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자동차업계에 '바퀴 달린 아이폰 쇼크'
독일 뮌헨 외곽의 한 시험 도로. 녹색 포르셰(Porsche·사진) 스포츠카가 구불구불한 길을 번개같이 내달린다. 독일의 자동차 튜닝 업체 루프(Ruf)사가 개조한 이 포르셰는 대당 수억원이 넘는다는 비싼 가격답게 막강한 성능을 자랑했다. 연속으로 이어지는 급커브에서도 전혀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이 시속 100km에 육박하는 속도로 칼같이 코너를 파고든다. 가속력은 말할 것도 없다. 쭉 뻗은 평지로 접어들자 속도계의 바늘이 순식간에 치솟더니 눈 깜짝할 새 시속 220km를 넘어선다. 멀리서 바라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경탄이 터져 나왔다.
시험 주행을 마친 포르셰가 차고로 들어서자 구경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린 운전사가 어디선가 기다란 코드를 쭉 끌고 오더니 차의 앞부분에 달린 콘센트에 연결한다. 알고 보니 전기 자동차다. 껍데기만 포르셰일 뿐 엔진과 동력계 등 속은 완전히 전기자동차였다.
- ▲ 그래픽= 김의균 기자 egkim@chosun.com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의 그린 이코노미 육성 정책에 힘입어 전자·IT·화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이 전기차 산업에 직접적으로 뛰어들면서 전기차 에코시스템(생태계)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195여개에 불과했던 독일 전기자동차기술박람회(eCarTec) 참가 업체가 올해는 400여개로 늘어났고, 내년 행사엔 이미 1000여개 업체가 참가 의사를 밝혔다.
이끌고 갈 것인가, 이끌려 갈 것인가
엔진은 모터로, 에너지는 전기로
부품 등 관련 산업 판을 뒤흔들 것
전문가 "10년 內 전기차시대 온다"
이는 전기차의 부상이 자동차 업계의 '아이폰 쇼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폰의 경쟁력은 아이폰에 응용프로그램(애플리케이션)을 공급하는 콘텐츠 기업들의 산업 생태계에서 비롯됐고, 아이폰은 결국 기존 이동통신 업체들의 기득권을 무너뜨렸다. 미국의 버라이존이나 한국의 SK텔레콤 같은 기업이 한때 자신의 하도급업체로 취급했던 중소 소프트웨어·콘텐츠 업체들의 힘 앞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기차와 전기차 에코시스템의 부상은 기존 자동차 업계는 물론 부품·에너지·금융 등 자동차와 연계된 모든 산업의 판을 뒤흔들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그동안 자동차 산업의 주변부에 있던 IT·전자·반도체·에너지·금융 산업이 전기차 시대의 주력 산업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전기차 시대의 애플이 될 것인가? 전기차 시대를 주도하려는 야심찬 기업들이 벌써부터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Weekly BIZ가 독일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바이에른(Bayern)에서 전기차발(發) 산업혁명의 현장을 살펴봤다.
이동형 로봇으로 진화하는 전기차…기계기술 대신 IT가 지배한다
바퀴달린 아이폰 쇼크
전기자동차는 우선 자동차 부품 업계에 지각변동을 몰고 올 것이다. 가솔린·디젤 엔진 시대에는 실린더, 플러그, 캠축, 엔진 블록 등 엔진을 구성하는 부품을 생산하는 수많은 기업들이 기본적인 자동차 산업의 에코시스템을 이뤘다.
하지만 전기차 시대에 이르러 엔진이 내연기관에서 전기 모터로 바뀌면 내연기관 부품을 만들던 기업들의 역할을 모터와 모터용 부품, 모터 제어장치를 만드는 전기·전자업체들이 대체한다.
이러한 에코시스템의 변화는 비단 부품 업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연료 분야에서도 석유에서 전기로 무게추가 옮겨지면서 주유소와 정유업체들이 쇠퇴하고, 전력회사들의 힘이 더욱 막강해질 것이다.
전기차는 자동차에 대한 소유의 개념을 바꿔 놓을 수도 있다. 현재의 전기차는 주행거리가 100~150㎞에 불과해 도시의 출·퇴근용으로 보급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가격은 대당 5000만~6000만원에 달해 어지간한 중형 세단보다도 비싸다. 또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 불과 1년 전에 산 전기차가 구닥다리 모델이 돼 중고차로 팔기 힘든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전기차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대여 자전거처럼 빌려 쓰고 갖다 놓는 방식이 주목을 받는다. 이 경우 제2금융권의 자동차 할부 금융은 지는 사업이 되고, 전기차 판매 회사나 렌털 회사와 연계된 은행의 대규모 리스 금융이 확산될 수 있다.
- ▲ 그래픽=박상훈 기자 ps@chosun.com
IT 기술이 기계기술 밀어내 우주·항공업체도 흥미보여…
■기계 기술 밀어내는 IT 기술
독일 뮌헨의 ESG는 1967년부터 전투기와 해군 전투함, 장갑차의 조종 시스템 및 정보·전자전에 필요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온 IT업체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 전기차 분야에도 뛰어들었다. 전기차는 기계보다 전기·전자장치에 가까워, ESG 같은 IT업체가 충분히 도전해 볼만한 비즈니스가 된 것이다.
내연기관 자동차는 엔진에 들어가는 연료의 양을 조절해 속도를 제어한다. 가속페달에 연결된 연료 밸브를 열고 닫는 기계적 조작으로 이뤄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전기자동차는 전기 모터에 들어가는 전류의 양을 정교한 전기회로와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통제해야 한다. 기계에서 전기·전자로 기술의 영역이 바뀐 것이다.
ESG는 전기차의 신경계(神經系)인 통합 제어시스템을 개발해 전기차 제조업체에 공급하고 있다. 배터리 관리, 전력 소비량 관리, 주행거리 예측 등 전기차의 핵심 기능은 물론, 에어컨, 방향지시등, 와이퍼 등 자동차의 기본 장치까지 모두 제어할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자동차 생산업체가 부품업체 여러 곳과 머리를 맞대야 해결할 수 있는 일을 ESG는 원스톱으로 해결해 내놓는다.
여러 자동차 업체들이 ESG와 손을 잡았는데, 이 중에는 현대자동차도 포함되어 있다. 독일 전기차기술박람회에서 만난 볼프강 스치지올 ESG 수석 부사장은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전기차 분야의 '보쉬(Bosch·세계 최대 자동차부품업체)'처럼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야심찬 전망을 내놨다.
최근에는 EADS(에어버스의 모회사) 같은 우주·항공업체들까지 전기자동차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 배터리가 지속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는 더욱 가벼운 차체의 전기차를 만드는 기술이 필요한데, 복합소재를 이용해 가볍고 튼튼한 차체를 만드는 기술은 항공기 업체들이 원조이기 때문이다.
■전기차의 핵심 부품은 반도체
전기차 에코시스템의 또 다른 핵심 산업은 반도체다. 전기차에는 전류 조절장치, 배터리, 배터리 충전장치, 보조전원 등 거의 모든 주요 부품에 반도체가 들어간다. 전기자동차에 전력을 공급하는 스마트그리드(smart grid·지능형전력배분시스템)까지 포함하면 100여종 이상의 반도체가 소요된다고 한다. 2030년에는 관련 시장 규모가 250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유럽을 대표하는 반도체 업체인 인피니언(Infineon)이 일찌감치 전기차 반도체 시장의 가능성을 봤다. 가장 최근의 성과는 기존 배터리의 용량을 15% 이상 늘리는 기술이다. 인피니언의 한스 아들코퍼(Adlkofer) 부사장은 "현재 150㎞ 내외에 머물고 있는 전기차의 주행거리를 20㎞ 정도 늘릴 수 있다"면서 "수치상으로는 크지 않아 보여도 전기차의 보급 속도와 시장 판도에 적잖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국내 업체의 제품보다 10~20% 뒤떨어진 성능의 중국산 배터리도 인피니언의 기술을 이용하면 국내 업체의 최신 제품과 비슷한 수준이 된다는 얘기다.
인피니언은 또 전기차가 충전을 하는 동안, 전력선을 통해 자동차의 각종 운행 정보를 인터넷으로 전송할 수 있는 반도체 칩셋도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전기차의 운행 정보는 도시의 교통 통제 시스템에서 분석돼 도시의 교통 흐름이나 혼잡도를 개선하는 데 쓰일 수 있다. 또 고객의 동의를 얻어 운행 정보가 보험사에 제공되는 것도 가능하다. 보험사는 운전자의 운전 습관이나 내역을 파악해 보험료를 조정할 수 있다. 안전운전을 하는 사람은 보험료가 싸지고, 거칠게 운전하거나 교통사고 위험이 큰 곳에 자주 가는 사람은 보험료가 비싸질 수 있다. 독일 지멘스가 이러한 개념의 스마트그리드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인피니언이 선점한 전기 자동차용 반도체 시장은 삼성전자 같은 경쟁자가 없어 인피니언의 시장 지배력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여전히 대만 업체들과 경쟁을 벌이면서 시장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주유소·정유업체 쇠퇴하고 전력회사의 힘 막강해질 것
전기차 금융도 새로 부상
■'주유소'를 '충전소'로 바꾼다
2008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운행 중인 8억1000만대의 자동차가 소비한 연료(가솔린과 디젤유 합산)는 9842억L에 이르렀다. 1대당 연간 1215L인 셈인데, 맥킨지의 예상대로 2020년까지 전체 자동차의 10~15%가 전기차로 바뀐다면 세계 연료 소비량이 2000억~3000억L 이상 줄어들 전망이다.
이는 정유업체에 쏠려 있던 에너지 업계의 무게 중심이 전력업체 쪽으로 옮겨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 정유업체들은 재빨리 전기차 충전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전기차 시대가 와도 고객들이 주유소에서 연료를 넣던 과거 습관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정유업체들은 가솔린이나 디젤 대신 전기를 팔아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일종의 시장 선점 전략이다.
유럽의 정유·에너지업체 이온(E·ON)은 올 들어 독일 뮌헨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100개 이상의 전기차 충전소를 계속 세우고 있다. 충전은 아예 공짜로 해준다. 충전 방식도 기존 주유소와 다를 게 없다. 차를 몰고 들어가서 충전기의 플러그를 차에 연결시킨 다음 신용카드를 꽂고 5~10분 정도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전력업체들의 계산은 다르다. 모든 가정과 직장에 충전 장치를 설치한다는 그림이다. 이렇게 되면 주유소가 만든 충전소들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전력업체와 주유소의 경합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전력업체로선 이미 도시 전역에 전력선을 깔아 놓고 있기 때문에 충전 설비의 확충은 큰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전기차를 단순히 전기 소비자가 아닌 '친환경 스마트 그리드'라는 큰 그림의 일부로 보는 장기적인 전략을 갖고 전기차 에코시스템에 뛰어들고 있다.
유럽의 전력 업체들은 현재 8%대인 신재생 에너지의 비중을 2020년까지 20%로 끌어올리겠다는 EU의 방침에 따라 풍력과 태양광 발전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들쭉날쭉한 문제가 있다. 뮌헨의 지역 전력회사인 SWM과 지멘스는 이러한 문제를 전기차가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지멘스 R&D센터의 베르너 폼 아이저(vom Eyser) 박사는 "가정용 차량의 경우 하루 24시간 중 실제 운행 시간은 채 2시간이 안 된다"면서 "운행되지 않고 주차돼 있는 약 22시간 동안 전기차는 충전과 방전을 거듭하며 도시의 전력 저수지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즉 도시 전체의 전기 공급량이 수요에 부족할 때는 전기차의 배터리에서 전기를 뽑아 쓰고, 반대로 전기 공급량이 수요보다 많을 때는 전기차의 배터리를 충전한다는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전기차와 충전장치에 각각 내장된 컴퓨터가 전력의 들어오고 나가는 양을 계산해 실제로 전기차가 이용한 만큼만 요금을 부과한다.
■은행들의 블루오션 될 '전기차 금융'
전기차 시대에는 차량의 소유 개념이 바뀔 수도 있다. 배터리 문제와 함께 전기차 보급의 가장 큰 걸림돌은 가격이다. 현재 전기차는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도 여전히 가솔린·디젤 차량에 비해 약 두 배가량 비싸다. 게다가 전기차로는 수백㎞의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없어서 기존 가솔린·디젤 차량을 완전히 대체하려면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이런 상황은 금융산업에 큰 기회다. 전기차를 일시불로 사는 부담이 커지면서 할부나 리스 형식으로 전기차를 보유하는 비중이 매우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BMW는 전기차와 기존 가솔린·디젤차를 묶어서 판매하는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전기차는 판매하되, 가솔린·디젤차는 리스해서 쓰도록 하는 것이다. BMW의 전기차 홍보담당인 토비아스 한(Hann) 씨는 "평소에는 전기차로 출퇴근을 하다가 출장이나 휴가 등으로 장거리 여행을 할 경우에는 근처 BMW 영업소에서 가솔린·디젤 차를 빌려 가면 된다"고 했다. 차량 구입비용도 일시불로 내는 것이 아니라, 집세를 내듯 매달 몇 십 만원을 꾸준히 내면 된다. 미국과 유럽 은행들이 자동차 금융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다양한 방식의 전기차 금융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전력회사와 자동차회사가 금융회사를 끼고 전기차 이용료를 몇 년간 월정액으로 받는 식으로 전기차를 판매하는 방법도 있다. 전력회사가 전기차나 배터리 구입비용의 일부를 지원하고, 소비자는 나머지 차(배터리) 값을 금융회사에서 할부 방식으로 쓰는 방식도 가능하다.
獨전기차 에코시스템 주도하는 나소어·메츠거 CEO
세계 전기차시장을 이끌고 있는 유럽, 그 중에서도 자동차공업의 중심지인 독일 바이에른에서 전기차 에코시스템 확산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이에른 중소·벤처기업들의 상호 협력과 기술 지원을 맡고 있는 바이에른 이노바티브(Bayern Innovative)의 요세프 나소어(Nassauer) CEO와 세계 최초로 전기자동차 기술박람회를 바이에른의 주도인 뮌헨에서 개최한 로베르트 메츠거(Metzger) 뮌헨엑스포 CEO다.- ▲ 나소어 CEO
그는 전기차 에코시스템에서 중소·벤처기업들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전기차 혁신을 이끈 첨단 기술들은 사실 자동차업체 같은 대형 회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기 모터나 배터리, 전기 제어장치들을 만드는 작은 기업들로부터 시작된 것들이 많다"고 했다.
바이에른 이노바티브는 현재 독일 연방정부와 바이에른 주정부의 지원을 받아 전기차 관련 중소·벤처기업들로 구성된 바이에른 전기차산업 클러스터(cluster·기업단)를 이끌고 있다. 또 이번 전기자동차 기술박람회에서 우리나라의 전기차산업 클러스터인 호남EV(전기차)지원단 이준항 실장과 기술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도 체결했다.
- ▲ 메츠거 CEO
아이폰과 같은 스마트폰 문화가 어느 순간 우리 생활을 파고들면서 IT·통신시장의 판을 뒤집었듯 전기차 역시 자동차산업의 큰 틀을 뒤흔들어 놓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는 "전기차는 향후 20년간 글로벌 경제의 발전을 이끄는 핵심 산업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메츠거 CEO는 전기차 에코시스템의 놀라운 발전 속도에 고무돼 있었다. "본래 이번 박람회는 지난해 머티리얼리카(Materialica)라는 재료·소재 박람회의 특별 세션으로 기획했던 겁니다. 그런데 막상 참가 신청을 받고 보니 참가 회사가 머티리얼리카의 3배를 넘더군요. 내년 규모는 또 올해의 2~3배가 될 겁니다."
전기자동차는 이제 대세다. 지난 십수년간 연료전지, 청정디젤, 태양광 자동차 등이 차세대 친환경 자동차 기술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지만, 경제성과 이산화탄소 감축 가능성, 기술의 성숙도, 정부의 정책 방향 등이 전기 자동차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결국 앞으로 자동차 산업은 연비가 뛰어난 내연기관 자동차와 전기차가 공존하는 구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전기차가 열어주는 신시장에서 승자가 되려면 기업들은 어떤 전략을 택해야 할까.
가장 먼저 만개할 분야는 이미 양산 단계에 접어든 전기 스쿠터다. 초기 가격은 기존 스쿠터에 비해 10~20% 정도 비싸지만, 연료비는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고, 별도의 충전시설 없이 집에서 간편하게 충전할 수 있어 매우 실용적이다. 전기승용차보다 한발 앞서 전기차 시장의 확대를 주도할 것으로 예측된다.
다음으로는 일일 운행거리가 200㎞ 내외이고, 연료비가 많이 드는 대도시의 버스와 택시, 택배용 소형 트럭 등이 유망한 전기차 시장이다. 이미 유럽의 여러 대도시에서 시범 운행 중인 전기버스나 전기트럭은 대량 생산이 시작되면 현재의 디젤차량과의 가격 차가 1억~2억원 정도로 낮아진다. 4~8년만 운영하면 추가 투자비를 뽑아낼 수 있다는 얘기다.
전기승용차는 선진국의 소형차 소비자들을 주요 타깃으로 삼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교통 혼잡도가 높은 뉴욕·파리·도쿄·서울 등의 대도시에 살면서 출퇴근용으로 세컨드카(second car)가 필요한 사람들은 전기차의 실용성에 크게 주목할 것이다.
전기차 부품 시장에도 신사업 기회가 많다.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는 시장 규모가 2020년에 40조~60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고효율 전기모터도 30조~40조원대로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전기차의 에너지 소모를 줄이는 기술도 사업성이 크다. 에어컨이 전기차의 주행거리를 20% 이상 깎아먹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효율적인 전기차용 냉난방 장치 개발 사업이 각광받을 수 있다. 또 전력 소비가 낮은 고(高) 휘도 LED 조명, 전기 모터의 부하를 줄여주는 저(低) 저항 타이어, 차량의 경량화와 공기 저항 감축 기술도 유망하다.
전기차 산업의 진전은 한국 산업의 근간인 자동차, 전기전자, 석유화학 산업의 틀을 바꾸어 놓는 메가톤급 변혁이 될 것이다. 한국은 다행히 이러한 전기차 산업의 근간이 튼실하지만, 전기차 보급이 미칠 엄청난 영향력과 이에 따른 시장 기회에 대한 인식은 다소 부족한 측면이 있다.
전기차 산업의 육성은 완성차 업체가 독자적으로 할 수 없다. 배터리부터 반도체에 이르는 수많은 부품 업체, 전력회사와 충전장치 개발 업체 등 인프라 기업들, 또 전체 산업 발전을 조율하는 정부의 역할이 조화를 이루어 총체적인 에코시스템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 기업들의 성공 비법은 빠르고 탄탄한 실행과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었다. 전기차 분야에서도 이러한 성공 공식이 다시 한번 발휘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