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간 수요일 강론>(2024. 1. 24. 수)(마르 4,1-20)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1-2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3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3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15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16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17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18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19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버린다.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 4,15-20).”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길’은 말씀을(예수님의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즉 신앙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이미 다른 종교에 빠져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비유에는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탄의 유혹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나자렛 사람들’을 ‘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마르 6,1-6).
그들은 예수님의 출신과 직업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랬는데,
사탄이 그 편견을 부추긴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돌밭’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세례는 받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뿌리’가 없다는 말은,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삶으로’ 실천하지는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돌밭’인 사람들은 박해 때에 금방 배교합니다.
말로만 믿고, 생각으로만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6-27).”
옛날의 박해와 같은 고난이나 시련이 없는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마치 취미생활처럼 하다가
어떤 위기를 만나면 금방 떨어져 나갑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을 취미생활 하듯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만 하고, 마음이 내킬 때에만 하고......
간절함도 없고, 정성도 없고, 적극적이지도 않고...>
‘가시덤불’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세례를 받고,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먹고사는
문제나 세상일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고, 믿음으로 극복하기에는
걱정거리가 너무 커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조금씩이라도
‘가시덤불’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하면서도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데마스’ 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가시덤불’의 예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대는 서둘러 나에게 빨리 오십시오.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 티키코스는 내가
에페소로 보냈습니다(2티모 4,9-12).”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들, 또는
동료들로서 바오로 사도와 함께 선교활동을 했던 사람들인데,
‘데마스’ 라는 사람은 너무 힘들어서 그랬는지, 믿음이 식어서
그랬는지, 바오로 사도를 ‘버리고’ 세속으로 돌아갔습니다.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라는 말을 근거로 해서,
그의 마음이 세속 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지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꺾였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좋은 땅’은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좋은 땅’의 경우에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다.” 라는 말은,
“믿고, 믿는 대로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태오복음에는 ‘깨닫는다.’ 라고 표현되어 있고(마태 13,23),
루카복음에는 ‘간직하다.’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루카 8,15),
‘받아들이다.’ 라고 표현하든지, ‘깨닫는다.’ 라고 표현하든지,
또는 ‘간직하다.’ 라고 표현하든지 간에 이 말들은 모두
‘실천하는 믿음’을 뜻하는 말들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26).”
받아들인다, 깨닫는다, 간직한다, 라는 말들을 표현 그대로만
생각하고 뜻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실천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전해 주지도 않고, 그저 간직하기만 하는 것은,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마태 5,15).
감추어진 말씀은 생명력을 잃어서 아무런 힘도 없게 됩니다.
[출처] 연중 제3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