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 왜곡과 연출로 덧입혀진 동양사상의 실체를 증명하다
20세기가 끝나던 지난 1999년 가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충격적인 제목의 책이 나왔다. ‘정신적 허위와 위선에 대한 용기’라며 조용히 격려하는 독자도 많았지만, 그런 그들보다 더 강력했던 건 ‘유교 및 동양사상의 존귀함을 모욕했다’는 어르신들의 분노였다. 저자 김경일 교수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죽다 살아난’ 그 책 이후, 한껏 의기소침해진 채 10여 년간 한자의 연원을 되짚어 보는 학술서 위주의 책만 집필했었다. 그러나 그간의 저작물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 보여준 에너지 가득한 주장보다는, 한자 및 갑골문, 중국어 및 중국인들의 문화에 대한 고찰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글자에 대한 연구가 거듭될수록 자꾸만 발견하게 되는 의문과 놀라운 반전의 증거 앞에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또 자판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고, 2012년 봄 《나는 동양사상을 믿지 않는다》라는 표제의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이 책은 ‘국내 최초의 갑골학 박사’인 저자의 이력에 걸맞게, 그의 전공인 갑골문 연구를 통하여 고대 동양문화의 출발점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맥을 잡고 있다. 우리에게 추측의 시대라 할 만한 고대 상나라 때,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갑골문은 동양사상의 메인 재료인 한자의 원천이다. 하지만 연구를 통해 글자의 의미와 변화 과정을 살펴볼수록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가치와 너무나 상반되거나 전혀 다른 식의 풀이로 진행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원형리정元亨利貞, 잘못 베껴 쓴 글자가 부른 2000년의 오해
《주역》의 처음 부분에 등장하는 ‘하늘이 갖춘 덕은 원형리정(元亨利貞)이다’라는 구절을 보자. ‘원형리정’의 네 글자 하나하나마다 고결한 의미를 부여하는 풀이가 이어지고 있는 만큼 후대의 학자들은 이 글자를 동양문화를 정의하는 개요라고까지 일컬었다.
원형리정은 흔히 “원은 선함이 자라는 것, 형은 아름다움이 모인 것, 이는 의로움이 조화를 이룬 것, 정은 사물의 근간이다. 이 네 가지 능력을 갖춘 이가 성인이다.”는 식으로 해석된다. 일단 네 글자가 연결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네 가지 추상적 개념들이 나열된 것이다.
《주역》은 상나라의 점술 문화를 종합 정리하여 짜깁기한 책이다. 따라서 일관된 가치관 속에서 만들어진 의미 깊은 책이 아니라 고대문화의 여러 가치관과 이미지를 짬뽕해놓은 저술이다. 따라서 상나라의 기록인 갑골문에 활용된 각각의 글자를 찾아보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원元은 갑골문에서 종종 사람 이름이나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종종 조상의 위패 중 첫째를 의미하여 ‘으뜸’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 외에 추상적인 ‘선함’의 뜻으로 활용된 기록은 없다.
형亨은 상나라 갑골문은 물론 서주시대 청동기 4889개에도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서주시대를 지나 전국시대에도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즉 상나라와 하나라 때의 우주관을 반영한다는 《주역》에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글자가 있는 것이다.
리利는 갑골문에서 낫으로 벼를 자르는 모습에서 등장한다. 의로움이나 조화가 아니라 곡식을 추수하는 상황에서 ‘이롭다’ ‘이득을 얻다’는 정도의 뜻이 파생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만 할 수 있다.
벼 벨 리利의 갑골문이다. 왼쪽 변이 벼 화禾이고, 오른쪽 변이 칼 도刀이다. 중간에 빗금 두 개는 벼를 벨 때 떨어지는 이삭을 표현한 글자다.
정貞 역시 ‘사물의 근간’이라는 의미로 쓰인 예를 찾을 수 없다. ‘묻는다’ 정도의 의미로만 사용되었다. 가장 흔한 형태는 이렇다. 갑자복정: 순무화甲子卜貞: 旬无禍라는 갑골문을 예로 들면 “갑자년에 점을 쳐서 묻는다. 열흘 동안 화가 없을까?”로 해석된다.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저자는 발칙한 결론을 내린다. 《주역》과 같은 시기에 작성된 다른 문헌을 읽어 보니 ‘원형리정’의 정체는 상나라 때의 점괘를 잘못 베껴 쓴 결과에 불과했다는 충격적 사실이다.
이렇듯 저자는 고대 글자에 나타난 난해함과 애매함이 오히려 ‘신비’와 ‘존귀함’이라는 2차 변화의 옷을 입는 놀라운 과정을 목도하게 되고, 수많은 문헌과 갑골문을 대조 비교할수록 동양사상이라는 의심의 안개에서 빠져나오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학이시습지…… 학學은 차별의 코드이다
동양사상의 역사가 《논어》나 《노자》와 같은 사상가들의 문헌 위주로 펼쳐지고 있음에, 이러한 대표 문헌들의 글자와 문장을 갑골문과 연계하여 의미를 맞춰보는 것 또한 저자의 연구 중 하나였다. 그리고 또 어쩔 수 없이 발견하게 되는 위선의 흔적들 또한 못 본 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동양문화의 토대가 되는 《논어》의 첫 구절은 배움에 대한 즐거움을 역설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學而時習之, 不亦悅呼?(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않겠는가?…… 그런데 ‘학’이 과연 순수한 ‘배움’의 의미였을까. 상나라의 글꼴과 그 뒤를 이은 서주시대에 쓰였던 ‘학’ 그리고 춘추와 전국시대까지 이어진 이 글자의 등장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다보니,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논어》 속의 ‘학’이 단순히 ‘배우다’의 의미가 아니라 왕실귀족 사내들의 정보 교환 장소이자 왕궁이며, 아울러 제례 공간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유가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배움의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 읽어야 한다는 전제에 동의만 한다면, ‘학이시습지’의 ‘학’이 단순 동사가 아니라 복합적인 공간의 명사이며, 정보 교환과 제례로 이어지는 거대한 퍼포먼스의 장소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학’을 ‘배우다’라는 동사가 아니라 ‘귀족 자제들에게 고급 정보를 전달하는 장소라는 ’명사‘라고 주장한다. ‘학’이라는 신분 차별의 공간에서 사내들끼리 은밀하게 진행하는 고급정보 나누기, 혹은 신분상승의 희열이 순간순간 체감되는 제례라는 파티로 어렵지 않게 확증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는 마치 ‘배움’이 순수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높은 신분으로 치솟기 위한 도약의 방편으로 쓰이는 지금의 세태와 어렵지 않게 맞물린다. 학은 더 이상 배움의 동사가 아니라 차별의 공간이자 차별의 방편이 된 것이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논어》의 첫 구절을 읽으려면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왕실 제사를 진행하는 궁궐 학에서 제례 절기에 따라 제반 절차를 실제로 실습하는 과정,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먼 곳에서 돈을 들고 찾아오니……
有朋自遠方來, 不亦樂呼(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흔히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라는 해석이 붙는다. 《논어》에서 적잖이 등장하는 이 ‘벗 붕(朋)’ 또한 ‘달 월(月)’ 두 개가 겹친 갑골문 속 상형에서부터 출발하여 변천 과정을 훑어나가니 결국 왕실 혈족의 재물관리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갑골문 기록을 보면 왕이 왕자와 신하들에게 조개 목걸이를 하사하곤 했다. 이 조개 목걸이가 ‘붕’의 기본형이다. 즉 ‘붕’은 왕의 하사품이며 화폐 다발이다. 또한 ‘붕’은 하사품뿐 아니라 ‘군사집단의 재화를 관리하는 인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상나라에서 ‘붕’은 왕실 혈족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재물 관리인이다. 서주시대 청동기 문자를 보면 왕의 비밀금고를 관리하는 인물은 ‘왕붕王朋’, 국가 일반 재무를 관리하는 사람은 ‘붕사朋史’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들 붕들을 관리하는 집단의 우두머리는 ‘붕백朋伯’이라 불렀다.
왕과 제후들을 연결해주는 메신저로서의 붕, 이를 증명하는 문헌들을 짚어가면서 저자는 ‘유붕자원방래’ 글귀를 다음과 같이 고쳐 풀이한다.
‘왕실의 재물을 관리하는 혈족 ‘붕’이 다른 먼 제후국으로부터 왔으니 그 질펀한 합족의 연회가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음양’의 신비? 그저 응달과 양달일 뿐!
동양철학, 동양의학 등 ‘동양’이라는 키워드에 실과 바늘처럼 따라붙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음양’이다. 하지만 음양사상의 베이스가 되는 ‘음양’이라는 단어에서 ‘음’은 그저 흐릿한 날씨요, ‘양’은 햇살 드는 언덕일 뿐이다.
심지어 ‘음’과 ‘양’은 주역 이전까지 상나라 갑골문을 통틀어 같은 문장에서 만난 적조차 없다. 게다가 2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음은 15회, 양은 단 1회만 사용되고 있었다.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의미가 명백한 갑골문 문장은 약 5만 개가 넘는다. 그중에서 단 15개의 문장에 우리가 ‘음양’이라고 부르는, 그것도 ‘음’ 한 글자만 사용되고 있는 것이고, 그 의미 역시 예외 없이 모두 ‘날씨가 흐리다’라는 뜻으로만 쓰인다. 게다가 날씨의 흐림(음)과 짝을 이루는 글자는 양이 아니라 ‘맑을 계啓’이다.
《주역》은 유교문화를 주요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후대의 어느 식자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점술 문화를 뒤섞어 묘한 신비감을 조성해 놓은 책이다. 다른 동양의 고전들이 일방적 훈계와 주장을 남의 이야기인 척 위장하는 전략을 취했다면 《주역》은 태고로부터의 신비를 배경으로 가치관을 전수하려 한 고도의 스토리텔링 저술이다.
난해함과 모호함이 신비로 둔갑하다!
이 책은 《노자》의 실제 저술가가 노자인지, 아니면 상나라 때의 점술가 집단이었던 정인들의 기록인지를 추적하고, 혹은 우리에겐 경외감과 고결함으로 다가왔던 ‘하늘 천’이나 ‘배울 학’ 같은 글자들의 본모습을 증명함으로써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던 동양문헌의 해석을 한껏 의심하게 만든다. 《논어》나 《맹자》와 같은 고전들의 가르침이 ‘일방적 훈수’처럼 여겨지고, 《주역》과 같은 난해함과 모호함을 품은 책은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도 차용했듯이 어느새 ‘동양신비’로 둔갑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위선의 해석들을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책 속에서 갑골문의 세부글꼴을 직접 하나하나 그려가며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동양사상의 왜곡이 ‘중화사상’이라는, 오랜 역사를 거친 중국인들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결과임을 숨기지 않는다.
동양문화는, 그 시원이 상나라 또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강력히 주장하는 중화사상의 이데올로기 맥락 속에서 생명력과 복원력이 유지된다. 그리고 오래된 역사의 권위로 존재를 강화하기도 한다. ……헌데 상나라는 멀쩡하게 존재하고, 시간 역시 숫자적으로 거의 짚어낼 수가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보니, 내가 맡았던 그 향기는 착각이었는가 해서 심란해진다. 우리에겐 익숙한 음양이 그곳에 없다니.
첫댓글 공자도 사실상 韓민족의 정당성과 정치적 목적으로 더욱 부각 시킨 존재였으니 뭐^^;
고등학생때 윤리과목 배울때 얼핏 느꼈던 느낌을 속시원하게 풀어줬나보네요. 동양철학의 말로 정의하기 어려운 난해함이 왜이렇게 유명해지고 권위적이게 될 수 있었던 걸까?
철학이란 이름하에 더 이상 깊게 생각은 안하고 그러려나 보다 넘어갔던 기억이 있네요.
한번 읽어보고는 싶네요
음 흥미롭네요 함 읽어봐야겠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인간들 속성은 똑같았겠죠.
달월자가전에는재물관리사라는의미로쓰였다니 흥미롭네요
이분은 현대 자본주의의 폐혜를 왜 동양사상에 껴 붙이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리고 음양에 대한 주장은 기가 찰정돈데.. 갑골문에 음양이 몇번 적여있지 않다고, 음양이 말뿐이라니.. 오랜기간동안 음양사상에 기반해서 사고한 고고한 동양철학의 역사가 있는데 예전에 그것도 음양사상이 정립되기 전에 갑골문에 음양이 몇자 적혀저 있지 않다고 음양이 없다고 말하는 건데. 말이 안되죠. 동양철학을 갑골문에 연계해서 풀려고 했던 시도자체가 오류.
갑골문은 신성시대.. 중국에도 주나라 이전에는 신을 섬기고 따르고 제사하고 점치고 술먹고 이런게 엄청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없는 시대였는데.. 그때 점치면서 거북이 배떼기에 나오는걸 갑골문자.. 주나라 이후로는 한번도 종교가 중국을 뒤덮은 적이 없습니다. 주나라왕을 엄청 찬양하죠 공자는.. 신성대시대 갑골문으로 인문학의 동양사상을 평가하는게 말도 안되는 겁니다.
공감합니다. 책 소개에서 좀 오만함 같은게 느껴지네요
이분 논리가 좀 웃기네요 갑골문이 기원전 14세기경 쓰여졌던 체계가 잡혀져있지 않은 문자고 논어가 쓰여진 기원전 4세기경(?)은 이미 대전이라고해서 어느정도 체계가 잡힌 문자로 썼을진데 갑골문으로 논어를 해석한다는 말은 언어의 역사성따위 개나 줘라 이소리네요 ㅋㅋㅋㅋ 뭐 주역같은 종교 냄새 비스무리한 책은 논하지 않겠습니다 주역과 논어를 같은 선상에 놓고 해석하는게 참 어이없네요 ㅋㅋ
해석자체는 신선하네요.
이 책도 많이 까였던걸로 기억합니다.