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a-Cola의 역사-8】
기술 감독관들은 정글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도록 휴대용 코카-콜라를 고안했고, 잠수함의 좁은 해치를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슬림형 기계도 개발했다.
또한 코카-콜라는 해외의 미국 군사기지 주변에 사는 민간인들에게도 제공되었는데 대부분이 그 맛에 매료되었다.
코카-콜라는 미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전쟁터에서조차 마실 수 있었지만 매우 귀중한 것이어서 특별한 경우를 위해 비축하거나 아주 비싼 값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터에서 공군 조종사였던 군인은 일본군 전투기 5대를 격추한 포상으로 코카-콜라 한 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그냥 마시기에는 너무 귀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전에 그가 다쳤을 때 수술해 준 의사에게 선물했다.
더글라스 맥아더, 조지 패튼 같은 장군들도 코카-콜라를 즐겨 마셨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성적이었던 장군은 유럽의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였다.
1943년 6월에 북아프리카에 있는 연합군의 군사작전을 지휘하던 중 그는 본국에 상세한 요구사항을 담은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3백만 병의 코카-콜라와 한달에 두 번 이와 비슷한 동일한 분량을 병 작업하고 씻고 포장하는 기계 장비를 보내주기 바람.
기계 장비는 각각 다른 장소에 설치할 10대가 필요하고,
각 기계는 하루에 2만 개의 병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함.
또한 6백만 병의 리필을 위한 충분한 원액과 병마개가 필요함.”
생산설비는 북아프리카에서 6개월 동안 운영되었고, 다음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이후 서유럽으로 진격하자 코카-콜라도 뒤따라갔다.
코카-콜라 회사는 멀리 이국에서 전쟁을 치루는 병사들에게 코카-콜라가 꼭 필요한 음료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주축국인 독일과 일본은 미국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코카-콜라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코카-콜라는 전쟁 전에 이미 양국에서 판매되고 있었고, 특히 독일에서 인기가 높았다. 나치의 정치선전부는 이러한 불편한 사실을 외면하면서 “미국은 츄잉검과 코카-콜라를 제외하면 세계 문명에 기여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조롱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재건기의 3년간 군 기지에 설치되었던 코카-콜라 생산 기계들은 계속 가동되었다.
그후 생산 시설은 민간에 넘겨졌다.
그러나 그때쯤에는 미국 덕분에 전 세계로 퍼진 코카-콜라는 남극을 제외하고 지구상의 모든 대륙 위에 확고한 기반을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 덕분에 코카-콜라의 매력이 거의 전 세계에 인정되었다.
코카-콜라를 좋아했던 가장 뜻밖의 인물은 소련의 군사지도자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일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장성 중에서는 가장 빛나는 공을 세웠던 전쟁영웅이었다.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감히 다른 목소리를 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신망이 높았기 때문에 스탈린도 주코프를 어찌할 수 없었다.
전후 독일의 분할을 위한 교섭 기간에 주코프는 아이젠하워의 권유로 처음 코카-콜라를 맛보고서는 코카-콜라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소 양국이 경쟁이 격화되고 있을 때에 미국의 가치관을 상징하는 음료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주코프는 특별한 주문을 했는데, 러시아의 보드카처럼 보이도록 무색의 코카-콜라를 만들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의 요청은 코카-콜라 회사에 전달되었고, 회사는 정부와의 적절한 절차를 거치고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도 얻은 후에 무색의 코카-콜라를 제조해서 주코프에게 보냈다.
자료의 출처
세계사를 바꾼 6가지 음료
톰 스텐디지 지음,캐피털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