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59
8월24일[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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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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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6dzy7dTK9A
[서울대교구 최기석 비오(대림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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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사랑 안에 일치된 친교의 공동체, 일상적으로 회개하고 화해하는 공동체!>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혹시 누군가에게 전교(傳敎)를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 전교 대상자를 정해 시도를 하려고 노력하다가도, ‘혹시라도 단칼에 거절당하면 어쩌지?’ ‘나도 잘 못사는 주제에 전교는 무슨?’하는 마음에 망설여집니다. 그래서 이웃 전교에는 큰 용기와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나타나엘의 완강한 거부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필립보 사도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나타나엘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함께 가자는 필립보 사도의 초대 앞에 나타나엘이 보인 반응은 냉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장 46절)
제가 필립보 사도였다면 나타나엘의 그런 반응 앞에 즉시 위축되어 뒤로 물러났을 것입니다. ‘아 그래요?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없었던 일로 하지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보 사도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럴 상황에 대비해서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와서 보시오.”
끝까지 자신감과 당당함을 잃지 않고 나타나엘을 주님께로 안내한 필립보 사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지혜와 은총으로 가득한 전무후무한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이 이루신 놀라운 행적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필립보 사도의 강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초대 앞에 나타나엘은 마음을 바꿉니다. 예수님께로 삶의 방향을 틀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마지막 카드인 ‘와서 보시오’를 사용해야겠습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과감히 떨치고 사람들에게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우리 공동체로 한번 오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사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어렵사리 그들이 우리 공동체에 왔지만, 정작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보다 큰 낭패는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에 앞서 단단히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으며, 문턱이 낮은 공동체, 그 누구라도 적극적으로 환대하는 공동체, 주님 사랑 안에 일치된 친교의 공동체, 일상적으로 회개하고 화해하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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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nuwosNBc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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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바늘 도둑과 작은 거짓말)>
오늘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나타나엘이라고도 불렸는데, 그는 ‘솔직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 그에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없어야만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요즘 더욱더 거짓말이 활개를 칩니다. 정부에선 ‘가짜뉴스’를 퍼뜨리면 처벌까지 하겠다고 나옵니다. 잘못된 정보로 정부에서 자신들을 표적으로 삼고, 음성인데도 양성이라고 판정을 내린다고 믿는 사랑의 제일교회 신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불안한 마음에 치료를 받다가 탈출까지 시도해 방역 당국의 애를 먹이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도 전광훈 목사는 정부에서 자신들을 테러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교회에 뿌렸다는 것입니다. 엄마부대 주옥순 대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오는 날엔 코로나가 절대 번지지 않는데 왜 코로나와 광화문 집회를 연결하느냐고 병실에서 유튜브로 따집니다. 지금 정권에서 이것으로 독재를 유지하려고 우려먹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을 많이 하다 보면 자신이 자신의 거짓말을 믿어버리는 수준까지 올라온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들이 하는 거짓말을 본인들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죄가 없어질까요? 그들 때문에 온 나라가 겪는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회에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더는 생기지 않도록 거짓말에 대한 의식을 새로 해야 합니다. 는 나라가 거짓말 천국이 되어가는 이유는 ‘착한 거짓말’을 허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한 거짓말이나 선의의 거짓말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자신도 거짓말을 하고 자녀들도 내버려 둡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선의의 거짓말이고, 어디까지가 진짜 거짓말일까요?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는 것입니다. 바늘도둑도 도둑인 것처럼, 작은 거짓말도 거짓말입니다. 안 좋은 것이라면 뿌리부터 잘라야 합니다.
제가 음식 대접을 받고 맛이 없을 땐 그저 “먹을 만하네요!”라고 말해줍니다. 먹을 만하니까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맛이 없는데 굳이 맛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분명 상대를 기쁘게 해 주는 말이기는 하나, 그러면서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엔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다는 말은 나를 믿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경합을 펼칠 때, 대부분 갤럽조사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의 압승으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빅데이터 통계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구글 검색창에 트럼프와 힐러리를 검색한 숫자를 세어보니 힐러리보다 트럼프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말로는 힐러리를 응원하면서 속으로는 트럼프를 뽑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트럼프를 뽑았다고 하면 정상인 취급을 받지 않을 것 같아서 갤럽 조사에서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대통령을 마친 사람들이 감옥에 갔을 때 “누가 저 사람 뽑았어?”라고 물어보면 뽑아준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선이 되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합니다. 거짓말은 자기를 선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말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하십니다. 무화과나무는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몸을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나무입니다. 거짓말의 대명사입니다.
그들은 왜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의 몸을 가리려고 했을까요? 자신들이 죄를 지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자신들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이 심판관이십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심판관이 되어 자신들을 심판하고 또 자신들의 힘으로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심판관이시고 하느님만이 구원자이십니다. 나를 죄인으로 심판하는 분도, 나를 선하게 만드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거짓말은 하느님 대신 나 자신이 심판자이고 구원자가 되려고 하느님처럼 높아지려는 방법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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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명심보감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물 속 깊이 있는 고기와 하늘 높이 떠, 나는 기러기는 쏘고 낚을 수 있거니와 오직 사람의 마음은 바로 지척 간에 있음에도 이 지척 간에 있는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범을 그리되 모양은 그릴 수 있으나 뼈는 그리기 어렵고, 사람은 알되 얼굴은 알지만 마음은 알지 못한다. 바다는 마르면 마침내 그 바닥을 볼 수 있으나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명심보감 성심편)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말도 있습니다. 착하게 살고 싶지만 행동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장)” 이렇듯이 우리는 남의 마음을 알기도 어렵고, 나의 마음 또한 쉽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재능과 능력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바둑은 몇 번 두면, 상대방의 실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력에 맞게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하수는 바둑 판 위에 실력에 맞는 정도의 돌을 먼저 놓습니다. 이것을 접바둑이라고 합니다. 골프도 평균 타수가 있습니다. 하수는 자신의 실력에 맞는 타수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핸디’라고 합니다. 저의 바둑 수준은 아마추어 7급의 수준입니다. 저의 골프 핸디는 100 정도의 수준입니다. 인품과 영성도 몇 번 만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인품과 영성은 능력과 재능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품과 영성은 오랜 정진과 성찰을 통해 드러납니다. 마치 샘이 깊은 물은 쉽게 마르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는 거센 바람이 불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만과 위선에 빠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을 안다고 하지만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삶으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과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은 비록 율법을 모를지라도, 인품과 영성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물고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코이라는 잉어입니다. 이 잉어의 치어를 작은 어항에 넣어 기르면 5-8cm 정도로 자라고, 좀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 두면 25㎝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이를 넓은 강물에 방류하면 놀랍게도 90-120㎝까지 성장한다고 합니다. ‘로고스(Logos)와 ‘ 뮈토스(Mythos)’를 생각합니다. 로고스라는 어항에 갇히면 사람의 이성과 지성은 그 ‘틀’에서만 갇히게 됩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인과관계를 따지고, 물질과 자본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과학혁명은 로고스의 세상입니다. 뮈토스라는 바다로 나가면 이성과 지성은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직관과 깨달음의 세상입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세상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한 세상입니다. 물질과 자본이 아니라 에너지와 파동의 세상입니다. 소유의 세상이 아니라 존재의 세상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고스와 뮈토스를 뛰어넘은 큰 바다였습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지불했습니다. 삶 속에서 자신이 본 것을 실천했습니다. 목숨을 바치면서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예수님을 본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길을 죽기까지 충실하게 따라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 사찰, 사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리를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가치를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 것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지금 가진 것들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밭에 묻혀 있는 진주(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팔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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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5-51: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성 바르톨로메오는 그가 십이사도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없는 분이다. 그는 필립보의 소개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 하신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아르메니아와 인도에서 전교하고 순교하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그가 만난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나자렛 출신”이라고 소개한다(45절). 나타나엘은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메시아에 대해 회의를 한다. 메시아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결코 대단하지 못했던 촌락이었던 나자렛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성서나 랍비들의 문헌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었던 마을이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46절)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권하여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었다. 필립보의 말을 듣고는 회의를 가졌던 나타나엘도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께 대한 관심과 신뢰를 드러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을 갖추신 예수님께 압도되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고백한다.(47-49절) 어떻든 이렇게 믿음을 가진 나타나엘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약속을 하신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50-51절)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싹튼 그 신앙이 예수님의 계속된 계시를 통해 커질 것이며, 확고하게 될 것이다.
나타나엘은 자기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고정관념과 편견에 싸여있는 그 마음에서 나타나엘의 속마음을 알아보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사랑과 기원을 드린다면, 그것을 알아주실 것이며, 결국은 우리도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살아가며 그분을 우리의 삶 속에 체험할 수 있을 때, 그렇게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 우리 자신이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를 갖는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춘다면, 오늘의 이 복음 말씀을 올바로 사는 것이며, 우리의 모습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천사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삶의 노력을 주님께 바쳐드리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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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신약 성경에서 바르톨로메오 또는 나타나엘 사도의 이름을 찾아보면, 열두 사도의 이름이 열거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마태 10,3; 마르 3,18; 루카 6,14 참조) 오늘 복음에서만 그 이름이 나타납니다. 역설적입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사도인데, 그가 복음을 전하였다거나 제자들 사이에서 무슨 일을 하였다는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그에게 복음이 전해진 장면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서 1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 장에서는 증언들이 고리처럼 이어집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그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안드레아가 다시 형 시몬을 데려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만나 그를 부르시고, 그다음에 오늘 복음의 첫 구절에서처럼 필립보가 다시 나타나엘(바르톨로메오)을 부릅니다.
이로써 복음서에서는, 바르톨로메오가 사도로서 복음을 선포하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전해진 증언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바르톨로메오 사도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필립보는 먼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말로 증언하였고, 그 말을 쉽게 믿지 않았던 나타나엘에게 직접 와서 보도록 초대하였고 그래서 마침내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요한 복음서 1장이 끝난 다음부터 지금까지, 사도들로부터 우리에게까지 신앙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에서도 사도들을 “초석”(묵시 21,14)이라고 부릅니다.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사도들에게서 전해진 신앙을 토대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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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믿음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45-51)
1) 이 이야기는 겉으로만 보면 나타나엘이, 즉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로만 보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저자의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나타나엘 자신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고백을 그의 말로 바꿔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나는 보잘것없는 시골 나자렛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내 마음속을 깊이 꿰뚫어보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메시아이신 분이라고 믿게 되었고, 그분의 제자가 된 지금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 하느님’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오르내린다는 말 때문에 이 말씀을 창세기에 있는 ‘야곱의 꿈 이야기’에 연결하는 경우가 많은데(창세 28,12), ‘이사야 예언자가 본 환시’에 연결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이사 6,1-4)
하느님 주위를 날아다니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 ‘사랍들’, 즉 ‘세라핌 천사들’의 주 임무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 천사들은 바로 그 ‘사랍들’, 즉 ‘세라핌 천사들’이고,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린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주위를 날아다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천사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면서 찬양한다는 뜻,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너희는 보게 될 것이다.”는 “너희는 믿게 될 것이다.”인데, 복음서 저자가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은,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바로 그 신앙고백으로 시작하는 책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고 찬미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콜로 1,15-17) 또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1-3) <‘예수님은 하느님의(하느님 본질의) 모상이신 분’이라는 말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으로 풀어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 교회의 신앙입니다. 혹시라도 “그것을 왜 그렇게 강조하는가? 그냥 예수님을메시아로, 또 주님으로 믿으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품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우리 구원에 직결되는 신앙이기 때문이고, 우리 교회의 모든 교리의 출발점이고 핵심이고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3)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는,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과 율법을 공부하던 관습에서 온 표현인데, 말씀의 뜻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갈망하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 너의 심정과 믿음과 희망을 내가 잘 알고 있다.”입니다.
이 말씀은, 그의 마음속을, 또 그의 믿음과 희망을, 또 그의 심정과 생활을 모두 꿰뚫어 보셨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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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산채로 껍질이 벗겨진 성인>
오늘 교회가 공경하고 축하하는 성 바르톨로메오는 공관복음서가 기록한 12 제자의 명단에 들어 있다.
예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을 제자로 불러 당신을 따르게 하시고,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으니, 12사도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야고보의 동기 요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데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 (마르 3,13-19; 마태 10,1-4; 루카 6,12-16; 요한 1,35-51 참조)
그런데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에 필립보와 나타나엘이 등장하는 요한복음의 대목을 오늘 복음으로 듣게 되는 이유는 성서학자들이 나타나엘과 바르톨로메오가 이명(異名)동인(同人)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갈릴래아 지방 카나 출신으로 우선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와 필립보와 함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바르톨로메오를 나타나엘로 기록하고 있으며, 부활하신 예수와 일곱 제자와의 만남에서도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요한 21,2)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바르톨로메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아무 데도 없다. 그러나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성령강림 이후 이집트, 페르시아와 인도에까지 복음을 전하였고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다고 한다.
한번은 성인이 아르메니아 폴리미오스 왕의 마귀 들린 공주를 치유해 준 일이 있었는데, 이 때 왕은 궁궐의 거짓 신상들을 모두 부수고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왕의 측근이 수백 군대를 풀어 성인을 잡아 가두고 심한 고문을 한 후 산채로 살갗을 벗기고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막연한 전설이 아니라는 것은 미켈란젤로(1475-1564)가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벽화 중 ‘최후의 심판’에서 드러난다.
미켈란젤로는 33살의 나이에 율리우스 2세 교황의 위촉으로 4년 반의 공을 들여 ‘천지창조’를 완성한 후 22년이 지난 59살에 클레멘스 7세 교황의 위촉으로 거대한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된다.
이 벽화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표현되는데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 옆에 성모 마리아, 그리고 그리스도의 발아래 있는 두 사람의 성자(聖者) 중에서 오른쪽 성자가 벗겨진 사람의 피부껍질을 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렇게 순교한 바르톨로메오 성인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얼굴이 미켈란젤로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일생을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마지막 죽음을 스승이신 그리스도처럼 받아 천상의 월계관을 쓰게 된 것은 모두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부모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며, 이웃을 만나고 스승을 만나며, 매일매일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사귀며 친구가 된다. 때가 되면 부부의 만남으로 서로를 내어주는 가정을 이루게 된다.
유대교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1878-1965)는 ‘너와 나의 만남’으로서 인간은 전인격적 완성을 도모한다고 했다. 그렇다. 오늘 예수와 만난 나타나엘은 예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예수를 따르며 예수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마지막에는 예수처럼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완성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도움으로 예수께 오기도 전에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 대한 나타나엘의 신앙고백도 말뿐만은 아니었다. 당장은 말로 된 신앙고백일망정 그는 순교로 이를 증언하였다.
중국사기(史記)에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했듯이 예수의 죽음은 나타나엘을 위한 죽음이었고, 나타나엘의 죽음은 예수를 위한 죽음이었다. 이는 신(神)이 인간을 위하여 죽은 것이고, 인간이 신을 위하여 죽은 셈이다.
나아가 예수도 바르톨로메오도 나를 위하여 죽은 셈이 아니겠는가. 우리 또한 성인을 본받아 예수님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며 내가 만나는 이웃을 위해 살도록 힘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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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구경꾸 알로이시오 신부님]
<신앙인의 의무>
예수와 직접 대면하며 함께 생활하였던 열두 제자들과 달리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신앙을 먼저 고백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알 수밖에 없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그들의 신앙 행위를 통하여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도 역시 신앙을 전파해야 할 의무를 지니며 뒤따라오는 신앙인들에게 신앙 행위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신앙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모범적인 신앙 행위를 듣고 봄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적극적으로 키워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그 어려움을 궁극적으로 이겨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증거해야 할 희망과 사랑의 믿음은 긍정적이지 못한 것을 찾아 비판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들을 찾아내어 따라할 때 비로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신앙을 통해서만이 다른 신앙인들에게 좋은 것을 말할, 다시 말해서 신앙의 좋은 본보기를 제시하는 의무를 채울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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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임문철 시몬 신부님]
<아버지의 뜻>
이제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사제 서품을 한 달 남겨 놓고서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가꿔온 사제의 꿈이었건만 그것이 혹시 저의 인간적인 소망이 아닌지 싶어 늘 불안했습니다. 그러다 성령기도회에서 비로소 확신과 감사를 드릴 수 있었지만 말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냐며 필립보를 타박하던 나타나엘은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는 이 한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겁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선 나무 그늘을 찾게 마련이고, 어쩌다 흔한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걸 맞출 수도 있는 것인데, 나타나엘은 곧바로 예수께 스승이라 부르며 제자가 되기를 자처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나타나엘은 조그만 징표에도 승복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큰 징표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원의와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은 하느님께서 당신 뜻을 천둥으로 울려주셔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늘 성령의 이끄심에 깨어 있는 이들에게는 막 피어난 꽃잎 끝에 맺힌 한 방울의 맑은 이슬만으로도 하느님의 뜻을 헤아림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거짓이 없는 순결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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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스승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1,48)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다 책 제목이 특별해서 잠시 짬을 내어 「솔직함의 적정선」(백두리)을 보고 읽으면서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저 자신은 저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특히 M.E 주말 발표 중에, 저는 솔직한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때론 이 솔직함이 저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 저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으로 다가왔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함의 적정선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요? 공감하는 부분은, 『감추는 것이 많으면 더 알고 싶어지지만, 거짓된 것이 많으면 더 알고 싶어지지 않는다. 진짜를 듣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만 듣고 싶다.』라는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솔직함의 적정선을 찾는 것은 마치 봄 옷차림을 고르는 것과 같이 이거다 싶은 조건이란 없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봄마다 옷장을 보며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잖아요. 대체 어떤 옷을 입어야 하지, 이 날씨에 뭐가 적당한 거야?
오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을 지내면서 사실 헷갈린 부분도 없지 않지만, 오늘 복음에 의하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1,45)라는 이 부분의 나타나엘과 바르톨로메오는 동일 인물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자신이 만났던 나자렛 출신 예수님을 나타나엘에게 소개하자, 대뜸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라고 거침없이 응답합니다. 이 표현의 밑바닥에는 나타나엘의 고정관념, 선입견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것이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는 커다란 덫,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나타나엘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길들여 있었기에, 위대한 인물은 예루살렘이나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로 베틀레햄 출신이면 몰라도, 나자렛과 같은 변두리 시골 촌 동네에서 세상을 구할 위대한 인물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필립보는 친구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1,45)라고 권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일단 한번 가서 만나보게, 라고 설득하여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예수님께서 뜻밖에도 나타나엘을 향해,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1,47)라고 긍정적으로 좋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을까요. 이 점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이어지는 대화를 따라가는 것이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길이라고 느껴집니다.
예상하지 않은 예수님의 찬사를 듣고 나타나엘은 내심 놀랍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오면서 나 자신도 내가 누구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데, 자신을 처음 본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을 들으면서 내심 놀람과 함께 호기심이 발동하여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1,48)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은 단지 나타나엘에게만 던진 물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진 궁극적인 질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과 같습니다. 오랫동안 나타나엘 자신이 자신에게 묻고 물어 왔던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1.48) 하고 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보았다, 는 표현은 마치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 마태오 사도를 부르실 때처럼 단지 눈에 보이기에 보는 것이 아니라 주시해서 그를 보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그의 마음에 무엇으로 고민하고 왜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었던 까닭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 각자를 주시해서 보고 계시며 당신과 만나실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장소는 곧 나타나엘이 이스라엘의 깨어 기다리는 사람의 전형으로 평소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해 온 것을 의미합니다. 이 근거는 바로 시편 1장의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 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1,2)라는 노래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처럼 그곳이 어디든 하느님을 갈망하고 고대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늘 지켜보시고 당신에게 다가올 것을 기다리십니다. 저는 무화과나무 아래가 아닌 누이의 무덤 옆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토록 오래 참 생명과 진리를 기다려 왔었기에 나타나엘은 마침내 주님과 만남을 이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남은 분명 은총이며 그러기에 은총 중의 은총의 만남은 주님과 만남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를 만났음을 확신한 나타나엘은 그의 솔직한 성격처럼 즉각 단순 명쾌하게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1,49)하고 고백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진리 앞에 단순 소박하게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주님을 따랐던 나타나엘과 같은 제자와 사도들을 예수님은 기다려 왔었는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비록 당신과 당신 고향에 대해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그였지만 그렇게 적나라하며 솔직하게 자기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그것이 때론 그의 약점이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분명하고 솔직한 성격이 가장 큰 장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느낍니다. 사실 솔직한 사람은 담백하기에 한번 마음이 바뀌면 무섭게 누구에게나,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내어 맡길 여지가 충분한 성향의 사람입니다. 이를 계기로 나타나엘은 아마도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도, 곡선이 아닌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1,50)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솔직함은 분명 좋은 미덕일 수 있지만, 때론 그 솔직함이 거부당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솔직하게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닌 척,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살게 되고 그렇게 살다 보면, 자신 앞에 정직하지 못하게 되고 내적 평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 앞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으로 남게 되면 자칫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서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우리는 모든 거짓된 허위와 가식을 벗어 던져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하느님 앞에서 마저 솔직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당신처럼 거짓 없는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도록 우리에게 나와 함께 가서 주님을 만나 봅시다, 고 재촉하고 초대합니다. “스승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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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첫 복사를 서는 아이를 보면 너무 예쁘고 귀엽습니다. 그러나 긴장해서 초조해하는 아이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합니다. 어떤 아이는 첫 복사를 서기 전에 자기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 복사하기 싫어.”
복사서는 두려움에서 피하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긴장하는 새 복사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틀려도 안 틀린 척하는 것이 복사야.”
그렇게 해야 사제도, 또 신자들도 분심에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연습을 계속하면 실제로 대범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불안해하면서 포기하는 곳이 아닙니다. 대범하게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곳이고 또 그런 삶을 살아야 할 세상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거센 파도와 같은 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두려워도 무섭지 않은 척, 틀려도 틀리지 않은 척,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이런 식으로 행동하다 보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거뜬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시기에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 삶을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주님 안에 머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바르톨로메오 사도입니다. 성경에는 ‘나타나엘’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여쭙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조금 뚱딴지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무화과나무’는 메시아적 평화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이미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충실하게 살아온 참으로 거짓 없는 사람임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알아주는 예수님 안에서 그는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자기 신앙을 고백합니다. 자기를 가치를 알아주는 예수님을 통해 더 올바른 길,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안해하고 걱정하면서 포기하는 삶이 아닌, 우리를 믿어주시는 주님과 함께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하늘 나라에서의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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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가 보았다>
‘百聞(백문)이 不如一見(불여일견)’이라 합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래서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다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거듭 말했습니다. 결국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권고에 따라 발길을 옮겼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필립보의 거듭된 권고는 우리에게 주님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내를 가지고 전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먼저 나타나엘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모든 것을 꿰뚫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나의 모습을 이웃이 보게 될 때 주님을 더욱더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한 논쟁을 피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변화된 모습을 와서 보시오!'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말에서 우리는 고정관념, 선입견이 얼마나 큰 장애를 가져오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은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열린 마음으로 상황과 사람,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 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조 야곱이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층계를 보았는데,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내용입니다.(창세 28,12-13)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은 층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끊임없는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냥 스쳐보는 것과 살펴보는 것, 꿰뚫어 보는 것은 의미가 달라집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타나엘을 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람이나 사건,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성숙을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들꽃’이라는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것도 좋지만 신앙인은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고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라삐 전통에서 “메시아를 갈망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메시아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나타나엘의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나만의 고요한 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은 진실해 지고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으며 마침내 그 삶을 주님께서 인정해 줄 것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인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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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다리>
요한 1,45―51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다)
그때에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다리>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1,46)
함께하고픈
믿고 바라며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임 만난
나를 건너
임께로 가세요
아직은
닿을 수 없는
벗과 임 사이에
내 기꺼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다리가 되어드릴게요
함께하고픈
믿고 바라며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임 만난
벗을 건너
임께로 갈게요
아직은
닿을 수 없는
나와 임 사이에
벗께서 기꺼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다리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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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진실한 사람>
+ 찬미예수님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저는 어린이 미사 때 손 인형을 이용해 강론을 합니다. 그냥 평소 미사와 같이 강론을 하면 아무래도 아이들이 지루하게 여길 수 있기에 조금은 편하게 다가가고자 인형극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야고보인데, 고학년 아이들은 다소 닭살이 돋는다고 이야기 하지만 재미없는 강론 보다는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학년 아이들은 꽤나 집중하는 편이어서 이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주 목요일, 사목국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의 초청을 받아 교사들과 함께 출연했고 거기에도 역시 야고보 인형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 어린이 미사 때, 이 방송을 시청한 3학년 학생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야고보에게.
야고보야 안녕? 나는 신지유 안나야. 나를 위해 맨날 성경에 대한 도움을 줘서 고마워. 너랑 멋진 신부님이랑, 예쁜 선생님들과 함께 가톨릭 주유소에 나온 걸 봤어. 난 너와 신부님, 선생님들이 프로그램에 나오니 정말 신이 나서 온 집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녔어. 코로나 조심하고, 토요일에 만나! 사랑해.
참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편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형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 그리고 인형을 통해 전달하는 교리 내용을 기쁘게 아이가 듣고 있다는 사실은 이 아이의 신앙이 잘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있는 그대로 강론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어린이의 자세.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어린아이와 같을 때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은 열두 제자 중 진실한 사람이라 불리웠던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교회의 오랜 전승은 바르톨로메오와 오늘 복음의 등장인물인 나타나엘을 같은 인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명단을 보면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는 항상 같이 짝을 이루어 나옵니다. 실제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필립보는 예수님에게 나타나엘을 소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나타나엘의 깊은 신심의 자세가 드러납니다.
베싸이다 출신인 필립보는 갈릴래아로 가려던 예수님을 만난 후 부르심을 받고 즉시 친구인 나타나엘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나타나엘은 예수가 나자렛 출신이라는 이유로 회의감을 드러냅니다.
실제로 나자렛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드러나지 않던 시골이었습니다. 즉 예언서나 율법서의 중요한 곳 어디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은 별 볼일 없는 동네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위대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고는 불가능하다고 나타나엘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필립보는 “와서 보시오”라는 말을 통해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고, 나타나엘은 직접 예수님께 감으로써 메시아에 대한 관심과 동료의 증언에 대한 신뢰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을 보러 온 나타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었음을 언급하시며 그가 참 이스라엘인임을 꿰뚫어 보십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다는 말은 당시 율법학자들이 흔히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율법서를 공부한 데서 연유된 랍비들의 은유적 표현입니다. 즉 이 예수님의 통찰은 나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특히 메시아에 열중하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이에 나타나엘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속적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겸손하게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가 편견과 의심을 버리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어린이와 같은 진실하고 순수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는 ‘톨로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에서 ‘바르톨로메오’라고 불렸습니다.
이처럼 바르톨로메오는 새로이 알게 된 것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모순이 되어도 진리를 받아들이는 진실성과 유연성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 이후 나타나엘, 즉 바르톨로메오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전교하다 순교합니다. 특별히 그는 참수 당하기 전에 칼로 가죽이 벗겨지는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벗겨진 살갗은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성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힘겨운 일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속 안에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그분께 의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님이 사실입니다.
기술 문명의 발달과 물질 문명의 진보는 우리에게 편리함과 안락함을 선사해주고 있고 그 안에서 신앙이란 부차적인 것으로 가리워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은 자신이 알고 믿는 것 외에는 아예 마음을 닫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물질문명이 우리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풍요로움 속에서 인간 실존은 내외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고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고 그 외 다른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일방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들은 한 순간에 자신의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평생 진리를 추구하며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 바르톨로메오 사도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도의 모습은 진실함과 경건함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그러한 삶을 사는 그를 보시며 우리가 사도의 삶을 따르게 되었을 때의 미래를 밝혀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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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만남의 축복>
-참 나의 발견-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시편145,17)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해야 할 일에만 매몰되면 해서는 안되는 일까지 하게 될 수 있다.”<다산>
“사람으로서 하지 않는 바가 있은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다.”<맹자>
매사 완벽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빈자리를 남겨 놓으라는, 자주 삶의 현장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여유와 자유를 지니라는 충고이겠습니다. 이래야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중요한 일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12사도들중 하나인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신약성서에는 사도들의 명단에만 언급되어 있을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빌립보에 의해 예수님께 인도된 나타나엘을 바르톨로메오와 동일시 합니다. 나타나엘은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무려 인도까지 갔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선교하였고 거기서 마법사로 고발당한후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박힌채 참수형으로 잔혹하게 순교했다 전해집니다. 성인의 상징물은 칼과 벗겨진 살가죽이며, 유다 타대오와 더불어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수호성인이자 제본업자, 도살업자, 치즈상인, 가죽상인, 미장공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에 의해 예수님께 인도되는 나타나엘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나타나엘에게 필립보는 강력히 권합니다. 자주 성소자들을 위해 인용되는 유명한 말마디, “와서 보시오.”입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 와서 실제 보라는 것입니다. 보고 배우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두분의 만남이 극적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요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보다 더 큰 찬사도 없습니다. 주님과 만날 때 참나의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참사람으로서의 나타나엘의 진면목을 꿰뚫어 본 예수님입니다. 평생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며 참사람의 나를 살고자 노력했을 나타나엘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선물’이란 이름뜻대로 거짓이 없는 참사람 나타나엘로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추구하고 선망하는 인간상입니다. 감격한 나타나엘이 묻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아마도 주님은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공부에 전념했는데, 특히 사람들이 갈망하는 메시아에 관한 공부였을 것이고, 주님께서 이를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곧장 이어지는 감동한 나타나엘의 화답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참 아름다운 참사람과 참사람의 만남입니다. 나타나엘의 내공을 짐작하게 합니다. 결코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그동안 간절히 부단히 찾았기에 주님을 만난 나타나엘입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새삼 확인시켜준 나타나엘을 격려하며 더 큰 축복도 예고합니다. 나타나엘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볼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심에 따라, 하늘이 열리고 야곱의 꿈이 예고한 하느님과의 통교가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항구한 현실이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말그대로 우리의 하늘문이, 하늘길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새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아무도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진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한 교회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의 신부라 불리는 교회입니다. 이 도시의 성벽의 기초를 위한 열두개의 돌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합니다.
열두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모든 것을 가르친 것이 교회공동체의 기초를 이뤘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 열둘 사도들중의 하나가 성 바로톨로메오 사도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현존하는, 우리의 영원한 비전이자 희망인 새 예루살렘 천상교회의 축복을 미리 맛보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활력넘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고,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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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성령의 충만함!>
오늘 복음(요한 1,45-51)은 '열두 사도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먼저 만난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요한 1,45)
나타나엘이 이 말을 듣고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1,46) 하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거짓이 없는 사람은 어떤 모습의 사람일까?'
단순하게 표현해 보자면,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신앙의 언어로 표현해 보자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 곧 마음의 창고 안에 '성령의 열매들인 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가 충만한 사람한 사람'입니다. 다른 언어로 표현하자면 '악의 모습들인 교만.탐욕.분노.인색.시기.음욕.나태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에 대한 갈망이 큰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엘처럼 거짓이 없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지금 우리와 모든 피조물 안에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을 만나 뵈올 수 있고, 너를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엘처럼 멋진 '신앙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믿는 이들의 신앙 여정은 '성령 채우기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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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8.24.토.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 47)
진실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의
시작입니다.
거짓에
흔들리지 않았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거짓이 없는
성 바르톨로메오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
거짓은 진실과
만날 수 없습니다.
거짓은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진실한
사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진실함으로
완성됩니다.
진실은
투명함으로
사랑을
풍요롭게 합니다.
가식과 허세가
없습니다.
거짓을 버리고
하늘을 만나는
기쁨의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진실한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를 통해
진실한 복음을
보여주십니다.
진실한 사람이
진실한 복음을
만납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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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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