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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묵상글 ( 2024년 12월 24일. - 찬미는 어떻게 나오는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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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24 04:17
- 찬미는 어떻게 나오는가?
“그때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하느님 찬미는 어떻게 나오는가?
오늘 저는 이 주제로 오늘 복음을 묵상했습니다.
즈카르야의 입에서도 마침내 찬미가 쏟아져나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앞두고 모두 성령을 받았음에도 그 홀로 받지 못하였었고,
모두 말을 할 수 있었음에도 그 홀로 입이 닫혀서 말을 하지 못하였지요.
그런 그가 이제 말을 하게 된 것이고, 찬미를 터트리게 된 것인데
말 못하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기에 그 찬미가 더 감격적입니다.
그러므로 즈카르야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찬미는 긴 침묵을 거치고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침묵은 단순히 언어의 중단이 아닐 것입니다.
일체 어떤 표출을 하지 않음이고,
깊은 내적 침묵이요 숙고요 묵상을 말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덕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진리와 그분의 진실한 뜻을 깨달아
구원되는 체험을 통절하게 한 뒤에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찬미는 무엇보다도 내 안의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을 내 안에 모셔 들여야겠지요.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우리 안의 성령께서 모시는 것이라고 했지요.
성령으로가 아니면 그것이 참으로 주님의 몸이란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면서.
마찬가지로 진실한 찬미는 인간 혓바닥의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성령을 모셔 하느님을 만난 사람만이 토해낼 수 있는 것이고,
즈카르야처럼 하느님 구원을 체험한 이만 토해낼 수 있는 겁니다.
즈카르야는 이 찬미를 토해내는 데 10개월이 걸렸는데 우리는 얼마가 걸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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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72년, 철학자 휴버트 드 레이퍼스는 자신의 책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에서 컴퓨터에게 체스를 가르치려고 한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는 인간 초보 플레이어조차 이길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컴퓨터로는 주방 보조를 대체하는 것 정도로 멈출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이 예측이 틀린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컴퓨터가 세계 체스 챔피언을 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방 보조는 아직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직 아무리 정교한 로봇도 바쁜 레스토랑의 테이블에서 접시를 치우고, 식기 세척기 안에 깨지기 쉬운 접시와 유리컵을 넣고 꺼내는 데 필요한 복잡한 기술을 갖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아시며, 우리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길 따름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미래를 예측하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종종 어떤 일을 행하는데 이렇게 될 것이라면서 수정하거나 멈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다양한 방법으로 이끄시는 그 손길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겸손과 모든 가능성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게 됩니다. 갓 태어난 아들 세례자 요한을 안고서 아버지인 즈카르야가 주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에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판단했다가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달라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점으로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에 대해 세속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돌잔치에서 아기의 미래를 예측해 보는 소소한 행사인 돌잡이가 있습니다. 엽전, 마패, 붓, 복주머니, 오방색지, 명주실, 바늘 쌈지 등이 준비됩니다. 이 중의 하나를 잡으면 아이의 미래가 보인다는 것이지요. 즉, 엽전을 잡으면 인생에 재물 운이 따른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준비된 이 모든 것은 세상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미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즈카르야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벙어리가 되는 하느님 체험을 통해 완전히 바뀌고 맙니다.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즈카르야의 노래’를 노래합니다.
이제 오늘 밤이면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대림 시기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우리 역시 세상의 관점보다 하느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사람이나 사물이 아닌 목표에 의지하라(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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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독서>는 다윗 가문에 영원한 왕좌가 약속되고, <화답송> 역시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시 89,5)고 노래한다. 그리고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환호합니다.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즈카르야의 노래’에서 따온 이 구절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요,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여전히 어둠과 질곡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둠이 짙기에 우리는 빛을 더더욱 기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기도> 때 드리고 있는 이 ‘찬가’(Benedictus, 찬미 받으소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68-75)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찬양 드리는 노래입니다. 곧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시고 예언한 구원을 아기 예수님을 통해 실현하심을 찬미합니다. 특히 여기에서는 구원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지녀야 할 두 가지 덕목을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노래합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입니다.”(루카 1,75)
<후반부>(1,76-79)는 어제 <복음>의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일 될 것인가?”(루카 1,66)에 대한 답변에 해당합니다. 곧 태어날 아기가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노래입니다. 여기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은 예수님을,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드러내줍니다. 곧 세례자 요한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선구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끝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8-79)
여기서 “크신 자비”라는 말의 직역은 ‘자비의 내장으로’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 크고 깊으심에서 그리스도는 오시어, 어둠과 죽음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고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결국,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멀지 않듯, 빛은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힘으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타오르는 빛이 우리의 발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이 어두운 이 세상에 오시어, 참 빛을 밝히실 것입니다. 어둠 속 우리를 당신 빛 속,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빛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등불을 밝혀들고 참 빛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어~”(루카 1,78)
주님!
제 안에 오신 빛, 자비시여. 저를 비추소서.
당신 마음으로 저를 채우소서. 제가 자비로워 지리이다.
당신 얼굴로 저를 비추소서. 제가 평화로워 지리이다.
제 안에 오신 별, 빛이시여. 저를 밝히소서. 제가 환해 지리이다.
그 크고 깊으심으로 저를 어루만지소서. 제가 새로워 지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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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으로, 사물의 선후, 경중, 본말이 서로 뒤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지도자의 위치가 있고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국민은 각자의 자리가 있고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 앞으로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는 이들의 권위가 보이지 않습니다. 권위는 고사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속 보이는 모습들이 멀미가 날 지경입니다. 자기 잇속을 챙기느라 백성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짙을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부분과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아기의 장래를 축복하는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시는 해방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약속을 어길 수도 있고, 때로는 파괴할 수도 있는 변덕스럽고 약한 존재이지만, 하느님은 절대로 파기하시지 않고 요지부동하십니다. 하느님은 약속을 기억하시고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주님을 섬기도록 해 주셨습니다(루카1,75). 이것은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영적인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요한이 제 몫을 감당하여 주님의 길을 닦고 알려주는 것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루카1,78) 덕분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기3,1).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사40,3).고 외치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마침내 요한은 오시는 주인의 길을 닦고 자신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다는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세상은 주인의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큰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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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마리아의 노래와 함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노래가 오늘 복음에서 읽은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묵상하는 노래입니다. 오늘은 구원의 역사에서 즈카리야의 노래가 지니는 신학적인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즈카리야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오래전부터 약속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심에 대한 찬미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셨음을 강조하면서,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도록 격려합니다. 노래는 하느님께서 다윗의 집에서 "권능의 구세주"를 일으키셨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완성을 예고하는 내용입니다. 메시아의 도래가 하느님의 구원 약속의 궁극적 성취임을 설명하고,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감사와 찬미의 마음을 일깨웁니다. 즈카리야는 구원이 단순히 정치적이거나 물리적 해방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통한 내적 해방임을 언급합니다. 구원은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랑의 행위임을 강조하며, 회개와 자비의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이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시는 구원자임을 설명하며, 예수님의 빛을 따라 살도록 독려합니다. 즈카리야는 자기 아들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가 되어 주님을 위한 길을 준비할 것임을 노래합니다. 우리들 역시 요한처럼 자기의 삶에서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고, 이웃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래는 하느님의 자비와 평화로 끝맺습니다. 이는 구원이 단순한 개인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공동체적,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됨을 암시합니다. 우리들 역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그 자비를 세상에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몸’을 얻는 것은 아닐까! 몸을 얻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보고, 만지고, 느끼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이 있기에 영혼이 가지는 자유와 순수함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몸이 있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또 만나야 하는 괴로움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을, 늙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아쉬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은 우리에게는 축복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몸’을 얻으시면서 많은 것들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으로 오시지만 영적인 자유와 순수함을 이야기 하십니다. 몸이 가지고 있는 멍에와 짐을 벗어버릴 수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재물, 명예, 권력을 추구함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된 행복은 가진 것을 나누면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을 하면서, 옳은 일을 추구하면서, 용서를 하면서 다가온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몸에 속해있지만 이미 영혼의 자유와 순수함을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몸의 틀을 벗어버리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예전에 있던 본당에서는 성탄 트리에 카드를 달아 놓았습니다. 카드에는 예수님께 드리는 성탄 선물이 적혀있었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 자선을 베푸는 일, 부모님 심부름하기, 성당 청소하기와 같은 선행을 적어 놓았습니다. 교우분들은 기쁜 마음으로 카드를 가져가셨고, 예수님께 마음을 담아 성탄 선물을 드렸습니다.
아직 아기 예수님을 위한 성탄 선물을 마련하지 못하셨다면 오늘 하루 기도를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를 위해서 도움을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위해서 먼 길을 떠나왔던 동방박사도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렸던 목동들도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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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2024년 12월 24일 주님 성탄 대축일 - 전야 미사
찬미 예수님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기도 안에서 성탄을 기다리고, 우리 안에 주님이 거처하실 곳을 마련하려 마음 청소 열심히 하며 준비한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함께 성탄의 기쁨을 나눕니다.
우리는 왜 성탄을 기뻐해야 하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기뻐해야 하는 것일까요? 단지 그것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탄생은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함께 에덴동산을 거닐었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아담과 하와를 불순종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어둠을 얻게 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때 하늘나라 즉 에덴동산의 문은 닫혀버렸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입니다. 인간의 교만이라는 죄 때문에….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다시 하늘나라로 초대하십니다. 용서라는 사랑 안에서 에덴동산으로 다시 인간을 불러 모으려 하십니다. 그리고 그 문을 열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 모든 것에 순종하시고 어둠이 아닌 빛으로 사람들을 이끌 단 하나의 존재,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지상에 보내십니다.
우리가 성탄을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순종이 오셨고 빛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빛이 하늘나라의 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을 찬미합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치킨 파티
이곳에 부임한 후 시작된 치킨 파티
성탄 전야 미사를 봉헌하고
부활 성야 미사를 봉헌하고
짧게 나누는 치킨 파티.
짧은 시간 안에서
간단한 나눔이
서로의 웃음이 되어줍니다.
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합니다.
기쁨도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합니다.
사랑도 이와 비슷합니다.
사랑은 작은 나눔 안에 있고
친절한 배려 안에 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함께 치킨 파티 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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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삶의 성경
“렉시오 디비나 하기”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89,1)
믿는 이들의 삶의 역사는 그대로 한 권의 성서요 하느님 자애와 진실의 발자취입니다. 삶의 중심이자 인도자이신 주님께 충실히 협조하여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성경을 하루하루 평생 정성껏 써가야할 거룩한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갔을때 유일하게 바쳐야 할 것이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예전 요셉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여 썼던 글이 생각납니다. 수차례 나눴지만 늘 새롭습니다. 요셉수도공동체 역시 하나의 성서로 보고 렉시오 디비나해본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과 더불어 공동체 역시 저는 또 하나의 성경으로 간주합니다. 제가 위인들의 자서전, 평전, 회고록을 주로 즐겨 읽는 것도 하나의 성경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 삶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진실하게 산 이들의 삶은 성경처럼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합니다. 삶은 평생 죽을 때 까지 배워야 하는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수도공동체라는 성서를 나름대로 렉시오디비나한 결과 넷으로 요약됨을 발견했습니다.
1.모든 것은 때가 있다.
2.모든 것은 필요했다.
3.모든 것은 지나간다.
4.그러니 현재를 살라(carpe diem).
넷의 요약 결론에 만족했고 많은 이들이 공감했습니다.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모든 것이 감사했다"가 될 것입니다. 제 지론 성경의 렉시오디비나도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신구약성서의 렉시오디비나가 기본이고, 다음에 자연성서, 다음엔 내 삶은 물론 공동체라는 성서입니다. 내 삶의 성서 렉시오 디비나 역시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이렇게 살 때, 결코 하루하루 충실히 살게 됩니다. 결코 함부로, 되는대로 막 살지는 못합니다.
하루하루가 써가는 살아있는 성서의 한쪽으로 아직은 미와의 내 삶, 내 공동체의 성서라는 것입니다. 결코 무의미한 삶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가 협력하여 써내려 가야 할 내 삶, 내 공동체의 성서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면담고백성사를 줄 때는 성서를 렉시오디비나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려 노력합니다. 옛 현자의 고백도 삶이 하나의 성서임을 입증합니다.
“진실한 삶으로 들어가본 사람만이 인생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한다.”<다산>
“죽을 때가 되었을 때, 한 상자의 글도 전할 것이 없다면 헛되게 산 것이다.”<다산의 여유당전서>
생애 마지막 한 권의 내 삶의 성서가 없다면 헛산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평생 오래 살았어도 쓸 이야기가 없는 텅빈 공허와 허무, 무의미한 삶이라면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할까요? 그 허기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하여 삶의 여정을, 삶의 성서를,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하여 어느 시점에 있는지 살펴보며 거품이나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짧은 세월, 기도하고 공부할 시간을 생각하면 때로 먹는 시간도, 잠자는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오늘 12월24일, 주님 오심의 성탄이 임박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과 독서가 내 삶의 성서, 내 공동체의 성서, 내 나라 공동체라는 성서를 잘 렉시오디비나하도록 우리를 일깨웁니다.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나? 성찰하기에 참 절호의 오늘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나탄의 신탁이요 복음은 즈카르야의 찬가입니다. 두 독서의 특징은 동사들의 주어가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공동체를 통해 이루신 업적을 노래하는 것이요, 그대로 일종의 렉시오디비나입니다. 내가, 공동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해 주신 것이라는 것이요, 이런 깨달음이 더욱 회개를 촉진하고 겸손과 순종,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도록 마음을 움직입니다. 오늘 제1독서 나탄의 신탁도, 복음의 즈카르야의 찬가도 주어가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위업을 나열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었다.”
많이 생략했지만, 모두가 하느님이 주어가 되어 다윗을 위해 해주신 일임을 깨닫습니다. 다윗의 무지를 일깨우며 회개에로 인도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주님이 하셨다는 자각이 겸손이자 믿음입니다. 일례로 내가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수도원에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새삼 우리 요셉수도원 수도자들 하나하나가 하느님이 보내주신 하느님의 선물이자 신의 한수임을 깨닫게 되니 저절로 회개와 겸손이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됩니다.
즈카르야의 찬가 역시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렉시어디비나요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미의 노래가 됩니다. 가톨릭 교회가 수천년간 아침기도때 마다 즈카르야와 함께 이스라엘공동체는 물론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공동체를 렉시오디비나 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찬가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하는 즈카르야의 노래가 참 은혜롭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위업을 렉시오디비나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즈카르야와 우리들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두가 바칠 찬가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에게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이 주어가 되어 주도권을 잡고 이루신 위업에 대한 감사와 찬미로 가득한 즈카르야의 찬가입니다. 얼마나 역동적인 하느님이요 이스라엘 공동체요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인지요! 마지막 구절에서 구세주 탄생의 예고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하느님의 구원활동이요, 오늘도 그대로 이뤄지는 구원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날마다 대림이요 성탄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어,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고, 오늘 하루도 당신 중심으로 당신께 최선을 다해 협조하며, 우리 삶의 성서 한쪽을 잘 쓰도록 도와주십니다.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속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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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하느님>
우리 하느님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와 똑같이 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몸소 오시어 함께하시는
우리 하느님
우리를 당신과 갈라놓은
우리의 헛된 울타리를 허무시어
우리가 당신과 함께할 수 있게 하시는
우리 하느님
우리를 위하는 체 오히려 죽음으로 내모는
우리의 이기심과 무관심과 탐욕으로부터
우리를 풀어 구원하시는
우리 하느님
우리가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우리가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김으로써
우리를 당신과 하나 되게 하시는
우리 하느님
우리가 어둠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우리가 빛나는 살림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
우리가 더불어함께 평화를 이루도록 북돋우시는
우리 하느님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 닮게 하시고
우리를 당신보다 앞서 온 누리에 보내시어
우리가 당신의 사람임을 드러내게 하시는
우리 하느님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와 똑같이 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몸소 오시어 함께하시는
우리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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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1972년, 철학자 휴버트 드 레이퍼스는 자신의 책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에서 컴퓨터에게 체스를 가르치려고 한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는 인간 초보 플레이어조차 이길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컴퓨터로는 주방 보조를 대체하는 것 정도로 멈출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이 예측이 틀린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컴퓨터가 세계 체스 챔피언을 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방 보조는 아직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직 아무리 정교한 로봇도 바쁜 레스토랑의 테이블에서 접시를 치우고, 식기 세척기 안에 깨지기 쉬운 접시와 유리컵을 넣고 꺼내는 데 필요한 복잡한 기술을 갖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아시며, 우리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길 따름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미래를 예측하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종종 어떤 일을 행하는데 이렇게 될 것이라면서 수정하거나 멈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다양한 방법으로 이끄시는 그 손길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겸손과 모든 가능성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게 됩니다. 갓 태어난 아들 세례자 요한을 안고서 아버지인 즈카르야가 주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에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판단했다가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달라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점으로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에 대해 세속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돌잔치에서 아기의 미래를 예측해 보는 소소한 행사인 돌잡이가 있습니다. 엽전, 마패, 붓, 복주머니, 오방색지, 명주실, 바늘 쌈지 등이 준비됩니다. 이 중의 하나를 잡으면 아이의 미래가 보인다는 것이지요. 즉, 엽전을 잡으면 인생에 재물 운이 따른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준비된 이 모든 것은 세상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미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즈카르야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벙어리가 되는 하느님 체험을 통해 완전히 바뀌고 맙니다.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즈카르야의 노래’를 노래합니다.
이제 오늘 밤이면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대림 시기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우리 역시 세상의 관점보다 하느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사람이나 사물이 아닌 목표에 의지하라(아인슈타인).그때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루카 1,67)
즈카르야의 예언은 찬미가다
믿음·경건·기도·단식·인내·정결·찬미 노래 등, 구약성경의 영적인 것들이 모두 신약성경에서 줄어들지 않고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오랜 침묵을 깨고 찬미가 형식으로 예언하는 것을 보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레메시아나의 니케타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엑카르트는 다른 자리에서 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 이 점을 설명한다.
짤막한 이야기 한 토막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추기경이 베르나르두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그러자 베르나르두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가 그분을 사랑해야 할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무이십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방법 없이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길 없는 길이야말로 이유 없음이다. 이 영적인 터에서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무 이유 없이 행하라. 무작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천국이나 영원한 행복과 같은 종교적인 목표를 없애는 데까지 확장된다. 우리의 바깥에 있는 목표룰 따라서 움직이는 것은 이분법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천국과 영원한 생명이 이미 여기에 있음을 망각한 것이고, 우리가 이미 신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망각한 것이다. 이 신적인 삶은 어떤 삶인가? 하느님은 어떻게 사는가? 신적인 삶은 이유 없이 사는 삶이다. 하느님은 “이유 없이” 산다 2(302)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올해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모든 이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 당신 나라에 들게 하소서. 그들이 당신 목소리를 듣고 평온히 응답하게 하소서. 그 누구도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당신을 만나뵙지 않게 하소서. 저희 모두 깨어 기도하며 기쁘게 그날을 기다리게 하소서. 예수님, 저를 비롯한 모든 이가 당신이 마태오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기다리게 하소서.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24,45-51)
(이제 당신이 죽는 그 순간을 묵싱하며 주님의 손에 맡겨드리고 기도한다. 당신이 임종하는 순간 가까이 있게 될 사람들을 주님께 봉헌한다. 그리고 지금 서서히 죽어가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한다.)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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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메시아의 길을 닦을 세례자 요한 /
박윤식 [big-llight] 2024-12-23 ㅣNo.178710
‘아기야 너는 지존하신 이의 예언자 되리니, 주의 선구자로 주의 길을 닦아 죄 사함의 구원을 주의 백성에게 알리리라. 이는 우리 하느님이 자비를 베푸심이라.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오게 하시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며,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리라.’ ‘성무일도’의 아침기도로 평화와 위로의 힘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성모님의 노래(마니피캇: Magnificat)가 성무일도의 저녁 기도에 한다면 ‘즈카르야의 노래’는 아침에 바친다. 마니피캇은 은총을 베푸신 주님을 찬미하는 고요하고 감미로운 저녁노을 같다면, 이 노래는 동 트는 새벽에 기쁨과 희망을 알리는 여명의 기도일 게다. 그동안 말문이 막혀 어둠 속에 있던 즈카르야의 입이 열리자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있던 백성이 구원의 빛을 받는단다. 이 고백은 구약의 백성이 신약의 시대를 맞아 밝은 구원의 아침을 여는 기도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해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 내주실 것이다.”
성령으로 가득 찬 즈카르야가 말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실현된다. 이는 성탄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그의 이 노래는 교회의 기도로, 아침 기도에서 성무일도로 날마다 반복해 바친다. 이 노래의 첫째 부분은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이고, 둘째 부분은 다가오는 메시아에게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 요한의 등장으로 미래의 희망을 노래한다.
요즘은 하루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기 어렵다. 아침저녁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친다면, 우리 삶은 질서가 잡힐 게다. 새벽 동이 트는 여명에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르고, 하루를 마친 저녁에는 저 아름다운 노을을 마음에 그리며, 마니피캇을 부르는 삶을 살면 어떨지? 즈카르야의 힘찬 희망이 마리아의 복된 기쁨이 말씀을 타고 우리 삶 속에 스미게 될게다.
자, 이제 오늘 밤이면 하느님의 그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떠오르는 별이신 메시아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게다. 이 성탄의 밤에 태어날 아기 예수님께서는 한밤중의 별을 권위 있게 밝혀 주시리라. 그 밤은 오직 파스카 축제의 밤과 비교될 게다. 하느님께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려고’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리라. 죄의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눈앞을 가릴 때, 우리 모두는 오직 하느님께서 자신만을 구원하실 분이심을 비로소 알게 될게다.
이렇게 즈카르야는 하느님께서 끝내 이스라엘을 올바르게 구원으로 이끄심에 감사하며 자기 아들 요한에게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잘 닦도록 노래로 찬미하는 거다. 이 장면이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애절하지 않느냐!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욱 거룩해 보인다.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려면 이처럼 거룩한 찬미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 오늘 밤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다. 이 대림 시기 마지막 날을 보내며, 우리 역시 주님께 거룩한 기쁨을 봉헌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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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께는 영광, 땅에는 참 평화 /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마태 1,1-25)
박윤식 [big-llight] 2024-12-23 ㅣNo.178711
이제 몇 시간 뒤면 성탄이다. 이 밤에 듣는 족보는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약속하신 구세주이심을 드러낸다. 또 당신의 오묘한 섭리를 느끼게끔 한다. 이 장엄한 하느님의 약속이 의로운 요셉의 조용한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인간적인 의심과 망설임을 기꺼이 입 다물며 내려놓고, 꿈 꾼대로 성령으로 잉태한 산골의 아리따운 마리아를 따뜻이 아내로 맞이한다.
요셉은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하느님 뜻에 기꺼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표징이요 완전한 응답이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세상을 구하실 그리스도를 가장 연약하고 무방비 상태의 아기 모습으로 보내셨다.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그림자처럼 따르게 하셨다. 우리가 성탄에 임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할지를, 그 아기의 모습에서 묵상하게 된다.
이제 우리를 내세우려는 욕심과 이미 정해진 자신만의 계획과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을 시간이다. 침묵과 겸손의 그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 고요하고 거룩한 밤에 세상의 화려함에서 멀어진 곳으로 그분께서 오신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을까? 하느님께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오셨다. 저 족보는 그 과정을 소상히 보여 준다. 아주 멀리서 시작해 조금씩 다가오는 발소리처럼,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드러내시는 거다.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시고는,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시고는 당신 뜻을 지상에 실현하시면서, 만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신다.’라는 것을 점점 분명하게 알아보게 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런저런 굴곡을 겪으면서 이어지는 다윗의 족보에서, 이스라엘을 그분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지금도 그 옛날의 그 모습대로 우리 삶 한가운데에서 한 점 변함없이 그대로 계시기에. 바로 우리가 고뇌하고 분노하고 이웃에게 상처주고 손해도 보고, 그러다 좌절과 아픔마저 겪는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에 여전히 함께 하시기에.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고뇌하시고 문제를 풀어 나가시면서 끝없는 위로와 평화를 주시려고 하느님께서는 아기 모습으로 오신다. 우리 역시 눈앞에 펼쳐진 현실과 여러 문제점을 외면하지 말고, 함께 고뇌하며 그 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해보자. 오늘 밤 태어나실 저 아기 예수님을 상상하며 함께 묵상해보면서.
요셉은 삶의 어느 한 곳에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그림자처럼 조용히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였다. 우리가 성스러운 성탄 자리에 함께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자세를 지녀야 할지를 요셉을 통해 깊이 묵상하자. 이제 우리를 내세우려는 욕심과 이미 정해 놓은 자신의 계획과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을 시간의 시작이다. 침묵과 겸손의 시간이 다가온다. 이 고요하고 거룩한 밤에 세상의 화려함에서 멀어진 곳으로 주님께서 태어나신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그러기에 오늘 이 기쁜 성탄의 밤에 요셉 성인이 가진 그 긴 침묵과 겸손의 시간을 잠시나마 갖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거룩한 이 밤이다. 그분께서는 가장 낮은 곳인 이곳에, 그 작은 모습으로 오셨다. 세상의 가난한 이들이 갖는 고통을 헤아리시고자 오셨기에 이 밤은 더더욱 거룩하다. 하느님 참 평화를 조용히 만끽하면서, 우리 가운데로 오신 아기 예수를 기쁘게 맞이하자.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모든 이에게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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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즈카르야는 구세주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질 구원을 노래합니다(루카 1,78-79 참조).
예수님께서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되실 것입니다.
그들도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크신 자비”(1,78)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세례자 요한을 향한 즈카르야의 예언을 눈여겨봅시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1,76-77).
하느님의 구원은 ‘죄를 용서받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뒷날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3,3)를 선포합니다.
이제 곧 구세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려고 오십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는 이 구원이 죄의 용서로 이루어진다고 선포합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 뒤에는 크신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신비를 여러분에게도 이루어 주시려고 오늘 우리에게 오십니다.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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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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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즈카르야는 아들의 할례식 때
아기의 이름을 요한으로 정합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가 한 첫 마디는
하느님 찬미였습니다.
즈카르야는 먼저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주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전에 약속하는 것을
이루어주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아들 요한의 임무도 짧게 언급합니다.
자기 아들의 할례식이지만
즈카르야는 요한보다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합니다.
이미 태어난 요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자기 집에 머무는 3개월 동안
임신한 두 여인을 돌보면서
즈카르야는 엘리사벳의 출산도 기다려왔지만
마리아의 출산도 기다려온 것처럼 보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 태중의 아기를 알아본 것처럼
즈카르야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것으로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키셨다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쁨에
자기 아들이 하나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또다른 기쁨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
즈카르야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좁게는 아들의 출산에서부터
넓게는 이스라엘의 구원에까지
그 기다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원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인간의 힘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에
희망을 놓기 쉬운 상황이지만
즈카르야는 그것을 놓지 않았고
결국 그 희망은 기쁨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즈카르야에게 하느님은
희망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고 잊으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곧 빛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우리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희망을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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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루카 1, 78)
어디서나
우리의
삶을 비추는
하늘의 빛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우리를
비추는
가장 빛나는
하늘의
빛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길을 만드시는
빛이 있습니다.
기다림 끝에
보게되는
한줄기
빛입니다.
빛은
빛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밝은
빛의 길을
보여줍니다.
별빛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별빛같은
사람의 탄생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어둠을 뚫고
우리에게
오십니다.
빛은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참된 빛이
우리 삶에
오셨습니다.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빛은
나눔입니다.
나눔은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빛을 찾아
걸어가는
우리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빛은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행하는
나눔이
되라고
성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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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24일 [주님 성탄 대축일] - 밤 미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를 위해 탄생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빅매치 중에 빅매치라고 할 수 있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리버풀대 파리 생제르망의 경기를 현장에서 직관할 수 있는 입장 티켓과 왕복 비행기 표를 보내 초대한다면, 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뛸 듯이 기뻐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 가방을 준비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밤에 주님의 천사는 몇몇 사람들에게 탄생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관할 수 있는 초대장을 보냅니다.
‘메시아 탄생 현장 직관!’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 그 값진 티켓은 로마 황제나 황비, 유다왕이나 왕비, 수석사제나 율법학교 교장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에게? 놀랍게도 학벌은 전무하고, 가문도 보잘 것 없으며, 하루 온종일 양들과 붙어 다니는 일이 전부인 들판의 목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 조직 안에서 목자들은 하위 그룹에 속하는 신분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목자, 하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말도 섞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자들 역시 우리 처지가 그렇지 하고, 자포자기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하느님, 가장 존귀하신 그분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에 탄생하시며, 요셉과 마리아 외에 최초로 목격을 허락한 사람들이 가장 낮은 곳에 살아가던 가장 보잘 것 없는 삶의 소유자 목자들이었습니다.
탄생 때부터 나자렛의 숨은 생활, 그리고 활기 넘치던 공생활, 마침내 골고타 언덕 위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보여주신 모습은 낮은 자의 모습, 작은 자의 모습, 지극히 겸손하신 모습이었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작고 낮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명료합니다.
우리도 당신의 모범을 따라 작아지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은총은 또한 작은 자들, 낮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 은혜로운 성탄의 밤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하는 말씀 또한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복음 2장 10~12절)
“너희를 위하여!” 주님께서 다른 세력가들과 잘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목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동시에 오늘 갖은 세상의 고통과 상처로 고생하는 또 다른 작은 자들인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셨답니다.
바로 나를 위하여!
이 경이롭고 축복 된 성탄의 신비 앞에 천사들과 한목소리로 감사와 찬미, 영광의 노래를 힘차게 불러야겠습니다.
구세주께서 바로 나를 위해 탄생하셨다니, 내 안에서도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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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2월24일 [성탄 밤미사]
복음: 루카 2,1-14: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나셨다
호구조사의 상황은 요셉과 마리아를 왕도 베들레헴으로 가게 한다. 이곳은 다윗의 왕권이 시작된 곳이다(루카 2,1-5; 참조 1사무 16,1-13). 여기서 성령으로 마리아, 시온의 딸인 동정녀에게서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영원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루카 2,6-7)이 사람이 되어 탄생하신다. 들에서는 주님의 천사가 주님의 영광과 함께 깨어있는 목동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의 복음을 전한다.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11절. 부활의 명칭). 그 표지는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는 아기”(12절)가 구유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합창이 이어진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14절) 여기서 말씀이 전해졌다. 즉, 복음화되었다. 목동들이 알아들었고, 아기에게로 달려갔다. 이것이 “오늘”(11절) 모든 사람에게, 가시적으로 영원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참으로 거룩하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 위에 죽으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시며, “하느님의 일”을 행하시며, 인간들 사이에서 사셨고, 그러므로 그분은 참으로 탄생하셨다. 성탄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깊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해 생각해 볼 것이 있다.
* 무덤에서 옛 시간의 날이 끝나고, 새로운 “날”, “낮”, “오늘”이 시작된다. 탄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날은 무덤에서 지지 않는 날로 시작되며, 탄생에서도 그렇다.
* 같은 인격(위격)이 “살아 계신 분”으로 무덤에서 나오셨다. 때문에 탄생에서도 “살아 계신 분”으로 태어나셨다.
* 수의로 싸여 무덤에 모셔졌다. 탄생에서도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우셨다.
* 무덤에서 인간으로서 신적 생명으로서 나셨다. 따라서 그분의 탄생은 즉 인간이 되신 것은 무덤을 위한 것이다.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돌아가셨다. 진정 부활로서 아버지는 성령의 복되신 영원 안에서 영원한 아들의 인성을 낳으셨다. 바오로 사도가 시편 2,7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바로 죽음을 위해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탄생을 위한 것이며, 탄생은 십자가를 위한 것이다.
* 마리아와 아리마태아의 요셉은 무덤에 묻기 위해 수의로 싸는데 있었고, 그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포대기에 쌓아 구유에 모셨다.
* 주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무덤이 없었기에, 짧은 시간이지만(요한 19,41), “3일” 때문에라도 사랑으로 내어드려야 했다. 똑같은 모습으로 그분을 위해서는 탄생할 자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여관은 모두 예약이 되어 있었다.
*몰약은 무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위해 쓰였다(요한 19,39). 그 몰약은 박사들이 아기에게 바친 예물이었다(한 번만 쓰였다).
* 하늘의 천사들은 부활에도 있었으며, 탄생에도 있었다.
* 초자연적 신적 빛이 부활에도 빛났고, 같은 것이 탄생에도 있었다.
* 부활 사건에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신현) 앞에서 두려움은 탄생에서도 나타난다.
* 제자들 사이의 부활에 대해 놀라움은 탄생에서의 목동들의 놀라움과 같다.
* 두려움에 대해 부활에서 천사들의 안심시키는 “두려워 말라!”는 말이 탄생에서도 같이 나타난다.
* “큰 기쁨”은 무덤에서 여인들에게 힘을 주었고, 같은 기쁨을 목동들도 맛본다.
* “표지”로서 무덤에 있던 얼굴을 싸맸던 수건과 끈이 표지가 되었으며, 같은 표지로서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워있다고 하였다.
* 부활 사건에서 제자들이 달려가는 것, 미래의 “하느님 양 떼의 목자들”, 탄생하신 곳으로 달려가는 목동들이 나타난다.
* 제자들에게 여인들을 통해서 전해진 부활, 탄생에서는 목동들의 주님의 찬미와 찬양을 볼 수 있다.
* 위대한 왕의 도시, 예루살렘(시온)에서 부활하셨고, 인간적인 왕의 도시, 메시아적 왕의 도시, 다윗 왕의 도시, 예수께서는 인성으로 그리스도의 선조인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부활의 “표지”는 탄생의 “표지”이다. 이것은 기쁜 소식(복음)이며 살아있는 표징이다. 이는 주님 자신이시다. 이분이 바로 “오시는 분”이시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나셨다. 그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분은 평화의 왕자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아기로 태어나셨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분이 바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시며 모든 이의 구세주이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가르치고 계시다.
복음에 나타난 성탄 사화가 바로 부활을 통하여 본 것임을 알 수 있다. 성탄의 신비는 바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성탄의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십자가와 죽음의 신비, 부활의 신비가 모두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신비는 우리 자신이 사랑을 위하여 죽는 것을 말하며, 부활의 신비는 거기에서 오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성탄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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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탄 성야 미사 >
‘선한 의지’가 도대체 무엇일까?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성야 미사에서는 목동들이 천사들에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말을 듣습니다.
여기에는 그들만이 아기 예수님을 뵐 자격이 있음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말 안에는 무슨 일을 해서 마음에 들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가톨릭의 전통적 해석, “pax hominibus bonae voluntatis”, 곧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평화”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직역이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의미는 의역이고 현대 신학자들의 합의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된 데에는 “선한 의지”란 단어의 뜻의 중요성을 번역하면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의지’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의지와 욕구를 발휘합니다.
그중에 선한 의지도 있고 악한 의지도 있다는 뜻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격리 원숭이 실험을 통해서 새끼 원숭이가 젖이 나오는 철사 어미보다는 젖이 나오지 않아도 따듯함을 주는
인형 어미를 어미로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해 냈습니다.
이것이 선한 의지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어머니의 냉대 속에서 자랐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면 생기는 것이 열등감이고 우울감입니다.
태어나면 아기들은 다 선한 의지를 가집니다. 젖을 먹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엄마를 찾으려는 의지입니다.
엄마를 찾지 못하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 먹으면서 엄마보다는 엄마 젖을 더 추구하게 됩니다.
선한 의지가 오염이 되는 것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원숭이 새끼들을 일부러 어미와 격리하며 우울증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며 발견한 것은 새끼 원숭이들은 먹이와 편한 시설이 아닌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줄 어미를 찾고 무리를 찾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덕분으로 할로우 박사는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치유하는 길은 사랑받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기처럼 사랑만을 요구하는 남자와 사는 것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첫 번째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았지만, 결국 이혼하고 맙니다.
할로우 박사의 우울증은 점점 심해졌고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사랑을 만났습니다.
이때 ‘구원자 원숭이’의 개념을 발견하게 됩니다. 격리 6개월이 안 된 원숭이들은 정기적으로 다른 무리의 원숭이들과 사귀다 보면 우울증이 사라진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두 번째 부인도 두 아이를 낳고는 암으로 사망합니다.
인간으로는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우울증이 심해져서 전기충격으로 우울증을 극복해보려 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첫 번째 아내와 재혼했지만, 상태는 계속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실험실의 원숭이들을 학대했다는 비난 속에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알았습니다.
사랑으로 상처받은 자신은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음을.
그러나 ‘착한 뜻’은 아니었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삐딱하게만 보는 주인공은 한 스승의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에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나를 창조한 엄마처럼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을 사람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아기들은 착한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살아갈 힘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의 목자들은 착한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면 정체성이 생긴 것입니다.
엄마를 만나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엄마는 나를 창조하여 나에게 생명과 같은 젖을 주는 존재입니다.
이 착한 뜻을 가졌기에 그들에게 메시아의 표징이 구유에 뉜 아기였던 것입니다.
밥은 곧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을 양식으로 내어주시면 자신들은 자녀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만을 찾기를 원하는 이들이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누구를 구원하실까요? 아기처럼 엄마를 찾지 않으면 죽는 게 낫다는 착한 뜻을 가진 이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어떤 이들은 돈으로 가난에서 구원되려고 하고 먹는 것으로 배고픔에서 구원되려 합니다.
그렇게는 메시아를 만나지 못합니다.
착한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이처럼 세상없어도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메시아만을 찾는 착한 뜻이 있나요?
그러면 오늘 밤에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선한 의지는 구원자를 부르는 목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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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성탄 대축일 밤미사 강론>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메시아입니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4-14)”
1) 여기서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라는 말은, 방을 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관에 투숙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베들레헴 주민들 가운데에도 산모를 위해서 방을 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이 없어서’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물론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출산에 대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했을 것이고, 여관비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온 사람들이 여관방을 모두 차지했고, 아무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아무도 반기지 않는
차가운 세상으로 오신 것이고, 그때부터 이미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요한복음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그 상황에 대해서 혹시라도, “만일에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요셉과 마리아를 위해서 나의 방을, 아니, 나의 집 전체를 내주었을 것이다.” 라고 큰소리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큰소리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다음 말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41-4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지금 내 곁에 있는 ‘작은 이’가 바로 예수님이고,
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입니다.
2)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배척만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맞아들여서, 비록 방은 아니고 외양간이었지만, 어떻든 출산을 위한 장소를 내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마도 8절에 나오는 ‘목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에 그 지역의 외양간은 주로 동굴이었는데,
외양간 역할도 하고, 목자들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의 숙소를 요셉과 마리아에게
기꺼이 내주고, 자기들은 들에서 노숙을 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누워 계셨던 ‘구유’는 우리나라 외양간의 여물통과는 다르고, 양을 먹이는 건초를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에 아기를 눕히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를 몰랐고,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인줄도 몰랐지만, 그들은 메시아를 맞아들인 ‘마음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이 말에서 ‘손님’은 요셉과 마리아처럼 딱한 상황에 처해 있는 나그네를 뜻하고, ‘천사들’은 하느님을 뜻합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딱한 처지에 놓인 성가정을 접대하다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 하느님’을 접대한 의인들입니다.
3)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라는 말은,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8-29).”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워 계셨다는 것은,
인간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음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 즉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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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67-79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드디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목전으로 다가왔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까지 하느님 뜻에 깨어 기도했던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지요. 결혼도 안 한 처녀의 몸으로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순명했던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어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결단하고 실행한 요셉이 있었습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동방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동방의 박사들이 있었습니다. 밤 새워 양들을 돌보다가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목동들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성전에서 기도하며 하느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이 드러나는 때를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것이 참된 행복임을 마리아께 알려드린 엘리사벳이 있었습니다. 가문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정한 즈카르야가 있었습니다.
우리를 탐욕과 집착으로 떠미는 세상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우리를 구원과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 하느님의 뜻에 맞갖는 참된 올바름을 갈구하고 그분의 자비를 이웃에게 실천한 사람은 작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선한 계획을 알아보며 참으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즐거움과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자기 욕망을 채우기에 바빴던 사람은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바치는 즈카르야도 처음엔 그랬지요. 아들을 얻게 해주시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듣고 이제와서 ‘왜?’라는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에는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에 대한 보속으로 열 달 동안 침묵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곰곰이 생각한 끝에 비로소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크신 자비와 그 안에 깃든 놀라운 섭리에 대해 깨닫게 되었고, 입이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그런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지요.
‘즈카르야의 노래’의 전반부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뜻을 품으셨음에 감사드리며, 그 계획이 다윗의 후손인 구원자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 위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한편 후반부는 자기 아들 요한이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게 하는, 그리하여 종말의 순간 심판 대신 구원을 받게 하는 ‘엘리야’의 소명을 받았음을 알려주는 내용이지요.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겠지만,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참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힘겨운 고통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겠지만,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반드시 진정한 평화의 길로,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 주실테니,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주어진 길을 끝까지 묵묵히 걸어가라고 당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당부는 비단 요한뿐만 아니라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겠지요. 그러니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의 손을 잡고 신앙의 길을 끝까지 걸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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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어둠에 빛을 주시는 아기 예수님”
광야에 나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집트를 떠나 시나이 산으로 나아갈 때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망이 부풀었습니다. 위엄의 이집트 파라오까지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하느님의 열 가지 재앙을 비록 종살이를 하는 신세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속 시원한 하느님 기적들이었습니다.
물 벽을 만들어 그 깊고 넓은 홍해를 발도 적시지 않고 건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신났고 용맹하던 이스라엘 군대들이 추격하다가 바다에 빠지는 광경을 보았을 때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나 흥분하고 하느님의 역사에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된 것을 소리치고 싶었고 서로들 들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죽음의 사막이라도 단숨에 건널 것 같은 기백을 가지고 시나이 사막의
여정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굽이굽이 마다 하느님께서 과거에 베풀어 주셨던 놀라운 기적들을 숨겨두고
마치 보물 찾기를 하듯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재미나 이벤트를 마련하여 또 한 차례
백성들을 놀라움의 골자기로 초대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수르 광야로 나아가 마라라는 물을 만납니다(탈출 15,22-24).
그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서히 사막에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불러내었나?’라는 말이 돌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그들은 인도하는 모세에게 대들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인도하던 하느님의 궤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 떠다니는 이동성막으로 유랑의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십 여년이 지난 후에야 하느님께서 약속으로 내어주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그들의 성전을 짓게 되었으며
그것이 그들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런에 우리가 잘 알듯이 바빌론에 의해서 철저하게
예루살렘 도성은 붕괴되 성전 적에 의해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그 안의 기물마저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사막의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를 갔던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시온 때문에 나는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예루살렘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그러면 민족들이
너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너는 주님께서 친히 지어 주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리라.“(이사 62,1-2)
버림 받았던 같았던 예루살렘이 다시 활기를 되찾고 그 옛날의 영광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시온에 돌아왔지만 그리스에서 로마 제국의 속국이 되어 다시
암울한 시대에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좀 더 구체적인 구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살이 할 때에 그들을 큰 백성으로 키워 주셨으며,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사도 13,17)
마태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요셉에 이르기까지의 족보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결론으로 이 족보의 의미를 새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마태 1,17)
우리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는 많은 구약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유롭고 어떻게 보면 혼란스러운 상황에 있던 인물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구원의 이야기가 이미 하느님의 섭리아래 계산되어 이끌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으로서는 하느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계산을 넘어
심오하게 계획된 이미 구원의 구원의 이야기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어서 예수님의 탄생 경위에 대해서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과 연계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신 성모님께서는 여인으로서 겪는 아픔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고 마리아 아가씨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결혼하기로 약속한 약혼기간에 마리아는 사랑하는 약혼자로부터 오해의 아픔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도 알다시피 신의를 저버리는 데에서
오는 괴멸감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의 변심은 복수까지도 불러올 정도로 실망과 고통의 극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기쁨 이전에 인간의 오밀조밀한 고통, 오해, 아픔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즈카리아야 엘리사벳의 아기를 갖지 못했던 아픔,
동정녀가 아기를 갖는 부끄러운 이야기, 약혼녀에게 배신을 당한 한 남자의 슬픔과
고통의 이야기가 전제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의 사십 여년의 방황과
불안과 불평의 이야기가 전개 되듯, 우리도 주님의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서로 얽히고설킨
이야기, 개개인의 실망과 아픔의 이야기가 전제되는 것입니다.
성경 기자는 이러한 어둠의 이야기를 그대로 밝히듯, 우리도 우리의 아픈 삶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한 바탕에서 우리 주님,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는
구세주의 이야기가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 베틀레헴의 한 벌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가난하고 때로 고통의 삶이 지나간다해도 우리에게는 분명 가난하신
주님의 성탄을 복된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사들의 외침을 다시 새겨 보도록 합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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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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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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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4. 2024년 12월 24일.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두는 삶
<2024.12.24>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12:1~10절)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두는 삶❞
❚ 세상의 가치가 우리의 중심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 안에서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즐거워하고 계명을 지키는 삶이어야 합니다(1~3절).
시인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1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성품이 녹아 있는 그분의 말씀들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행하는 의인의 후손 역시 땅에서 강한 자가 될 것이며,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2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자손의 복뿐만 아니라 물질의 복도 받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로움은 영원히 지속될 것(3절)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구원에 감사하여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만약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한다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거나 홍수처럼 쏟아지는 설교들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말씀 안에서 누리는 영적 풍요로움은 과거 어느 때보다 약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우리 마음이 순종을 통해 세상 가운데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삶의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옳은 길을 가도록 노력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매일 매 순간 즐거워하고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마음 중심에 두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자비로우며 은혜를 베푸는 삶이어야 합니다(4~7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직한 자들’은 어둠 가운데서도 빛이 떠오르며, 은혜와 자비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자들을 구원하셔서 생명과 기쁨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꼭 닮아서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롭기’ 때문입니다(4절). 이들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꾸어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잘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일을 정의롭게 행하였기 때문입니다(5절).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6절). 그가 비록 흉한 소식들을 듣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하게 됩니다(7절).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이유는 반석이요,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구원의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리 어둠이 짙은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 하거나 염려하지 않는 이유는 인생의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강력한 빛이 비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 속에는 자비와 긍휼과 정의가 빛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성품을 일상의 삶에서 드러내며 살아가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확신하고, 신뢰하기에 세상에서 흉한 소식이나 위협적인 소식이 들려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붙잡아 주시고 함께하시면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이 같은 복을 받아 세상으로 흘려보내므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므로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마음 중심에 두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두려워하며 영생을 바라는 삶이어야 합니다(8~10절).
시인은 여호와를 의뢰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마음 역시 견고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승리 가운데서 자신의 적들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8절). 또한 그들은 여호와께서 주리고 가난한 백성을 양식으로 먹이셨음을 본받아, 자신의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널리 나눠 주고, 그의 의로움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시는 것처럼 의인의 ‘뿔’, 즉 그의 존귀와 능력도 영광 중에 높여질 것입니다(9절). 반대로 악인은 의인이 영화롭게 되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갈며 한탄하겠지만, 결국은 소멸 될 것이고, 또한 악인들이 추구하는 욕망과 악한 시도들 역시 결국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10절).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믿음을 굳게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며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사람은 마침내 우리의 대적이 받는 보응을 보게 될 것이며, 악인은 결국 땅에서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이 의인보다 형통하고 번성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겠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들의 번영과 형통을 부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을 소망하며 날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잘못과 범죄 함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는 것 역시 바른 신앙을 형성하는 좋은 밑거름이 된다는 것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므로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마음 중심에 두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세상의 욕심과 가치에 마음을 빼앗기는 불행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중심에 두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믿음의 사람답게 말씀에 순종하며, 예배하는 것을 즐거워 하며, 당당하게 복음의 증인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시 112:1~1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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