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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호자무수(胡子無鬚)
당연하다고 여기는 집착을 뒤흔들어 본질을 보게 하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달마
간경과 참선을 더불어 주장
전설의 달마와는 큰 차이
혹암 스님은 화두를 통해
달마에 대한 집착 없애려고
폭풍우처럼 우리를 몰아쳐
혹암(或庵) 화상이 말했다. “서쪽에서 온 달마는 무슨 이유로 수염이 없는가?”
무문관(無門關) 4칙 / 호자무수(胡子無鬚)
1. 달마는 새로운 기풍 도입한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를 아시나요. 쿠바에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혁명가입니다. 냉전 시대에도 체 게바라는 영원한 혁명과 영원한 젊음의 아이콘으로 동구권이나 서구권의 대중들에게 군림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지요. 쿠바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미국에서마저도 체 게바라는 젊은이들에게 제임스 딘(James Dean, 1931~1955)에 버금가는 인기를 구가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단순히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거친 이분법을 넘어서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낡은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에게 체 게바라는 이미 하나의 전설이자 상징이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붉은 별이 새겨진 베레모를 쓰고 있는 그의 사진은 티셔츠, 머그잔, 노트 등등에 새겨져, 아직도 우리 주변에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체 게바라를 언급하는 이유는 불교 전통에서 활발발한 기풍을 도입했던 달마, 즉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528 혹은 536) 때문입니다.
달마는 불교 전통에 새로운 기풍을 도입한 혁명가였습니다. 흔히 달마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는 혁명적인 선언을 했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싯다르타와 그의 경전을 부정하고, 자신의 마음을 직접 자각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 어떻게 혁명적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체 게바라처럼 달마는 이제는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전설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심지어 이제는 불교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달마를 소비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달마가 새겨진 티, 달마가 새겨진 도자기, 달마가 새겨진 핸드폰 고리 등등. 그 중 가장 압권은 달마가 새겨진 그림, 즉 달마도가 신비한 효험이 있는 부적처럼 사용되는 데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수맥의 흐름을 차단하는 믿거나 말거나 한 작용도 있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려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달마는 싯다르타처럼 대중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겁니다.
대중들은 특정한 인물에 자신의 꿈과 이상을 응결시킵니다. 이럴 때 달마와 같은 대중적 아이콘이 탄생하게 됩니다. 당연히 대중이 생각하는 달마와 실제 달마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6세기경에 쓰인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와 20세기 초 돈황에서 발견된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입니다. 이 두 자료를 넘기다보면 6세기 때 달마의 모습과 그의 사상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달마, 즉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달마와는 확연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낙양가람기‘에 보면 페르시아에서 온 보리달마가 영령사(永寧寺) 구층탑을 보고 그 화려함과 웅장함에 넋이 빠져 염불과 합장으로 며칠을 보냈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당당한 달마와는 너무나 다른 낯선 모습의 달마입니다. 또한 달마의 사상을 요약하고 있는 ’이입사행론‘을 보면 달마가 불교경전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확인하게 됩니다.
2. 역사적 달마와 전설을 구분해야
‘이입사행론’은 깨달음에 ‘들어가는[入]’ ‘두 가지[二]’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입(理入)’이고, 다른 하나는 ‘행입(行入)’이지요. 이치로 들어가는 지적인 방법과 실천으로 들어가는 실천적인 방법, 이 두 가지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비록 이치로 들어가는 방법, 즉 ‘이입(理入)’에서 벽관(壁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달마는 그 사전 조건으로 경전을 통해 이치[理]를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벽을 보듯이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겁니다. 지금 달마는 ‘불립문자’와 ‘직지인심’의 가르침과는 사뭇 다른 주장, 오히려 교종(敎宗)에 가까운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경전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벽관이란 참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달마의 사상은 종밀(宗密, 780~840)이나 지눌(知訥, 1158~1210)이 주장했던 선교일치(禪敎一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지적인 이해와 실천적 수행을 동시에 강조하니까 말입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요,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1921~2006)과 같은 저명한 선불교 학자들도 역사적 달마와 전설적 달마를 구분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아이콘이 되어버린 달마에 대해 선사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당연히 선사들은 아이콘이 되어버린 달마를 해체하려고 했을 겁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逢佛殺佛, 逢祖殺祖)” 스스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우상을 파괴하지 않으면 우상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운문(雲門, ?~949) 스님도 부처를 “마른 똥 막대기(乾屎橛)”라는 폭언을 날리며 우상 파괴에 열을 올렸던 겁니다. 싯다르타마저 주인이 되는 데 방해가 된다면 똥 막대기 취급을 하는데, 달마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무문관(無門關)’의 네 번째 관문에서 달마가 수염을 깎이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이 네 번째 관문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혹암(或庵, 1108~1179) 스님은 우리에게 뚫기 힘든 화두를 던집니다. “서쪽에서 온 달마는 무슨 이유로 수염이 없는가?”
부드럽게 번역했지만, 사실 혹암 스님의 화두에 등장하는 번역어 “서쪽에서 온 달마”의 원문은 ‘서천호자(西天胡子)’입니다. 직역을 하면 ‘서쪽에서 온 오랑캐 새끼’입니다. 혹암 스님은 대놓고 달마에 덧씌워져 있는 아이콘이라는 아우라를 벗기려고 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혹암 스님에게 달마는 선종의 초조(初祖)도 아니고 뭣도 아닌, 그저 과거 서역에서 온 외국인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혹암은 “달마가 무슨 이유로 수염이 없는가?”라고 물으며 폭풍우처럼 우리를 몰아붙입니다. 어떤 달마도를 보던지 간에 그림 속의 달마는 짙고 풍성한 수염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혹암 스님은 지금 “달마에게는 수염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심지어 우리에게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 봅니다. 달마도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3. 달마 흉내 말고 스스로 부처가 돼야
지금 혹암 스님은 맹목적인 집착을 와해시키는 좋은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식은 단순합니다. ‘A는 B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A는 B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덧붙이면 집착을 붕괴시키는 데 더 강력하게 됩니다. 마치 ‘A는 B가 아니다’는 사실이 자명한 것처럼 ‘A는 무슨 이유로 B가 아닌가?’라고 되묻는 겁니다. 그럼 상대방은 A에 대한 믿음을 유보하고, A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할 겁니다. 정말로 A가 B인지 아니면 B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니까요. “당신의 아들은 무슨 이유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가?” 아들이 당연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부모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질문이지만, 부모를 이를 통해 아들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할 겁니다. 혹은 “당신의 애인은 무슨 이유로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는가?” 항상 진실한 사이라고 믿고 있던 사람에게 정말 충격적인 질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질문으로 두 사람은 더 서로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될 겁니다.
이제 네 번째 관문을 덮고 있던 안개가 조금은 걷힌 것 같네요. 수많은 달마도의 달마들은 100이면 100 모두 위엄이 넘치는 수염을 뽐내고 있습니다. 분명 달마에게는 수염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혹암 스님은 달마에게는 수염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무엇 때문에 수염이 없는지 물어보기까지 하니, 우리의 당혹감은 절망감에까지 이를 정도로 커져만 갑니다. 달마에게는 수염이 없다는 혹암 스님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달마도에 등장하는 달마와 실제 존재했던 달마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또한 달마도 이외에 실제 달마를 보았던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실제 달마에게 달마도처럼 수염이 있었는지, 아니면 혹암 스님의 말처럼 수염이 없었는지 확신을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얼마 있다가 정말 화가 치밀어 혹암 스님에게 되물어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스님도 달마를 직접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달마에게 수염이 없다고 확신하시나요?”
화가 나서 혹암 스님에게 따지는 순간, 아마 스님은 우리에게 빙그레 미소를 던지실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너는 지금까지 어떻게 달마에게 수염이 있다고 확신했던 거니?” 혹암 스님의 자비로운 미소로 우리는 달마에 대한 해묵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실 혹암 스님의 충격적인 질문은 우리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갖고 있던 달마에 대한 모든 믿음이 실제 달마와는 무관하게 우리의 마음이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강신주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달마를 신성시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부처가 되기보다는 달마를 흉내 내려고 했다는 점일 겁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간단한 질문 하나로 혹암 스님은 우리로 하여금 ‘아이콘 달마’를 넘어서 ‘실제 달마’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바로 대답해보세요. “무슨 이유로 달마에게는 수염이 있는 겁니까?”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