 받고 두 남자의 우정은 다시 회복되고 있습니다. 요즘이라면 다른 결말이겠죠. 아무래도 보수적인 20세기 초의 상황은 남녀간의 불륜은 음탕한 여자의 책임으로 돌렸던 것 같습니다. 물론 레오 입장에서 보면 유부녀인줄 모르고 한 여자에게 빠져들었다가 당한 것이니 억울할만 하죠. 그럼에도 참고 기다렸지만 친구에게 빼앗기고. 아무튼 여자 하나때문에 굳은 우정이 흔들리게 되는 내용입니다.
제목 '육체와 악마'는 그야말로 펠리치타스를 지칭하는 제목입니다. 나이든 목사가 레오에게 절대 펠리치타스를 다시 만나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 설교 중에 '악마는 영적으로 인간에게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 형상화된 육체의 모습으로 인간을 유혹한다'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펠리치타스는 육체를 무기로 남자에게 접근한 사악한 인간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존 길버트는 유성영화 시대가 되면서 목소리 문제로 나락으로 떨어진 배우로 기록되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근사하지는 못해도 크게 문제가 될만큼 치명적이지도 않습니다. MGM의 루이스 메이어 사장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목소리가 꼬투리를 잡힌 것인데 1926년 '육체와 악마' 출연당시에는 썩 잘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멋지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의 비중이나 외모는 '크리스티나 여왕'에 출연할 때 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렇다고 톱스타가 될만한 근사한 분위기는 아니라고 보여지니까요. 동시대 활동한 배우들중에서는 존 배리모어나 루이 주베, 보리스 칼로프, 모리스 슈발리에가 훨씬 개성있거나 깔끔한 외모라고 생각되긴 합니다. 하지만 '찰리 채플린' '막스 형제' '버스터 키튼' '해롤드 로이드' 등 코미디 영화에서 인기를 모았던 배우들이 많았던 시대에 진지하고 무게감있는 연기에서는 존 길버트 같은 배우가 중용되었던 셈이지요. 아무튼 두드러진 개성이나 매력이 뛰어난 배우는 아니라고 생각되지요. 비슷한 나이의 배우 중에서는 샤를르 보와이에, 프레드릭 마치, 험프리 보가트 등이 유성영화 시대에 물만난 고기처럼 활약을 했고 존 길버트는 빛을 못 봤습니다.
3년만에 아프리카에서 돌아왔더니
친구의 아내가 된 펠리치타스
펠리치타스 때문에 피의 맹세로 맺어진
오랜 친구의 우정에 금이 가게 되고....
펠리치타스의 중재로 어렵사리
화해를 하게 된 두 친구
스웨덴에서 할리우드에 막 진출하여 출연한
이 영화가 성공하여 꽃길을 걷게 된 그레타 가르보
그레타 가르보 에게 이 영화는 굉장히 '기회의 땅' 이 됩니다. 스웨덴에서 몇 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와 1926년에 두 편의 영화에 출연하는데, 이 영화에서 존 길버트라는 잘 나가는 배우와 공연하였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잘 이끌어내며 화면을 장악했습니다. 그레타 가르보는 당시 여배우로는 꽤 큰 키를 가졌는데 이 영화에 함께 등장하는 바바라 켄트를 외모와 몸매에서 완전 압도합니다. 너무 아이처럼 앳되 보이고 아담했던 바바라 켄트와 달리 굉장히 요염하고 늘씬한 몸매와 세련되면서도 음탕한 팜므파탈 같은 분위기를 잘 보여주었으니까요. 우리가 무성영화 시대를 생각하면 쉽게 연상되는 짙고 이상한 화장과는 다른 좀 더 뒷시대 느낌이 풍기는 그레타 가르보의 큰 키와 강한 외모는 30년대에 더 잘 먹힐 스타일이었고, 이후 30년대 유성영화 시대가 된 이후 그레타 가르보는 여배우로서 더 빛을 발했습니다. 비영어권 태생으로서 초기 유성영화에 생각외로 잘 적응한 셈이죠. 물론 외국여성 역할을 많이 하긴 했지만.
당시 그레타 가르보는 21세였고, 미국 영화계에서는 완전 신예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레타 가르보의 실제 나이가 과연 1905년 생일까 의심스럽긴 합니다. 이 영화에서 바바라 켄트와 2살 차이인데 바바라 켄트는 아직 어린 소녀 같고 그레타 가르보는 완전히 성숙한 여인이니까요. 물론 그 시대 여자들이 빨리 어른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캐서린 헵번(1907년생)이나 마를레테 디트리히(1901년생)과 비교해도 그레타 가르보는 너무 노안이거든요. 21세의 풋풋하고 앳된 분위기가 아닌 너무 요염하고 성숙한 역할이 무난할 정도니까요. 30년대 20대 후반시절 상당한 노안분위기였던 것을 보면 대략 4-5살 정도 나이가 적게 알려진게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펠리치타스와 레오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불륜을 저지른다.
레오와 펠리치타스의 관계를 알게된 울리히
레오를 사랑했던 울리히의 여동생
존 길버트가 한창 잘 나가던, 무려 루돌프 발렌티노와도 라이벌로 거론되던 시절 출연한 영화이며 그레타 가르보가 미국 영화계에 성공적으로 입성하게 된 출세작입니다. 좋은 시대가 되어 한때 전설속 인물로만 취급되던 그레타 가르보나 존 길버트 출연작을 이렇게 직접 고화질로 확인할 수 있고, 그들의 명성이나 이야기등에 대한 부분을 영화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국내에 출시된 그레타 가르보 출연영화만 무려 8편입니다. 그중 가장 일찍 출연한 작품이 이 '육체와 악마'고 현재 이 영화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젊은 그레타 가르보의 모습이 나오는 작품이지요. 두 남자의 우정을 산산히 무너뜨렸지만 그 대신 하늘의 벌을 받게 되는, 어떻게 보면 가련한 여성 역할입니다. 영화에서의 비참한 최후와는 달리 실제 여배우로는 아주 높이 비상을 하는 계기가 된 작품이 되었지요.
ps1 : 클래런스 브라운이 연출했는데 이후 그가 연출한 '안나 크리스티'나 '안나 카레리나' 등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에 그레타 가르보가 계속 출연합니다.
ps2 : 당시 결투방식이 지금 시점에서 매우 이해가 안갑니다. 문제가 벌어지면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는거지 결투로 해결하다니... 그럼 잘못한 사람이 이기면 빠져나가는 구실이 되는데.
ps3 : 이 작품은 헤르만 주더만의 대표작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소개글에서 이 작품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ps4 : 세 명의 주요 인물중 그레타 가르보의 남편이자 존 길버트의 절친인 울리히 역의 라스 한손 역시 스웨덴 배우입니다. MGM 이 만든 미국영화지만 독일 원작, 스웨덴 배우 2명을 출연시켰네요.
ps4 : 매우 놀랍게도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 시절이던 1929년 10월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 올립니다. 한자가 난무하던 시대에 전체 문장이 오로지 한글로 나온 것이 놀랍네요.
[출처] 육체와 악마(Flesh and the Devil, 1926년) 존 길버트와 그레타 가르보|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