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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지혜와 거짓된 지혜 (약3:13-18절)
미국의 사상가요 시인이었던 에머슨은 말하기를 ‘라파엘은 지혜를 그림으로 그렸고, 헨델은 지혜를 음악으로 표현하여 노래했으며, 세익스피어는 지혜를 문학 작품으로 나타내어 감동을 주었고, 콜롬부스는 지혜로 항해하여 신대륙을 발견했으며, 루터는 지혜를 설파하여 로마 교황과 싸웠고, 워싱턴은 지혜로 무장하여 미국의 독립을 쟁취했으며, 왓트는 지혜로 과학을 발전시켰다.’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지혜는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매우 귀중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기자는 말하기를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이 지혜를 얻기 위하여 수고하고 노력합니다. 중국의 사서 중 하나인 대학에서는 ‘사물의 이치가 구명된 후에야 지혜가 나온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대자연의 이치를 터득한 후에 비로소 인간은 지혜를 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지혜란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토대로 해서 모든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판단의 능력이 있어야 인생의 바른 길을 걸어갈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인간이 노력하고 경험하고 배우고 깨달아 알 수 있고 습득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러한 일반적 지혜와는 다르게 해석합니다.
*잠9:9-12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네게 더하리라.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참 지혜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 만든 거짓된 지혜를 가지고 사람을 속이고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분쟁이 끝날 줄 모르고 항상 다투며 시기하며 질투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야고보 기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지혜를 참 지혜, 하늘의 지혜라 부르고, 인간이 만든 지혜를 거짓 지혜 즉 땅의 지혜라 부르며 이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땅의 지혜란 인간의 육체의 소욕에 따라 하나님의 참 지혜를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잠18:1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이러한 지혜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를 의미합니다. 본문15-16절에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땅의 지혜는 그 근원이 세상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혜이며, 장차 없어질 지혜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번뇌하게 하는 지혜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자기 지혜로 절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불변하지만 세상이 지혜는 환경에 따라 변하고 바뀝니다. 따라서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말하기를 ’인간은 지혜가 없이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솔로몬은 말하기를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참 지혜가 아니라 거짓된 지혜이기 때문에 인간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익하게 합니다. 또한 땅의 지혜는 정욕적이므로 화평을 모르는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지혜가 심판받는 땅의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사47:10-11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에스겔 선지자는 두로 왕이 받을 심판에 대해 그들이 세상의 지혜로 말미암아 부를 얻어 교만해졌다고 했습니다.
*겔28:4-5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이 교만에서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 다툼에서 세상의 온갖 요란한 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땅의 지혜는 사회적 혼란과 죄악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즉 땅의 지혜는 평화보다 투쟁을 일으키고 화합보다 분열을 조장하며 친교보다 불화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땅의 지혜는 사탄의 지혜입니다. 사탄이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과 우리 믿는 자들을 대적하는 최대의 적이며 교활한 자이며, 극악무도한 자입니다. 따라서 땅의 지혜는 하나님과 사람을 대적하는 일을 하도록 하며, 사람을 시험에 빠뜨리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지혜를 미련한 것으로 보시고 지혜자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고전3:19-20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였느니라.
이러한 땅의 지혜는 교회 안에도 존재합니다. 야고보 당시 초대 교회 안에는 유대교 선생들, 즉 랍비라 칭함받기를 좋아했던 자들이 율법적 지식을 내세워 교회를 교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어수선하게 만들고 신자들 간에 불화를 일으키고 분파를 조장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만일 그들의 지혜가 올바른 것이라면 선행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그것이 있다고 자랑만 하지 말고 선행으로써 그것을 증거해 보일 것이며, 지혜가 있다고 하면서도 다른 이들과 불화하고 싸운다면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정욕과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자와 총명한 자들이 있는 곳에는 결코 다툼이나 시기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변론만 가지고 자신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교회는 분파가 생기고 갈등과 대립이 존재하게 되는데 참 지혜가 있는 자라면 절대로 교회 안에 다툼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선행과 온유함으로 자신의 지혜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에 대해 예언하기를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평화를 이루시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곳에는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서는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는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참 지혜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할 만큼 우리의 삶에는 크고 작은 싸움과 다툼으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들이 서로 충돌하며 부딪히기 때문에 정당한 생존 경쟁보다는 약육강식의 잘못된 의식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역사 이래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큰 전쟁만 해도 15,000회나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1년에 2.6회의 큰 전쟁이 일어난 셈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끊임없는 다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분쟁을 해결해 보려고 정치를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정치도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간 상호간의 갈등은 쉽게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정치적 메시야가 되기를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파종과 수확의 모델을 구원에 적용합니다. 참 지혜인 화평은 궁극적인 치유와 화해와 연합을 이루어 냅니다. 그러나 인생은 화평보다는 싸움을, 의의 열매보다는 다툼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화평 대신에 진부한 싸움으로, 성도의 교통 대신에 서로를 외면하며, 성화 대신에 마찰을 일삼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와 부부, 형제, 나아가 교인들과 싸워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개 싸움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이 싸우고, 더 많이 상처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툼의 현장은 오늘 우리들의 현주소입니다. 이 잘못된 버릇은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어떻게 고치느냐. 복음으로 다시 마음이 깨어지고 심령이 통회해야 합니다.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 많은 이 세상에 분쟁과 다툼이 종식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싸움의 발단은 어디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우리들이 싸울 때 어떤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옳고 너는 틀린다.” 는 것입니다. 실상이 그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상대방에게 잘못을 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결함을 보기보다는 상대의 잘못에 눈을 돌리기 때문에 시비가 일어납니다.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 쪽은 항상 상대방뿐입니다. 솔직히 자기반성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떤 양계장 주인이 닭장에 도둑이 들자 총을 가지고 닭장으로 들어가면서 캄캄하여 보이지 않는 침입자를 향해 소리를 쳤습니다. “거기 닭장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요” 그러자 어둠 속에서 이런 대답이 들렸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닭들 외에는 아무도 없소.” 도둑은 자신을 닭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찌 인간이 닭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 죄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시오” 그 때 세상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기는 순진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스스로 죄인은 없습니다. 야고보는 누구에게, 어떤 잘못이 있느냐고 하는 상대적인 책임을 따지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싸움의 동기에 대한 성경의 성찰입니다. 야고보는 우리 속에서 부단히 일어나는 인간의 욕망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욕망은 우리의 지체 속에 있는 육체의 정욕이라는 것입니다. 이 욕망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7:22-23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정욕이라는 말 ’헤도네‘에서 쾌락주의라는 철학 용어가 나왔습니다. 쾌락주의 ’헤도니즘‘은 쾌락이 인간의 최선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세상 쾌락을 더 좋아합니다. 영원한 것보다 현세적인 것에 눈과 마음을 주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정욕들은 우리의 내부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 정욕들은 특별히 몸과 육체의 자연적인 욕구들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고전 ‘노자’ 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승인자유력 자승자강”--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세고 자기를 이기는 자는 더욱 힘이 강하다. 여기서 자신을 이긴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싸워서 이긴다는 뜻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정욕과의 싸움은 바로 우리 자신과의 싸움을 말합니다. 이 정욕은 욕심이며 욕심은 죄를 낳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심으로 선악과를 먹었으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신의 목숨만을 보존하려는 욕심으로 거짓말을 하였으며, 아간과 가룟 유다는 물욕에 눈이 어두워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죄악의 본질은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는 욕심에 있습니다. 이 욕심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랐고 그 결과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시66:18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야고보는 위로부터 난 참 지혜의 특성을 말하고 열거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난 지혜는 세상 지혜와는 다릅니다. 세상 지혜는 독한 시기와 다툼과 진리를 거스리는 속임이 있는 반면에 하늘로부터 난 지혜는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 이 지혜는 인간의 노력에 따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지혜는 선한 지혜이며, 인간에게 많은 은혜를 베풉니다.
*잠13:15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야고보는 하늘의 지혜의 특성을 여덟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 참 지혜는 성결합니다.
‘성결’이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충분히 깨끗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 지혜는 겉으로 드러내기 위한 지혜가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한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지혜는 그 가치를 떨어뜨리게 될 다른 어떤 교훈이나 목적과 섞이지 않은 채 깨끗하며 불의나 더러움에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과 생활의 깨끗함을 간직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지혜인 것입니다.
둘째, 참 지혜는 화평을 추구합니다.
참 지혜는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화목한 관계가 되도록 하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올바른 관계와 질서를 이룹니다. 거짓 지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불화하게 하고, 반목하게 하고, 거역하게 하며,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도 반목하고 질시하며 투쟁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 환경도 파괴시키며 결국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셋째, 참 지혜는 관대합니다.
참 지혜는 거친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지혜입니다. 자기의 의견에 반대되는 것에 대해서도 무조건 자신의 것만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무례하거나 오만하지 아니하고 무정한 행위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감싸 주고 포옹할 줄 알며 인내합니다. 아놀드라는 사람은 이 지혜를 ‘도리를 잘 분별하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넷째, 참 지혜는 양순합니다.
여기서 ‘양순’이라는 말은 매우 쉽게 권고될 수 있다는 뜻으로 선한 일을 권하거나 악을 떠나라고 하는 권면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를 말합니다. 불의에 대해서는 강하게 대적하면서도 선과 의, 진리에 대해서는 언제나 순종하고 따르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참 지혜는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긍휼을 외부로부터 고통받는 자에 대한 동정심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긍휼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긍휼의 반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은 인간의 외적 고통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죄악이나 과실에도 베푸시는 긍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무조건적인 은총, 무한대의 사죄의 은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참 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참 지혜는 그 열매가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야 합니다. 마음으로, 생각으로만 하는 지혜가 아니라 행함으로 열매가 나타나는 지혜라야 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참 지혜는 편벽됨이 없습니다.
‘편벽’이라는 말은 본래 여러 사람 중에서 특별히 한 사람을 지목하여 의심하거나 판단하거나 엉뚱하게 그릇된 추측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참 지혜는 이런 무례함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코 편파적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비난하거나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덟째, 참 지혜는 거짓이 없습니다.
어떠한 것을 위장하거나 속이지 않습니다. 교활하거나 간사하지 않고 어떤 술책도 계획하지 않습니다. 오직 신실하고 개방적이며 진실합니다. 정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계에서 패전이나 패배의 날을 경축일로 삼고 있는 민족은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빛나는 승리의 날만을 기념하고 경축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나치 독일에게 학살된 600만 동포의 영혼을 달래는 기념일도 있습니다. 유대인의 민족문화서 또는 역사책으로 “하가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하가다에 유대인의 가장 큰 축제일인 “파스오바”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파스오바“는 유태인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잡혀 있다가 해방되어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경축일입니다. 하가다에는 해방의 기쁨과 존엄성을 서술하고 있는데 서두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파라오(왕)의 노예였노라.” 세계 어느 민족의 역사책에 이러한 굴욕의 말로 시작된 것이 있습니까. 더구나 그 책에는 “그들 자신의 힘으로 해방했다.” 라고 쓰여 있지 않고 “우리는 해방 당했다.” 라고 수동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그들을 해방시킨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태도가 유대인을 오늘까지 살아남게 한 비결이었습니다. 이 파스오바 경축일에 저들이 먹는 음식은 고엽 (쓴 잎사귀), 마쓰아 (거친 빵), 딱딱하게 삶은 계란, 아라쟈 (식후에 마시는 음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인정하고 신실한 기도 생활을 계속하는 일은 내속에 내재하는 욕망과 자존심을 누르는 훌륭한 처방입니다. 우리가 바른 기도를 드리면 하늘의 창문이 열리고 위로부터 은혜의 선물 즉 하나님의 지혜가 쏟아질 것입니다. 성결된 욕구는 참 지혜의 확실한 응답을 받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 우리들은 싸움과 다툼의 회오리바람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 심화시키고 다른 형제와의 교제의 길을 활짝 열어놓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함께 산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서로에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고 무거운 짐을 서로 나누어지며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여 주님 앞에서 일일이 토설되며 그 결과 서로가 서로를 향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가되어 시기와 다툼과 투기가 극복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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