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평양 구시가, 멀리 대동강이 보이고 오른쪽에 대동문과 왼쪽의 연광정이 보인다.
보통문 아래의 빨래터 풍경
1900년 초 평양 시내
1900년 초 기홀병원
1900년 초 평양 모습
1900년 초 평양시민들의 모습.
1900년대초 의료 선교사 더글라스 폴웰의 환자 진료
1900년대초 의료 선교사 더글라스 폴웰의 환자 수술 장면
평양 대동문(大同門)
평양 대동문(大同門)조선 중기에 지어진 평양성의 동문.
전체 높이 19m, 석축 높이 6.5m인 2층 누각이다.
축대는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쌓았고 복판에 무지개문을 내서 사람들이 출입하도록 했다. 대동강 건너 남쪽으로 이어졌다.
평양 칠성문(七星門)
평양 칠성문(七星門)평양 모란봉(牧丹峯)에 있는 성문.
전형적인 고구려성으로 현재의 문루는 조선 숙종대에 개수한 것이다. 을밀대(乙密臺) 쪽에서 등성이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성벽과 만수대에서 북쪽으로 뻗은 성벽을 어긋나게 쌓고, 그 두 성벽 사이에 가로 세워 성문을 세웠다.
1920년대 평양 시장
평양의 어느 시장 안 풍경이다. 머리에 이고 지고 끌고 흰 옷 입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평양 신시가지
평양 신시가지 평양의 일본인 거리. 한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장기가 내걸린 건물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평양역 근처로 짐작된다.
평양이사청
평양이사청은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영사관이 개편된 관청이다. 사진은 1909년 1월 순종이 서북지역을 순행하는 중에 평양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는 뜻으로 정문에 아치를 만들어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내건 모습이다.
평양 고등학교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等普通學校)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 평양에 설립된 근대 교육 기관이다. 줄여서 평양고보로 흔히 지칭한다.
1909년 관립평양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전신인 한성부의 한성고등학교는 4년제였으나 평양고등학교는 3년제 학교로 출범했다. 대구의 대구고등보통학교, 서울의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보다 먼저 설립되어 두 번째로 생겨난 관립학교였다. 학생들은 교모에 가는 백선 두 개를 둘러 두 번째로 설립된 ‘제2고’임을 내세웠다.
이후 평양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여 일제 강점기 동안 명문 학교로 꼽히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처음으로 신입생을 뽑았을 때 조선인 합격자는 44명이었다. 이중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가 가장 많은 15명을 합격시켰고, 평양고등보통학교는 6명으로 2위, 대구고등보통학교가 5명으로 3위였다.
평양제2중학교로 개칭했다가 한국 전쟁 후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제39회 졸업생이 마지막 졸업생이다.
평양 고등학교 남학생 기숙사
1922년 1300명이 지원했지만 200명만 입학됐다
평양 현무문(玄武門)
평양 현무문(玄武門)평양 금수산(錦繡山)의 성문.
모란봉과 을밀대 사이에 있다. 역시 고구려 때 축조되어 조선 숙종대에 중건됐다. 성문 축대는 다듬은 돌로 선과 면을 갖추어 정연하게 쌓았다.
칠성문과 함께 고구려 성곽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평양 부벽루(浮碧樓)
평양 부벽루(浮碧樓)산 위의 사람들은 대성산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 언뜻 모란대가 보이고 왼쪽 성벽을 따라가면 을밀대로 이어지는 위치다. 오른쪽 대동강가에 있는 누각이 부벽루다.
부벽루와 평양기생
평양 모란봉(牧丹峯)
강을 건너 시집가는 행렬의 모습이다.
평양 모란봉(牧丹峯)대동강 주변의 절경을 담은 사진이다. 왼쪽 봉우리가 모란봉이고 부근은 금수산이다. 오른쪽 섬은 능라도(綾羅島)이며 산 중턱에 부벽루가 보인다. 그 아래 문은 전금문(轉錦門), 누각은 득월루(得月樓)다. 머리에 짐을 인 아낙들이 지나는 곳은 청류벽(淸流壁)이다.
모란대의 입구, 전금문
평양 을밀대(乙密臺)
평양 을밀대(乙密臺)모란봉 중턱에 있는 누각.
사방이 틔어 있다 해서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부른다. 고구려 때 세운 것을 조선 숙종대에 다시 세웠다. 고구려 축성술을 엿볼 수 있는 축대의 높이는 11m에 달한다.
평양 득월루
평양 득월루 대동강변에 보이는 누각이 득월루,
아래의 문이 전금문이다. 오른쪽 길을 따라 가면
기린굴(麒麟窟)이 나오고 계속 올라가면 을밀대에 닿는다.
대동강 철교
대동강 철교 평양 시내와 선교리를 잇는 기차철교로 1905년에 준공되었는데, 평양역과 대동강역 사이에 있었다. 길이는 약 760m. 왼쪽은 나무로 된 인도교. 철교 아래로 나루터가 보인다. 철교에 일장기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행사가 있었던 듯하다.
평양 연광정(練光亭)
평양 연광정(練光亭)대동강변 덕바위(德巖)에 있는 정자로 고구려 때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장방형 평면의 누정 두 채가 ㄱ자 모양으로 붙은 형태다. 관서8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풍치가 빼어나다.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것이 능라도다.
평양 기자릉(箕子陵)
평양 기자릉(箕子陵)평양 기림리에 있는 기자의 가묘.
중국 은(殷)나라의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에 따라 후대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똘똘해 보이는 어린아이가 짐짓 포즈를 취했다.
대동강 얼음 채취
대동강 얼음 겨울에 채취, 대동강이 꽁꽁 얼었다.
강 얼음을 채취해 얼음창고에 저장했다가 여름철에 사용하는 것은 평양의 오랜 관습이었다. 얼음을 캐낸 자리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나룻배가 대동강을 건너고 있다.
대동강 물을 길어 나르던 물장수
아낙들이 대동강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대동강에서의 빨래
대동강에서의 빨래이른 봄, 대동강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아낙들이 강기슭에서 겨우내 밀린 빨래를 하고 있다. 아직 강이 다 녹지 않아 얼음덩이가 떠다닌다. 강 건너편은 선교리인 듯하다.
연광정과 종각, 연광정은 평안감사가 기생들과 연회를 벌이던 곳이다.
진남포 전경
진남포 전경1897년에 개항된 삼화부(三和府)로 해관(海關)이 설치되었던 항구이다. 일본과 청의 상인이 많이 거주했으며, 1910년 진남포부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일본의 주요 군수품 수송기지로 활용되었다.
1930년 당시의 평양 시내
1930년대 상공에서 바라본 평양. 평양에서 가장 오래된 대동강 다리(1926년 완공)가 보인다. 이 다리는 1950년에 전쟁으로 파괴되었다가 훗날 재건되었다.
1930년대 평양 거리
1930년대 평양 거리에서 전도중인 기독교 선교사들
1930년대 일제 시대의 헤이조 신사. 헤이조는 일제 시대 평양의 일본식 명칭이다.
1930년대 평영 영명사. 대동강 기슭의 이 절은 한국 전쟁중 파괴되었다. 뒷쪽에 보이는 건물은 을밀대.
1930년대 고구려 시대의 성인 현무문과 을밀대
1930년대 을밀대
1930년대 을밀대에서 바라본 최승대
1930년대 평양 박물관.
아래쪽은 식민지 시대 일제 건축물의 특징을 보여주며 위쪽은 한국의 전통 기와를 얹었다. 이 건물은 한국 전쟁 당시 파괴되지 않았지만 철거되었다. 지금은 이 곳에 모란각(식당)이 들어서 있다.
1931년 7월 반중 폭동으로 폐허가 된 평양의 중국인 거리
1937년 6월 13일 평안남도 평양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는 모습
1942년 평양의 기생학교
1950년 12월 4일. 피난민들이 부서진 대동강 철교에 매달린 사진. 이 사진을 촬영한 AP 통신 종군 기자 막스 데스퍼는 퓰리쳐상을 받았다.
1957년 평양의 기술직업학교 수업광경(섬유공업 기술부)
1957년 평양의 기술직업학교 수업광경
1947년 평양의 전경
1950년 평양의 한 거리
1950년 옹기시장
1951년 전쟁중에 운행한 전차
1952년 부상군인 휴게소
1952년 모란봉과 해방탑
1953년 평양 중앙광장 복구광경
1954년 평양역사박물관
1954년 대동강 철교 복구식
1955년 모란봉극장
1955년 로동신문사
1955년 대동문영화관
1955년 남포 인민병원
1955년 평양섬유공장
1957년 송진야금속공장의노동자 야간 휴게소(숙소)
1958년 평양의 스탈린대로
1958년 복구된 평양 시내
첫댓글 역시 50년대 전쟁 이후로 소련 스타일로 건물이 확 바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