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나 여왕
원제 : Queen Christina
DVD 출시제 : 퀸 크리스티나
1933년 미국영화
감독 : 루벤 마믈리안
출연 : 그레타 가브로, 존 길버트, 이안 키스
루이스 스톤, 엘리자베스 영, C 오브리 스미스
레지날드 오웬
불멸의 뮤지컬 명작이 된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시대의 에피소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연기하면서 동시에 발성을 하는 유성영화에서는 목소리 연기가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대사연기가 안되는 배우들은 도태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 상황을 코믹하고 다소 과장되게 다룬 영화가 그 작품이었습니다.
영화에서처럼 무성영화 시절에는 제법 스타였지만 유성영화로 넘어가면서 시들어버린 인물중 대표적인 배우가 바로 존 길버트 입니다. 존 길버트가 출연한 두 편의 영화 리뷰를 차례로 올리면서 그 시대의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성영화 한 편과 무성영화 한 편씩 각각 올릴텐데 첫 번째 영화는 '크리스티나 여왕' 입니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17세기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입니다. 스웨덴의 여왕이었고, 전쟁에 참가한 부왕이 전사하자 불과 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었고, 성공적으로 전쟁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계속적인 전쟁을 주장하는 대신들의 뜻에도 불구하고 평화선언을 하여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시대를 이끌었습니다. 독서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데카르트에게 개인 교습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몸이 약한 데카르트가 새벽부터 여왕을 가르치는 것이 힘들어 일찍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크리스티나 여왕이 이렇게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끈 것은 물론 훌륭한 충신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당연히 섭정정치를 했음에도 그들은 나라롤 바로 세우고 여왕이 성인이 될때까지 잘 보필한 것이지요. 더 주목할 부분은 1632년에 왕위에 오른 여왕이었지만 재위 22년뒤인 1654년 불과 28세의 나이로 스스로 왕관을 벗고 왕위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우선 늘 바쁘고 많은 결정을 해야 하는 왕 노릇에 지쳤고, 마르틴 루터의 신교(개신교)를 믿던 스웨덴이었는데 가톨릭으로 개종을 원했고, 결혼에 대한 압박도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여걸이기도 했지만 자유로운 영혼이기도 했던 셈이죠. 왕위에서 내려와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평생 호화롭게 살며 독신으로 삶을 마쳤습니다.
6세에 왕위에 오르는 크리스티나
중성적 이미지가 배어있는
여걸 분위기가 잘 어울렸던 그레타 가르보
1920년대와 30년대의 전설적 여배우인 그레타 가르보가 크리스티나 여왕을 연기했는데 저는 이 역할이 마음에 듭니다. 그레타 가르보는 미모에 대해서 많이 과장되게 알려져 있었는데 오히려 남장을 하기도 하고 여걸스런 풍모를 보여준 이 영화에서의 다소 중성적인 분위기는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예쁜척 하는 것보다 당당하고 자유로운 여성으로서의 분위기가 더 어울려 보인거죠. 딱 자기 스타일을 잘 찾은 영화라고 보입니다. '마타하리'에서의 요염한 춤 같은 연기는 오히려 어울리지 않아 보였거든요. 지적이고 중성적 느낌, 당당하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그레타 가르보의 캐릭터는 예쁜척하거나 신비로운 척 하는 캐릭터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영화에서는 크리스티나 여왕이 왕관을 벗어던진 이유를 남자와의 사랑 때문이라고 설정했습니다. 여왕이 어느날 남장을 하고 사냥을 나갔다가 만나게 된 스페인 대사 안토니오와 어찌어찌하여 같은 방에서 숙박을 하게 되는데 그때 그와 사랑에 빠지고 난생 처음 여자로서의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왕관까지 벗어 던진 순정이 벌어진 것이지요. 여왕의 운명의 남자가 된 안토니오 역을 한 배우가 바로 존 길버트 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100% 허구입니다. 왜 크리스티나 여왕이 왕관을 벗어 던졌는지는 앞에 이야기한 이유가 팩트이고, 남자와의 사랑때문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럴싸한 애틋한 로맨스 이야기를 위해서 그렇게 가상의 스토리를 넣은 것이지요. 더구나 이루어지지 못한 애틋한 사랑이 됩니다. 안토니오와 함께 배를 타고 로마로 가려고 했는데 그가 여왕을 사모했던 마그너스(이안 키스) 라는 재무대신과 결투하다가 크게 부상을 입고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던거죠. 사실 그가 죽은 후 굳이 로마에 갈 이유가 없어진건데 오히려 영화의 엔딩은 결연한 표정으로 로마로 향햐는 뱃머리에 서 있는 그레타 가르보의 모습을 담았고 그 장면이 너무 존재감이 넘치는 명장면이 되버린 것이지요.
남장여인 크리스티나 여왕을 남자로 알고
친해지려고 하는 안토니오
그레타 가르보와 존 길버트
무성영화 시대의 인기 스타였으나
유성영화 시대에 몰락한 비운의 배우 존 길버트
이런 엔딩만 봐도 사실 이 영화는 애틋한 멜러물의 탈을 쓰긴 했지만 실제로는 '이건 허구야'라고 외치는 듯 합니다. 엔딩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모습은 암만 봐도 연인을 잃은 비련의 여인의 모습이 아니었지요. 마치 전쟁에 출정하러 가는 듯한 여해적 같은 모습이랄까요? 이야기 자체도 허구였지만 오히려 크리스티나 여왕은 동성애자로 의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이 영화속에서도 에바(엘리자베스 영) 라는 측근이 존재하는데 의도적으로 가까운 측근으로 비중있게 넣은 느낌입니다. 둘의 동성애적 설정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의도는 보인 셈이지요. 그리고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로마에서 자유롭게 살았음에도 결혼을 안하고 평생 독신으로 보낸 것도 그녀가 레즈비언일거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나 여왕이 안토니오와 가까워지는 장면도 안토니오는 그녀가 남자라고 생각하고 접근했고, 낯선 남자 둘이 서로 같은 방에서 자는 경우는 쉽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방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만 크리스티나가 방을 양보한다고 했을때 안토니오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화를 내는 장면은 마치 연인끼리 줄다리기 하는 느낌입니다. 방에 들어와서 자신이 여자인것을 밝히기는 하지만 무늬만 이성간의 로맨스 영화로 형식적인 전개를 한 느낌입니다.
연인간의 로맨스가 전개되는 내용임에도 비중은 그레타 가르보가 압도적으로 큽니다. 존 길버트는 그냥 비중있는 조연 정도 분량이지요. 그레타 가르보의 원톱 주연작이라고 하는게 맞지요. 이 영화에서 존 길버트는 철저히 여주인공의 들러리 였습니다. 그럼 과연 그의 목소리 연기는 어땠을까요? 소문처럼 그리 나쁘진 않았습니다. 물론 근사한 목소리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그게 치명적 핸디캡은 아닙니다. 모든 배우가 게리 쿠퍼, 율 브리너, 그레고리 펙 처럼 중후하고 멋진 음성을 가진게 아니니까요. 그럼 그가 목소리 때문에 유성영화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건 뭘까요?
상대가 남장한 여인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난생 처음 여자로서 행복을 느끼는
크리스티나 여왕
저는 이 부분을 두 가지로 보는데 첫번째는 MGM의 사장인 루이스 메이어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 때문입니다. 그의 목소리를 문제삼은 건 사실 관객이라기 보다는 루이스 메이어였지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존 길버트가 루이스 메이어 사장에서 밉보여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몰아간 부분이 있습니다. 근사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사랑은 비를 타고'에 나왔던 것처럼 심하게 핸디캡을 가질 정도는 아니더군요. (크리스티나 여왕 을 보신 분이라면 뭐 아실 겁니다.) 루이스 메이어가 MGM의 독재자 라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요. 최근 공개된 영화 '맹크'에도 참고될 만한 내용이 나오고 특히 어린 주디 갈랜드를 혹사시킨 부분도 유명합니다. MGM에서의 루이스 메이어는 지금 WWE의 빈스 맥맨 회장이나 UFC의 데이나 화이트 대표와 비유할 수 있을겁니다.(WWE와 UFC에 관심없거나 문외한인 분들은 못 알아들으시겠지만 어쩔 수 없지요)
두번째 이유는 그냥 배우 자체가 멋이 없기 때문이지요. 존 길버트를 이류 배우로 취급하는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놀랍게도 그는 1920년대 무성영화 시절에 세기의 미남이라고 알려진 루돌프 발렌티노의 라이벌 정도의 위상이었고, 그가 받은 개런티도 매우 높았습니다. 매우 몸값 높은 무성영화 배우였던 겁니다. 저는 그가 루이스 메이어에게 찍히지 않았더라도 훨씬 근사하고 목소리 까지 좋은 게리 쿠퍼 같은 배우에게 유성영화 시대에 분명 밀렸을거라고 봅니다.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캐리 그랜트, 이 배우들이 만약 크리스티나 여왕에 등장했다면 남녀의 비중이 팽팽한 애절한 멜러물이 되었을 수 있지만 존 길버트는 그런 수준까지는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즉 그가 무성영화 시대에 떠오른 건 다소 운이 작용한 거라고 보고 더구나 루돌프 발렌티노가 1926년에 31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도 존 길버트 에게는 좀 더 위상을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유성영화 시대에는 더 목소리가 근사하고 더 키가 크고 더 잘생긴 배우들에게 밀릴 수 밖에 없지요. 그걸 더 빨리 앞당긴 사람이 루이스 메이어라고 보여지고.
안토니오에게 깊이 빠진 크리스티나 여왕
왕관보다 사랑을 택한 크리스티나 여왕
아무튼 존 길버트는 비운의 배우가 되었습니다. '크리스티나 여왕' 출연 이후 딱 한편 더 출연한게 그의 이력에서 끝이니까요. 그리고 193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불과 39세의 나이였지요. 그리고 기억에서 사라진 배우가 되었습니다. 30년대에 할리우드에는 근사한 다른 배우들이 등장하였고. 반면 같이 공연했던 그레타 가르보는 이 영화가 크게 호평받으면서 유성영화에서도 탄탄한 입지를 굳혔고, 1941년까지 활동을 합니다. 그러면서 30년대 유성영화에서 '마타하리' '그랜드 호텔' '안나 카레니나' '춘희' '니노치카' 등 준수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지요. 1930년대 가장 인기있는 여배우이기도 했고. 똑같이 무성영화 시대에 이름을 알렸지만 한 명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일찍 요절하고 한 명은 전설의 배우가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애초에 두 배우는 같은 레벨이라고 볼 수 없었고, '크리스티나 여왕' 영화를 보면 그 존재감에서의 차이가 느껴집니다. 이 영화가 호평을 받은 것은 그레타 가르보의 캐릭터가 빛났기 때문이지요.
1930년대 여걸의 이야기처럼 다루어진 영화중 이 작품은 마를레네 디트리히 주연의 '진홍의 여왕'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두 영화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여왕'의 이야기죠.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연기한 예카테리나 2세 역시 당대의 여걸이었고, 무려 34년동안이나 재위를 했던 인물이었으니까요.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에서 '대제'로 불린 2명의 통치자 중 한명이기도 했고. 두 영화는 같은 듯 하면서도 다릅니다. 같은 부분은 실존했던 여걸이자 통치자의 이야기이고 정략결혼 대상의 남자보다 다른 남자를 사랑한 이야기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당대의 전설적 여배우가 각각 주인공이었던 점도 공통점이지요. 다른 점은 '진홍의 여왕'은 치열한 경쟁을 벌여서 결국 황제에 오르는 과정을 담았다면 '크리스티나 여왕'은 반대로 왕위에서 내려오는 과정을 담고 있지요. 두 편 모두 30년대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벗어던진 크리스나
사랑하는 남자 안토니오는 안타깝게도
여왕의 품속에서 숨을 거두고....
마치 전쟁에 나가는 출정식속의
장군같은 분위기를 보여준 엔딩 장면
저는 개인적으로는 '진홍의 여왕'이 더 마음에 드는 영화지만, 굳이 두 작품의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두 여배우 역시 당대의 막상막하의 전설급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하지요. 그레타 가르보가 일찌감치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에 이미 스타가 되어 30년대까지 전성기를 보내고 은퇴한 반면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1920년대 20대나이의 독일 시절에는 거의 무명배우였고 조연배우였지만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톱스타로 이름을 날렸고, 30대 중반에 은퇴한 그레타 가르보와는 달리 50대까지도 젊음을 유지하며 계속적인 수작에 출연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요. 둘 다의 전성기인 1930년대만 본다면 그레타 가르보가 다소 우위겠지만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후반기에 쌓아올린 업적을 무시할 수는 없죠.
아무튼 '크리스티나 여왕'은 1930년대 유성영화 초기의 볼만한 영화로도 흥미롭지만 배우들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여러가지 흥미거리를 찾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당시에 말이 많았던 존 길버트의 '육성연기'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ps1 : 루벤 마물리안 연출작인데 그는 같은 해 마를레네 디트리히 주연으로 '사랑의 개가(The Song of Songs)'를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그 영화는 '크리스티나 여왕'처럼 유명한 영화는 아니지요.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출연한 1930년대 유명영화들은 대부분 조셉 폰 스턴버그 감독 작품입니다.
ps2 : 크리스티나 여왕이 평생 부유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로마에 간 이후로도 스웨덴에서 재정적 지원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스웨덴에 남겨놓은 재산도 제법 있었을테고. 쫓겨난 왕이 아니라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왕관을 벗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예우를 받은거죠.
ps3 : 우리나라 배우 중 목소리 핸디캡을 딛고 스타가 된 배우는 여배우로는 원미경, 남자배우로는 안성기를 꼽을 수 있지요. 물론 원미경은 영화출연에서 성우가 더빙한 경우가 자주 있었지만 안성기는 반드시 자기가 더빙을 했지요. 우리나라에서 전설급 배우로 인정받는 김지미의 경우도 원래 목소리가 좀 투박하지만 40대가 되어서는 그리 단점이 되지 않았고, 그래서 '길소뜸' '티켓' 같은 작품에서는 자기 목소리로 자연스럽고 좋은 연기를 했지요. 전성기 시절 거의 성우더빙에 의존한 신성일, 남궁원도 실제는 꽤 근사한 목소리를 가졌습니다.
[출처] 크리스티나 여왕(queen christina, 1933년) 유성영화의 불운아 존 길버트|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