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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신문 정치부 기자인 금님은 기사 마감 시간이 임박해오자 연신 기사 내용을 손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데스크에 보네야 할 기사가 최종 마무리 단계에서 자꾸 브레이크가 걸리곤 했던 것이다. 특히 오늘 같이 특종 기사가 발생 했을 때는 데스크의 독촉이 더 심했다.
“아유! 손이 열 개라면 좋겠네! 이거야 원 똥 누고 뒤도 닦지 못하겠네! 사람을 아주 달달 볶아요!”
금님이 투덜대면서도 기사 수정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때 그녀 뒤에서 편집부의 박 부장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렸다.
“임 기자! 기사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어? 마감 시간이 임박한데 도대체 뭐하는 거야? 또 낮술 먹었어?”
박 부장이 그녀를 향해 버럭 언성을 높였다. 금님은 치밀어 오르는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박 부장에게 대꾸를 했다.
“부장님! 이제 겨우 부장님으로서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우리 유정의 미를 남깁시다! 내일이면 국장이 되실 분이 너무 쫀쫀한 것 아니에요?”
금님이 지지 않고 대답하자 박 부장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뭐라고! 내참! 오늘은 참는다만 임 기자 말대로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편집부를 떠나니까 참는 줄 알아!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이름이 임금님이면 하는 짓도 임금님이 돼야 하는 것 아니야? 이건 뭐 동네 깡패도 아니고 여자가 말투가 그게 뭐야? 참 누가 데려 갈지 걱정이다. 걱정!”
“걱정 마세요! 차라리 아이 셋 달린 홀아비에게 갈망정 부장님 더러 데려가 달라고는 하지 않을 태니.”
금님이 부장을 향해 입을 삐죽거렸다. 지켜보던 다른 기자들이 고개를 돌리고 킥킥 웃어 댔다. 그때 사진부의 박 기자가 금님에게 다가왔다. 손에는 몇 장의 사진이 들려 있었다. 박 기자가 부장 눈치를 살피며 금님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오늘 판문점 사진 나왔는데 봐 줄래?”
박 기자가 사진을 금님에게 건넸다. 기사와 함께 실릴 사진을 골라달라는 것이었다. 사진은 모두 별 특징 없는 사진들이었다. 그래도 그중 괜찮다 싶은 사진을 고르고 기사와 함께 데스크에 올려 보냈다. 전송이 모두 끝나자 박 기자가 금님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보여 줄게 있는데.”
“뭔데요?”
“사진이야. 그런데 좀 특이한 사진이 찍혔단 말이야.”
“특이한 사진이라니요? 그게 뭔데요?”
박 기자가 자신의 가방 속에서 사진 두 장을 꺼내 금님에게 내밀었다.
“이거 오늘 판문점의 히어로인 이상호를 찍은 사진이야. 그런데 이걸 좀 봐.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아? 이 동작 말이야!”
빅 기자가 내민 이상호의 사진은 손바닥을 환하게 펼치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게 왜요? 뭐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박 기자가 사진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이 동작 말이야. 이 동작 보고 느낀 것 없어?”
“동작이오? 손바닥 펴는 것 말이에요? 이게 왜요?”
“어허! 임 기자 초등학교 때 걸 스카우트 하지 않았어? 아니 어떻게 이 동작을 모르는 거야? 이건 바로 구조 요청 동작이야! 위급할 때 구조 해달라는 신호 말이야!”
“네? 구조 요청이라고요? 설마!”
금님이 말도 안 된다는 어투로 웃었다. 그러자 박 기자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어. 그런데 말이야 어떻게 이런 동작을 두 번 연거푸 할 수 있지? 그것도 국정원 요원에게 말이야!”
금님이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국정원 요원에게 라면 그, 그럼 오늘 본 그 국정원 요원에게 이 신호를 보냈단 말이에요?”
박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요? 분명 국정원 요원에게 보넨 신호란 말이지요?”
금님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리고는 박 기자에게 물었다.
“그 국정원 요원 만날 수 있지요? 술친구라면서요?”
“지금 말이야? 아니 그때는 우연히 불광동에서 만나 같이 한잔 했던 거지. 지금도 만날 수 있다고 장담 할 수는 없지.”
“무슨 말이에요? 대한민국 기자가 못 만날 사람이 어딨어요? 잔말 말고 당장 시간 약속 정해 보세요! 당장 말에요!”
금님이 재촉을 했다. 금님의 성격을 잘 아는 박 기자가 난처한 얼굴을 했지만 이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어디 한 번 해보지 뭐. 천하의 임금님께서 한번 보자는데 미천한 것들이 거절이야 하겠어? 안 그래?”
박 기자의 말에 금님이 생긋 웃었다. 박 기자가 전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박 기자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됐어! 앞으로 두 시간 후에 명동 로얄호텔에서 만나기로 했어.”
“로얄호텔이라고요? 하필 복잡한 명동이에요?”
“어쩔 수 없었어. 그 사람이 한 시간 후에 다른 사람과 거기서 약속이 잡혀 있대. 그래서 우리는 두 시간 후에 만나기로 했어.”
금님은 시계를 봤다. 약속시간 까지는 약 한 시간 반 정도 여유가 있었다. 박 기자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상대가 국정원인데 쉽게 입을 열겠어? 그 사람들 입 열지 않기로 유명하잖아.”
맞는 말이었다. 국정원 요원들은 절대로 정보를 누설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북쪽과 관련된 정보를 쉽게 입을 열리가 만무했다.
“걱정 마요! 내게도 생각이 있어요.”
“어떻게 하려고?”
그러자 금님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취재가방을 가리켰다.
“지난 번 우리 중국 폭력조직인 삼합회를 취재한 적이 있었잖아요? 기억나요?”
“그럼! 결국 취재도중 제보자가 숨지는 바람에 중단 했었잖아. 그런데 그걸 왜?”
“그때 제보자가 내게 넘겨준 것이 있었어요. 삼합회 조직원 명단 말이에요! 아마 국정원이 이 명단을 보면 환장 할 걸요? 안 그래요?”
“그런 것이 있었어? 정말이야?”
박 기자가 놀라 되물었다. 몇 달 전 삼합회가 한국으로 진출해 활동하고 있다는 제보를 그들이 받고 심층 취재를 하던 중 제보자가 누군가에 의해 칼에 찔려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금님이 사망한 제보자에게 삼합회 조직원 명단을 넘겨받았던 것이다. 그제야 박 기자도 금님이 국정원 요원을 만나 어떤 협상을 하려는지 알았다. 삼합회 조직원 명단이라면 국정원에서도 군침이 도는 것이었다. 충분히 협상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금님은 박 기자와는 한 시간 후에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커피를 한잔 빼들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번호를 눌렀다. 그녀의 아버지 임광필의 핸드폰 번호였다.
“아빠! 나야. 오늘 생일인데 미역국은 먹었어? 미안해. 아침 일찍 취재가 있어 아빠에게 축하인사도 하지 못하고 나왔네. 미안해!”
“아, 아니야! 무슨 말이야? 오히려 아빠가 너에게 고맙다고 해야지. 속 썩이지 않고 잘 커줘서 말이야. 허허허!”
임광필이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녀의 아버지인 임광필은 잠실에서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원래는 강남에서 룸살롱을 했었는데 딸들이 커가자 교육에 좋지 않다면서 잘나가던 룸살롱을 접어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시작한 사업이 바로 정육점이었다. 정육점을 차린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사업 중에 가장 잘 되는 것이 술장사와 고기장사라는 그의 철학 같은 믿음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딸이 둘이었는데 큰딸인 임금령은 사법고시에 합격해 지금은 연수원에 들어가 있었고 그리고 둘째딸인 금님은 신문기자였던 것이다. 두 딸이 검사와 신문기자를 하게 된 것은 완전히 임광필의 고집 때문이었다. 룸살롱을 할 때 툭하면 검찰의 집중 단속을 당했고 신문사에서는 특종이라도 잡았다는 듯이 그를 와전 세상에 쓸모없는 불한당으로 몰아 붙였기 때문이었다. 툭하면 집중 단속을 당했고 신문사는 룸살롱의 비리라며 대문짝만하게 실리는 통에 세무감사까지 받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검사와 신문 기자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고 결국 그 소원대로 이뤄진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임광필의 정육점 상호였다. 큰딸의 이름은 어명인 임금령으로 지었고 둘째는 임금님으로 지었다. 그리고 그의 정육점 상호는 전하 정육점이었다. 잠실 새마을 시장의 전하 정육점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미안해 아빠! 그 대신 오늘 일찍 들어갈게. 오늘 아빠의 기가 막힌 육회 실큰 먹어 볼 태야. 그래도 되지?”
“그럼! 되고말고. 아빠가 특별히 맛있는 부위인 제비추리를 준비해 둘게.”
임광필이 기분 좋게 껄껄 웃었다.
“좋았어! 오늘 우리 가족 특별히 노래방도 가는 거야. 그러니까 언니에게도 시간 맞춰 나오라고 해. 오늘 노래방비는 내가 쏜다!”
금님이 기분 좋게 외쳤다.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 하는 사람이 아빠 임광필이었다. 오죽했으면 그녀는 누구든지 그녀를 데려 가려면 데릴사위가 돼야 한다고 자기 입으로 외칠 정도였다. 시집을 가되 절대로 아빠와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그녀의 고집이었다. 임광필은 그런 금님이 이쁘고 사랑스러워 그녀의 말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다윗과의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그녀는 박 기자를 앞세우고 명동으로 향했다. 명동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고 길게 늘어선 자동차들로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짜증스런 복잡함에 금님은 참지 못하고 투덜대고 말았다.
“왜 하필 이런 복잡한 곳에서 만나자는 거야? 호텔에 주차는 할 수 있으려나 몰라!”
금님이 투덜대자 박 기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러지마. 그 사람이 거기서 먼저 약속이 잡혀 있었다고 했잖아. 그리고 우리가 필요해서 만나 달라고 하는 건데 너무 투덜대지 마.”
금님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래도 조금씩 차가 움직여서 어느덧 약속시간에 맞춰 로얄호텔에 도착했다. 금님이 차에서 내리며 앞 유리창에 신문사 로고를 붙이고 자동차 키를 도어맨에게 주었다. 도어맨이 얼굴을 찡그리며 목청을 높였다.
“손님께서 직접 주차를 하셔야 합니다! 보다시피 지금은 일손이 딸려서 저희들이 주차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자 금님이 소리쳤다.
“뭐라고요? 그래서! 내차가 고급차가 아니라서 주차해주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런 씨팔! 내일 아침 신문에 로얄호텔이 차를 구별해서 주차해 준다고 크게 실어 줄까요?”
금님이 언성을 높이며 차 앞에 붙은 신문사 로고를 가리켰다. 그제야 도어맨의 표정이 급변하며 황급히 그녀의 차를 주차장으로 이동시켜줬다. 금님이 콧방귀를 뀌며 도도하게 말했다.
“내가 전에부터 벼루고 있었어! 호텔 도어맨들 고급차들만 주차해주는 못된 습성을 확 뜯어 고쳐야해!”
박 기자가 그런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여간 못 말려! 그 성질 죽어서야 버릴 거야? 신문사 기자란 신분이 아주 사람을 버려 놨어!”
박 기자의 핀잔에 금님이 생긋 웃었다. 호텔 로비로 걸어가며 금님에게 물었다.
“삼합회 명단 가져왔어?”
“그럼요. 여기 잘 모시고 있어요.”
금님이 자신의 취재가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박 기자가 금님에게 사각봉투 한 장을 건넸다.
“이게 뭐에요?”
“사진! 지난 번 삼합회 조직 취재할 때 찍어둔 사진이야. 그때 삼합회 조직원으로 의심되는 자들 몰래 찍어둔 사진 있었잖아? 이게 바로 그 사진들이야.”
“그래요?”
금님이 사각봉투를 열어봤다. 당시 삼합회 조직원으로 의심되는 몇몇 인물들이 찍혀 있는 사진들이었다. 금님이 다윗과 만날 때 힘이 되어 주려는 박 기자의 배려였다.
“고마워요! 난 미처 생각도 못했었는데.”
“고맙긴! 우리가 남인가? 파트너잖아.”
박 기자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호텔 로비의 커피숍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다윗이 미리 먼저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윗이 먼저 박 기자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고 그들을 향해 흔들었다. 박 기자가 반갑게 다가가 악수를 했다. 그리고 금님을 소개했다.
“여긴 제일신문 사회부 기자 임금님 기잡니다. 서로 인사 하시지요.”
금님이 반갑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일신문 사회부 기자 임금님이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윗 역시 악수를 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낯설지는 않습니다. 우리 판문점에서 몇 번 본적 있지요?”
“호호호! 아마 그럴 걸요? 지난겨울부터 제가 판문점 담당이어서 회담이 열릴 때면 판문점에 있었거든요.”
“그래요!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납니다. 항상 까만 파카를 입고 있었지요? 하얀 깃털이 달린 파카 말입니다!”
“호호호! 맞아요! 어쩜 기억력도 좋으셔라!”
금님이 환하게 웃었다. 커피를 시키고 다윗이 물었다.
“성함이 임금님이라고요? 하하하! 특이한 이름이네요. 저 역시 특이한 이름이어서인지 금세 호감이 가는데요?”
“호호호! 오기 전에 그쪽 성함은 들었어요. 이스라엘 왕 다윗이라면서요?”
“네! 저의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처럼 용감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저도 귀한 사람이 되라며 아빠가 지어 주신 거예요.”
“그래요? 그럼 다른 형제들은 이름이……전 위로 누나들이 세 명이나 있는데 제 이름과는 달리 섭순이, 섭동이, 섭습이거든요. 할아버지께서 딸을 낳아 섭섭하다고 누나들 이름을 모두 그렇게 지었습니다! 하하하!”
“네? 섭순이 섭동이 섭습이요? 호호호! 그 댁은 남성우월주의신 모양이네요? 어떻게 이름을…….”
“네! 제가 5대독자 외아들이거든요.”
“그래요? 전 위로 언니만 있어요. 우리 언니 이름도 만만치는 않아요. 임금명이거든요. 임금명, 즉 어명이란 이름이에요.”
“네? 어명이라고요? 하하하! 역시 굉장한 이름이네요. 임금명에 임금님이라! 어울리네요!”
다윗이 허물없이 웃었다. 두 사람은 이름으로 인해 급격히 가까워졌다. 서로 흉허물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저를 보자고 하신 것이 뭣 때문이지요? 듣기론 판문점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라고 하던데.”
“네! 그래요. 의문점이 있어서 확인해 보려고요.”
“의문점이라고요? 그게 뭔데요?”
다윗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금님이 자신의 가장 속에서 이상호의 사진을 깨내 내밀었다. 다윗은 금님이 내민 이상호의 사진을 보며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네 정색을 하며 물었다.
“이 사진은 북쪽 대표로 나온 이상호가 아닙니까? 이 사진이 왜?”
다윗의 물음에 금님이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 이 사진 속에 이상호가 하고 있는 이 동작 때문에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다윗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상호의 동작에 의심을 하는 사람이 그 이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네 정색을 하며 입을 봉했다. 금님이 놓치지 않고 다윗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움찔 하는 것을 봤던 것이다.
“도, 동작이라니요? 동작이 왜요?”
다윗이 모르쇠로 일괄했다.
“에이! 왜 그래요? 다 알고 왔는데!”
“뭘요? 뭘 안다는 겁니까?”
다윗이 시침을 땠다. 그러나 이미 그는 표정에서 금님에게 속마음이 들켜 버렸다.
“그러지 말고 우리 신사적으로 서로 공유합시다! 이상호가 귀순하는 건가요?”
“네?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귀순이라니요? 아닙니다! 귀순은 무슨!”
다윗이 펄쩍 뛰었다. 그러나 금님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슬쩍 물었다.
“좀 알려 주세요! 내 맹세코 지금 대화는 신문에 기사로 올리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대답해 주세요. 이상호가 귀순하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아니라니까요!”
다윗이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었다. 금님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네! 내가 깜빡 했었네. 그쪽이 국정원이라는 것을 말이야. 하는 수 없네! 이것 서로 도우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됐네! 어렵게 구한 건데 엿 사먹어야겠네!”
금님이 가방 속에 삼합회 명단을 꺼냈다. 그리고 명단을 다윗 앞에 흔들었다. 다윗이 어떤 일이 있어도 정보를 줄 수 없다는 얼굴이다가 명단을 보고는 표정이 변했다.
“그, 그게 뭡니까?”
“보다시피 명단이에요. 아마 그쪽도 관심이 많은 걸요? 중국 폭력조직 삼합회 한국조직원 명단이거든요?”
“네? 삼합회 조직원 명단이라고요?”
다윗의 표정이 굳어졌다. 금님이 느긋한 표정으로 명단을 다시 자신의 가방 속으로 넣었다.
“그걸 어떻게 그쪽이……그건 시중에 막 돌아다닐 물건이 아닌데요.”
“맞아요! 막 돌아다니는 것 아니고요 나도 한 사람 목숨과 맞바꾼 것이니까요. 이 명단을 넘긴 제보자가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
“어때요? 이 명단과 이상호. 우리 서로 맞바꾸는 것 어때요? 난 지금이라도 이 명단 그쪽으로 넘길 수가 있는데.”
다윗의 표정이 묘하게 교차되었다. 명단을 넘길 수가 있다는 것은 한국에서 삼합회 조직을 와해시킬 수 있다는 것과도 같았다. 지금까지 수없이 검찰, 경찰과 합동으로 삼합회를 와해시키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했었다. 원인은 단 하나 조직원 명단이 없어서였다. 다윗이 주변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정말 그 명단 넘기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좋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절대로 기사화 하지 않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해야만 정보를 넘기겠습니다.”
다윗이 그만 약속을 하고 말았다. 금님이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요! 나도 약속 지킬게요.”
“그리고 우선 그 명단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 정말 삼합회 명단인지를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금님이 고개를 끄덕이고 명단을 다윗에게 넘겼다. 다윗이 명단을 받아보고 첫 장을 넘겨 읽어 보고는 곧장 전산실로 전화를 연결 시켰다.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사람 확인해봐. 이름은 김동철 나이는 이십 구세. 주소는 동대문구 답십리동이야. 확인해봐.”
전산실에서 잠시 후 그에게 말했다.
“그 사람 지금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데요? 죄목은 폭력에 의한 살인교산데요?”
“폭력에 의한 살인교사? 조직폭력배란 말이야?”
“예! 그런데 이상한대요? 분명 조직폭력배는 맞는데 조직에 관여한 흔적은 없는데요? 그런데도 조직폭력배들처럼 변호사를 선임하긴 했습니다. 그것도 거금을 들여 명성 있는 변호사를 말입니다.”
“뭐? 이 자가 돈을 많이 들여 변호사를 선임했단 말이지?”
다윗이 다시 다른 이름을 조회해 보라고 했다. 전산실 요원이 다시 검색해 알려줬다.
“그 사람은 지금 부산 해운대에 있는 조그만 호텔 총 지배인입니다. 말이 쉬워 지배인이지 이런 사람들은 거의 폭력배들입니다. 호텔 나이트클럽이나 빠징꼬를 장악하고 있거든요.”
“알았어. 수고했어.”
다윗은 고개를 끄덕이고 전화를 끊었다. 폭력배 명단이 거의 확실했던 것이다.
“확인 했으니까 이제 말 해줘야지요?”
금님이 재촉했다. 다윗이 자신의 손가방에서 서류 서너 장을 꺼내 금님에게 내밀었다. 일급 기밀 문서였다. 금님이 황급히 다윗이 내민 서류를 들춰봤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안색이 점점 굳어져갔다.
“이게 정말이에요? 정말 이렇게 엄청난 금이 묻혀 있단 말이에요?”
금님이 다급하게 물었다. 다윗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세상에! 우리나라 땅에 이런 것이 묻혀 있단 말이에요? 이걸 저더러 믿으라는 거예요?”
“네! 모두가 사실이니까요. 저도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상호가 여기 이것들을 모두 남쪽으로 건네주겠다는 겁니다. 이 자료들 속에 기재돼 있는 모든 것들을요!”
금님은 믿어지지 않았다. 휴전선에 엄청난 황금이 숨겨져 있다는 마치 소설 같은 이야기이었다.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차츰 알아보기로 하고 오늘은 더 이상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알려하면 내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잠깐만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해주시겠어요?”
다윗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님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상호 말이에요. 단순히 식량 때문에 이 많은 황금을 포기한다는 건가요? 이건 앞뒤가 맞지 않는데요? 식량이라면 금이 없다고 해도 오늘 판문점에서 발표한 그것만으로도 우리 정부는 식량을 충분히 공급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맞습니다! 우리 고민도 거기에 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허술한 곳이 있거든요. 가령 이만한 금이 있다면 당연히 북쪽이 자기들이 가지려 할 것인데 선뜻 남쪽에 넘기려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다는 거지요.”
“북쪽의 김정은도 동의를 했다는 건가요? 식량만 해결해주면 금을 넘겨주겠다는 것을요?”
다윗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님이 계속 고개를 갸웃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식량도 물론 중요하긴 했다. 북쪽의 기근은 생각보다 심각했던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만한 금이면 몇 년은 끄떡없이 식량을 공급 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포기하고 구차하게 남쪽에 구걸을 한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이빨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북쪽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닌지 고민이라는 겁니다. 물론 지금으로선 이상호가 진실이라고 하지만 과연 북쪽 역시 그런 마음인지가 의문이라는 겁니다. 북쪽의 체질상 그들은 절대로 국민들 배고픔 때문에 자신들의 소유를 포기하는 그런 체제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왜 이상호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거지요?”
“그것이 우리가 모르겠다는 겁니다. 느닷없는 구조신호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가 제시한 남북 협약의 일방적인 제시인지 아니면 북쪽이 정말 김정은과 추종자들이 협의를 거쳐 꺼내 놓은 것인지 아직 확인해보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에 열릴 서울 회담이 기대가 됩니다. 내가 보기엔 이상호가 서울 회담 때에는 분명한 남쪽이 믿을 만한 증거를 제시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요? 그럼 일단 서울 회담을 주시해야겠네요? 그렇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서울 회담이 끝날 때가지 이번 이 사건은 일체 기사화해서는 안 됩니다. 자칫하면 회담이 결열 될 수도 있고 북쪽의 체제상 어쩌면 이상호 개인이 위험해 질 수도 있단 말입니다!”
다윗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만약 이 사실을 신문에 싣는다면 독자들에게 엄청난 해일이 일어나겠지만 이상호라는 개인에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국가적인 호재를 자칫 물거품이 되게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걱정 마세요. 그렇게 상식에 벗어난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 대신 한 가지 약속은 해 주세야 해요. 만약 이 사건이 기사화 할 수 있는 단계가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내게 먼저 기사를 준다는 약속을 해줘야 해요!”
“물론이지요! 이렇게 삼합회 명단까지 줬는데 그 정도 약속도 못 지켜 주겠어요?”
다윗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어느 듯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금님이 시계를 보며 물었다.
“벌써 퇴근 시간이 지났네요. 어때요. 우리 소주 한 잔 할까요?”
“소주를요? 소주 잘 하십니까?”
“그럼요! 신문사란 곳은 의무적으로 술을 배우게 하는 곳이에요. 술 마시지 않으면 제 정신으로 못 있는 곳이 신문사거든요!”
“아니 왜요?”
“호호!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다루고 취재하는 곳이 신문사 인데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살인사건에 온갖 치정 사건과 정치인들과 거기다가 정부의 중요 인사들까지 부정부패에 난무한 술수를 다루다 보니 속이 이만저만 타들어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술을 마시지 않으면 이 더러운 세상에서 견딜 수가 없단 말예요!”
금님이 푸념을 했다. 다윗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어디 오늘 난생처음 여기자와 술 한 번 마셔 볼까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기자와 술 마신 적이 없었지만 말입니다.”
다윗의 말에 금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호텔 커피 값을 계산하려고 했다. 다윗이 말리려 했지만 그녀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건 회사 공금이에요. 제보자에 대한 회사의 배려라고나 할 까요? 오늘 술값도 제가 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신문사가 내는 겁니다. 호호호!”
금님이 커피 값을 내고는 박 기자에게 말했다.
“박 기자님도 함께 가는 겁니다. 오늘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는 거예요!”
그러자 박 기자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돼? 오늘 아버지 생일이라고 일찍 간다고 했잖아?”
“괜찮아요! 기자가 그런 거지 어떻게 매번 시간 약속을 지킬 수가 있겠어요? 이해해 주실 거예요.”
금님이 아무 문제없다는 듯이 말하고는 냉큼 다윗 곁으로 다가갔다. 박 기자가 단념한 표정으로 그녀 뒤를 따랐다. 그들은 그길로 곧장 중앙극장 뒷골목에 있는 곱창 집으로 향했다. 연탄불에 석쇠를 놓고 곱창 구이를 해주는 집이었다. 이른 저녁인대도 곱창 집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로 부산했다. 겨우 자리에 앉자 다윗이 곱창과 양을 주문했다. 많이 시켜본 솜씨였다.
“이집에 자주 오는 모양이죠?”
“네! 동료들 중에 유난히 곱창을 좋아하는 놈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집에 자주 옵니다.”
다윗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는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곧 석쇠위에 곱창과 양이 올라가고 지글지글 굽히며 구수한 냄새와 매운 연기가 올라왔다. 소주가 오갔다.
“와! 정말 맛있네요! 곱창이 이렇게 고소하고 맛있는지 몰랐는데!”
금님이 탄성을 내질렀다.
“후후! 곱창을 처음 먹어보시는 모양이네요. 고기에 대해선 내가 일가견이 있지요. 맛있게 먹는 방법을 제가 잘 압니다!”
다윗이 우쭐하며 곱창을 열심히 뒤집었다. 금님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벌써 기억에서 지워지셨나? 우리 아빠가 정육점 한다는 사실 말에요. 정육점집 딸에게 고기에 대해 자랑하는 거예요? 도사 앞에 문자 쓰시네!”
“아참! 그랬지. 전하 정육점! 깜빡 했네요. 하하하!”
다윗이 크게 웃었다. 금님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대답해 주실래요?”
“뭔데요?”
“이상호 말이에요. 이상호가 이호영의 아들이라 하셨지요?”
“네!”
“그런데 말에요. 난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것이 이상호가 82구역에 대해선 김정은 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북쪽 체제를 보면 이런 것은 어림없는 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다윗이 씩 웃었다.
“맞아요. 북쪽에서는 이상호가 82구역을 전담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은 죽은 김일성의 유언 때문이었습니다!”
“네? 김일성의 유언 때문이라고요?”
“네! 김일성 유언 때문이지요.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82구역에 관한 것은 전적으로 당 비서인 이호영에게 맡겼습니다. 두 사람은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82구역을 발설한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김일성이 죽으면서 이호영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82구역은 절대로 자신의 후계자들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유언을 했답니다. 82구역의 자금성 황금은 철저하게 인민들을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면서 말입니다!”
“김일성이 그런 유언을 남겼단 말에요?”
다윗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82구역에 관한 것은 김정일도 몰랐고 김정은은 더더욱 몰랐지요. 오직 이호영만이 알고 있었고 이호영이 죽으면서 자신의 아들인 이상호에게 그 비밀을 넘기며 자세한 내막을 가르쳐준 것이지요! 김정은이 이상호에게 강압적으로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김일성의 유언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호영의 가족은 숙청이나 사형을 시켜서는 안 되며 또한 82구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주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던 겁니다!”
“아!”
금님은 이제야 이야기의 앞뒤가 정리되었다. 결국 독재자 김정은도 이상호만큼은 마음대로 처단하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82구역은 철저하게 이호영에 의해 지켜졌고 이호영이 죽으면서 아들인 이상호에게 넘겨졌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유언으로 인해 김정은도 82구역만큼은 자신이 건드릴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굉장하네요! 김일성도 대단한 사람이지만 이호영 역시 거기 못지않은 사람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독재자 김일성도 자기 자손들은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호영에게 82구역을 맡기면서 철저하게 자신의 후손들에겐 숨겼다는 것은 언젠가 82구역의 유물이 인민들을 위해 쓰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후손에게 넘기면 결국 인민들을 위해서는 쓰이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였다. 김일성에 관한 편견이 여지없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독재자이고 한반도를 반으로 갈라놓은 인물이었지만 죽기 전에는 자신의 후손들을 믿지 못하고 82구역만큼은 넘겨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상호가 대를 이어 82구역을 지켜왔던 거네요?”
“그렇습니다. 덕택에 지금까지 철저하게 숨겨져 왔던 겁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82구역은 우리 남쪽이 가지게 되는 건가요?”
“아니오! 그건 아닙니다. 그렇게 되려면 먼저 선결적으로 해결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82구역은 남과 북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곳입니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절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고 둘째는 중국입니다. 중국이 과연 자신의 소유였던 82구역의 황금을 순순히 포기를 할까요? 전 아니라고 봅니다. 자칫 잘못되면 중국과의 마찰이 생길 우려가 있습니다!”
금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중국이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추측은 맞는 말이었다.
“쉬운 일이 아니네요! 북쪽이 지금 당장은 식량문제로 82구역을 넘긴다고 하지만 과연 그것이 그들 본심일지도 두고 봐야겠군요?”
“맞습니다! 절대로 본심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이번 서울 회담이 중요합니다. 그들 속셈이 서울 회담에서 드러날 태니 말입니다.”
금님은 갈등이 생겼다. 엄청난 이일을 신문에 기재한다면 그야말로 특종 중에 특종이 분명했다. 그런데 기사로 올리지 않겠다는 다윗과의 약속 역시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그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박 기자는 비틀거리며 먼저 택시를 타고 떠나 버렸다. 금님이 다윗의 팔을 잡아채며 큰소리로 물었다.
“꺽! 이, 이차 어때요? 기가 막히게 맛있는 육회를 먹을 수가 있는데 같이 갈래요?”
“네? 육회라고요? 좋지요! 나도 육회라면 사족을 못 씁니다!”
“그래요? 좋아요! 갑시다. 내가 기막힌 육회를 먹여 줄 태니까.”
금님이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다윗을 택시에 밀어 넣었다.
“잠실! 잠실 새마을 시장 입구에 새워주세요.”
금님이 택시 기사에게 소리쳤다. 다윗이 후달짝 놀라 물었다.
“아니 육회 먹으러 전하 정육점으로 가는 겁니까?”
“왜요? 안 돼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육회 먹여 준다고 했잖아요. 이 세상에서 우리 아빠가 만든 육회보다 더 맛있는 것은 없어요. 내가 잘못 말했어요?”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렇게 불쑥 가도 되는 건지 잘 몰라서…….”
“히히히! 괜찮아요! 마침 오늘이 우리 아빠 생일이거든요. 오늘 가족들이 신나게 노래방에 가고 하려 했는데 그쪽하고 만나는 바람에 완전 망쳤잖아요. 그러니 어떡해요. 이제라고 가서 아빨 위로해 줘야지. 안 그래요?”
“네? 가족들 모임이라고요? 아니 그런 곳을 내가 왜 낍니까?”
“히히히! 괜찮아요. 절대로 부담 느끼지 마세요. 가서 보시면 알겠지만 우리 아빠 그렇게 옹졸한 사람 아니에요. 왕년에 강남에서 날리던 룸살롱 사장이었다니까요!”
금님이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그녀의 술버릇이었다. 이유 없이 웃음이 나오는 것 말이다. 잠실 새마을 시장 입구에서 내린 그들은 금님이 억지로 끄는 바람에 다윗은 어쩔 수 없이 그녀 손에 끌려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금님이 시장 입구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들었다.
“뭔 아이스크림이 이렇게 많이 삽니까?”
다윗이 눈이 동그래 물었다. 금님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낄낄! 우리 아빠 아이스크림 귀신이에요. 이런 것 제자리에 앉아 열 개는 먹어 치운다니까요! 이 아이스크림에 얽혀있는 진실이 뭔지 알아요? 아빠 어렸을 적 동네에 아이스케끼! 그러니까 당시에는 아이스캐끼라고 부르는 빙과를 파는 빙과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도 먹고 싶어서 하루는 밤에 몰래 그 가게로 들어가서 빙과 한 개를 훔쳐 먹였데요. 그런데 공개롭게도 주인에게 들켜서 멱살이 잡혀 외할머니에게 끌려 왔는데 그날 외할머니가 난생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빙과점 주인에게 잘못을 비는 것을 봤데요. 평생을 꼿꼿하게 사신 우리 외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무릎까지 꿇고는 빌었다지 뭐에요? 그날 이후 아빠는 아이스크림만 보면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면서 원수 잡아먹을 기세로 먹어댄다니까요? 호호호!”금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요? 아이스크림 한 개 때문에 무릎을 꿇었단 말입니까?”
“네! 나중에 내가 외할머니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내가 그때 무릎을 꿇고 비는 바람에 너 아빠가 저렇게 반듯하게 자란 거라고 말에요! 어때요? 굉장한 할머니죠?”
금님의 눈가에 반짝이는 물기가 서렸다. 다윗은 새삼 그녀가 다시 보였다. 털털하고 과격한 성격의 그녀가 아니라 섬세함까지 갖춘 여자임을 느꼈다. 금님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거기다가 우리 아빠 하루에 소주가 기본이 세병이에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것이 해장술이에요. 덕분에 하루 종일 취해 있어서 아직 운전도 할 줄 몰라요. 술이 깨어 있을 때가 없으니 어떻게 운전을 하겠어요? 호호호!”
금님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어느덧 금님이 걸음을 멈추고 소리쳤다.
“저기에요! 전하 정육점. 어서 들어가요!”
고개를 들어 보니 전하 정육점 간판이 보였다. 붉은 전등이 켜져 있는 전형적인 정육점이었다. 금님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빠! 나 왔어요. 아빠 사랑하는 둘째 딸 왔어요! 임금님 납시오!”
금님이 다윗의 팔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다윗은 민망해 우물쭈물 거리며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사람 좋게 보이는 임광필이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금님이 냉큼 품에 안겼다.
“아빠! 보고 싶었어.”
“허허허! 나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누구시냐? 처음 보는 분인데.”
임광필이 다윗을 보며 물었다. 다윗이 어물쩍 인사를 했다.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렇게 뵙게 되었습니다. 저도 전혀 예정에 없었는데 이렇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해 했다. 임광필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허허허! 잘 왔소! 나 임광필이라고 하오. 반갑소!”
임광필이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다윗이 엉겁결에 손을 잡았다. 엄청난 손아귀 힘이 느껴졌다. 역시 술 냄새가 났다. 임광필은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 있었던 것이다. 금님이 콧소리를 내며 어리광을 피웠다.
“아빠! 우리 육회 먹으러 왔는데 먹여줄 수 있어? 내가 이 사람에게 엄청 아빠 육회 솜씨를 자랑 했거든.”
“그래? 당장 대령 해야지! 누구 명이라고 거역 하겠어? 허허허!”
임광필이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윗에게 물었다.
“어떤 사이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이 맞소?”
“네? 그, 그게 무슨……아,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사이 아닙니다!”
다윗이 깜짝 놀라 외쳤다. 충분히 오해살만 하긴 했다. 하지만 그는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임광필은 의미 있는 웃음을 흘리며 다윗에게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후후! 내가 저애 애비요. 저놈 하는 짓거리를 보면 모든 것을 알 수가 있단 말이오.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내게 데려올 애가 아니오. 내말 무슨 뜻인지 알겠소?”
“네? 하, 하지만 정말 아닌데.”
“지금까지 살면서 난생처음 남자를 우리 집에 데려온 거요. 삼십 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란 말이오!”
임광필이 찡긋 한쪽 눈을 감고는 보기에도 서늘한 커다란 칼을 들고 고기를 성큼성큼 쓸었다. 자칫 잘못 말했다가는 무지막지란 칼이 그를 향 할 것 같았다. 다윗은 그만 얼어붙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라고 해명하기는 더더욱 힘들어지는 상황이었다. 먹음직한 육회가 나왔지만 그는 임광필의 기세에 꺾여 육회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금님은 연신 임광필과 키득대며 웃고 있었고 보리자루 모양 굳어버린 다윗만 부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자! 육회를 대령 했으니 술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지. 술 좀 하시오?”
임광필이 다윗에게 물었다.
“아, 예! 조, 조금…….”
“그래요? 잘 됐구먼. 난 남자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영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남자는 뭐니 뭐니 해도 술을 마실 줄 알아야 해!”
임광필이 양손에 소주병을 두 병씩 들고 우두둑 술 뚜껑을 땄다. 다윗은 그만 술병에 질려 임광필이 내민 술잔을 엉겁결에 받아야 했다. 하지만 육회는 정말 맛있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