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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서해랑길 43코스(선운산 버스정류장-사포마을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3. 12. 23(토)
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아산면·부안면·흥덕면 일원
여행코스 : 선운산 버스정류장→연기제→질마재→진마마을(서정주 생가)→신기마을→반월마을→상포마을→김소희 생가→사포마을 버스정류장(거리/시간 : 21.1km, 실제는 ‘미당시문학관’부터 11.61km를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3코스를 걷는다. 10개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고창의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부안 땅으로 넘어가는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미당 시문학관, 김소희 생가 등을 꼽을 수 있다.(이 글은 ‘디지털고창문화대전’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 들머리는 선운산 버스정류장(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IC에서 내려와 22번 국도를 타고 법성포·상하(선운사) 방면으로 달리다가 삼인교차로에서 좌회전하면 잠시 후 선운사 입구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고창43코스) 안내도는 버스정류장 옆에 세워져 있다.
▼ 3개 코스(41∼43코스, 49.9km)로 이루어진 고창구간의 마지막 여정이다. 이름처럼 고창 갯벌을 따라 북상하던 서해랑길(41코스)이 느닷없이 방향을 틀어 선운산 자락을 헤집더니(42코스, 선운산을 샅샅이 뒤져본 적이 있기에 생략했다), 43코스에서 다시 갯벌을 옆구리에 끼고 부안 땅으로 넘어간다. 길이는 21.1km, 초반에 소요산 임도를 끼고 있어선지 난이도가 별이 3개(5개 중)로 분류된다.
▼ 선운산으로 가는 입구. ‘세계유산도시 고창 방문의 해’인 2023년을 맞아 예쁜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원래 꽃으로 장식된 아치였는데, 이게 영하 10도를 훌쩍 내려가는 동장군에 눈보라까지 몰아치다보니 콘크리트를 쏟아 부은 구조물로 변해버렸다.
▼ 선운산은 화산작용으로 형성된 암석들이 곳곳에서 수직 암벽을 이룬다. 그중 한 곳에서 ‘송악(천연기념물 제367호)’이 자란다. 송악은 나무나 바위를 붙들고 자라는 일종의 덩굴 식물이다. 제주라면 밭담이나 숲 등 흔하게 보이지만 적어도 육지에는 귀하신 몸이다.
▼ 10 : 48. 실제 출발은 선운리(부안면)에 있는 ‘선운리 삼거리’에서 했다. 21.1km나 되는 거리는 물론이고, 계속된 폭설주의보로 눈이 수북이 쌓여있을 게 뻔한 산길(임도를 따를 수도 있다) 구간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8km를 단축하는 셈이 됐다.
▼ 이후의 답사도 서해랑길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바닷길보다 ‘김성수 선생’의 생가를 둘러보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 같아서다. 삼거리에 세워놓은 ‘해안문화 마실길 안내도’를 따르면 되는데, 이 마실길은 이곳에서 출발해 김성수 생가와 김소희 생가를 거쳐 목우마을까지 간다.
▼ 길을 나서기 전 마을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미당시문학관으로 향하는데 전면에 ‘소요산(逍遙山 444.2m)’이 놓여있다. 서해랑길은 저 산의 허리 깨로 난 임도를 따라 이곳으로 온다. 그러다 중간에서 ‘길마재’란 고갯마루를 넘는다. ‘길마’란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을 가리키는 우리말. 서정주 시인이 1975년 펴낸 대표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는 ‘길마’가 구개음화가 안 된 상태로 굳어지면서 ‘질마’가 됐다.
▼ 10 : 51-11 : 12. 첫 만남은 ‘미당시문학관’. 삼거리에서 바람개비가 인도하는 대로 80m쯤 들어가면 나온다. 선운분교(봉암초등학교) 폐교 후 건물을 개보수해 2011년 문을 열었다. 미당의 유족들이 기증한 4,000여 점의 유품 전시공간이 있고 미당과 그의 시를 소개하는 영상 자료실이 마련되어 있다.
▼ 미당의 대표 시는 ‘冬天’? ‘국화 옆에서’로만 알아오던 내 설익은 앎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문학관 표지석’ 오른편에 떡하니 앉아있다.
▼ 안으로 들어가면 실루엣 처리된 미당이 맞는다. 우리말 시인 가운데 가장 큰 시인이란다. 하지만 시성(詩聖)으로까지 추앙받던 시인은 친일파로 낙인찍혔고, 그런 다음에는 손님으로 들끓던 미당시문학관도 찾는 발길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 벽면은 미당과 가족, 친지들의 사진으로 가득하다. 미당을 기리기 위한 문학관이니 그의 약력도 빠질 리가 없다. 벽면에 질마재의 유년시절과 퇴학당한 소년(유·소년기), 방황과 열정의 천재적 개성출현(청년기),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한국 시문학의 대표작들(중년기), 만족 없는 탐구, 세계여행과 산 이름 외우기(노년기) 등 유·소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 공간 대부분은 미당의 주옥같은 작품들로 채워 넣었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구들을 음미하며 미당을 키웠다는 바람을 만나보면 어떨까? 우리네 빈 가슴이 그 바람으로 채워질지 누가 알겠는가.
▼ 패널이나 액자 등 작품을 전시하는 방법도 다양했다. 심지어는 유리로 터널을 만든 다음 대표작들을 그 벽면에 적고 있었다.
▼ 미당의 남현동(서울) 자택 서재도 재현해 놓았다. 미당 문학 마지막 30년(1970-2000)의 산실이란다. 운보가 그린 미당 초상화, 남정 박노수 화백의 시화, 가야금, 친필이 들어있는 도자기, 세계 125개국을 집고 다녔던 지팡이가 생전 그의 일상생활의 취향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준다.
▼ 육필 원고도 눈에 띈다. 이밖에도 그동안 발간됐던 작품집, 서간, 낙관, 늘그막에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을 모자·담배파이프·지팡이 등도 진열되어 있다. 참고로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2000년 10월 63년을 함께 산 부인이 세상을 뜨자 곡기를 끊고 그해 12월 하늘로 돌아갔다. 미당은 10대의 습작 시기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생로병사에 따르는 온갖 감정이 실린 1,0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 미당의 시와 삶은 후배 문인들의 시선을 통해 전해준다. 고은, 이어령, 김춘수 등 쟁쟁한 이름들이 빈 여백을 가득 메운다.
▼ 옥상 전망대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미당을 오욕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작품들도 만난다. 1943년부터 1944년 미당이 썼던 친일의 글에 관해 감추거나 미화하기보다는 명확하게 드러내어 방문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종천친일파(從天親日派)’라는 자기변명이 눈에 거슬리기도 했지만.
▼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옛 학교 건물과 잘 어울리는 새 건물은 5층으로 지어졌다. 미당의 작품과 자료들은 각 층의 전시실로도 부족해 계단의 벽에까지 걸려있었다. 그걸 하나하나 음미해가며 오르다보면 어느덧 옥상 전망대.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미당이 잠들어 있다는 안현마을의 뒷산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대신 창문을 통해 변산반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 11 : 12. 문학관 옆 ‘질마재권역 문화센터’가 들어섰다. 체험관광과 도농교류, 주민소득 등 다양한 분야의 개발을 추진하는 본부쯤 되는데, 진마마을·서당마을·신흥마을(선운리)과 안현마을(송현리)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단다. 이들의 노력으로 샘과 도깨비집 등 서정주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장소와 소재가 옛날처럼 복원되었다고 한다.
▼ 그나저나 문학관과 문화센터의 경계에 놓여있는 저 자전거 조형물은 무엇을 전하고 싶을까?
▼ 2차선인 ‘질마재로(소요산 방향)’를 따라 100m쯤 가다 첫 삼거리에서 ‘진마안길’로 바꿔 마을로 들어간다. ‘미당 서정주’가 태어나 자랐다고 해서 ‘미당길’로 불리다가 서정주의 친일행적과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찬양이 알려지면서 이름까지 빼앗긴 서글픈 길이다.
▼ 11 : 18. 잠시 후 진마마을 어귀에서 ‘서해랑길’을 만났다. 서해랑길 트랙은 8.8km를 찍는다. 내 앱은 0.8km, 정확히 8km를 단축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이곳 진마마을(선운리)은 ‘질마재 시인마을’로도 불린다. 시인 서정주가 나고 자란 마을이기 때문이다. 마을도 그가 지은 산문시집 ‘질마재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서 꾸며놓았다.
▼ 당산나무 아래, 바위를 다듬어 만든 조형물이 눈에 띈다. 이후 길 따라 걷다보면 이런 조형물들을 심심찮게 만나는데, 미당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 실린 산문시를 주제로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미당이 환갑에 펴낸 시집 ‘질마재 신화’는 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미당 특유의 언어로 되살린 것이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실제 마을 주민이었으며, 시집에 나오는 외가 터는 물론이고 서당·빨래터·우물도 아직까지 남아있다.
▼ ‘웃돔샘’도 복원해 놓았다. 삼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으로 미당은 이 샘에 얽힌 이야기를 소재로 간통사건과 우물이라는 시를 썼다. 참! 근처에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도깨비와 부자 된 설막동이네’의 도깨비집도 있다는데 들러보지는 못했다. 때문에 나무로 조각된 여러 형상의 도깨비들을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도깨비집이 복원되어 있다는 걸 미리 알아오지 못한 내 불찰을 탓할 따름이다.
▼ ‘정떼는 방법’을 주제로 한 조형물이란다. <모시밭골 감나무집 과부는 마흔에도 눈썹이 쌍긋한 제물향이 스며날 만큼 이뻤었는데. 여러 해 동안 도깨비 사잇서방을 두고 전답 마지기가 좋아 사들인다는 소문이 그윽하더니. 어느 저녁엔 대사립문에 인줄을 느리고 뜨끈뜨끈 맵고도 비린 검붉은 말피를 쫘악 그 언저리에 두루 뿌려놓았습니다>
▼ ‘상가수(上歌手)의 소리’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조형물은 나무에 살짝 가려있다. <질마재 상가수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면 상여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 기상청은 연일 ‘한파의 맹공’을 외쳤었다.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간 수은주가 되돌아오지를 않는다면서. 그런 추위도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닌가 보다. 고드름이 만들어내는 진풍경. 흡사 주렴을 늘어뜨린 것처럼 매달려 있는 저런 풍경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11 : 24. 잠시 후 만난 미당의 생가. 미당은 어린 시절 이 집에서 서당을 다니다가 아홉 살 무렵 보통학교에 입학하려고 인근의 줄포로 이사했다. 1942년 부친이 죽은 후 친척이 개조해 거주하다 1970년경부터는 사람이 살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왔다. 그러다 2001년에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초가지붕 본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헛간이 있는 초가지붕 아래채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 생가 곳곳에는 그의 시와 글을 세긴 빗돌을 세워놓았다. 건물의 벽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동천, 국화 옆에서 등 그의 대표시를 적은 아크릴 판이 곳곳에 붙여져 있다.
▼ 서정주 시인의 생가 바로 옆에는 ‘우하당(又下堂)’이란 현판이 걸린 작고 아담한 기와집 두 채가 서 있다. 이곳에서 미당의 동생이자 시인인 서정태 옹이 살았었다. 그는 우리 나이 여든 일곱부터 질마재가 한눈에 보이는 미당 생가 옆에 조그만 흙집을 짓고 홀로 시를 쓰며 지냈다. 그리고 아흔을 넘겼어도 꼿꼿했던 당신은 2020년 3월 돌아가셨다.
▼ ‘선운리 마을회관’ 옆 ‘질마재권역 시문학체험관’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문이 열렸다고 해도 체험을 해볼 여유는 없었겠지만.
▼ 뒤돌아본 ‘시인의 마을’. 길이 실개천을 따라 마을을 관통하도록 나있다.
▼ 동구 밖 장승이 눈길을 끈다. 마을은 저렇듯 잘 가꾸어져 있다. 축제의 고장 고창을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참고로 고창은 1월 세계유산도시 고창 방문의 해 선포식을 시작으로 3월 벚꽃축제, 4월 청보리밭축제, 5월 바지락페스티벌, 6월 (복분자·수박·갯벌)축제, 7월 한여름 밤의 페스타 등이 쉼 없이 이어졌다. 마케팅 전략도 뛰어나다. 8월 ‘고창으로 여름휴가오세요’, 9~10월 ‘단풍이 피어나는 가을, 고창으로 오세요’, 11~12월 ‘겨울의 특별한 기억, 설창 고창에서 함께해요’처럼 시기와 테마에 맞는 맞춤형으로 전개한다.
▼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질마재 시인마을 복합문화공간’. 문화 공간 외에도 카페와 책방(북 카페)이 들어서 있다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 11 ; 35. ‘선운리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734번 지방도(인촌로)를 따른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서해랑길 대신 ‘해안문화 마실길’을 걸어보기 위해서다.
▼ 11 : 39. 잠시 후 ‘안현(鞍峴, 길마재 밑에 있는 마을이란 뜻)’ 마을에 이른다. 동구 밖 표지판은 ‘안현 돋음볕마을’로 적고 있었다. ‘처음으로 솟아오르는 햇볕’이란 뜻을 담은 애칭이란다. 이 마을은 ‘국화 옆에서’로 대변된다. 서정주 시인을 기리기 위해 마을 뒷산에 국화꽃을 심고, ‘100억 송이 국화축제’를 여는가 하면, 담벼락을 국화꽃으로 채워 넣었다. 2008년에는 SBS ‘패밀리가 떴다’의 촬영지가 되면서 전국적인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 안현마을은 ‘국화마을’로 통한다. 애칭처럼 모든 집 담과 지붕에 국화가 소담하게 그려져 있다. 송주철 공공디자인연구소가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모티브로 그린 벽화라고 한다.
▼ 마을 앞. 간척으로 인해 생긴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연이어 며칠을 내린 폭설 때문이지 세상은 온통 하얗다. 그 너머에서 변산반도가 성큼 다가온다. 아름답다.
▼ 11 : 58. ‘신기마을’을 지난다. 법정 동리인 송현리(松峴里)를 구성하는 3개의 행정마을(고잔·안현·신기) 중 하나다.
▼ 버스정류장 옆 이정표(김성수생가↑ 1.2km/ 김소희생가← 11.7km/ 손화중피체지→ 0.6km/ 미당시문학관↓ 1.7km)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서해랑길(김소희생가)로 되돌아가란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럴 생각이 없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해안길보다는 문화재인 인촌 김성수선생의 생가를 둘러보는 것이 더 바람직했기 때문이다.
▼ 버스정류장 맞은편.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인 ‘손화중 피체지(孫華仲 被逮地)’ 표지판이 세워져있다. 고창지역을 근거로 활동한 손화중은 전봉준·김개남과 함께 대표적인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로 꼽힌다. 나주성 싸움에서 패한 뒤 도망 다니던 손화중이 이 근처 이씨 재실에 숨어 있다가 재실지기의 고발로 체포당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손화중 스스로가 재실지기에게 자신을 고발하여 상금을 받으라고 권유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 12 : 03. 잠시 후 이번에는 와우형 지형이라는 ‘고잔마을’을 지난다. 소의 머리, 등허리, 꼬리에 해당하는 모양이 남향으로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마을이다. ‘당산굿 줄다리기’로도 유명한데, 줄을 잡아당겨야 누워 있는 소가 일어난다고 하여 줄 당기는 것으로 정성을 들인다고 한다.(사진은 마을경로당)
▼ 계속해서 ‘734번 지방도’를 따라 북향한다. 길은 ‘인촌로’란 이름표를 달았다. 인촌 김성수의 생가로 이어지는 길다운 발상이라 하겠다. 하나 더. 인촌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면서 길의 이름 또한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진마마을의 ‘미당길’과는 달리 ‘인촌로’는 아직까지 본래의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 12 : 10.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인촌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봉암리(鳳岩里)’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인촌·봉오·죽도·고당 또는 할미당) 중 하나로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의 생가가 이곳에 있다. 김성수의 ‘인촌(仁村)’이란 호는 그가 태어난 이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
▼ 동구 밖 정자나무는 하나가 아니고 두 그루나 된다. 소나무(수령 224년)와 느티나무(수령 231년)로 수종이 다르지만 하도 오래 묵다보니 굵기가 장난이 아니다. 둘 모두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늘에 참새방앗간인 정자(仁村亭)까지 지어놓았다.
▼ 12 : 16. 300m쯤 들어갔을까 솟을대문의 거대한 저택이 반긴다.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이자 정치·언론·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근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의 생가이다. 또한 김성수와 동생이자 민족자본 육성의 대표자인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 1896-1979)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1907년 봄, 이 고장을 휩쓴 화적떼의 행패로 부안군 줄포로 이사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위탁하여 보존해 오다 1977년 김연수가 옛 모습 그대로 보수·복원했다.
▼ 안내판은 이곳에서 태어난 김성수·김연수 형제의 화려한 이력을 적고 있었다. 경성방직주식회사와 동아일보, 삼양사, 중앙고등학교,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를 세우고 경영해왔단다. 하지만 전라북도 기념물(제39호)임을 알리는 공식 안내판에는 그네들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서도 적고 있었다. 맞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김성수는 철저히 일본 제국주의 편에 섰다. 막대한 국방헌금을 냈고 전쟁을 미화하는 시국강연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 일제의 전쟁 동원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조선 청년들의 징병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언론에 여러 차례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해방 이후 승승장구했다. 미군정의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선임되는가 하면,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우익의 거물 정치인으로 우뚝 서게 된다. 그러다 6.25 전쟁의 혼란 속 부통령으로 추대되기까지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작은댁(수당 김연수의 옛집) 사랑채. 1903년 김성수의 친부인 지산(芝山) 김경중(金璟中)이 지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사랑채 앞에 작은 아들인 김연수와 함께 김경중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풍수전문가들의 얘깃거리로 자주 등장하는 ‘샘’이 있다. ‘진응수(進應水)’로 길지의 증거가 되고 그러한 땅은 삼정승을 배출한다‘는 것이다.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를 그 증거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김연수의 아들인 김상협 국무총리는 다른 하나일 수도 있겠다. 그럼 나머지 한 명은 언제 태어나게 될까?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일 따름인데...
▼ 문간채를 지나면 작은댁 안채. 1881년 김성수의 조부 낙제(樂薺) 김요협(金堯莢)이 건립했다. 인촌 김성수와 수당 김연수 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 마루에는 전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이자 20대 및 21대 국회의원인 정운천씨가 이곳에서 태어났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놓여있었다. 김성수와 친척인 그는 김성수가 설립한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뒤 김성수처럼 정치가의 길을 걷고 있다.
▼ 작은댁과 큰댁은 ‘통로문’으로 연결된다. 외부로는 솟을대문을 따로 두었다. 인촌 생가는 긴 직사각형의 대지 위에다 낮은 담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큰댁, 남쪽에는 작은댁을 배치했다. 한 대지에서 독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이하다. 생가 규모도 커서 조선 후기 전라도 지방 토호의 부유한 거주 환경 및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단다.
▼ 김성수의 양부인 원파(圓坡) 김기중(金祺中)이 지었다는 문간채를 지나면 큰집 사랑채. 1879년 김성수의 조부 낙제 김요협이 건립했다. 참고로 좁은 의미의 김성수 생가는 이곳 ‘큰댁’을 말한다. 김성수의 큰아버지(김기중)과 아버지(김경중)가 한 울타리 안에서 위채와 아래채로 나누어 살았는데, 김성수가 아들이 없는 김기중에게 양자를 갔기 때문이다. 김경중의 집은 작은 아들인 김연수가 물려받았음은 당연하다.
▼ 사랑채 앞의 동상. 왼쪽부터 인촌 김성수, 김상만의 부인 고현남, 김상만, 김성수의 양부인 원파(圓坡) 김기중(金祺中) 순이다. 참고로 김상만(1910~1994)은 인촌의 장남으로 해방 이후 동아일보 사장, 국제신문협회 본부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 또 다른 문간채를 지나면 큰댁 안채. 1861년 김성수의 조부 낙제 김요협이 건립했다. 생가는 아름다운 굴뚝과 꽃담도 잠깐의 볼거리로 충분했다. 기와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패턴이 얼마나 많은지를 자랑하려는 듯 보무도 당당히 서있다.
▼ 12 : 37. 도로(734번 지방도)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북쪽 방향이다.
▼ 12 : 45. 8분쯤 후 도착한 ‘농원마을’은 법정 동리인 ‘상암리(象岩里)’를 구성하는 7개 자연부락(석암·원당·쥐섬·농원·신농원·반월·상포) 중 하나로, 1954년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원(農園)을 조성하면서 이룬 마을이다. ‘은흥촌(恩興村)’으로도 불리는데 초등학교(봉암)와 보건진료소가 들어서 있었다.
▼ 12 : 48-12 : 58. 마을에 들어서니 ‘봉암삼거리건강원’ 주인아주머니가 커피를 대접하겠다며 붙잡는다. 여섯이나 되는 인원이 부담스럽지도 않는지.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따끈따끈한 국산차를 대접한다. 객지에서 살다가 귀향했다는 50대 주부인데 자신의 고향을 찾은 외지인들이 고마워서 무언가라도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다. 따뜻한 인심에 이끌려 한참이나 한담을 즐기다 다시 길을 나섰다.
▼ 12 : 59. 상암 보건진료소를 지난다.
▼ 왼편에는 ‘상암저수지’가 있다.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간척지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소중한 수원이다.
▼ 북진(北進)을 고집하던 도로가 농원마을을 지나면서 동진으로 바뀐다. 바닷가를 떠나 내륙으로 들어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 어디쯤에서 서해랑길로 빠져나가야 한다.
▼ 13 : 15. 내 예상은 옳았다. ‘신촌마을 버스정류장’ 앞에서 도로가 둘로 나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부안면소재지로 가는 734번 지방도(인촌로)를 버리고 바닷가로 나아가는 ‘수앙·신촌길’을 따르기로 했다.
▼ 하룻밤 머물러보고 싶을 정도로 잘 지어진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 나는 홍천 농장에 저런 한옥을 짓고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아직까지도 서울 근교의 산속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한옥에 대한 로망까지 포기하지는 못했지만...
▼ 첫 번째 사거리(13:22)에서는 오른쪽이다. 사포리를 향해 바닷가로 가는 길(사포상암로). 진행방향 저 멀리에 거대한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게 ‘방장산’이라는 것은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도움을 받고서야 알 수 있었다. 오래전이지만 지금처럼 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철에 저 산을 올랐었다. 하지만 지리에 어두운 난 산만 내려오면 그게 어디에 붙어있는지를 금방 잊어버린다.
▼ 순백의 들녘 너머는 곰소만(고창에서는 ‘줄포만’이라고 할 것이다). 그 뒤를 변산반도의 험준한 산봉우리들이 받쳐주는데, 저 봉우리 사이 계곡 어디쯤에 전나무길이 일품인 내소사가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 철새 무리가 떼를 지어 하늘을 난다. 맹추위에 쫓겨 더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가는지도 모르겠다.
▼ 14 : 06. 드디어 서해랑길과 마주한다. 줄포만에 이른 것이다. 정확히는 ‘갈곡천’의 하구역(또는 汽水域)쯤 되겠다. 갈곡천(葛谷川)은 고창 신림면(가평리)의 방장산에서 발원하여 부안면 중흥리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15.77km 길이의 하천이다. 참! 오는 도중 양지바른 곳에 앉아 20분 동안이나 새참을 즐기기도 했다.
▼ ‘서해랑길’ 표식은 자전거도로 안내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서해랑길과 저전거길이 겹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방향을 헷갈리게 만드는 못된 이정표(상암리와 김소희생가의 방향을 바꿔놓았다)도 눈길을 끈다.
▼ 이후부터는 ‘갈곡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바다도 아닌 것이 강도 아닌 것이 몸집만 몽땅 부풀려놓았었던 모양이다. 양안에 방조제를 쌓아 들녘을 만들어놓았다. 길은 그 방조제 위로 나있다.
▼ 이즈음 우린 유난히도 많은 저수지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해수인지 아니면 담수인지는 몰라도 크고 작은 저수지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 서해랑길을 만나면서 고창 갯벌을 마주한다. 고창 갯벌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자연유산이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자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다. 갯벌 면적은 55.31㎢. 고창갯벌센터가 있는 만돌 해변(41코스)에서 시작해 부안 땅 앞까지다.
▼ 길은 갈곡천을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천은 거슬러 올라갈수록 몸매를 줄여나간다. 그러더니 이내 갯고랑으로 변해버린다.
▼ 14 : 15. 수양배수장. 둑을 쌓아 들녘을 만들어내는 간척사업에서 빠질 수 없는 시설이다.
▼ 오른쪽으로는 그 간척사업이 만들어놓은 들녘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 종점에 가까워지면서 갈대꽃의 군무가 길손을 반긴다. 맞다. 43코스의 종반은 아름다운 갈곡천을 따라 걸으며 갯벌과 갈대를 동시에 구경할 수 있는 구간이라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갈대 너머로 내장산이 거대한 몸짓을 드러내면서 춤사위에 흥을 돋운다.
▼ 오늘은 폭설주의보에 잔뜩 쫄아 코스를 1/3이나 줄였다. 그런 결정이 마음까지도 한껏 여유롭게 만들었나보다. 눈에 들어오는 사물마다 아름다움으로 포장되는 걸 보면 말이다.
▼ 갈대로 한가득인 갈곡천 갯고랑 너머로는 ‘후포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우리가 따르고자 했던 ‘해안문화마실길’은 저 마을을 지나 ‘목우마을’까지 간다.
▼ 14 : 30. 아까 갈곡천의 하구역에서 헤어졌던 ‘사포·상암로’와 다시 만났다. 길가 이정표(김소희생가← 0.2km/ 부안면방향→/ 미당시문학관↓ 13.2km)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갈곡천’을 건너란다.
▼ 갈곡천에는 배수관문이 설치되어 다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 바다와 경계를 나누는 셈이다.
▼ 배수갑문은 전망대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줄포만을 향해 나아가는 갯고랑이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
▼ 조류 관찰대도 만들어 놓았다. 맞다. 이곳 갈곡천에는 멸종위기야생동물 1급인 황새, 매와 2급인 검은목두루미, 말똥가리, 새홀리기 등 7종의 희귀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고 했다.
▼ 그러니 어찌 올라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침수지는 갈대만 무성할 뿐 텅 비어 있었다. 전문가들이 확인했다던 그 철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14 : 35. 서해랑길 표식이 ‘사포마을’에 잠시 들렀다가란다. 김소희 명창의 생가가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느냐면서. 맞다. 고창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김소희는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하늘이 내린 목소리로 유명한 명창이다. MZ세대들에게야 낯설겠지만 우리네 소리를 좋아하는 장년층에게는 요즘의 아이돌만큼이나 인기가 높았었다. 하나 더. 이밖에도 고창은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신재효 선생과 그가 사랑했던 제자 진채선이 태어나 곳이기도 하다.
▼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한 칸의 'ㄱ'자형 안집과 헛간채로 이루어진 초가집이다. 부자까지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먹고살만한 살림살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진마마을에서 살던 서정주의 집만큼은 아니었던 듯. 같은 초가집이지만 격자무늬 방문을 달았던 서정주의 집과는 달리 김소희의 집은 소박한 띠살문을 달았다. 우리네 기억속의 고향집처럼...
▼ 문루 중앙. 편액 대신 사진을 걸었다. 문득 김소희의 판소리에는 ‘희다가 겨운 백자의 옥빛’이 어려 있다던 미당 서정주의 칭찬이 떠오른 것은 그녀의 단아한 얼굴 때문이었을까?
▼ 1917년 이곳에서 태어난 만정(晩汀) 김소희(金素姬, 본명은 김순옥)는 13세에 광주로 가서 명창 송만갑의 제자로 국악에 입문했다. 15세에 서울로 올라가 조선성악연구소에서 정정열 등에게 소리·춤·기악을 두루 배우면서 명창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창극좌 입단(1937),여성국악동호회 조직과 한국민속예술학원 창설(1945),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보유자 지정(1964),국악협회 이사장(1993) 등을 거치면서 일생을 국악 발전에 바쳤다. 1995년 향년 79세로 타계했다.
▼ 길은 우리를 ‘사포마을’로 인도한다. 법정 동리인 ‘사포리’를 구성하는 5개 자연부락(사포·고사리바탕·새터·술항골·회목) 중 하나로 ‘사포(沙浦)’라는 지명은 갯가에 모래가 많다는 데서 유래했다. 어선의 접안이 편리해서 19세기까지 흥덕골에서 거둬들인 세미를 쌓아두던 창고가 들어서 있는 등 호황을 누렸으나 토사의 유입으로 폐항(廢港)되었다고 한다.
▼ 14 : 45. 사포경로당과 반석교회를 차례로 지나면 어느덧 ‘사포마을 버스정류장’. 서해랑길 43코스의 여정은 끝을 맺는다. 서해랑길(부안 44코스) 안내도는 정류장에 기대듯 세워져 있다.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11.61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미당 시문학관과 김성수 생가, 김소월 생가 등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 버스정류장 뒤에는 ‘무명의병충의위령탑’이 들어서 있었다. 정유재란(1597) 때 왜군의 조총·화총에 맞서 죽창·화살로 싸우다 전멸한 무영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최일수라는 독지가가 세운 탑이란다.
▼ 그 옆에는 ‘해주최씨’ 가문에서 ‘삼강문’을 세워놓았다. 삼강(三綱)이란 한나라의 동중서와 반고가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강조한 세 가지 덕목(忠·孝·烈)이다. 이 집안은 정유재란 때의 의병장 ‘최서생’을 충(忠), 그의 아들인 기종을 효(孝), 그리고 열(烈)은 서생의 부인 ‘문화유씨’를 내세운다. 화순에 살던 유씨는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인 기종과 종인 순동을 데리고 70여 킬로나 떨어진 이곳까지 와 아들을 순동에게 부탁한 다음 사진포(사포)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유씨의 열행비 옆에 노비 순동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했다. 지독한 감기로 요 며칠 고생하고 있으면서도 내 곁을 지켜주겠다며 부득부득 따라나섰다.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받는 것보다는 더 많이 베푸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는 미국 코넬대학 교수이자, 인간생태학분야의 최고권위자인 ‘칼 필레머(Karl Pillemer)’의 주장을 실천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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