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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에게로 보냄 받았음을 증언함
행 22:12-21
12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행 22:12-21 / 거기에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하고 율법을 잘 지키며 다메섹의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3) 그가 나를 찾아와 곁에 서서 `사울 형제여. 눈을 뜨시오' 하고 말하자 바로 그 순간에 나는 그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4) 그러자 아나니아가 내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메시야를 만나게 하시고 또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시려고 당신을 택하신 것입니다. 15) 당신이 그분의 말씀을 가지고 각 지방에 나가서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16) `자, 이제 무엇을 주저하겠습니까? 일어나 주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당신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으십시오.' 17-18)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경위]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의 일입니다. 어느 날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던 나는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상 가운데서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라. 네가 내 말을 전하더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 그들은 제가 회당마다 돌아다니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매질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 게다가 주님의 증인인 스데반이 죽임을 당할 때는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그 일에 찬송하였고 그를 돌로 치는 사람들의 겉옷을 지켜 주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2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라. 나는 너를 멀리 이방 사람에게로 보내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유대인과의 동질성을 강조하며 그들을 설득하려 합니다.
아나니아의 증언(12-16) 여기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설명하는 동안에 바울은 유대인 군중의 성난 정서를 고려합니다. 예를 들면, 아나니아를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 하나님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의인’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최대한 유대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의 동질성을 애써 강조합니다(고전 9:20). 그리고 바울은 경건한 유대인 아나니아가 자신을 세례교인이 되게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나니아가 악명 높았던 사울에게 ‘형제’라고 부른 것은 그의 회심을 인정하고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었습니다.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표시로써 아나니아는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행 9:18). 아울러 바울은 아나니아의 증언을 통해 자신의 회심이 조상들의 하나님, 유대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신을 선택하신 결과이며, 자신의 복음 전파가 자신의 눈과 귀로 들은 확실한 증거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복음은 이론이나 이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분명한 사실(Fact)에 근거한 것입니다.
바울의 계속된 증언(17-21) 세례 교인이 된 이후의 일을 바울은 계속 증언합니다. 여기서 ‘후에’란 아라비아 광야에서 훈련을 받고난 이후, 곧 회심 후 ‘3년 뒤’를 뜻합니다(갈 1:18019). 3년 후 그는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소개합니다. 이 변증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주’라고 호칭함으로 여호와와 예수님의 관계를 확실하게 연결짓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속히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여기서 ‘멀리...보내리라’라는 말씀은 예루살렘 안에 머물렀던 사도들과 달리 사도 바울이 이방의 먼 지역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여줍니다. 이방 선교는 바울의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거절할 수 없는 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마지막 말이 유대인들을 크게 자극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 군중은 유대인과의 동질성을 강조한 바울의 말을 잘 들어왔으나 바울이 ‘이방인’을 언급하자 더 이상 듣기를 거부합니다.
적용 :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살아계심을 역사적인 사실로 믿습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고백한 말입니다.
자신의 존재가치가 점점 사라져 감을 묵묵히 기뻐하는 자..
자신이 망해가는 것을 기뻐하며 십자가만을 드러내는 자..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자기 의를 버리고, 자기만족을 위한 삶을 포기하며, 돈과 명예와 재물을 숭배하던 내면의 질그릇을 부숴버려, 죽음의 자리로 향하던 그곳, 거기에서 그는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목도합니다. 성경은 그를 향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와 같은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 설 교 >
아나니아의 역할
행 22:12-16 / 김영규 목사
주님을 만난 직후의 사울
지난 주 말씀은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장면이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입구에 다다랐을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은 불가항력적인 주님의 모습 앞에 눈이 멀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울은 일행의 손에 이끌려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사흘 동안 캄캄한 눈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이와 같이 갑작스런 주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은 거기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12-13) 사울이 예수님 앞에 엎드러진 이후에를 인도한 사람은 아나니아란 사람입니다. 아나니아가 누구인지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 그는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복음이 전파될 때에 믿게 된 신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가 다메섹에 머물게 된 것은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본래 다메섹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는데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전도를 받고 다메섹으로 돌아간 경우입니다. 둘째로, 그는 본래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 때문에 다메섹으로 피신하여 거주한 경우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아나니아는 유대인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아나니아가 율법에 경건한 사람이며, 다메섹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지금 사울은 예수를 전한 것 때문에 분노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변론하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아나니아가 유대인으로서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설명합니다. 유대인으로 존경받으려면 우선 율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지키고, 토라를 외우고, 정결 예식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나니아는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와서 눈을 뜨게 해 줬습니다.
사실 아나니아는 좋아서 사울을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세요. 사울을 찾아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아나니아는 망설였습니다. 사울이란 사람은 살기등등하여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아닌가? 그런 사람을 왜 찾아가란 말인가?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행9:13-14) 아나니아가 망설일 때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16)
사울을 찾아간 아나니아는 사울을 위해 손을 얹고 기도해줬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9:17) 아나니아가 기도할 때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며 눈을 떴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눈을 뜨게 된 내력을 얘기해 줬습니다.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14) 네가 만난 분은 예수님이시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을“저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에 사울은 예수님을 유대교를 파괴하는 이단 교주 정도로 생각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예수님을 아나니아는 의인이라 불렀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지금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저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 의인이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사울에게 보낸 분은 바로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믿는 하나님, 구약 성경에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타난 이단자가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말씀하신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그 사실을 유대인들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눈을 뜨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할 일도 가르쳐 줬습니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15-16)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두 가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줬습니다. 첫째는 그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해야 될 직무입니다. 둘째로,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공적 표식이요 절차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라는 사람들 앞에서의 증표입니다. 세례는 믿음의 결과로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죄를 씻기 위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믿고 죄를 씻었기 때문에 받는 표식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아직도 세례를 받지 않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반드시 세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나니아의 역할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사울에게 새로운 인생길을 가도록 안내해 준 아나니아의 역할입니다. 아나니아는 최초로 예수님을 만난 사울에게 두 가지 획기적인 영향을 줬습니다. 첫째로, 그의 눈을 뜨게 해 준 일입니다. 육신의 눈을 뜨게 해 준 것보다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준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안목을 갖도록 도와줬습니다.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물질관, 새로운 우주관, 새로운 가정관,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도록 도와줬습니다. 둘째로, 그가 해야 될 직무를 가르쳐 줬습니다. 즉,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도록 진로를 결정해 줬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실 때에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주님이 사울 앞에 나타셨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님의 부르심은 어느 날 사울이 잠자는 동안에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반드시 어떤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신실한 신자로 만들어 가실 때에 반드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사울은 홀로 믿어서 사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의 인도를 통해서 사도답게 변화되었습니다. 사울의 생애에 영향을 준 인물은 아나니아 뿐만이 아닙니다. 순교자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의 신앙을 사울에게 보여줬습니다. 바나바는 회심한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가서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키워줬습니다.
저에게는 목사가 될 때가지 결정적인 영향을 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영향을 주신 분은 청년기에 제게 예수님을 전해주신 집사님입니다. 제가 병들어 학업을 중단하고 낙심해 있던 시기에 끈질기게 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제가 싫어하든지 말든지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어떤 때는 집사님 집에서 정성스런 식사 대접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그렇게 깔끔하게 잘 차려진 밥상은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빌리그레이엄 전도집회 장소로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 교회 부흥회에 인도하셔서 감동적인 간증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 분은 제가 교회 생활에 정착할 때까지 항상 관심을 가지고 돌봐주셨습니다.
두 번째 영향을 주신 분은 제가 처음 등록을 하고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님이십니다. 그 분은 제가 예수님께 푹 빠지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은사를 받도록 지도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제가 차분하게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도록 지도해 주신 일입니다. 처음 은혜 받고 뜨거운 마음을 가지게 되니까, 물불을 가리지 못했습니다. 당장 대학을 그만두고 신학교를 가려고 했었는데, 차근차근 공부하여 목회자의 소양을 쌓으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바람에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길지는 않지만, 직장생활 사회생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만일 아무 경험도 없이 목회에 뛰어들었더라면 여러 면에서 부족한 목회자가 되었을 겁니다. 저는 목회의 길을 가면서 그 목사님께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세 번째 영향을 주신 분은 2년차 서리집사였던 저를 신학교에 보내주신 목사님이십니다. 저는 여러 차례 목회자로 헌신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보니 가족을 먹여 살리는 문제가 큰 과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위로 할머님 어머님을 모시고 있었고, 결혼하여 아내와 막내가 태어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식구들의 생계 대책도 없이 목회의 길을 간단 말인가? 그런 가운데 마음도 슬슬 변했습니다. 꼭 목사가 돼야만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인가? 평신도로서 교회를 잘 섬기면 되지! 하나님 앞에서의 서원을 스스로 저버리려고 했습니다. 그 무렵 제게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도록 강하게 권면해 주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제가 결단을 내리도록 도와주셨고, 신학교에 보내주셔서 목사 안수를 받고 개척 나올 때까지 저를 지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목회자가 되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영향만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제게 중요한 사람들을 보내셔서 영향을 받게 하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육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존경했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 제게 많은 감화를 주신 분들이 바로 선생님들이셨습니다. 저는 6.25때 월남한 피난민의 자녀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시고 제 어려운 형편을 보셨습니다. 손수 노트와 연필을 사주셨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 와서 서울 변두리 중랑천 판자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에 3년 동안 학비를 받도록 도와주신 선생님이 계십니다. 이런 교육에 대한 제 생각이 은연중에 자식들에게까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자식 셋이 다 선생이 되었고, 자부들까지 다 선생입니다. 어린 시절에 어떤 사람에게 받은 영향이 일생에 영향을 주고,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줍니다. 그만큼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누구를 변화시키실까?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적인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그런 영향은 오랜 접촉을 통해서 나타날 수도 있고, 짧은 기간의 만남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의 만남을 통해서 이런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나 역시 그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신중하게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누구의 삶을 바꿔 놓으실까? 나 때문에 자식들의 삶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나 때문에 내 직장 동료의 인생길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나 때문에 친구들의 삶이 바뀔 수 있고, 나 때문에 교인들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나로 인하여 사상이 바뀔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나로 인하여 직업이 바뀔 수도 있고, 가정이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조심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실족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오히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용기를 얻고, 나 때문에 새로운 삶의 의욕을 갖게 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죄 짓던 사람이 회개하고, 나 때문에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27:17) 사람은 사람에 의해 다듬어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성도와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신앙이 달라집니다. 인격이 달라집니다. 생각과 사상, 가치관이 변합니다. 사상이 변하면 사는 방식도 변합니다. 직업도 변하고, 하는 일이 변합니다. 오늘 나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아나니아와 같이 결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행 22:17-23 / 양향모 목사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시며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온통 그런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왜 우리에게 메시야가 필요하며 하나님께서 그 메시야를 어떤 경로를 통하여 보내셨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그 메시야로 오셨다는 사실과 그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고 맞이해야 하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받을 은혜가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또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확인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다짐을 해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사도행전 22장을 통하여 사도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변증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먼저 자신이 유대인이며 정통적으로 성경의 율법을 배운 사람이며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열심을 내던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환상 중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복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먼저 전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극히 반대하였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며 자신들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짐승들과 같은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좀 더 의미 있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기독교가 어디서 온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생각하기를 기독교는 서양에서 온 종교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토속종교를 믿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교나 무속종교가 뭘 하면 좋게 생각하고 기독교가 뭘 하면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유대인들만 섬기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 유대인들의 종교를 우리가 왜 따라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도 아니고 유대인들만 따르는 유대교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우주만물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시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 속에서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신 은혜의 복음을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본문 17-18절에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라고 한 것은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좀 힘이 듭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회심 후 3년 동안 다메섹과 아라비아에서 보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고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고 아라비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 기간 동안 바울은 이중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으로 찍혀서 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동안 바울이 기독교인을 박해하고 회당마다 찾아다니며 기독교인들을 때리기도 하고 잡아가서 죽이기도 했기 때문에 바울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회심을 했다고는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회심한척하고 접근했다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 붙잡아가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양편을 이해시키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들의 화가 좀 풀어지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또 기독교인들이 바울이 확실히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했다고 믿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런 시간이 3년 정도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3년 동안 이 두 그룹의 사이에 끼여서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이제 시간이 적당히 흐른 후에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먼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에 성전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를 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하나님을 배반한 이단종교라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하여 떳떳하게 성전으로 들어갔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예수님이 바로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하여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성전에 들어와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즉 환상 중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무리 좋은 말로 설명을 해도 내게 대해서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괜한 고생하지 말고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지금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들을 설득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는데 30년 전에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예루살렘에 왔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때 바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지금에 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그 때 이런 일들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지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이렇게 왔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축복이기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다시 예루살렘에 왔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19-21절에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시자 바울이 떠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도 한 때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람이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증언하다가 순교를 당할 때도 유대인들의 편에 서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찬성을 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회당마다 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 내고 그들을 구타하고 잡아다가 가두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런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이 말을 하면 들어볼 것이고 좀 깊이 생각해 보고 예수님을 믿을 사람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기독교를 반대하는 일에 그렇게 열심을 냈던 사람이 복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명을 하면 좀 들어나 보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에서 살펴 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 믿는 것은 그런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고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증언을 한다고 해도 그냥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성품이 참 착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잘 섬기고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귀한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다 복음을 잘 알고 복음에서 나오는 바른 교훈의 말씀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경건한 삶을 자랑하고 꼭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복음과 반대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편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시는 사람만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창세전에 선택을 받은 사람이어야 하고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 역사하셔야만 복음의 비밀을 알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울은 이방인을 전도하기 위해서 택함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멀리 이방인들에게 보내서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속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계만방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 자신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지만 그래도 유대인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죽을힘을 다하여 이렇게 예루살렘까지 다시 찾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된 것은 이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먼 곳에 있는 우리들에게까지도 이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고 우리가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중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수고를 하고 노력을 하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면서 까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위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사실은 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지만 그 구원의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을 하는 이유도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복음을 모르는 세계 만만에게 선교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본문 22-23절에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들이 흥분해서 하는 행동입니다. 사도 바울이 정말로 해야 할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정작 전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는 아직 한마디도 하지 못했는데 중간에 말을 못하게 막고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여기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극도의 분노를 나타낼 때 주로 하는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격렬한 분노로 인하여 흥분하고 날뛰는 사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화가 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멀리 이방인들에게 보낸다는 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방인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할 것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불쾌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바울을 살려둘 자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할 사람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없어져야 할 사람은 자신들인지도 모르고 고함을 지르는 유대인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참 많이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들이 참 많이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없어져야 할 사람인지 모르고 우리보고 없어지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몰라보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살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하여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으로 은혜로 구원의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유일한 길이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의 구주로 믿는 일입니다. 이 믿음이 없거나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존재하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는 간다고 하면서 세상에 살 가치도 없는 사람들처럼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위대한 믿음이라고 말은 하면서 진실 되게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교회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다 가지고 있는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이 복음을 바르게 알고 진실 되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잊지 말고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에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갚으려는 심정으로 사랑을 베풀면서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는 사명을 잘 감당하며 서시기 바랍니다. 전도하며 선교하는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으로 가라
김영규 목사
그들이 네 말을 듣지 않으리라
오늘도 안토니아 요새 계단에서 바울이 유대인 군중들을 향해 하는 설교 장면이 계속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지, 어떻게 눈을 감았다가 떴는지, 어떤 사명을 받았는지 얘기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거기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17) “후에”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지 약 3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그 3년 동안 바울은 아라비아에 가 있었습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1:17-19) 아라비아에 가 있던 시기는 아마 개인적인 사색과 기도 기간으로 생각됩니다. 특별히 주님을 믿는 구원의 원리에 대해서 깊이 연구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무엇이 다른가? 유대인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후일 바울은 신약 성경의 절반에 해당하는 13권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성경은 기독교 교리 체계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 어떻게 구원 받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종말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런 중요한 교리 체계를 확고하게 깨달은 것이 바로 이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라비아에서의 3년이 지난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생각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황홀한 상태에 빠지고 주님의 환상이 보였습니다. “황홀한 중에”란 말은 헬라어로 엑스타시인데, 개역한글판에는 “비몽사몽간에”라고 번역했습니다. 보통 잠을 잘 때 보여지는 것을 꿈(dream)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시에 보이는 것을 환상(vision)이라고 합니다. 환상은 영적으로 어떤 황홀함 속에서 보여집니다. 바울은 이런 환상을 본 경험이 많습니다.
주님이 바울에게 하신 말씀은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18)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예루살렘 사람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왜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바울이 예루살렘 유대인을 전도하는 일에 매달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인 전도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19-20) 바울이 얼마나 열심 있는 유대교도였는지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하면 관심을 갖고 돌이킬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배신자로 여겼고 분노하여 대들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울을 싫어한 예루살렘 사람들은 유대교도들만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들도 바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 바울이 기독교를 대적하던 과격분자였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도든 그리스도인이든 바울을 싫어했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유대인에 대한 자신감은 착각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자신감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가 있습니다. 처세술에 능하거나, 대인관계에 자신 있는 사람들은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감을 가져라! 자신 있게 말하라! 확신을 가져라!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네 말을 들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잘못 된 생각입니다. 누구도 내 말을 경청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니까, 혹은 엄마니까 자식들이 내 말을 듣겠지? 내가 사장이니까, 내가 상사니까 부하들이 내 말을 듣겠지? 내가 담임목사니까 교인들이 내 말을 듣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말이 합리적이니까, 혹은 좋은 일이니까 내 말을 듣겠지? 눈에 보이는 표적이 있으니까 내 말을 듣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말세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를 막고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습니다.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슥7:11)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행7:57)
요즘 “소통부재”라는 말을 엄청 많이 사용합니다. 왜 소통이 없느냐? 소통부재의 책임은 대개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대통령에게 따집니다. 부모에게 따집니다. 스승에게 따집니다. 경영자에게 따집니다. 당신 때문에 의사 소통이 안 된다! 과연 그럴까요? 제가 볼 때에 소통의 문제는 현대인의 의식구조의 문제입니다. 우선 내말만 하고 남의 말은 듣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즉, 소통부재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의 문제입니다. 천안함 사건을 보세요. 다국적 조사단이 면밀히 사건을 조사하여 결과를 내놨습니다.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입니다. 대부분이 조사 결과를 인정하고 전 세계 다수의 나라들이 규탄성명을 냈습니다. 그런데 유독 김정일이 하고 대한민국 안에 사는 몇몇 사람들이 못 믿겠다고 유엔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못 믿는 게 아니라 안 믿는 겁니다. 심지어는 6.25 전쟁을 남침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역사적 fact까지도 믿지 않습니다. 이런 세태의 변화는 교회 밖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마찬가집니다. 저는 세월이 지날수록 목회가 힘들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 세대 전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든지 잘 받아들이고 믿었습니다. 요즘은 어떤 사실을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남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려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저 잠잠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 진정으로 내 말을 경청하겠습니까? 누가 내 말을 듣고, 변화를 일으키겠습니까?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듣게 하시는 사람이 듣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서 듣게 하시는 사람만이 듣고 변화됩니다.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욥36:10)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50: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행22:14)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남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아서 괴로우십니까? 소통이 안 됩니까? 말이 통하지 않습니까? 남편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자식들이 내 말을 듣지 않습니까?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마음의 귀를 열어주시면 듣습니다. 하나님 듣는 귀를 열어주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예루살렘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하고 탄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듣는 것도 하나님 뜻이고 듣지 않는 것도 하나님 뜻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거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21) 바울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판단에 절대적인 의미를 두지 마세요.
바울의 생각이 뭡니까?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적격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타당한 이유도 많았습니다. 첫째로 그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정통파에 해당하는 랍비 힐렐과 가말리엘의 계보에 속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유대인에게 전도하는 것은 가장 타당한 일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기독교에 대해서 가장 적대적인 박해자였습니다. 본문에 언급했듯이 그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할 때에 돌 던지는 사람들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으로 다메섹까지 쫓아다녔습니다. 그런 사람이 돌변하여 예수를 믿는다면 꽤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셋째로 그는 자기 동족 유대인을 누구보다 사랑했습니다. 그는 동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이런 극단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내 동족이 구원받는다면 내 자신은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그 정도로 동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유대인에게 전도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인식도 큰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이방인을 바라보는 유대인의 시각은 폐쇄적입니다. 만일 메시아가 세상에 온다면 유대인을 구원하러 오시지, 이방인을 구원하러 오실 수는 없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이 볼 때 이방인은 개나 돼지 정도로 부정한 사람들입니다. 함께 마주 앉아 식사를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부정합니다. 오순절날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유대인 신자들조차도 예수님은 유대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을 구원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들 역시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사도에게 이방인 고넬료를 찾아가라고 했을 때에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행10:14) 하나의 비유입니다만, 이방인과는 접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10:15) 베드로는 이방인을 찾아가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리 부정한 이방인도 주님이 깨끗하게 하시면 깨끗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주님을 영접했던 바울 역시 유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9:4-5) 유대인은 이방인들보다 타고난 축복이 많습니다. 바울 역시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우선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유대인의 특권을 무시하고, 이방인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이 부정하다는 사고방식은 유대인의 판단이지, 하나님의 생각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의 혈통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세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은 인류 구원입니다. 어느 혈통, 어느 족속만의 구원이 아닙니다. 인종과 종족, 가문, 문명인이든지 미개인이든지, 남녀노소,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부르심과 구원은 계속됩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려는 것은 애당초 복음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 내게 이방인은 누구인가?
그러면 오늘 내가 찾아가야 될 이방인은 누구일까요? 그들에게 내가 할 일이 뭡니까? 결론적으로 세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로, 내가 찾아가서 만나야 될 이방인은 아직 복음을 받지 않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복음 밖에 있다면 다 이방인입니다. 비록 혈육이라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영적 이방인입니다. 세상에서는 매일 함께 살지 몰라도 죽는 순간부터 영원히 다른 곳에 살아야 합니다. 친구도 마찬가집니다. 세상에서 친구라고 영원히 친구는 아닙니다. 천국에 함께 가지 못하면 결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아직 복음을 받지 않은 영적 이방인들, 내 곁에 있는 이방인들을 최우선적으로 만나서 전해야 합니다.
둘째로, 복음적인 만남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복음을 알리는 것이 우리 만남의 목적입니다. 인생 살다 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만납니다. 다양한 목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취미 생활로 만날 수 있습니다. 학연이나 지연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혈육이기 때문에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만남이든지 그리스도인의 만남은 근본적으로 복음적인 접촉이 되어야 합니다. 즉, 내가 믿는 예수님을 전해서 함께 천국에 이르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내가 현재 누리는 천국, 내가 장차 들어갈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합니다. 바울의 생애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애찬을 나누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피고인으로 재판받는 자리에서 재판장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그 만남이 복음을 전하고 축복을 나누는 삶으로 이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누가 내 얘기를 듣고 안 듣는 일에 대해서 과도히 마음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듣는 것도 하나님 뜻이고, 안 듣는 것도 하나님 뜻입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런 진리를 항상 깨닫습니다. 전도하다가 실패했다고 낙심 마세요. 누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화 낼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듣게 하시면 듣습니다. 하나님이 마음 열어주시지 않는 사람들에게 백날 얘기해도 소용없습니다. 담대하게 전하되 실패에 대해서는 자책하지 마세요.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 지십니다.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겔3:11)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가시고, 만나게 해 주시는 사람 만나시고, 좋은 열매 맺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