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너 충녕대군 도는 관홍장중(寬弘莊重)하다.” 1418년(태종18년) 6월 17일 태종이 세자였던 양녕(讓寧)대군을 폐세자시키고 셋째 아들 충녕(忠寧)대군을 새롭게 세자로 책봉하는 글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즉 세종대왕이 세자로 책봉될 때 그 이유가 바로 관홍장중(寬弘莊重)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세종대왕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어진(御眞)이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어진은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영조, 불타다 남은 철종의 것이 남아 있다. 고종은 사진이 있다. 어진이나 사진이 있으면 그 외모를 살피며 당시의 역사로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아쉬울 뿐이다. 사진이 없던 시절 조선에는 ‘관홍장중’처럼 한 사람의 겉과 속을 두루 살필 수 있는 ‘네 글자 평판’이 있었다. 글로 표현하는 한 인물의 생애에 대한 사진이라고나 할까? 이 네 글자 평판은 조선 특유의 것이 아니고 옛날 중국에서 비롯됐다. 그것은 공자(孔子)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논어(論語)》 학이편에서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은 스승인 공자를 다음과 같은 네 글자로 표현했다. “스승님께서는 온량공검(溫良恭儉)하시다.” 온량공검(溫良恭儉)하다는 평을 받은 공자.
이 글은 문맥을 함께 보아야 한다. 자금(子禽)이라는 사람이 공자의 제자인 자공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찾아간 나라에 이르셔서 반드시 그 정사(政事)를 들으시니 그분이 (정치에 관심이 많아) 그렇게 하려고 구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제후가 먼저 공자에게 청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자공은 이렇게 답했다. “공자께서는 온량공검(溫良恭儉)하시어 사양함을 통해 그것, 즉 정치참여의 기회나 지위를 얻은 것이니 설사 공자께서 먼저 원해서 얻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구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네.” 흥미로운 것은 세종이나 공자 모두 스스로 정치적 지위를 억지로 추구한 것은 아니고 세종은 ‘관홍장중’했기에, 공자는 ‘온량공검’했기에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공자는 짧게나마 노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라고 하는 고위직에 오른 적이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법무부장관이나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자리다. 우리가 사서삼경이라고 할 때 포함돼 있는 《서경(書經)》이라는 책에는 요(堯)임금의 인물됨을 나타내는 표현이 나오는데 역시 네 글자다. 삼경은 모두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진다. 즉 공자가 요임금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요임금께서는 흠명문사(欽明文思)하시어 (그분의 정치는) 억지스러움이 없고 자연스러워 편안했다.” 이번엔 흠명문사(欽明文思)다. 이제 12자나 쌓였으니 그것을 풀어야 할 차례다. 그것을 푸는 비밀은 한 글자씩 읽어내는 데 있다. 먼저 ‘흠명문사’다. 송나라 정치가이자 문인인 진덕수(眞德秀)가 쓴 제왕학 《대학연의(大學衍義)》(해냄 이한우 옮김)의 도움은 결정적이다. “흠(欽)이란 삼가지[敬] 않음이 없다는 뜻이고 명(明)이란 환하게 밝히지 않음이 없다는 뜻이며 문(文)이란 (꽃부리) 안에 잠재되어 있던 것을 밖으로 남김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英華之發見]이고 사(思)는 뜻하고 생각하는 바가 깊고 멀다는 것이다.” 문(文) 하면 ‘글월 문’ 하는 지금 식의 우리 한자 수준으로는 사실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명(明)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무엇을 환하게 밝힌다는 것인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논어》 학이편에서 공자의 제자인 자장(子張)이 밝음[明]에 관해 묻자 공자는 말했다. “서서히 젖어드는 참소(讒訴)와 살갗을 파고드는 하소연[愬]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 정사는 밝다[明]고 이를 만하다.” 즉 신하들 간의 중상모략을 분별해 내고 친지들의 애끓는 민원청탁을 끊어 내는 것이 밝다는 뜻이다. 흔히 어떤 지도자가 굳세고 밝다[剛明]고 할 때 밝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인 것이다. 이제 역순으로 자공이 공자를 평했던 온량공검(溫良恭儉)이다. 온(溫)이란 조화를 이루어 냄이 두텁다[和厚]는 뜻이고 양(良)은 고상하고 순수하다[尙粹]는 뜻이며 공(恭)은 마음 속의 삼감이 밖으로 나타나서 정중하다는 뜻이고 검(儉)은 마음에 절제가 있다는 뜻이다. 이 또한 기존의 번역처럼 따뜻하고 선량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다고 옮겨서는 본뜻에 다가갈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태종이 세종을 평했던 관홍장중(寬弘莊重)이다. 관(寬)이란 신하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재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홍(弘)은 마음 씀이 넓고 크다는 뜻이며 장(莊)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장엄하다는 뜻이고 중(重)은 그 내면이 묵직하다는 뜻이다. 겉[寬]과 속[弘], 겉[莊]과 속[重]이 잘 짜인 표현이다. 특히 네 글자의 첫머리에 있는 ‘관’은 세종의 인물됨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글자다. 그냥 너그러움이 아니다. 유학에서 ‘관’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여러 가지 재능을 요구하지 않고 한 가지만 잘하면 그것을 발휘하게 해 준다는 뜻이다. 즉 세종 때 장영실의 경우처럼 천문과 기기 제작에 탁월하면 노비라는 신분을 문제 삼지 않고 그 한 가지 재주를 높여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 ‘관’이다. 반대로 아랫사람에게 여러 가지 재능을 요구하면 그런 윗사람을 인(吝)이라고 한다. 아끼다, 인색하다는 뜻이다. 임금의 시호 네 글자 평판은 무엇보다 조선시대에 임금의 묘호(廟號)를 정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묘호란 세종(世宗), 중종(中宗), 철종(哲宗) 할 때의 그 세(世), 중(中), 철(哲)이다. 당시에는 임금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신하들이 임금의 행적을 잘 정리한 다음 그것을 네 글자로 요약해 그것을 바탕으로 묘호를 정했다. 실록에 어떤 네 글자로 세(世)라는 묘호를 정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치세를 이루다, 혹은 태평성대를 이룩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중종의 경우에는 연산군으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중흥하여 다시 안정시켰다[中興再安]는 취지를 담아 중(中)이라고 했다. 그러면 철(哲)은 무슨 뜻일까? 일반적으로 슬기롭고 총명하다는 뜻이다. 아마도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제동을 거는 ‘무모함’을 행하지 않고 조용히 있다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안동 김씨들이 가상히 여겨 이렇게 붙여준 것은 아닐까? 식민지 상태에서 세상을 떠난 고종(高宗)에게 고(高)라는 묘호가 붙은 이유는 조기입극(肇紀立極), 즉 비로소 기강을 세우고 표준을 세웠다는 말인데 솔직히 모르겠다. 전형적인 암군(暗君)에 속하는 명종(明宗)에게 명(明)이라는 묘호가 붙은 것도 역설적이다. 물론 이는 그 자신이 죽기 전에 원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중국 한나라 말기의 대학자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열녀(烈女)에 대한 이야기를 모은 것이 아니다. 뛰어난 여성들을 평가한 책이다. 그래서 사람 보는[知人] 훈련서로 이만한 책을 얻기 어렵다. 바로 이 책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네 글자 인물평이다. 순(舜)임금의 두 부인이자 요임금의 딸로 서로 자매였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에 대해 덕순행독(德純行篤), 즉 아내다움은 맑고 순수했으며 그 행실은 신실하고 도타웠다고 평한다. 은나라를 세운 탕(湯)왕의 부인 유신(有㜪)에 대해서는 명이유서(明而有序), 즉 밝고 차례를 지킬 줄 알았다고 평한다. 아홉 명의 후궁을 슬기롭게 잘 거느린 데 대한 호평이다. 이처럼 네 글자 모두가 반드시 각각의 뜻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식으로건 네 글자의 틀은 유지했다. ‘문(文)’의 의미 그리고 임금이 아닌 신하에게 시호를 붙여주는 장면이 《논어》 공야장편에 나온다. 사람 보기[知人]를 좋아했던 자공이 또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대부인 공문자에게 문(文)이라는 시호를 내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공자는 말했다. “공문자가 행하는 데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敏而好學],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아[不恥下問] ‘문’이라 일렀다.” 앞서 요임금을 이야기할 때 보았던 그 ‘문’이다. 그런데 그때는 영화지발현(英華之發見)이라고만 했는데 여기서는 민이호학(敏而好學)과 불치하문(不恥下問)하기 때문에 ‘문’이라는 시호를 주었다고 말한다. 포괄적 의미에서 ‘애쓰다’라고 할 수 있는 ‘문’에는 그 밖에도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시호법에서 ‘문’이라는 시호를 받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경천위지(經天緯地)했을 때도 ‘문’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경(經)은 날줄, 위(緯)는 씨줄로 천지의 도리를 밝히는 것을 경천위지라고 했다. 주나라 문왕(文王)이 그랬고 문선왕(文宣王-문을 널리 펴다)이라는 시호를 받는 공자(孔子)도 그런 경우다. 그 밖에도 도덕박문(道德博聞), 도덕박문(道德博文), 박학다문(博學多聞), 근학호문(勤學好問), 근학호문(勤學好文), 박학다식(博學多識), 박학다견(博學多見), 민이호학(敏而好學), 경직자혜(敬直慈惠-안으로 삼가고 밖으로 곧아 사랑과 은혜를 베풀다), 자혜애민(慈惠愛民), 충신첩례(忠信接禮-충성과 신의를 다해 예로 모시다), 충신애인(忠信愛人), 강유상제(剛柔相濟-굳셈과 부드러움을 함께 써서 가지런히 하다), 민민혜례(愍民惠禮-백성을 위로하고 은혜와 예를 베풀다), 수덕래원(修德來遠-임금의 다움을 닦아 먼 곳 나라 사람들을 오게 하다), 시이중례(施而中禮-예를 베푸는 것이 법도에 맞아떨어지다) 중 하나에 해당되면 ‘문’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문(文)은 사실 유학적 세계관에서는 가장 높은 평가를 담고 있는 말이다. 건국자를 제외하면 가장 좋은 것이 ‘문’이 들어가는 임금이었다. 주나라에서 문왕(文王), 무왕(武王)이 이어지고 한나라에서 문제(文帝), 무제(武帝)가 이어졌다. 그리고 수(隋)나라는 아예 나라를 세운 황제를 문제(文帝)라 했다. 그만큼 ‘문’이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글월 문’ 정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도 ‘문’의 이 같은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예를 들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등이 ‘문’ 자가 들어가는 시호를 받았다. 퇴계 이황의 경우 사후에 문순공(文純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도덕박문(道德博聞), 즉 도덕이 뛰어나고 학식이 넓어 ‘문’이라 했다.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받는 율곡 이이 또한 같은 이유로 ‘문’이라 했다.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우암 송시열도 마찬가지 이유로 ‘문’이라 했다. 이들 사이에 순(純), 성(成), 정(正)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말 그대로 ‘순’은 도덕박문이 깨끗했고 ‘성’은 도덕박문을 이뤄냈으며 ‘정’은 도덕박문이 바르고 곧았다는 뜻이다. 나라에서 주는 시호의 경우 문신에게는 ‘문’ 이외에 정(貞) 공(恭) 양(襄) 정(靖) 등이 있었고 무신에게는 충(忠)을 비롯해 무(武) 의(義) 등이 주로 앞에 사용됐다. 그러나 조선중기의 정승 이산해(李山海)의 경우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처럼 반드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송시열 vs 윤증 조선 후기 당쟁의 중심에 섰던 송시열.
나라에서 시호를 내릴 때는 일정한 절차가 있었다. 먼저 시호를 내릴 만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자손이나 친척들에게 행장(行狀)을 지어 예조에 올리도록 한다. 이때 가능하면 조정에서 명망 있는 사람이 행장을 지을수록 뒤에 가서 좋은 시호를 받을 수가 있다. 동시에 행장의 내용은 시호의 근거가 되는 네 글자로 요약될 것이기 때문에 시호법에 밝은 사람이 행장을 지을수록 좋은 시호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와 관련해서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의 일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문난적(斯文亂賊), 즉 간사한 자[邪]를 배척하고 바름[正]을 세웠다고 자부하는 송시열이 숙종 초 경상도 장기에 유배를 가 있을 때 윤증(尹拯)이 찾아왔다. 송시열이 윤휴(尹鑴)와 사문난적 논쟁을 벌일 때 맞상대였던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다. 한때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했다. 윤증은 현종 10년(1669년) 아버지 윤선거가 세상을 떠나자 박세채(朴世采)에게 행장을 요청했다. 그리고 현종 14년에는 송시열에게 묘비명을 부탁했다. 그런데 반년 후쯤에 보내온 묘비명은 무성의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은근히 자신의 아버지를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박세채의 행장을 그대로 옮겨 적은 다음 끝에 “현석(玄石-박세채)이 윤선거를 극히 찬양했기에 나는 그대로 적기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고 쓴 것이다.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을 패러디하여 사실상 윤선거를 비판하는 취지로 이렇게 쓴 것이다. 원래 술이부작이란 말은 공자의 저술 원칙으로, 편집만 하지 새롭게 내용을 창작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뒤집어 자신의 아버지를 비방했으니 송시열이 아무리 스승이라도 참을 수가 없었다. 윤증은 여러 차례 비문 개정을 요청했으나 송시열은 끝내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비록 공(公-윤선거)을 따른 지 오래지만 그 깊은 학문은 엿보지도 못했다”는 설상가상 식의 답변만 보내왔기에 이때 장기에까지 찾아갔던 것이다. 송시열과 윤선거 부자는 서인, 윤휴는 남인이었다. 그런데 윤증이 아버지에 대한 윤휴의 제문을 수용한 적이 있었다. 송시열은 윤증이 남인의 제문을 받았다 하여 이처럼 같은 당인인 윤선거 부자에 대해 박절하게 돌아선 것이다.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은 결국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런 논란 끝에 윤선거는 소론이 집권하게 된 숙종 36년(1710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이듬해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당쟁 격화는 이처럼 시호를 받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사실 이쯤 되면 시호는 실제 그 사람의 모습을 담기보다는 미화(美化) 쪽으로 쏠리게 된다. 공로만 남고 인물평 사라져 이순신에게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린 인조의 교서.
다시 시호를 받는 절차다. 예조에서는 이렇게 올라온 행장을 봉상시(奉常寺)로 보낸다.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아다. 이곳이 바로 행장을 검토해 그 사람의 성품과 생애를 네 글자[四字]로 요약하는 관아다. 그리고 후보가 될 만한 시호 세 가지[三望]를 골라 홍문관에 보낸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의 경우 선조나 광해군 때 시호를 받지 못하고 인조 21년(1643년) 3월 28일에야 뒤늦게 시호를 받았다. 이때 세 가지 후보는 충무(忠武), 충장(忠莊), 무목(武穆)이었다. 홍문관에서는 의정부 사인(舍人-오늘날 국무조정실장) 등 관계자들과 모여 최종 검토를 한 다음 서명을 하고서 이조로 넘긴다. 그러면 임금이 최종적으로 세 후보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 인조의 경우 이순신에 대해 충무(忠武)를 골랐다. 이 때 충(忠)이란 위신봉상(危身奉上), 즉 일신의 위험을 감수하며 위를 받들었다는 뜻이고 무(武)는 절충어모(折衝禦侮), 즉 적의 창을 꺾어 나라의 치욕을 막아냈다는 뜻이다. 아쉽게도 여기에는 이순신의 공로만이 드러나 있을 뿐 인간됨을 알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다. 네 글자 평판이 국가에 의해 공식화하면서 혹은 정치화하면서 인물됨은 점점 사라지고 외적인 공적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글자 인물평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무엇보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사람을 중시 여기는 전통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증거이기도 하다. 어떤 형태로건 복원된다면 지금처럼 사람을 가벼이 여기는 풍토를 고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